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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성령 시대의 예고

본문

오늘은 요엘서를 상고하겠습니다. 요엘서는 현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아주 의미 있는 성경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의 시대를 성령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 시대를 예고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시대에 살면서도 신약 시대가 지난 후 얼마 있다가 성령님의 사역이 소멸되고 2000년 가까이 세월이 지난 후 20세기에 들어서서 성령님의 사역이 새롭게 조명 되고 이론만의 성령님이 체험 되는 성령님이 되었고 우리들이 활발한 성령사역의 수혜자이기 때문에 요엘서는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특히 의미가 있다고 보겠습니다.
요엘서의 배경에 관하여서는 목장 성경 공부를 통하여 배웠을 테니까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요엘은 남왕조와 북왕조가 외국의 침공으로 멸망의 위협을 느끼고 있을 때에 활동한 예언자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요엘서를 읽으면 주제가 메뚜기인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메뚜기가 땅에 알을 나면 이것이 자라면서 몇 번씩 허물을 벗고 성장의 단계마다 다른 초목이나 초목의 부분을 갉아먹는데(사진) 요엘은 이것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1:4,6). 1장에서는 실제로 있었던 메뚜기의 재앙을 묘사하고 있고 2장에서는 이것에 빗대어 메뚜기 떼처럼 몰려들어 이스라엘과 유다를 멸망시킬 외적의 군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뚜기의 재앙을 단순한 자연의 재난으로 보았습니다. 피해가 극심하지만 지난 후에 얼마가 지나면 복구가 됩니다. 그러나 요엘은 메뚜기의 재난이 단순한 자연적인 재난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고 회개하기를 촉구했는데 백성들은 이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그리하여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1 여호와 하나님은 경고하신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큰일을 이루실 때에는 자연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에도 동방 박사들이 하늘의 징조를 보고 찾아왔었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종결 짓기 전에 자연에 큰 변동이 올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요엘을 통하여 예고하고 계십니다(2:30)..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연 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도 경고를 주십시다. 그러므로 역경이나 실패가 지속되거나 반복될 때에는 일단 여호와 하나님이 경고를 주시고 계신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야 합니다. 반복되는 사업의 실패라든가, 직장에서 반복되어 쫓겨나든지 쫓겨난 후에 직장이 구해지지 않는다든지, 자꾸 몸에 이런 저런 병이 생긴다든지, 자꾸 이사람 저 사람과 부딪치든지 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가 아닌가 생각해야 합니다. 관계에 어려움이 생기면 어떤 분들은 무조건 자신이 오해 받는다고 생각하고, 어려운 상황이 생기면 사단의 공격이라고 생각하고, 일이 반복해서 꼬이면 재수가 없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그런결론은 내리기 전에 일단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경고가 아닌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2 경고의 목적은 회개이다
경고의 목적은 회개입니다. 요엘도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2:12-14). 진정으로 하는 회개를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고 회개할 때에 재앙은 물러갑니다(2:18-20).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경고하시는 것은 우리를 큰 재난에서 건져주기 위함이십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면 복을 주십니다. 회개하고도 회복이 되지 않으면 자신이 진정으로 마음을 찢는 회개를 하였는지 살펴야 합니다.
