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성령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
본문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누가복음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분명히 성령을 보내시고 우리가 받도록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면 누구든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받아야 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성령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0절 말씀에 보면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여호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속에 있는 생각은 영외에는 알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외에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받아야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더라도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성령은 능력이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까지도 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실 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받으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 성령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 어떤 것이든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고 성령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인지 아닌지를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말하는 것, 복음을 전하는 것도 내가 가진 지식이나 지혜로 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영, 성령의 능력을 감당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일은 영으로라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13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우리 안에 성령을 받아 살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것이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으면 그리스도의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하는 일은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바르게 분별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알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내속에 온전히 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한 번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소멸시킬 수도 있고, 성령의 능력이 다 소멸 된 것처럼 무능력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에 대한 우리의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 태도가 크게 4가지로 명령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에 대한 4가지 명령이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는 이 명령에 대한 내용은 없습니다.
우선 성령을 받아야 할 이유만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 하더라도 성령에 대하여 우리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태도를 알아야 성령을 지속적으로 받은 모습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성령에 대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명령은 성령을 충만 받아라는 명령입니다.
에베소서5장18절 말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우선 충만의 정의를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충만하다는 것은 고도의 흥분한 상태나 아니면 절대적인 완전함, 혹은 더 이상 성장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그 어떤 성숙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 개인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에 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나의 모든 본성을 성령의 능력에 굴복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에베소서5장18절에서는 성령충만을 술취함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술에 취하면 어떻게 됩니까 술에 지배를 받습니다. 자기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술에 취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용기가 생깁니다. 그래서 술에 취하는 것은 방탕한 삶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5장11절에 보면 술취하는 자는 사귀지도 말고 이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고린도전서 6장 10절에 보면 술취하는 자를 도적이나 탐란하는 자, 토색하는 자들과 함께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술은 여러 가지 유익한 점도 있기는 하지만 가장 큰 단점은 이성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술에 취하면 자신이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이나 말을 함부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술취하는 것은 방탕하는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에 여기서 술이란 단순히 술이라기 보다는 세상의 정욕들을 말합니다. 세상에 썩어 없어질 것에 도취되지 말고 성령에 지배를 받아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요, 여호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영생을 얻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성령을 받으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담대해집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은혜로워서 감사와 기쁨이 충만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우선은 성령을 받되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충만히 받는다는 것은 계속 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주님 품에 안길 때까지 성령 충만을 계속 유지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세상에 미혹되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예배를 제대로 드리게 되고 감사하고 서로 복종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성령은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모든 일에 적극적입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얼굴이 밝아집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얼굴이 화사합니다. 기분이 좋습니다. 얼굴이 쥐어짠 행주처럼, 지옥에서 출장나온 것처럼, 저녁 못먹은 시어머니얼굴처럼 되어 있다면 성령충만한 믿음이 아닙니다. 술에 취하면 말이 많아지듯이 성령충만하면 기도를 많이 하게 되고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술에 취하면 노래를 잘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찬양이 달라집니다. 술에 취하면 마음이 넓어집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마음이 넓어져서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명령은 모든 신앙의 삶을 살 때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명령입니다.
갈라디아5장16절 말씀,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도는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령을 따라 살면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살지 않는다면 이것은 결국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이 되고, 그것은 곧 믿음 없는 모습의 삶이 됩니다. 성령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자연적으로 성령을 따라 살게 됩니다. 갈라디아서5장16절에 보면 성령을 따라 살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육체의 일은 무엇입니까 19절 이하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반면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들이 맺는 열매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22-23절에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로마서8장5-7절 말씀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 육신의 생각은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성령을 좇아 살면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세 번째 명령은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명령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5:19절 말씀에 보면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소멸된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단절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보세요. 있어야 할 핵심적인 성령이 없으면 죽은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울 왕을 잘 알 것입니다. 사울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을 때 여호와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무엘상10장6절 이하에 보면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그리고 10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이렇게 성령이 충만한 행동을 하니까 다른 주위 사람들이 사울을 보고 하는 말이 ‘선지자냐’‘언제 선지자가 되었느냐’고 의아심을 갖게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사울이 왕이 되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은 그에게 성령을 먼저 부어주셨습니다. 위대한 이스라엘의 초대왕의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을만한 사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무엘상9장1-2절에 보면 사울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현손이며 베냐민 사람이더라 /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그래서 위대한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성령이 떠나버릴 때 어떻게 되는지 말입니다.
사무엘상15장에 보면 사울이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전쟁에서 탈취한 전리품 가운데 좋은 짐승을 가져온 것을 두고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22절 이하에 보면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5:22-23).
