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성령께서, 성도를 대신하여
본문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셨다고 해서 성령강림절을 오순절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교회력으로 볼 때는 오순절보다는 성령강림절이 더 적절한 이름입니다.
성령강림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셨다고 하지만, 그 전이라고 해서 성령께서 활동을 하지 않으신 건 아니었지요. 구약성경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임하셨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곧 성령이시니까, 구약시대에도 성령께서 활동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강림절은 성령께서 처음으로 세상에 오신 날은 아닙니다.
성령강림절의 의미는 교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령강림절은 바로 교회가 시작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신 목적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시려고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 그날이 바로 성령강림절이고, 오늘은 그 일을 기념하는 주일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오늘은 온 세계 모든 교회의 생일인 셈이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의 말씀은 성령강림절에 교회를 통해 세상에 오신 바로 그분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특별히 전반부는 분위기가 무척 무겁습니다.
3:10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없고,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혀는 사람을 속인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 찼다. 발은 피를 흘리는 일에 빠르며,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함이 있다.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눈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
7:19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
7:24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오늘 읽은 말씀도 같은 분위기입니다.
22절은,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
아담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죄가 들어오는 바람에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또 그 바람에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도 함께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17, “...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제는 흙과 곡식이 열매 맺는 일조차도 고통이 되었다는 겁니다. 출산의 기쁨도 물론 크지만, 그 기쁨을 얻기 위해 흘리는 땀과 눈물이 너무 크다는 겁니다. 모든 피조물이 죄에 짓눌려 있는 형국입니다. 함께 신음하며, 열매를 맺기 위해서, 새끼를 낳기 위해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멋대로 행한 결과입니다.
사람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23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미 성령을 받은 우리도 그렇다는 것 말입니다. 피조물이나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예수 믿고 성령을 받은 우리도 구원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령을 받았다는 건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건데,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걸까요 무엇이 더 필요하다는 말인가요 성령을 받은 사람도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건가요
이 대목을 자세히 보면, “우리도 자녀로 삼아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을 속량한다, 우리 몸이 구원을 받는다는 거지요. 그러면, 성령을 받으면 우리 영혼만 구원을 받고 아직 우리 몸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걸까요
그렇게 몸이 구원받지 못했으면 아직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걸까요 우리의 구원이 영혼 따로 몸 따로 그렇게 받는 것이고, 영혼만 구원을 받고 몸이 구원을 받지 못했으면 아직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것인가요 그러면, 영혼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 믿고 성령을 받으면 되는데, 몸의 구원은 어떻게 해야 받을 수 있습니까 구원이라는 게 그렇게 까다로운 거란 말입니까
사람도 피조물입니다. 사람도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사람 때문에 전 피조세계가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사람만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다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회복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의 세계가, 사람 때문에 망가져버렸는데,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이 원래 지으셨던 그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 그것이 구원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죄를 지어서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그로 인해 죽게 된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그 모습 그대로 회복되는 것,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 속에서 사람의 자리를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은 파괴되고 망가지고 다 무너져도 사람만 예수 믿고 영혼만 쏙 빠져나와서 천당에 간다, 그런 게 아니라는 겁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구원은 회복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건 구원의 시작이지, 완성은 아닙니다. 구원은 회복입니다. 이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회복되고,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가 회복되는 것이 구원의 완성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아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졌지만, 우리가 구원 받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여전히 일그러진 채로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여전히 그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세상에는 악이 있고, 선한 사람보다 악한 사람이 더 힘이 있고,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더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세상에서 그냥 살면 악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열심히 교육하고 가르쳐도 그런데, 그냥 세상에 맡긴 채로 내버려두면 악당이 되기가 훨씬 쉽단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도, 미쳐간다고 표현할 정도로 엉망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구원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 세상이,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이 온전히 회복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악한 세상 속에서 신음하며 사는 동안,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바로 그 자리에 교회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회복시키고, 일그러진 사람의 모습을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려는 일이 바로 성령께서 교회를 통해 이루시려는 일입니다.