어떤 목회자님이 목회를 잘 하셔서 교회도 잘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분이 그런데 어떤 여성과 간음죄를 지었습니다. 이것이 알려지면서 이분은 목회를 그만 두고 가정을 버리고 그 여성과 더불어 다른 지역으로 떠났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났고 교회는 사분오열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상처 받는 아내와 자녀, 교인들로 인하여 마음이 아팠습니다. 무엇보다도 잠시의 욕정 때문에 목회의 특권을 상실한 본인이 안타까웠습니다. 이분은 얼마 있다가 다시 아내와 가정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곳에 가서 사역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이분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도했던 저이지만 이런 것을 보면서 마음이 착잡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그 지역에서 목사를 우스운 존재로 보게 되었고 전도가 힘들어졌습니다. 본인과 그를 사랑하는 주위 분들은 회개했으니까 된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 사건이 얼마나 여호와 하나님을 수치스럽게 했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는지를 생각한다면 “회개했으니까 되지 않았냐”라고 가볍게 말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진정한 마음을 찢는 회개는 이런 것입니다. 미국 목사님 가운데에서 잘 알려진 분이 어떤 여인과 불륜의 관계에 빠졌습니다. 이것을 밝혀졌을 때에 이분은 솔직히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책을 많이 쓰신 분이라 글로써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 글 가운데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제가 전에 쓴 글은 성령 충만할 때에 쓴 것입니다. 제가 지금 지은 죄로 인하여 그때에 쓴 책의 내용까지 매도하지 말아주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 이분은 그 후 모든 사역을 놓았고 한 목사님 밑에서 평신도처럼 지도를 받았고 목사님의 권유에 의하여 결혼 상담도 받았습니다. 그러기를 3년간 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높이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지도 목사님도 그가 완전히 회복된 것을 인정하셨고 그 후에 다시 강단에 서기 시작하고 글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마음을 찢는 진정한 회개입니다.
이러한 회개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가능합니다. 율법적인 관계에서는 형식적인 회개밖에 나오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까 저는 이기적이라서 그런지 솔직히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기도 응답을 해주셨고 기도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시던지 혹은 기도하지 않은 것까지 주셨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고 나니까 “제가 주를 위하여 죽기를 원하나이다. ” “제가 여호와 하나님에게 수치를 갖다 드릴 자리에 가거든 차라리 저를 죽여주세요. ” 이런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비결은 기도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 받는데 어떤 분은 받을 때도 있고 못 받을 때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사역의 도구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을 구하든지 주리라고 하셨습니다(요14:12, 13). 그러나 이것은 누구에게나 주는 백지 수표가 아닙니다. 앞 절을 보면 제자들이 주님이 하시던 사역을 물려받아 할 것이 가정되고 있습니다. 다음 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등장을 합니다. 구하는 대로 모든 것을 다 주겠다는 것은 인생의 목적을 사역에 두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도 결심한 사람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절대적인 기도 응답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려면 사명을 위해서 살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삶을 산다는 것은 목회자가 되거나 선교사가 되는 것이 아님을 여러분들은 아실 줄 믿습니다. 삶의 목표를 섬김에 두고 자신 소유를 섬김의 도구로 생각하고 직장 생활을 하고 사업을 하고 가정을 돌볼 때에 사명을 위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3 여호와 하나님 백성의 결말은 축복이다
호세아가 그랬지만 요엘서도 끝은 축복의 약속으로 끝납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북 왕국은 앗시리아에게 멸망하고 남왕국은 바빌론에게 멸망 당할 운명을 안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은 민족으로서도 나라로서도 끝장이 나는 것일까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의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멸망시켰던 나라들을 심판하실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3:1-2상). 그리고는 풍요함을 약속하고 계십니다(3:18). 멸망 받아야 하기에 합당한 이스라엘 운명의 마지막 장은 왜 항상 축복으로 끝날까요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한번 선택하시면 이 선택을 포기하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사도 바울도 증거하고 있습니다(딤후 2:13).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크리스천들이 복음의 서진을 믿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복음이 서진을 하여 소 아세아에 퍼졌습니다. 이것이 서진하여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에 퍼졌습니다. 이것이 서진하여 로마에 다다랐고 이를 통해 유럽에 전파되었습니다. 이것이 서진하여 미주에 도달했습니다. 이것은 또 서진을 계속하여서 대한민국에 도달하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비롯하여 장로교회와 감리 교회 중에서 제일 큰 교회가 크지도 않은 대한민국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한민족을 사용하기 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핵심이 서진을 하여 중국으로 옮겨가는 것을 느낍니다. 복음은 계속 서진을 하여서 무슬림 국가에 퍼지고 더욱 더 서진하여서 마침내는 이스라엘에 도달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으면서 인류의 역사가 종말을 맞게 되지 않겠느냐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사실에 동의하던 안 하던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지금 복음이 이방 민족 간에 왕성하지만 마침내 유대인들도 구원 받을 것을 로마서에서 예고하고 계십니다(롬 11: 29, 31).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함이 있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가 끝까지 믿음을 지키도록 지켜주실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함이 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 자녀들의 인생은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여호와 하나님의 관계에 집중하고 잘못되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의 인생은 잘 될 수밖에 없습니다.