이 경고의 메시지를 받은 사울은 사무엘의 옷자락을 잡고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돌이켜 달라고 했습니다.
사무엘도 왕이 그렇게 하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미 결정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오히려 완강하게 사울왕을 이미 버렸다는 것을 거듭 강조합니다. 사무엘상16장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그래서 사무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기름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이 지시하는 이새의 막내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13절에 보면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기름을 붓는 순간 다윗에게는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14절에 보면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고 하셨습니다. 기름을 부었을 때 그동안 사울과 함께 했던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사울을 떠나 다윗에게 들어가셔서 다윗을 감동시켰습니다.
성령이 내주해야 할 성도에게 성령이 떠나면, 성령을 소멸시켜버리면 무능한 성도가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소멸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언제 어떻게 하면 성령이 소멸됩니까 ‘소멸하다’는 단어는 ‘끄다’‘억눌려 버리다’‘죽다’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의 활동을 통제하거나 억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않기 위해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 욕망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사울 왕의 경우 말씀을 거역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속에 음행과 거짓과 술수와 우상숭배와 같은 더러운 것이 있다면 성령님을 추방시키는 것과 같이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거룩하시고 정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성령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가꾸어야 합니다. 더러운 생각이 들어올 때마다 우리는 즉시 회개함으로써 항상 우리 마음을 청결하게 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항상 하늘의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골로새서3:2절 말씀“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성령의 은사를 받은 분들이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 받은 분들의 말로가 좋지 않은 까닭은 바로 처음에는 성령의 능력을 나타내고 그것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만 나중에는 변질되어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는 등 성령을 소멸시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을 충만히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으로 능력의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성령을 소멸시키는 더럽고 추한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하거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성령님이 계속 내안에 거주하십니다. 성령을 소멸시키분 계십니까 다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넷째 명령은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에베소서4장30절 말씀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 안에서 구원의 확인을 받게 되기 때문에 성령님을 근심되게 하면 안됩니다. 육신의 부모님에게 불효중의 하나가 부모를 근심시키는 일입니다. 효도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부모님에게 걱정과 근심을 끼쳐드리지 않는 것, 마음을 평안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에게 효성스럽게 하려면 근심을 시켜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님을 근심되게 하는 일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에베소서4장 30절 앞의 내용의 말씀입니다.
방탕한 생활,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는 것, 즉 거짓된 삶, 분을 내어 죄를 짓는 것, 더러운 말을 하는 것, 도둑질하는 것 등입니다. 종합적으로 말씀드리면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은 성령님이 싫어하는 모든 더러운 행위들, 죄가 되는 모든 것들은 이에 해당됩니다.
우리 성령님도 근심하신다는 것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63장8절 이하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시고 어려울 때 구원시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반역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저버릴 때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다고 10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산다면 성령님은 근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도 근심하시는 분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6장6절 말씀,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 근심어린 심정으로 마지막에 단행한 것이 홍수 심판입니다. 그래서 40일 동안 비가 밤낮으로 와서 150일 동안 온 세상을 뒤덮은 그 수많은 물은 곧 여호와 하나님의 근심어린 마음으로 인간을 향하여 흘리신 눈물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홍수가 단순히 심판의 물이 아니라 근심어린 여호와 하나님, 근심하시는 성령님의 눈물임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부모님의 눈에서 눈물을 자아내는 일을 자행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회개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님을 근심하게 한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에베소서4장31절 이하에 보면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구체적은 내용이 몇 가지 언급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라고 하신 것을 보면 이런 유형은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들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근심하는 일들을 자행하는 일들이 많아지거나 회개치 않고 지속적으로 하게 되면 결국 소멸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근심하게 만드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당도 세 종류가 있습니다. 세습무당입니다. 부모가 무당이면 자녀가 이어받는 경우입니다.
학습무당이 있습니다. 이는 철학관을 운영하는 사람들로서 배워서 하는 무당들입니다.
강신무당이 있습니다. 신이 직접 내려서 하는 무당입니다. 이런 무당들은 대단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돼지를 거꾸로 세우기도 하고 작두의 날카로운 칼날로 걸어 다니기도 합니다.
