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
본문
국가의 아주 중요한 요직에 있는 두 분이 최근에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을 만나서 하는 이야기 중에 중요한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 나라의 장래는 교회에 달려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당연하면서도 그렇게 보는 시각이 감사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성도로서 목사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 말입니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국가의 변화, 국민의 변화는 교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국민들이 지금 어느 누구의 말도 잘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말씀도 잘 안듣습니다. 아내의 말이나 남편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선배의 잘 잘 듣지 않습니다. 고참 말도 듣지 않고 지휘관 말도 듣지 않습니다. 대통령의 말도 잘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누구의 말은 듣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듣습니다. 하기야 요즘 성도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도 건성으로 듣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도 100% 순종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의 가르침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의 장래는 교회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주 중요한 것을 지적했습니다. 다른 사람 말은 안들어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들어야 살길이 열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어려움을 겪을 때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바치러 간 사건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한 것을 보고 뒤에 하신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16절 말씀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앞으로 후손들이 복을 받을 것인데 그 이유는 아브라함 네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러주신 말씀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찌니라”(신12:32). 고 했습니다. 예레미야19장14-15절에 보면 예루살렘 성에 재앙을 내리는데 그 이유는 “이는 그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삶의 변화는 말씀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고 준행하는 것은 성령이 함께 역사해야 합니다. 사실 오늘 날 우리가 변화되어야 할 모습은 어떤 모습니까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어떤 것이 있습니까 바울은 디도를 통해서 주신 서신 가운데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우리의 옛사람의 모습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변해야 할 옛사람, 즉 고쳐야 할 옛 사람의 모습을 우리는 다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각이 없는 자였습니다. 우리가 전에는 어리석게도 복을 줄 수 없는 형상 앞에 가서 복을 달라고 빌었던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영적으로 무지한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명태 몇 마리 놓아주고 사고 나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고, 돼지머리 앞에 두고 돼지 입에다 돈을 물려놓고 안전사고가 나지 않게 해 달라고 빌며 살았던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이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종이 한 장 벽에다가, 문에다가 붙이거나 아니면 지갑에 넣어 다니면 복을 받고 어려움을 면한다고 하면서 행하던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아니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예수를 믿는 사람 중에도 옛 사람을 버리지 못해서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리를 가끔씩 듣습니다.
전에는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자고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불순종했던 자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지금도 우리는 이런 일을 자행합니다. 아직도 불순종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불순종을 이야기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전에는”이라고 전제를 달고 있습니다.
여기서 ‘전에’라는 것은 예수를 믿기 전에, 거듭나기 전에는 불순종했지만 이제는 순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전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모든 것이 불순종한 삶이었지만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은 우리는 순종을 잘합니까 만약에 우리가 아직도 불순종한다면 옛 사람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증거가 됩니다.
전에는 우리가 속은 자의 삶이었습니다. 속아도 완전히 속았습니다. 베드로전서2:25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길을 잃은 양과 같은 삶이 속은 삶이었습니다. 거짓된 종교, 거짓된 가르침에 따랐던 자들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쉽게 믿지 못하고 예수님을 쉽게 영접하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잘 속습니다. 지금도 속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단에 속습니다. 사이비에 속아 넘어갑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조금만 어려우면 그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고 속아서 철학관에 물으러 갑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물으려고 하지 않고 사람을 찾아다니며 물으려고 하는 것은 속을 위험이 있습니다.