그 모든 것이 회복되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의 구원은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은 소망 가운데 있습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은 소망 가운데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24절에,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데, 이게 그런 뜻입니다. 아직도 구원은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망하는 거지요. 이미 이루어진 걸 소망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눈이 보이지 않는 것,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소망하지요. 소망을 가진 사람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우리의 구원을 믿는 사람은 그 소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당겨서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구원이 이루어지기를 참으면서 기다려야 한다고 오늘 성경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아직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거나, 위태롭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취소될 수 있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건 마치 이런 겁니다.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아기는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아직 성숙한 사람은 아닙니다. 아기는 어른이 될 때까지 계속 자라나야 합니다.
멈추면 안 됩니다. 아기가 태어났다고 완성된 건 아닙니다. 하지만, 아기가 태어난 이후에는 취소할 수 없습니다. 미숙하기는 하지만, 사람입니다. 아기가 태어났는데, 중간에 뭐가 잘못됐다고 해서 사람이 고양이가 되지는 않습니다. 아기는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사람인 겁니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합니다.
같은 이치입니다. 구원이 시작된 그 순간, 그 구원은 취소되거나 변경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계속 완성되어야 합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냥 갓난아기로 남아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구원도 마찬가지고,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막 믿기 시작했을 때는 모든 게 서툴고 미숙하고 실수도 많고 그러지요.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어른스러워져야 합니다.
여전히 어린애처럼 남의 탓이나 하고 불평하고 투덜대면 곤란합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이 돌봐주어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내가 다른 사람을 돌봐주고 지켜주고 인도해주어야 합니다. 양보도 할 줄 알고, 희생도 할 줄 알고, 포기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른이지요. 가끔 그런 아빠들 있지요 아이하고 먹을 거 가지고 싸우는 아빠들. 아이가 자기 먹을 거 뺏어갔다고 삐져서 아이하고 말도 안 하는 철없는 아빠들 가끔 있어요. 예수 믿는 일에도 그렇게 철없는 사람들 가끔 있단 말이지요.
교회도, 성도도 자라야 합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고, 어른스러워지고, 어른 노릇을 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재하시면, 그때부터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온전히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 사는 세상과 피조 세계가 다 회복되지 않았으니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이, 성령과 함께, 구원을 완성시켜나가야 합니다.
우리 주변을 변화시켜서 세상을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회복시키고,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회복시키는 일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겁니다. 그게 우리 구원의 완성입니다. 구원의 시작은 개인적이었지만, 완성은 모두가 함께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자기만 알고 자기 혼자만의 문제에 매달려 사는 사람은 아직도 어린 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성령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직 미숙한 우리를 도우십니다.
26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
우리 혼자서 자랄 수는 없습니다. 우리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우리도 끊임없이 힘써야 하지만, 우리 혼자 힘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는 것일 텐데, 그건 아니란 말이지요. 갓난 아기가 혼자서 자라납니까 태어나서는 엄마가 젖을 먹여야 하고, 기저귀도 갈아주어야 하고, 옷을 입혀야 하고, 학교도 보내주어야 하고... 어른이 될 때까지 돌봐주어야 하지요.
아이 자신도 끊임없이 애써야 하지만, 부모와 주변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안된단 말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서도, 우리 혼자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죄 지으면서, 나쁜 일을 나쁜 일이라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살아오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루아침에 성인군자가 되거나 믿음이 다 자란 어른이 되는 건 아니란 말이지요. 우리는 약하고 부족하고 능력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우리에게 가장 쉬운 것이라고 할 기도조차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게 우리 아닙니까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하십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하신다는 말씀은 우리가 할 기도를 대신해 주신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하시니까 우리는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 성령께서 다 하셨으니 기도할 필요 없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도록 도우시고,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알게 되도록 간구하시고,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살피셔서, 그런 일들에 대해서 우리 대신 간구하십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더욱 성숙해져서, 우리가 우리의 기도를 할 수 있게 되도록 간구하십니다.