교인들도 세 종류가 있습니다. 세습교인이 있습니다. 모태신앙들이 여기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학습교인이 있습니다. 배워서 아는 신앙, 지식적으로 아는 신앙, 이성적이면서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신앙, 성경에 나타난 이적과 기적을 잘 믿으려고 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성령충만한 교인이 있습니다. 늘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아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님에 대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 네가지, 성령충만 받으라, 성령을 좇아 행하라. 성령을 소멸치 말라.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항상 성령충만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분명히 성령을 보내시고 우리가 받도록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면 누구든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받아야 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성령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0절 말씀에 보면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여호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속에 있는 생각은 영외에는 알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외에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받아야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더라도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성령은 능력이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까지도 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실 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받으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 성령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 어떤 것이든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고 성령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인지 아닌지를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말하는 것, 복음을 전하는 것도 내가 가진 지식이나 지혜로 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영, 성령의 능력을 감당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일은 영으로라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13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우리 안에 성령을 받아 살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것이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으면 그리스도의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하는 일은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바르게 분별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알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내속에 온전히 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한 번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소멸시킬 수도 있고, 성령의 능력이 다 소멸 된 것처럼 무능력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에 대한 우리의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 태도가 크게 4가지로 명령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에 대한 4가지 명령이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는 이 명령에 대한 내용은 없습니다.
우선 성령을 받아야 할 이유만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 하더라도 성령에 대하여 우리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태도를 알아야 성령을 지속적으로 받은 모습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성령에 대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명령은 성령을 충만 받아라는 명령입니다.
에베소서5장18절 말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우선 충만의 정의를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충만하다는 것은 고도의 흥분한 상태나 아니면 절대적인 완전함, 혹은 더 이상 성장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그 어떤 성숙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 개인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에 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나의 모든 본성을 성령의 능력에 굴복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에베소서5장18절에서는 성령충만을 술취함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술에 취하면 어떻게 됩니까 술에 지배를 받습니다. 자기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술에 취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용기가 생깁니다. 그래서 술에 취하는 것은 방탕한 삶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5장11절에 보면 술취하는 자는 사귀지도 말고 이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고린도전서 6장 10절에 보면 술취하는 자를 도적이나 탐란하는 자, 토색하는 자들과 함께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술은 여러 가지 유익한 점도 있기는 하지만 가장 큰 단점은 이성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술에 취하면 자신이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이나 말을 함부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술취하는 것은 방탕하는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에 여기서 술이란 단순히 술이라기 보다는 세상의 정욕들을 말합니다. 세상에 썩어 없어질 것에 도취되지 말고 성령에 지배를 받아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요, 여호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영생을 얻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성령을 받으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담대해집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은혜로워서 감사와 기쁨이 충만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우선은 성령을 받되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충만히 받는다는 것은 계속 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주님 품에 안길 때까지 성령 충만을 계속 유지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세상에 미혹되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예배를 제대로 드리게 되고 감사하고 서로 복종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성령은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모든 일에 적극적입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얼굴이 밝아집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얼굴이 화사합니다. 기분이 좋습니다. 얼굴이 쥐어짠 행주처럼, 지옥에서 출장나온 것처럼, 저녁 못먹은 시어머니얼굴처럼 되어 있다면 성령충만한 믿음이 아닙니다. 술에 취하면 말이 많아지듯이 성령충만하면 기도를 많이 하게 되고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술에 취하면 노래를 잘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찬양이 달라집니다. 술에 취하면 마음이 넓어집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마음이 넓어져서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명령은 모든 신앙의 삶을 살 때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명령입니다.
갈라디아5장16절 말씀,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도는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령을 따라 살면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살지 않는다면 이것은 결국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이 되고, 그것은 곧 믿음 없는 모습의 삶이 됩니다. 성령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자연적으로 성령을 따라 살게 됩니다. 갈라디아서5장16절에 보면 성령을 따라 살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육체의 일은 무엇입니까 19절 이하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반면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들이 맺는 열매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22-23절에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로마서8장5-7절 말씀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 육신의 생각은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성령을 좇아 살면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세 번째 명령은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명령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5:19절 말씀에 보면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소멸된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단절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보세요. 있어야 할 핵심적인 성령이 없으면 죽은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울 왕을 잘 알 것입니다. 사울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을 때 여호와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무엘상10장6절 이하에 보면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그리고 10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이렇게 성령이 충만한 행동을 하니까 다른 주위 사람들이 사울을 보고 하는 말이 ‘선지자냐’‘언제 선지자가 되었느냐’고 의아심을 갖게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사울이 왕이 되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은 그에게 성령을 먼저 부어주셨습니다. 위대한 이스라엘의 초대왕의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을만한 사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무엘상9장1-2절에 보면 사울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현손이며 베냐민 사람이더라 /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그래서 위대한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성령이 떠나버릴 때 어떻게 되는지 말입니다.
사무엘상15장에 보면 사울이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전쟁에서 탈취한 전리품 가운데 좋은 짐승을 가져온 것을 두고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22절 이하에 보면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5:22-23).