4. 우리는 누구나 성령 받는 세대에 살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요엘을 통하여 약속하신 축복 중의 하나가 성령님이십니다(2:28-29). 이 당시에는 성령은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받았습니다. 이러한 성령을 남녀 불문하고 노소에 상관없이 사회 신분을 뛰어넘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날이 도래할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이 오순절 날에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120명이 모여서 기도할 때에 성령이 내리면서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고 놀래 하는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엘을 통하여 약속한 것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요엘서를 인용하여서 설명하고 있습니다(행 2:16). 우리가 바로 누구나 성령을 받을 수 있는 복되고 복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면 누구나 다 성령을 받습니다. 이러할 때에 요엘이 예언한 것처럼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는 초자연적인 역사가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에게는 성령님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는데 어떤 분에게는 별로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령님의 나타나심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 충만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령님의 나타나심을 원한다면 우리는 성령 충만에 관하여 바른 이해를 해야 합니다.
우선 우리는 성령 충만의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충만의 목적은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성령 충만이라는 말이 9번 등장하는데 이 단어가 등장할 때마다 뒤쫓아 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사건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성령 충만한 후에 설교를 했을 때에 예루살렘 거민 3000명이 하루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행 4:8).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 충만했을 때에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행 4:31). 스데반은 결과적으로 순교를 하게 되었지만 성령 충만하여서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들과 논쟁을 벌여서 꼼짝 못하게 하였습니다(행6:8). 바나바는 성령 충만하여서 많은 사람들은 주님 앞으로 인도하였습니다(행 11:24). 우리는 이를 통하여 성령 충만 하는 것은 복음 사역을 잘 감당하라고 허락하시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위하여 살기로 결심을 하면 성령 충만은 당연하게 쫓아옵니다. 그러나 복음 전파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성령 충만을 갈구하면 성령 충만을 못 받던지 이상한 영에 사로잡힐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 성령님의 나타나심을 체험하고 싶으면 복음전파를 위하여 살기를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또 한 가지 알아야 하는 것은 복음 전파는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이라는 단어가 사도행전에 많이 등장을 하는데 그 후에 있는 편지서에는 딱 한번 등장을 합니다. 에베소서에 등장을 하는데(엡 5:18) 성령 충만 하라는 말을 한 후에 생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엡 5:22) 남편은 아래를 사랑하고. 자녀들은 부모에게 복종하고 부모들은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이것은 성령 충만해야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의미가 있겠지요.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가정과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복음을 전파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복음전파에는 두 가지가 병행을 해야 합니다. 말과 삶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말로 전하고 말로 믿으라고 권면하고 교회에 초청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생활이 밑받침이 되지 않으면 말이 공허해집니다. 크리스천으로써의 아름다운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말이 수반되지 않으면 효과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크리스천답게 사는 데에만 집중하고 예수 믿으라거나 교회 나오라는 말은 꺼내지 않는데 우리의 삶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청하지 않는데 교회에 나오게 만들고 청하지 않는데 예수를 믿겠다고 결심하는 예는 없습니다. 이 두 가지가 다 사용되어야 합니다.
소수의 선택된 백성만이 받을 수 있는 성령을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함으로 받은 우리들은 복음전파를 사명으로 알아서 성령 충만하고 우리의 삶 가운데에 성령의 나타나심을 맛보는 신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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