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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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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강림절(Pentecost)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내려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부활절후 50일째 되는 날이라서 오순절(5旬節)이라고도 말합니다. 우리가 지난 한달 동안 성령 충만에 대해서 말씀을 듣고 있는데 성령강림절을 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성령에 대해서 미리 알고 성령강림절을 맞이하면 더욱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한 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해줍니다. 하늘로부터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하게 됩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머리 위에 임하게 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사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하게 됩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난 겁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변화되었다는 겁니다. 생각이 변화되고 가치관이 변화되고 의식구조가 변화되고 삶이 변화되고... , 모든 것이 변화되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니까 새로운 마음이 생기게 되었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고, 새로운 삶의 스타일이 생기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성령을 받으니까 가만히 있지를 못하지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전도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베드로가 회개설교를 하니까 3천명이 돌아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사도들이 성령이 충만하니까 복음의 증인이 됩니다. 사도들이 여기 저기로 흩어져서 생명을 살립니다.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이 살아납니다.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이 떠납니다. 각양각종의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얼마나 큰 변화가 나타나는지 모릅니다. 이보다 더 큰 변화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은 초대교회에만 잠깐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도 역사하고 미국에도 역사하고 한국에도 역사합니다. 이번 여름에 우리 청년들이 단기선교를 가는데, 두 명이 더 늘어서 네 명이 간다는데, 가보면 알지만 터키에도 역사하고, 이란에도 역사하고, 팔레스타인에도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오늘날에도 성령 충만은 크게 두 종류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게 나타나기도 하고, 눈에 보이지 않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성령은 은사로 나타나서 눈에 보이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여러 가지 은사가 나오지요.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믿음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의 은사, 예언의 은사, 영 분별의 은사, 통역을 주십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처럼 방언을 하게 됩니다.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게도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보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평안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이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평안이 눈에 보입니까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경험하셨을 겁니다. 성령을 받으면 마음에 평안이 있지요. 예배를 드리면 마음이 뜨겁습니다. 찬양을 드리면 기쁩니다. 교회에 오는 발걸음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삶의 생기가 넘칩니다. 주일날 제자훈련 클래스가 있는데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2부 예배가 끝나면 좀 쉬었다가 시작하는데, 얼마나 뜨거운지 일찍 끝나도 밤 10시입니다. 보통은 11시에 끝납니다.
지난주간에 연회에 갔다가 목사님들을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제자훈련 얘기를 했더니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 제가 보기에도 그 사람들 제정신()이 아닙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시지요 주일날 하루 종일 교회에서 헌신하다가, 월요일 아침에 일찍 출근해야 하는데... , 주일 밤 11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가니 제정신이 아니지요.
그렇다고 제자 훈련하는 거에 겁먹지 마세요. 제자훈련을 하면 다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이처럼 피곤해도 피곤하지가 않은 겁니다. 지칠 줄을 모릅니다. 신이 납니다. 삶의 생기가 넘치고 의욕이 넘치고 기쁨이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일에도 능률이 납니다. 공부도 잘 됩니다. 가정도 화목이 넘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 충만은 이렇게 좋은 거예요. 세상의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는 것이 성령 충만이에요. 금보다 귀한 것이 성령 충만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성령 충만을 사모하고 구해야 하는 겁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성령 충만을 구하셔서 성령 충만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인들 중에는 성령 충만을 원하면서도 성령 충만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사실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성령 충만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성령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성령 충만해야 인생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령 충만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성령을 받지 못해서 답답하게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령 충만을 원하는데 성령 충만하지 않다면 원인을 분석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원인을 분석하잖아요. 무엇이 잘못됐나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나 원인을 분석하고 연구하고 찾아내면 문제가 해결되어 순조롭게 나아갑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성령 충만을 원하는데 성령 충만하지 않다면 자신을 낮추고 말씀을 들으며 원인을 찾아내야 합니다. 나에게 성령 충만을 막고 있는 둑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어 깨닫기만 하면 성령 충만은 자동적으로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신앙생활을 누릴 수가 있는 겁니다.
성경을 보면 성령 충만한 사람들과 성령 충만하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를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할 때의 일입니다.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에서 전도합니다. 3절에 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내가 전하는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아라는 말이잖아요. 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메시아는 굉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상 대대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그 구세주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짧은 기간 동안 전도를 했는데, 2절에 보면 세 안식일이라고 했거든요. 세 주간 정도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4절에 보면 헬라인의 많은 무리들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랐습니다. 예수를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기하여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소요를 일으킵니다. 바울 일행을 끌어다가 군중 앞에 세우려고 찾아다닙니다.