전에는 각색 정욕에 물든 삶이었습니다. 요한일서2장16-17절에 보면 우리에게 대표적인 정욕 세 가지가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런 것들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특히 물질에 대한 욕심은 결국 자기를 해치고 결국은 멸망에 이르게 된다고 디모데전서6:9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버린 것 같지만 아직도 욕망이 순간순간 일어납니다. 우리의 욕심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전에는 행락에 종노릇한 삶이었습니다. 연락을 좋아하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지금은 주안에서 즐거워하지만 전에는 세상의 일을 통해서 즐기려고 했고 쾌락을 쫓아가던 삶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만족과 향락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들입니다. 오늘 날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일락을 위해서 삽니다. 돈을 버는 목적이 일락을 위해서 법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종노룻 했다는 것은 시키는 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쾌락에는 누구나 쉽게 빠지게 되고 그것에 매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잠언21:17말씀 “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 디모데전서5:6 말씀에 보면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은 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전에는 이런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전에는 악독과 투기로 미워하며 살았던 삶이었습니다. 사랑하기 보다는 미워하고 격려하기 보다는 시기하며 투기하는 마음을 갖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면 그 속에는 온갖 불의와 추함과 탐욕과 악의가 가득합니다.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합니다. 고린도전서3:3에 보면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을 보면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시기와 분쟁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육신의 삶을 온전히 벗어던지지 못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미움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아세요. 요한일서3:15에 보면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살인하는 자는 영생이 그 속에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전에는 가증스런 사람이었습니다.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는 추하고 더러운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결과 서로 미워하면서 사는 삶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가증스런 일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교만하고 거만하고 거짓된 행동을 하며 살았던 우리들입니다.
특히 불신자, 여호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부패하여 가증한 악을 행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말씀 가운데 44:4-5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가증한 일을 행하지 말라고 하였어도 그들이 듣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다른 신들에게 분향을 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이와 같은 사람이었는데 지금 구원받은 자로서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여전히 이전에 행하던 일을 자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구원은 어떻게 주어졌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4절에 보면 “우리 구주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인해 허물이 많은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아니면 우리가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도 많은 죄를 범하고도 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하심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아 이렇게 복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에베소서2:4 말씀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나타낸 가장 큰 증거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죄인 된 나를 독생자의 죽으심으로 바꾸었으니 그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5절에 보면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데 그것은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통해서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하심과 긍휼하심을 통해서 구원받은 우리는 어떻게 변해야 합니까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어리석고 순종하지 않고 속아서 살았고, 여러 가지 정욕과 향락에 종노릇하며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악독과 투기로 지내며 서로가 미워하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고 살아가는 저희들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야 할까요
오늘 우리 사회를 생각해 봅시다. 생기는 것은 오락실과 식당과 유흥점입니다. 이론 인해 도박중독자가 300만명, 정신분열증세가 있는 사람이 300만명, 알콜중독자가 250만 명이나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회적 병리현상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 병리현상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돈을 벌 수 있는 직장이 없음으로 인해 한탕주의로 발전하면서 백성들에게 진정한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그렇다 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인 교회와 교인들, 앞장서서 섬긴다고 하는 목회자들의 타락상은 왜 이렇게도 심각하게 나타나는가 우리는 메스컴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타락상이 심심찮게 보도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교회가 이렇게도 많은데 술집은 줄어들지 않습니까 오락실도 줄어들지 않고 러브 호텔도 줄어들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령이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면 반드시 삶의 변화가 있습니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결국 성령의 역사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5절 말씀에 보면 성령이 새롭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구원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지만 우리가 새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19장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이 때 에베소에서 신앙생활 하던 사람들을 만나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 이때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어떤 분인가도 모르고 요한의 물세례만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안수하였습니다. 안수기도 할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것이 무엇을 통하여 알 수 있는가 하면 방언과 예언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는 사실 성령을 받았느냐 못받았느냐를 구분할 수 있게 하는 것이면서도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그 중에 방언은 개인의 신앙유익을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을 받은 사람이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반드시 새 사람이 됩니다. 새 사람들로 가득차면 그 사회는 반드시 놀라운 일이 발생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의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만 시대와 지역에 따라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의 한국교회가 있기 까지는 여러 성령의 역사가 있었지만 교회사적으로 잊지 못할 성령의 역사가 1907년 1월 15일 밤부터 진행된 평양대부흥운동입니다. 당시에 선교사들이 자국에 보고할 때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를 가리켜서 사도행전 이후에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평가를 했습니다.