우리를 언제까지나 어린 아이로 머무르게 하시려고,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되도록 다 알아서 기도해주시고, 우리가 기도할 필요 없도록 다 대신 기도해주시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요새 보면, 초등학교에 다니는데 혼자서는 옷도 못 입는 아이들이 있어요. 엄마가 다 해주니까, 자기는 할 필요도 없고, 한번 해 본 적도 없어서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신다는 것은 그렇게 하신다는 게 아니란 말이지요.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시되,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신다고 합니다. 아직도 세상에서 시달리고 고달픈 우리 처지를 생각하시면서, 성령께서 울고 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십니다. 우리가 너무 불쌍해서 말입니다.
가끔 그럴 때 있지요. 나 자신이 너무 불쌍해서 눈물 날 때 있지 않습니까 사는 게 지치고 지겨울 때,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주저앉고 싶을 때 없으셨나요 아무도 없이 혼자라고 느껴질 때. 내 옆자리에서,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이 잠들어 있는데도, 가슴이 미어지도록 외로워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를 때. 내가 보기에도 나 자신이 너무 불쌍하고 안쓰러울 때가 있단 말이지요. 그런 우리를 보시면서 성령께서 우십니다. 너무 불쌍해서, 너무 측은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하십니다.
때로는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신이 났어요. 돈을 많이 벌어서, 승진해서, 출세해서, 성공해서 아주 신이 났습니다.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그런 우리 모습을 보시면서도, 성령께서 탄식하며 간구하실지 모릅니다.
뭐가 뭔지 모르고, 앞뒤 분간 못하면서 그저 눈앞에 뭐가 생겼다고 저러는구나. 저게 복이 될지 해가 될지도 모르면서, 그저 남들이 부러워하니까, 자랑하느라 정신없구나. 저러다 실수하면 어떻게 하나, 저러다 교만해져서 복이 독이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셔서 마음 졸이시며 간구하실 지도 모릅니다.
그런 성령의 생각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성령께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해서 간구하시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우리 자신보다도 더 잘 아십니다. 다 헤아리시고, 다 이해하시고, 우리 아픔을, 우리 기쁨을 우리와 똑같이 느끼십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그 기도에 응답해주십니다. 나는 아직 깨닫지 못해서 기도하지 못한 것까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 치워주시고, 채워주시고, 이뤄주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내 대신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성령께서는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만 구원받고 천당가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회복되고 온전해지게 하는 일에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일하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고, 여호와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더 이상 우리가 탄식하지 않도록, 더 이상 우리 때문에 우리 이웃이, 우리 세상이 탄식하지 않도록 우리를 격려하시고 세워주시고 인도하십니다.
오늘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신 날입니다. 성령께서 나에게 찾아오셔서 내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할 때에도,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성령님은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고, 우리를 주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임하시고, 우리 교회 안에 임하십니다.
우리 교회를 위해, 교회의 아픔을 생각하며, 교회의 꿈과 소망과 시련과 좌절을 보시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교회가 혹시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교회가 혹시 위험한 일에 처하지 않도록, 교회가 혹시 누군가에게 휘둘려서 주님을 따르지 못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교회를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교회가 신나게 잘 나갈 때도, 교회가 어려움을 당해 실망했을 때에도 그러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하십니다.
그러니 소망을 가집시다. 실망하지 말고 낙심하지 맙시다. 흔들리지 말고 믿음을 굳게 지킵시다. 지금 우리는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한 걸음씩 걸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서, 참으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뭔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지금 당장 눈에 차고 손에 잡히는 뭔가가 없더라도, 인내하고 견디면서 우리가 할 일을 합시다. 지금도 성령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십니다.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그 간구가 우리를 살립니다. 그 간구가 우리를 일어서게 합니다. 그 간구가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과 함께 더 뜨겁게 간구하고, 더 뜨겁게 사랑하며, 더 열심히 주님을 위하여 일하며 삽시다. 성도들을 사랑하고 서로의 짐을 대신 져주면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지키면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우리를 통해 일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과 생각, 우리의 입술과 손발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 뜻대로만, 주님이 기뻐하실 것만 하며 삽시다.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까지, 온 창조세계가 회복되는 그 날까지 성령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성령강림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셨다고 하지만, 그 전이라고 해서 성령께서 활동을 하지 않으신 건 아니었지요. 구약성경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임하셨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곧 성령이시니까, 구약시대에도 성령께서 활동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강림절은 성령께서 처음으로 세상에 오신 날은 아닙니다.