여러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울이 전하는 구원의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을 사람은 유대인이잖아요. 유대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구세주를 갈망하고 있었잖아요. 구약성경에서 그것을 증거하고 있잖아요. 그렇게 간절하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셨으면 믿어야지요. 헬라인의 많은 무리들과 많은 귀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른 것처럼 그들도 따라야지요. 그런데 그들은 핍박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를 믿지 못하게 가로막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복음이 증거될 때에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있고 핍박하는 사람이 있듯이, 교회를 다니면서 성령 충만을 받는 사람도 있고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안 믿는 것이나 성령 충만을 받거나 안 받는 것은 원리에서는 같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본문에 나오는 유대 사람들을 보면서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늘 설교가 비약인지도 모르고 적용이 잘못됐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가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것도 이와 같다는 생각을 여호와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은혜로 받으시면 좋겠습니다.
 첫째, 고정 관념이 성령 충만을 가로막습니다.
지난해인가 해군사관학교 학생들이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을 때에 이상한() 지도를 봤습니다. 우리 나라 지도가 거꾸로 되어 있는 겁니다. 서울이 아래에 놓여 있고 부산 제주도가 위에 있는 거예요. 지금까지 그런 지도는 본적이 없거든요. 우리는 서울이 위쪽에 있어야 하고 제주도는 아래쪽에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잖아요. 교육을 통해서 고정된 사고방식이지요. 사실 지형의 실물이라는 것은 바라보는 곳이 어느 쪽이냐에 따라서 다를 수가 있는 거예요. 서울이 아래쪽에 있을 수도 있고 부산 제주도가 위쪽에 있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 생각을 안 해보셨나요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지만 고정관념을 깨면 더 넓은 세계관을 볼 수가 있고 더 넓은 세계관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지도가 거꾸로 되어 있는 것은 해군이 세계를 향해서 나아간다는 의미로 만든 것인데, 그런 우리 나라 지도를 보니까 그 생각이 나더라구요. 우리 나라가 진해 부산 제주도에서 태평양을 향해서 세계로 힘차게 나아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그냥 들어오더라구요. 저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잘못된 고정관념이 성령 충만을 가로막습니다. 이건 이렇게 해야 하고, 저건 저렇게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거예요.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도 고정관념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나실 분이 아니거든요. 죄인들과 어울리는 분이 아니에요. 자기들이 생각하는 구세주는 그런 분이 아니에요. 자기들의 고정관념을 정해놓으니까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겁니다. 구약성경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이 얼마나 많이 나와요. 그런데도 자기들의 고정관념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겁니다.
성령 충만의 잘못된 고정관념 중에 하나는 성령을 받지 않고도 신앙 생활하는데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성령 받지 않으면 교회 다니는 데에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 받지 않으면 예수 믿는 데에는 문제가 됩니다. 예수를 바로 믿으려면 성령 충만은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교회 다니는 것하고 예수 믿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아시지요. 공부하는 것하고 학교 가는 것하고, 직장 다니는 것하고 일하는 것은 다른 거예요. 교회 다니는 것하고 예수 믿는 것은 전혀 다른 거예요.
보세요. 성령 충만하지 않고 얼마든지 예배드릴 수가 있고, 얼마든지 봉사할 수 있고,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고, 얼마든지 충성할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던 분들은 전혀 불편함이 없습니다.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도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히 받지 않고는 예수를 온전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깊은 은혜의 단계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려면 성령 충만해야 하는 겁니다. 성령 충만해야 신앙생활이 바로 되는 겁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고도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은 오늘 이 시간에 다 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 충만의 잘못된 고정관념 중에 하나는 성령이 나에게 임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나는 가만히 있고 성령이 나에게 오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런 분들은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이 개입하셨잖아요. 그런데 착각하지 마세요. 바울은 특별한 사람이에요. 바울은 믿음의 열정이나 실력이 대단한 분이에요. 여호와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개입하신 거예요. 방향을 고쳐주신 거예요. 이런 것을 가리켜서 특별 은혜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바울과 비교할 수도 없으면서, 아니 어떤 면으로 봐서도 비교할 상대가 되지도 않으면서 바울처럼 성령이 임하실거다. 꿈 깨세요. 성령은 구해야 하는 거예요. 나는 가만히 있고 성령께서 모두 알아서 해주시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미신이에요. 성경 여러 곳에서 성령을 구하라고 했어요. 성령 충만은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는 거예요. 구할 때에 성령이 역사하는 겁니다. 오늘 이 시간에 성령 충만의 고정관념을 모두 깨시기 바랍니다. 잘못된 고정관념은 깨도 아프지 않습니다. 고정관념을 깨야 성령을 받을 수가 있는 겁니다.