당시 감리고 선교사 헤리스는 이렇게 보고 했습니다. “수 천 명이 글 읽기를 배우고, 기독교를 알아보려고 문의하며, 술주정꾼, 도박꾼, 도적놈, 오입장이, 살인강도, 독선적인 유학자들, 구태의연한 불교도들, 여러 천명의 잡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으니 옛 것은 모두 다 지나가고 말았다”
사실 이와 같은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이 우리나라만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가 시대를 따라 전 세계적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습니다. 사실은 1903년에 시작된 영국의 웨일즈부흥운동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양부흥운동 출발의 가장 시초가 되었던 것은 마가 다락방에서 120명의 성도가 함께 기도할 때 임재 했던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 후에 시대 시대마다 성령의 역사는 계속되어 왔지만 평양부흥운동이 일어나던 시점을 중심으로 해서 그 전에 일어난 다른 성령의 역사를 보면 1903년 영국 웨일즈, 1905년 인도 북부지방인 카시아, 1906년 미국의 아주사 스트리트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특히 영국 웨일즈 지방에 임재한 성령의 역사가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가 그 배경을 어느 정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에 영국에서도 교회가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19세기 중반부터 자유주의 신학의 발흥, 다윈의 진화론, 고등비평, 심리학의 출현으로 교회가 위기를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를 살려야 할 신학이 교회로부터 생명력을 앗아갔습니다. 신학이 신앙의 파괴의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때에 1900년 6월 웨일즈 장로교 총회장 에반 필립스가 상당히 우려하면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교회의 신앙이 인간의 노력에 의존하려는 이처럼 무시무시한 경향에 어느 정도 기울어져 있는지 모르지만 기독교 신앙을 무신론의 방향으로 끌어들이려는 간과할 수 없는 오류가 분명히 존재한다. 헤겔의 철학과 진화론의 원리가 극단적 형태로 신앙의 영역에 범람하고 필시 가장 파괴적인 힘을 발휘하고… 오류의 영이 공중에 가득하게 되어 소리 없이 인간 지성의 잠재의식에 파고 든 영향은 사람들에게서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 인격적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빼앗고 있다”
다시 2년 후 1902년 웨일즈 장로교 총회장 퀸딜란 존스는 “교단신학”이란 책에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초자연적 존재로 믿으며, 성경을 초자연적 계시로 믿으며, ... 그리스도를 초자연적인 분으로 믿는다”고 역설했습니다. 도회지 교회 주일학교에서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속죄, 성령의 인격을 부정한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점점 영적 생명력을 상실하였고, 교회는 더욱 병들어 갔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의 권위가 상실한 설교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1890년대부터 웨일즈 교세는 급감하기 시작하여 1900년까지 불과 10년 동안 약 1만3천여 명이나 줄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인식한 이들은 부흥의 필요성과 긴박성을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래서 1902년 웨일즈 장로교 월간지에 “하늘에서 내리는 성령의 임재만이 그 가라지를 뿌리 뽑고 웨일즈 땅이 무신론과 불신에 희생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지도자들은 전적으로 여기에 동조하였습니다. 1902년 교회의 벗이라는 책에서 한 지도자는 만약 “내가 마지막으로 웨일즈 전역에 있는 동포에게 보내는 메세지”가 있다면 그것은 “현재 나의 조국과 민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성령의 특별한 임재를 통한 영적 부흥”이라고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904년 성령의 불길이 웨일즈 전역을 휩쓸었습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영적 토양이 준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선은 19세기 말 미국 시카코의 무디 성경학교와 영국에서 해마다 케직 사회경회가 열렸는데 , 여기에 참석하고 돌아온 13명의 웨일즈 사람들이 웨일즈에서도 그와 같은 사경회가 열리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1903년 웨일즈 클래드린도드 웰스에서 케직 사경회가 열렸고, 1904년도에 제2회 케직 사경회가 열렸는데 웨일즈 부흥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젊은이들이 6개월 동안 매일 기도회를 가졌던 웨일즈의 한 교회에서 그해 말에 120명이 회심을 했습니다. 그해 11월20일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고 밤마다 기도회를 가지고 기도했고, 10주 동안 밤 기도회를 가지며 부흥의 은혜를 경험하고 150명이 회심한 교회도 있었습니다. 웨일즈의 부흥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젊은이들의 기도였습니다.