성령강림절의 의미는 교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령강림절은 바로 교회가 시작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신 목적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시려고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 그날이 바로 성령강림절이고, 오늘은 그 일을 기념하는 주일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오늘은 온 세계 모든 교회의 생일인 셈이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의 말씀은 성령강림절에 교회를 통해 세상에 오신 바로 그분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특별히 전반부는 분위기가 무척 무겁습니다.
3:10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없고,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혀는 사람을 속인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 찼다. 발은 피를 흘리는 일에 빠르며,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함이 있다.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눈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
7:19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
7:24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오늘 읽은 말씀도 같은 분위기입니다.
22절은,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
아담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죄가 들어오는 바람에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또 그 바람에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도 함께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17, “...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제는 흙과 곡식이 열매 맺는 일조차도 고통이 되었다는 겁니다. 출산의 기쁨도 물론 크지만, 그 기쁨을 얻기 위해 흘리는 땀과 눈물이 너무 크다는 겁니다. 모든 피조물이 죄에 짓눌려 있는 형국입니다. 함께 신음하며, 열매를 맺기 위해서, 새끼를 낳기 위해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멋대로 행한 결과입니다.
사람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23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미 성령을 받은 우리도 그렇다는 것 말입니다. 피조물이나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예수 믿고 성령을 받은 우리도 구원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령을 받았다는 건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건데,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걸까요 무엇이 더 필요하다는 말인가요 성령을 받은 사람도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건가요
이 대목을 자세히 보면, “우리도 자녀로 삼아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을 속량한다, 우리 몸이 구원을 받는다는 거지요. 그러면, 성령을 받으면 우리 영혼만 구원을 받고 아직 우리 몸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걸까요
그렇게 몸이 구원받지 못했으면 아직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걸까요 우리의 구원이 영혼 따로 몸 따로 그렇게 받는 것이고, 영혼만 구원을 받고 몸이 구원을 받지 못했으면 아직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것인가요 그러면, 영혼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 믿고 성령을 받으면 되는데, 몸의 구원은 어떻게 해야 받을 수 있습니까 구원이라는 게 그렇게 까다로운 거란 말입니까
사람도 피조물입니다. 사람도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사람 때문에 전 피조세계가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사람만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다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회복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의 세계가, 사람 때문에 망가져버렸는데,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이 원래 지으셨던 그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 그것이 구원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죄를 지어서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그로 인해 죽게 된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그 모습 그대로 회복되는 것,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 속에서 사람의 자리를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은 파괴되고 망가지고 다 무너져도 사람만 예수 믿고 영혼만 쏙 빠져나와서 천당에 간다, 그런 게 아니라는 겁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구원은 회복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건 구원의 시작이지, 완성은 아닙니다. 구원은 회복입니다. 이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회복되고,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가 회복되는 것이 구원의 완성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아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졌지만, 우리가 구원 받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여전히 일그러진 채로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여전히 그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세상에는 악이 있고, 선한 사람보다 악한 사람이 더 힘이 있고,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더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세상에서 그냥 살면 악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열심히 교육하고 가르쳐도 그런데, 그냥 세상에 맡긴 채로 내버려두면 악당이 되기가 훨씬 쉽단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도, 미쳐간다고 표현할 정도로 엉망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구원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 세상이,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이 온전히 회복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악한 세상 속에서 신음하며 사는 동안,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바로 그 자리에 교회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회복시키고, 일그러진 사람의 모습을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려는 일이 바로 성령께서 교회를 통해 이루시려는 일입니다.