 둘째, 자신의 자아가 성령 충만을 가로막습니다.
사사기 시대의 상황을 한 마디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사기 21장 25절에 보면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겁니다. 사사 시대 이전에는 일만 있으면 여호와 하나님께 물어보고 여호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나아갔어요. 그래 전쟁에 나가면 백전백승이었어요. 그런데 사사시대에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었다는 거예요. 이 사람도 자기의 뜻대로 하고, 저 사람도 자기의 뜻대로 했어요. 사공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자아가 강할수록 성령을 가로막습니다. 내 신념이 강할수록 성령 충만을 가로막습니다. 나의 주장, 나의 경험, 나의 판단, 나의 철학, 나의 비전... , 이런 것들로 채워져 있으면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합니다. 자기 계획, 완고함, 고집이 있으면 주님이 주시는 은혜도 차단시키고 성령의 역사도 제한한다는 겁니다.
때때로 기도할 때도 보면 기도가 잘못되어서 성령 충만을 차단할 때가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는 것을 말하잖아요. 그런데 내 식으로 성령을 경험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이런 식으로 성령 충만하게 해주시고 저것은 저런 식으로 성령 충만하게 해 주세요. 심지어는 누구와 같이 성령 충만하게 해 주세요. 자신이 생각하는 성령 충만의 공식을 세워 놓고는 성령 충만하게 기도를 합니다. 그러니 성령 충만하게 되나요 이런 것이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하기 위해서 내 자아가 강한지 안 강한지를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속회에 가시거든 말씀 나눔을 할 때에 다른 사람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만 강하게 이야기한다. 대화가 안 된다. 그러면 자아가 강한 겁니다.
저와 여러분은 내 스스로 관리하지 않으면 내 자아는 저절로 강하게 됩니다. 우리가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내 자아를 철저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아가 강해져서 성령 충만하게 하는 것을 차단한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이 된다는 겁니다. 오늘 이 시간에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자아가 성령 충만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모두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경험 중요한 겁니다. 우리의 가치판단 중요한 겁니다. 우리의 철학 중요한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셋째, 불순종이 성령 충만을 가로막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복의 통로로 삼으셔서 다른 사람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초대교회도 보면 제자들을 통해서 일하셨습니다. 초대교회가 부흥되는데 아무나 데려다가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120명의 사도들이 다락방에 모여서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여기에 순종합니다. 순종할 때에 성령이 내렸다는 사실입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모이지 않았다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종종 한국에 가서 부흥회를 해 보면 말씀에 반응하는 모습이 여기와는 좀 다른 것을 느낍니다. 먹고사는 것은 여기가 월등한데 신앙생활의 열정이나 아멘은 한국이 더 낫습니다. 이유가 뭔지 아세요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는 순종할 때에 경험하는 것인데 순종하지 않으니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가 없는 거지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침체되는 겁니다. 이민사회에 얼마나 유식하고 똑똑한 사람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 유식함이 순종하지 않는 걸림돌이 된다는 겁니다. 순종하지 못하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니까 성령 충만이 안 되는 겁니다.
어느 성도가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하여 성령 충만을 구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는데 성령 충만하지 않은 겁니다. 그래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이 성도는 성령 충만을 구하면서도 헌신하지 않고 계속 구하기만 했기 때문에 성령 충만하지 않은 겁니다. 불순종했다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하여 성령 충만을 구해야겠다는 마음을 여호와 하나님이 주셨으면 순종해야 합니다.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면 저절로 성령 충만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성령 충만하면 헌신하게 되지만 헌신하다보면 성령 충만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성령 충만하면 기도하게 되지만 기도하다보면 성령 충만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성령 충만하면 전도하게 되지만 전도하다보면 성령 충만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여러분, 성도가 성령을 충만히 받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을 터트려야 합니다. 내 안에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을 제거하지 않고는 성령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내 안에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이 얼마나 완고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견고하게 쌓아놓았는지 웬만한 역사에는 꿈적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고정 관념과 자기 계획이나 불순종과 고집이 꺾여야 합니다. 꺾여야 여호와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이고, 둑이 터져야 강 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되는 겁니다. 성령 충만을 가로막는 둑을 모두 제거하셔서 여호와 하나님이 성령 충만하게 하실 때에 그 은혜를 다 받아드려서 언제어디서나 성령 충만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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