1903년 접어들면서 네 명의 젊은 청년들이 매일 밤 웨일즈의 부흥을 놓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기도소식이 전광판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많은 사람들이 기도 모임을 가졌습니다. 어느 날 기도 현장에서 모임을 인도했던 침례교 목사였던 존스 목사님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어 그 집회를 장악하셨으며 위에서부터 강한 능력으로 우리를 압도하셨다.... 나는 거의 말을 할 수 없었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도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이런 기도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그로 인하여 사회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이 임재했을 때 어떤 변화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간단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우선은 교회가 성장했습니다. 불과 5주 만에 2만명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1904년과 1905년 사이에 칼빈주의 감리교회에 2만4천명이 새로 등록을 했고, 웨슬리 교회에서는 4천명이 증가했고, 회중 교회 교인의 수는 2만6천5백명의 교인이 증가했습니다. 웨일즈 부흥운동이 일어난 후 1년 동안 교인의 증가가 8만4천명 정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는 사회를 변화시켰습니다. 웨일즈에 도박이 사라지고, 부정직함과 술취함, 불의 부도덕성 등이 사라짐으로 인해 한동안 그 곳에 죄인들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옛 생활을 청산하고 삶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술주정뱅이와 도박사들이 그 악습에서 벗어났고, 가정불화가 치유되었으며, 술집이 텅텅 비었습니다. 앵글시의 클랜페어에서는 한 곳을 제외하고 모든 술집이 문을 닫았습니다.
글래스 모건에서 음주와 관련하여 재판을 받은 사람이 1903년에는 1만 명이 넘었으나, 1906년에는 5천4백명으로 줄었습니다. 사람들이 빚을 갚았습니다. 원수와 원수 사이, 형제와 형제 사이, 자매와 자매 사이의 거친 장벽이 힘없이 무너지고 심지어 성령 안에서 교단의 장벽도 무너졌습니다. 당시 마부들 입에서 말을 향한 욕이 사라져서 말을 부리는데 오히려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무시무시한 죄악들이 고백되었고, 묵은 빚을 청산했으며, 극장이 문을 닫아야 했고, 광부는 물론 무신론자들이 회심했으며, 술주정뱅이, 도둑, 사기꾼들이 구원을 받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었습니다. 성령님의 임재는 개인적 각성으로 끝나지 않고 변화와 사회개혁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임재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웨일즈에서 성령임재는 역시 성령을 보내달라는 기도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에 웨일즈에서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지금 성령을 보내주소서.
2.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지금 성령을 강하게 보내주소서
3.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지금 성령을 더욱 강하게 보내주소서
4.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지금 성령을 훨씬 더 강하게 보내주소서.
아울러 성령의 강한 역사를 위해서 우리는 찬양해야 합니다. 웨일즈 운동 중에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가 찬송이었습니다. 은혜가 풍성하면 찬양이 은혜롭습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성도가 부르는 찬송은 다 은혜가 됩니다. 찬양을 불러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받아야 하고 모셔야 합니다. 찬송 부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큰 소리로 불러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불러야 합니다. 주님을 생각하면서 불러야 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이 역사하실 때 성령님이 하시는 일 중에 중요한 것은 변화되는 일입니다. 오늘 날 인간이 변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교회가 변하지 않고 성도가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변화가 없느냐 성령을 충만히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아십니까 영국 웨일즈에 성령님의 임재가 필요했던 시대와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요즘 신신학이 강하게 활동하고 있고, 성경을 비평할 때 고등비평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화석화로 만들어버리고 있고, 보다 더 이성적인 모습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물질의 풍요로움으로 인한 좋은 믿음을 향한 간절한 소망이나 은혜받기 위한 소망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위기를 이야기하고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며칠 전에 통계청에서 우리나라 종교 인구에 대해 발표를 했습니다. 발표에 보면, 지난 1995년, 즉 10년 전에 조사된 내용과 비교할 때 전체 종교 인구는 10. 5%증가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인구는 8백61만6천명으로 전체 인구의 18. 3%를 차지했으나 10년전 보다는 오히려1. 6% 감소했습니다.