그 모든 것이 회복되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의 구원은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은 소망 가운데 있습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은 소망 가운데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24절에,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데, 이게 그런 뜻입니다. 아직도 구원은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망하는 거지요. 이미 이루어진 걸 소망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눈이 보이지 않는 것,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소망하지요. 소망을 가진 사람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우리의 구원을 믿는 사람은 그 소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당겨서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구원이 이루어지기를 참으면서 기다려야 한다고 오늘 성경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아직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거나, 위태롭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취소될 수 있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건 마치 이런 겁니다.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아기는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아직 성숙한 사람은 아닙니다. 아기는 어른이 될 때까지 계속 자라나야 합니다.
멈추면 안 됩니다. 아기가 태어났다고 완성된 건 아닙니다. 하지만, 아기가 태어난 이후에는 취소할 수 없습니다. 미숙하기는 하지만, 사람입니다. 아기가 태어났는데, 중간에 뭐가 잘못됐다고 해서 사람이 고양이가 되지는 않습니다. 아기는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사람인 겁니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합니다.
같은 이치입니다. 구원이 시작된 그 순간, 그 구원은 취소되거나 변경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계속 완성되어야 합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냥 갓난아기로 남아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구원도 마찬가지고,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막 믿기 시작했을 때는 모든 게 서툴고 미숙하고 실수도 많고 그러지요.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어른스러워져야 합니다.
여전히 어린애처럼 남의 탓이나 하고 불평하고 투덜대면 곤란합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이 돌봐주어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내가 다른 사람을 돌봐주고 지켜주고 인도해주어야 합니다. 양보도 할 줄 알고, 희생도 할 줄 알고, 포기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른이지요. 가끔 그런 아빠들 있지요 아이하고 먹을 거 가지고 싸우는 아빠들. 아이가 자기 먹을 거 뺏어갔다고 삐져서 아이하고 말도 안 하는 철없는 아빠들 가끔 있어요. 예수 믿는 일에도 그렇게 철없는 사람들 가끔 있단 말이지요.
교회도, 성도도 자라야 합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고, 어른스러워지고, 어른 노릇을 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재하시면, 그때부터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온전히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 사는 세상과 피조 세계가 다 회복되지 않았으니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이, 성령과 함께, 구원을 완성시켜나가야 합니다.
우리 주변을 변화시켜서 세상을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회복시키고,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회복시키는 일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겁니다. 그게 우리 구원의 완성입니다. 구원의 시작은 개인적이었지만, 완성은 모두가 함께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자기만 알고 자기 혼자만의 문제에 매달려 사는 사람은 아직도 어린 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성령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직 미숙한 우리를 도우십니다.
26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
우리 혼자서 자랄 수는 없습니다. 우리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우리도 끊임없이 힘써야 하지만, 우리 혼자 힘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는 것일 텐데, 그건 아니란 말이지요. 갓난 아기가 혼자서 자라납니까 태어나서는 엄마가 젖을 먹여야 하고, 기저귀도 갈아주어야 하고, 옷을 입혀야 하고, 학교도 보내주어야 하고... 어른이 될 때까지 돌봐주어야 하지요.
아이 자신도 끊임없이 애써야 하지만, 부모와 주변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안된단 말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서도, 우리 혼자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죄 지으면서, 나쁜 일을 나쁜 일이라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살아오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루아침에 성인군자가 되거나 믿음이 다 자란 어른이 되는 건 아니란 말이지요. 우리는 약하고 부족하고 능력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우리에게 가장 쉬운 것이라고 할 기도조차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게 우리 아닙니까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하십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하신다는 말씀은 우리가 할 기도를 대신해 주신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하시니까 우리는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 성령께서 다 하셨으니 기도할 필요 없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도록 도우시고,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알게 되도록 간구하시고,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살피셔서, 그런 일들에 대해서 우리 대신 간구하십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더욱 성숙해져서, 우리가 우리의 기도를 할 수 있게 되도록 간구하십니다.