이 경고의 메시지를 받은 사울은 사무엘의 옷자락을 잡고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돌이켜 달라고 했습니다.
사무엘도 왕이 그렇게 하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미 결정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오히려 완강하게 사울왕을 이미 버렸다는 것을 거듭 강조합니다. 사무엘상16장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그래서 사무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기름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이 지시하는 이새의 막내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13절에 보면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기름을 붓는 순간 다윗에게는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14절에 보면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고 하셨습니다. 기름을 부었을 때 그동안 사울과 함께 했던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사울을 떠나 다윗에게 들어가셔서 다윗을 감동시켰습니다.
성령이 내주해야 할 성도에게 성령이 떠나면, 성령을 소멸시켜버리면 무능한 성도가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소멸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언제 어떻게 하면 성령이 소멸됩니까 ‘소멸하다’는 단어는 ‘끄다’‘억눌려 버리다’‘죽다’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의 활동을 통제하거나 억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않기 위해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 욕망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사울 왕의 경우 말씀을 거역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속에 음행과 거짓과 술수와 우상숭배와 같은 더러운 것이 있다면 성령님을 추방시키는 것과 같이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거룩하시고 정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성령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가꾸어야 합니다. 더러운 생각이 들어올 때마다 우리는 즉시 회개함으로써 항상 우리 마음을 청결하게 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항상 하늘의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골로새서3:2절 말씀“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성령의 은사를 받은 분들이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 받은 분들의 말로가 좋지 않은 까닭은 바로 처음에는 성령의 능력을 나타내고 그것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만 나중에는 변질되어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는 등 성령을 소멸시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을 충만히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으로 능력의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성령을 소멸시키는 더럽고 추한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하거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성령님이 계속 내안에 거주하십니다. 성령을 소멸시키분 계십니까 다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넷째 명령은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에베소서4장30절 말씀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 안에서 구원의 확인을 받게 되기 때문에 성령님을 근심되게 하면 안됩니다. 육신의 부모님에게 불효중의 하나가 부모를 근심시키는 일입니다. 효도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부모님에게 걱정과 근심을 끼쳐드리지 않는 것, 마음을 평안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에게 효성스럽게 하려면 근심을 시켜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님을 근심되게 하는 일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에베소서4장 30절 앞의 내용의 말씀입니다.
방탕한 생활,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는 것, 즉 거짓된 삶, 분을 내어 죄를 짓는 것, 더러운 말을 하는 것, 도둑질하는 것 등입니다. 종합적으로 말씀드리면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은 성령님이 싫어하는 모든 더러운 행위들, 죄가 되는 모든 것들은 이에 해당됩니다.
우리 성령님도 근심하신다는 것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63장8절 이하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시고 어려울 때 구원시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반역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저버릴 때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다고 10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산다면 성령님은 근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도 근심하시는 분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6장6절 말씀,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 근심어린 심정으로 마지막에 단행한 것이 홍수 심판입니다. 그래서 40일 동안 비가 밤낮으로 와서 150일 동안 온 세상을 뒤덮은 그 수많은 물은 곧 여호와 하나님의 근심어린 마음으로 인간을 향하여 흘리신 눈물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홍수가 단순히 심판의 물이 아니라 근심어린 여호와 하나님, 근심하시는 성령님의 눈물임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부모님의 눈에서 눈물을 자아내는 일을 자행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회개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님을 근심하게 한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에베소서4장31절 이하에 보면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구체적은 내용이 몇 가지 언급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라고 하신 것을 보면 이런 유형은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들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근심하는 일들을 자행하는 일들이 많아지거나 회개치 않고 지속적으로 하게 되면 결국 소멸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근심하게 만드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당도 세 종류가 있습니다. 세습무당입니다. 부모가 무당이면 자녀가 이어받는 경우입니다.
학습무당이 있습니다. 이는 철학관을 운영하는 사람들로서 배워서 하는 무당들입니다.
강신무당이 있습니다. 신이 직접 내려서 하는 무당입니다. 이런 무당들은 대단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돼지를 거꾸로 세우기도 하고 작두의 날카로운 칼날로 걸어 다니기도 합니다.
교인들도 세 종류가 있습니다. 세습교인이 있습니다. 모태신앙들이 여기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학습교인이 있습니다. 배워서 아는 신앙, 지식적으로 아는 신앙, 이성적이면서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신앙, 성경에 나타난 이적과 기적을 잘 믿으려고 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성령충만한 교인이 있습니다. 늘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아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님에 대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 네가지, 성령충만 받으라, 성령을 좇아 행하라. 성령을 소멸치 말라.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항상 성령충만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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