반면에 천주교는 지난 10년 동안 74. 4% 증가했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어떤 것인지 왜 받아야 하는지 모른다면 안됩니다. 지난 1월 달에 교회 주제에 맞추어 4주간에 걸쳐서 성령님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교회를 비롯하여 한국교회가 새롭게 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변화됩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을 풍성히 부어주신다고 했습니다. 마가 다락방에 부어주셨던 것처럼 풍성하게 부어주십니다. 간구하면 됩니다. 찬송하면 됩니다. 소망을 가지면 주십니다. 성령이 충만하기 위해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그리고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국가의 변화, 국민의 변화는 교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국민들이 지금 어느 누구의 말도 잘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말씀도 잘 안듣습니다. 아내의 말이나 남편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선배의 잘 잘 듣지 않습니다. 고참 말도 듣지 않고 지휘관 말도 듣지 않습니다. 대통령의 말도 잘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누구의 말은 듣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듣습니다. 하기야 요즘 성도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도 건성으로 듣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도 100% 순종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의 가르침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의 장래는 교회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주 중요한 것을 지적했습니다. 다른 사람 말은 안들어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들어야 살길이 열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어려움을 겪을 때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바치러 간 사건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한 것을 보고 뒤에 하신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16절 말씀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앞으로 후손들이 복을 받을 것인데 그 이유는 아브라함 네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러주신 말씀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찌니라”(신12:32). 고 했습니다. 예레미야19장14-15절에 보면 예루살렘 성에 재앙을 내리는데 그 이유는 “이는 그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삶의 변화는 말씀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고 준행하는 것은 성령이 함께 역사해야 합니다. 사실 오늘 날 우리가 변화되어야 할 모습은 어떤 모습니까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어떤 것이 있습니까 바울은 디도를 통해서 주신 서신 가운데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우리의 옛사람의 모습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변해야 할 옛사람, 즉 고쳐야 할 옛 사람의 모습을 우리는 다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각이 없는 자였습니다. 우리가 전에는 어리석게도 복을 줄 수 없는 형상 앞에 가서 복을 달라고 빌었던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영적으로 무지한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명태 몇 마리 놓아주고 사고 나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고, 돼지머리 앞에 두고 돼지 입에다 돈을 물려놓고 안전사고가 나지 않게 해 달라고 빌며 살았던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이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종이 한 장 벽에다가, 문에다가 붙이거나 아니면 지갑에 넣어 다니면 복을 받고 어려움을 면한다고 하면서 행하던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아니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예수를 믿는 사람 중에도 옛 사람을 버리지 못해서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리를 가끔씩 듣습니다.
전에는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자고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불순종했던 자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지금도 우리는 이런 일을 자행합니다. 아직도 불순종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불순종을 이야기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전에는”이라고 전제를 달고 있습니다.
여기서 ‘전에’라는 것은 예수를 믿기 전에, 거듭나기 전에는 불순종했지만 이제는 순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전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모든 것이 불순종한 삶이었지만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은 우리는 순종을 잘합니까 만약에 우리가 아직도 불순종한다면 옛 사람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증거가 됩니다.
전에는 우리가 속은 자의 삶이었습니다. 속아도 완전히 속았습니다. 베드로전서2:25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길을 잃은 양과 같은 삶이 속은 삶이었습니다. 거짓된 종교, 거짓된 가르침에 따랐던 자들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쉽게 믿지 못하고 예수님을 쉽게 영접하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잘 속습니다. 지금도 속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단에 속습니다. 사이비에 속아 넘어갑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조금만 어려우면 그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고 속아서 철학관에 물으러 갑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물으려고 하지 않고 사람을 찾아다니며 물으려고 하는 것은 속을 위험이 있습니다.
전에는 각색 정욕에 물든 삶이었습니다. 요한일서2장16-17절에 보면 우리에게 대표적인 정욕 세 가지가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런 것들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특히 물질에 대한 욕심은 결국 자기를 해치고 결국은 멸망에 이르게 된다고 디모데전서6:9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버린 것 같지만 아직도 욕망이 순간순간 일어납니다. 우리의 욕심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전에는 행락에 종노릇한 삶이었습니다. 연락을 좋아하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지금은 주안에서 즐거워하지만 전에는 세상의 일을 통해서 즐기려고 했고 쾌락을 쫓아가던 삶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만족과 향락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들입니다. 오늘 날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일락을 위해서 삽니다. 돈을 버는 목적이 일락을 위해서 법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종노룻 했다는 것은 시키는 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쾌락에는 누구나 쉽게 빠지게 되고 그것에 매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잠언21:17말씀 “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 디모데전서5:6 말씀에 보면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은 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전에는 이런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전에는 악독과 투기로 미워하며 살았던 삶이었습니다. 사랑하기 보다는 미워하고 격려하기 보다는 시기하며 투기하는 마음을 갖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면 그 속에는 온갖 불의와 추함과 탐욕과 악의가 가득합니다.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합니다. 고린도전서3:3에 보면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을 보면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시기와 분쟁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육신의 삶을 온전히 벗어던지지 못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미움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아세요. 요한일서3:15에 보면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살인하는 자는 영생이 그 속에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전에는 가증스런 사람이었습니다.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는 추하고 더러운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결과 서로 미워하면서 사는 삶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가증스런 일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교만하고 거만하고 거짓된 행동을 하며 살았던 우리들입니다.