우리를 언제까지나 어린 아이로 머무르게 하시려고,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되도록 다 알아서 기도해주시고, 우리가 기도할 필요 없도록 다 대신 기도해주시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요새 보면, 초등학교에 다니는데 혼자서는 옷도 못 입는 아이들이 있어요. 엄마가 다 해주니까, 자기는 할 필요도 없고, 한번 해 본 적도 없어서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신다는 것은 그렇게 하신다는 게 아니란 말이지요.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시되,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신다고 합니다. 아직도 세상에서 시달리고 고달픈 우리 처지를 생각하시면서, 성령께서 울고 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십니다. 우리가 너무 불쌍해서 말입니다.
가끔 그럴 때 있지요. 나 자신이 너무 불쌍해서 눈물 날 때 있지 않습니까 사는 게 지치고 지겨울 때,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주저앉고 싶을 때 없으셨나요 아무도 없이 혼자라고 느껴질 때. 내 옆자리에서,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이 잠들어 있는데도, 가슴이 미어지도록 외로워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를 때. 내가 보기에도 나 자신이 너무 불쌍하고 안쓰러울 때가 있단 말이지요. 그런 우리를 보시면서 성령께서 우십니다. 너무 불쌍해서, 너무 측은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하십니다.
때로는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신이 났어요. 돈을 많이 벌어서, 승진해서, 출세해서, 성공해서 아주 신이 났습니다.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그런 우리 모습을 보시면서도, 성령께서 탄식하며 간구하실지 모릅니다.
뭐가 뭔지 모르고, 앞뒤 분간 못하면서 그저 눈앞에 뭐가 생겼다고 저러는구나. 저게 복이 될지 해가 될지도 모르면서, 그저 남들이 부러워하니까, 자랑하느라 정신없구나. 저러다 실수하면 어떻게 하나, 저러다 교만해져서 복이 독이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셔서 마음 졸이시며 간구하실 지도 모릅니다.
그런 성령의 생각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성령께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해서 간구하시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우리 자신보다도 더 잘 아십니다. 다 헤아리시고, 다 이해하시고, 우리 아픔을, 우리 기쁨을 우리와 똑같이 느끼십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그 기도에 응답해주십니다. 나는 아직 깨닫지 못해서 기도하지 못한 것까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 치워주시고, 채워주시고, 이뤄주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내 대신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성령께서는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만 구원받고 천당가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회복되고 온전해지게 하는 일에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일하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고, 여호와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더 이상 우리가 탄식하지 않도록, 더 이상 우리 때문에 우리 이웃이, 우리 세상이 탄식하지 않도록 우리를 격려하시고 세워주시고 인도하십니다.
오늘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신 날입니다. 성령께서 나에게 찾아오셔서 내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할 때에도,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성령님은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고, 우리를 주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임하시고, 우리 교회 안에 임하십니다.
우리 교회를 위해, 교회의 아픔을 생각하며, 교회의 꿈과 소망과 시련과 좌절을 보시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교회가 혹시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교회가 혹시 위험한 일에 처하지 않도록, 교회가 혹시 누군가에게 휘둘려서 주님을 따르지 못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교회를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교회가 신나게 잘 나갈 때도, 교회가 어려움을 당해 실망했을 때에도 그러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하십니다.
그러니 소망을 가집시다. 실망하지 말고 낙심하지 맙시다. 흔들리지 말고 믿음을 굳게 지킵시다. 지금 우리는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한 걸음씩 걸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서, 참으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뭔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지금 당장 눈에 차고 손에 잡히는 뭔가가 없더라도, 인내하고 견디면서 우리가 할 일을 합시다. 지금도 성령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십니다.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그 간구가 우리를 살립니다. 그 간구가 우리를 일어서게 합니다. 그 간구가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과 함께 더 뜨겁게 간구하고, 더 뜨겁게 사랑하며, 더 열심히 주님을 위하여 일하며 삽시다. 성도들을 사랑하고 서로의 짐을 대신 져주면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지키면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우리를 통해 일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과 생각, 우리의 입술과 손발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 뜻대로만, 주님이 기뻐하실 것만 하며 삽시다.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까지, 온 창조세계가 회복되는 그 날까지 성령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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