특히 불신자, 여호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부패하여 가증한 악을 행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말씀 가운데 44:4-5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가증한 일을 행하지 말라고 하였어도 그들이 듣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다른 신들에게 분향을 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이와 같은 사람이었는데 지금 구원받은 자로서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여전히 이전에 행하던 일을 자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구원은 어떻게 주어졌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4절에 보면 “우리 구주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인해 허물이 많은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아니면 우리가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도 많은 죄를 범하고도 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하심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아 이렇게 복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에베소서2:4 말씀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나타낸 가장 큰 증거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죄인 된 나를 독생자의 죽으심으로 바꾸었으니 그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5절에 보면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데 그것은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통해서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하심과 긍휼하심을 통해서 구원받은 우리는 어떻게 변해야 합니까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어리석고 순종하지 않고 속아서 살았고, 여러 가지 정욕과 향락에 종노릇하며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악독과 투기로 지내며 서로가 미워하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고 살아가는 저희들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야 할까요
오늘 우리 사회를 생각해 봅시다. 생기는 것은 오락실과 식당과 유흥점입니다. 이론 인해 도박중독자가 300만명, 정신분열증세가 있는 사람이 300만명, 알콜중독자가 250만 명이나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회적 병리현상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 병리현상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돈을 벌 수 있는 직장이 없음으로 인해 한탕주의로 발전하면서 백성들에게 진정한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그렇다 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인 교회와 교인들, 앞장서서 섬긴다고 하는 목회자들의 타락상은 왜 이렇게도 심각하게 나타나는가 우리는 메스컴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타락상이 심심찮게 보도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교회가 이렇게도 많은데 술집은 줄어들지 않습니까 오락실도 줄어들지 않고 러브 호텔도 줄어들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령이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면 반드시 삶의 변화가 있습니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결국 성령의 역사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5절 말씀에 보면 성령이 새롭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구원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지만 우리가 새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19장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이 때 에베소에서 신앙생활 하던 사람들을 만나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 이때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어떤 분인가도 모르고 요한의 물세례만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안수하였습니다. 안수기도 할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것이 무엇을 통하여 알 수 있는가 하면 방언과 예언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는 사실 성령을 받았느냐 못받았느냐를 구분할 수 있게 하는 것이면서도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그 중에 방언은 개인의 신앙유익을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을 받은 사람이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반드시 새 사람이 됩니다. 새 사람들로 가득차면 그 사회는 반드시 놀라운 일이 발생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의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만 시대와 지역에 따라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의 한국교회가 있기 까지는 여러 성령의 역사가 있었지만 교회사적으로 잊지 못할 성령의 역사가 1907년 1월 15일 밤부터 진행된 평양대부흥운동입니다. 당시에 선교사들이 자국에 보고할 때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를 가리켜서 사도행전 이후에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평가를 했습니다.
당시 감리고 선교사 헤리스는 이렇게 보고 했습니다. “수 천 명이 글 읽기를 배우고, 기독교를 알아보려고 문의하며, 술주정꾼, 도박꾼, 도적놈, 오입장이, 살인강도, 독선적인 유학자들, 구태의연한 불교도들, 여러 천명의 잡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으니 옛 것은 모두 다 지나가고 말았다”
사실 이와 같은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이 우리나라만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가 시대를 따라 전 세계적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습니다. 사실은 1903년에 시작된 영국의 웨일즈부흥운동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양부흥운동 출발의 가장 시초가 되었던 것은 마가 다락방에서 120명의 성도가 함께 기도할 때 임재 했던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 후에 시대 시대마다 성령의 역사는 계속되어 왔지만 평양부흥운동이 일어나던 시점을 중심으로 해서 그 전에 일어난 다른 성령의 역사를 보면 1903년 영국 웨일즈, 1905년 인도 북부지방인 카시아, 1906년 미국의 아주사 스트리트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특히 영국 웨일즈 지방에 임재한 성령의 역사가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가 그 배경을 어느 정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에 영국에서도 교회가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19세기 중반부터 자유주의 신학의 발흥, 다윈의 진화론, 고등비평, 심리학의 출현으로 교회가 위기를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를 살려야 할 신학이 교회로부터 생명력을 앗아갔습니다. 신학이 신앙의 파괴의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때에 1900년 6월 웨일즈 장로교 총회장 에반 필립스가 상당히 우려하면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교회의 신앙이 인간의 노력에 의존하려는 이처럼 무시무시한 경향에 어느 정도 기울어져 있는지 모르지만 기독교 신앙을 무신론의 방향으로 끌어들이려는 간과할 수 없는 오류가 분명히 존재한다. 헤겔의 철학과 진화론의 원리가 극단적 형태로 신앙의 영역에 범람하고 필시 가장 파괴적인 힘을 발휘하고… 오류의 영이 공중에 가득하게 되어 소리 없이 인간 지성의 잠재의식에 파고 든 영향은 사람들에게서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 인격적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빼앗고 있다”
다시 2년 후 1902년 웨일즈 장로교 총회장 퀸딜란 존스는 “교단신학”이란 책에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초자연적 존재로 믿으며, 성경을 초자연적 계시로 믿으며, ... 그리스도를 초자연적인 분으로 믿는다”고 역설했습니다. 도회지 교회 주일학교에서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속죄, 성령의 인격을 부정한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점점 영적 생명력을 상실하였고, 교회는 더욱 병들어 갔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의 권위가 상실한 설교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1890년대부터 웨일즈 교세는 급감하기 시작하여 1900년까지 불과 10년 동안 약 1만3천여 명이나 줄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인식한 이들은 부흥의 필요성과 긴박성을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래서 1902년 웨일즈 장로교 월간지에 “하늘에서 내리는 성령의 임재만이 그 가라지를 뿌리 뽑고 웨일즈 땅이 무신론과 불신에 희생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지도자들은 전적으로 여기에 동조하였습니다. 1902년 교회의 벗이라는 책에서 한 지도자는 만약 “내가 마지막으로 웨일즈 전역에 있는 동포에게 보내는 메세지”가 있다면 그것은 “현재 나의 조국과 민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성령의 특별한 임재를 통한 영적 부흥”이라고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904년 성령의 불길이 웨일즈 전역을 휩쓸었습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영적 토양이 준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선은 19세기 말 미국 시카코의 무디 성경학교와 영국에서 해마다 케직 사회경회가 열렸는데 , 여기에 참석하고 돌아온 13명의 웨일즈 사람들이 웨일즈에서도 그와 같은 사경회가 열리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1903년 웨일즈 클래드린도드 웰스에서 케직 사경회가 열렸고, 1904년도에 제2회 케직 사경회가 열렸는데 웨일즈 부흥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젊은이들이 6개월 동안 매일 기도회를 가졌던 웨일즈의 한 교회에서 그해 말에 120명이 회심을 했습니다. 그해 11월20일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고 밤마다 기도회를 가지고 기도했고, 10주 동안 밤 기도회를 가지며 부흥의 은혜를 경험하고 150명이 회심한 교회도 있었습니다. 웨일즈의 부흥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젊은이들의 기도였습니다.
1903년 접어들면서 네 명의 젊은 청년들이 매일 밤 웨일즈의 부흥을 놓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기도소식이 전광판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많은 사람들이 기도 모임을 가졌습니다. 어느 날 기도 현장에서 모임을 인도했던 침례교 목사였던 존스 목사님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어 그 집회를 장악하셨으며 위에서부터 강한 능력으로 우리를 압도하셨다.... 나는 거의 말을 할 수 없었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도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이런 기도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그로 인하여 사회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이 임재했을 때 어떤 변화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간단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우선은 교회가 성장했습니다. 불과 5주 만에 2만명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1904년과 1905년 사이에 칼빈주의 감리교회에 2만4천명이 새로 등록을 했고, 웨슬리 교회에서는 4천명이 증가했고, 회중 교회 교인의 수는 2만6천5백명의 교인이 증가했습니다. 웨일즈 부흥운동이 일어난 후 1년 동안 교인의 증가가 8만4천명 정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는 사회를 변화시켰습니다. 웨일즈에 도박이 사라지고, 부정직함과 술취함, 불의 부도덕성 등이 사라짐으로 인해 한동안 그 곳에 죄인들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옛 생활을 청산하고 삶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술주정뱅이와 도박사들이 그 악습에서 벗어났고, 가정불화가 치유되었으며, 술집이 텅텅 비었습니다. 앵글시의 클랜페어에서는 한 곳을 제외하고 모든 술집이 문을 닫았습니다.
글래스 모건에서 음주와 관련하여 재판을 받은 사람이 1903년에는 1만 명이 넘었으나, 1906년에는 5천4백명으로 줄었습니다. 사람들이 빚을 갚았습니다. 원수와 원수 사이, 형제와 형제 사이, 자매와 자매 사이의 거친 장벽이 힘없이 무너지고 심지어 성령 안에서 교단의 장벽도 무너졌습니다. 당시 마부들 입에서 말을 향한 욕이 사라져서 말을 부리는데 오히려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무시무시한 죄악들이 고백되었고, 묵은 빚을 청산했으며, 극장이 문을 닫아야 했고, 광부는 물론 무신론자들이 회심했으며, 술주정뱅이, 도둑, 사기꾼들이 구원을 받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었습니다. 성령님의 임재는 개인적 각성으로 끝나지 않고 변화와 사회개혁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임재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웨일즈에서 성령임재는 역시 성령을 보내달라는 기도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에 웨일즈에서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지금 성령을 보내주소서.
2.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지금 성령을 강하게 보내주소서
3.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지금 성령을 더욱 강하게 보내주소서
4.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지금 성령을 훨씬 더 강하게 보내주소서.
아울러 성령의 강한 역사를 위해서 우리는 찬양해야 합니다. 웨일즈 운동 중에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가 찬송이었습니다. 은혜가 풍성하면 찬양이 은혜롭습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성도가 부르는 찬송은 다 은혜가 됩니다. 찬양을 불러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받아야 하고 모셔야 합니다. 찬송 부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큰 소리로 불러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불러야 합니다. 주님을 생각하면서 불러야 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이 역사하실 때 성령님이 하시는 일 중에 중요한 것은 변화되는 일입니다. 오늘 날 인간이 변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교회가 변하지 않고 성도가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변화가 없느냐 성령을 충만히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아십니까 영국 웨일즈에 성령님의 임재가 필요했던 시대와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요즘 신신학이 강하게 활동하고 있고, 성경을 비평할 때 고등비평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화석화로 만들어버리고 있고, 보다 더 이성적인 모습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물질의 풍요로움으로 인한 좋은 믿음을 향한 간절한 소망이나 은혜받기 위한 소망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위기를 이야기하고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며칠 전에 통계청에서 우리나라 종교 인구에 대해 발표를 했습니다. 발표에 보면, 지난 1995년, 즉 10년 전에 조사된 내용과 비교할 때 전체 종교 인구는 10. 5%증가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인구는 8백61만6천명으로 전체 인구의 18. 3%를 차지했으나 10년전 보다는 오히려1. 6% 감소했습니다.
반면에 천주교는 지난 10년 동안 74. 4% 증가했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어떤 것인지 왜 받아야 하는지 모른다면 안됩니다. 지난 1월 달에 교회 주제에 맞추어 4주간에 걸쳐서 성령님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교회를 비롯하여 한국교회가 새롭게 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변화됩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을 풍성히 부어주신다고 했습니다. 마가 다락방에 부어주셨던 것처럼 풍성하게 부어주십니다. 간구하면 됩니다. 찬송하면 됩니다. 소망을 가지면 주십니다. 성령이 충만하기 위해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그리고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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