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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성령충만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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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현대교회의 영적 문제중 하나는 “얼마나 강력한 성령충만을 경험했는가”가 아니라 성령충만의 도덕적 해이, Moral Hazard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내가 얼마나 성령이 충만하냐”고 기술적이고 경험적인 질문으로 묻지 말고, “내가 얼마나 성령충만의 윤리에 충실하냐”고 인격적이고 윤리적인 질문으로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성령충만한 경험이 목적하는 실천적인 도덕규범은 무엇입니까 성령충만은 성도에게 어떤 행동방식을 가져오기 위한 것입니까 P. W. C 제10차 세계대회 총무였던 P. S. Brewster 목사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사항이 성령충만의 윤리라고 1973년 10월호 Pentecostal지에 기고하였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Brewster 목사님께서 지적하신 성령충만의 세 가지 윤리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령충만의  첫번째 윤리는 지상의 그리스도의 몸이요 복음전도의 대표기관인 교회의 질서를 확립하고 유지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성령께서는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교회질서의 관점에서 본다면 줄과 행, 오와 열을 가지런히 하여 여럿이지만 하나인 것처럼 만드신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교회가 하나의 목적, 하나의 목표, 하나의 사상, 하나의 언어로 통일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위하여 단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바벨탑에서 흩어졌고,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흩어졌고, 예수께서 치시던 12제자가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오순절날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하나의 교회가 태동하고 그 예루살렘교회가 오늘 한국교회, 송도제일교회를 이룩하여 공동의 생명체에 연합시킴으로 공동의 목표를 향하여 공동의 신앙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구약교회, 예루살렘교회, 한국교회는 하나의 교회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교회가 하나가 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교회가 뜨겁게 단결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다양성 가운데 거룩한 질서가 생기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힘있게 세워집니다. 다시 말하면, 서로 서로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하고 복종합니다. 목사님은 주의 종이 되고, 장로님은 아론과 훌이 되며, 집사님은 스데반과 빌립이 됩니다.
교회가 성령충만하여 은혜로와져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보존되는 것입니다. 교회법은 은혜를 유지하는 울타리입니다. 율법주의와 의식이 윤리보다 승해선 안됩니다. 성령충만한 능력과 생명이 교회를 통일시키고 연합시킴으로 교회를 교회되게 합니다. 본문을 보세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일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로 부름받은 교회가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의
 두번째 윤리는 성도의 고상한 도덕생활을 이룩하는 것입니다. 롬 8:3-4에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도, 십계명도 거룩합니다만 우리의 육신으로는 도무지 지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이며,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육신의 생각은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가 됨으로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에 있는 자는 도무지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도 없고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율법의 의로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은 의문의 죽이는 것으로써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되고 말았지만 예수께서 우리 육신의 죄를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보혈로 청산하시고, 성령을 보내어 주심으로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돌판에다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영에 기록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으로 우리에게 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새 생명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능히 지킬 수 있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한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 어느 계명이 가장 크니이까”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였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된 옛 사람인 육신이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이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이 어떻게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최고한 법을 지킬 수 있습니까 안됩니다. 우리도 안되고, 옛날 이스라엘도 안되고, 바리새인도 안되고, 힘으로도 능으로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하심을 받게 됩니다(고후 5:14).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요 16:7). 성령은 예수께서 승천하심으로 오신 까닭에 영광의 영이십니다(벧전 4:14).
예수님 대신에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또 다른 보혜사이십니다(요 14:16). 우리가 성령의 사랑에 붙들림을 받으면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됩니다. 성령이 충만히 임하시면 우리가 권능을 받고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할 뿐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의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없이 율법을 지키려는 모든 자에게 우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율법의 멍에가 얼마나 무겁더냐 너의 육신으로 안된다. 율법을 행하여 의를 따라 구원받을 인생은 아무도 없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 나의 멍에는 쉽고 가벼우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을 입으면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힙니다. 이 사랑의 생명이 율법의 울타리를 넘어 금지할 법이 없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사랑의 계명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불신자의 의보다 훨씬 뛰어난 윤리생활, 도덕생활을 이룩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법을 성취하는 성령충만한 능력이 교회를 성결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의
 세번째 윤리는 복음증거를 가능케 하는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펴서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전도자가 성령충만해야 한다고 하면, 전도자는 성령충만하기를 어느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복음전도에 복종할 때 성령충만해집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성령충만의 최초의 역사가 있기 전이요, 지금은 성령충만의 계속적인 역사 속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원도 황지에 있는 예수원 원장이었던 R. A. Torray 성공회 신부는 헬라어 플레레와 플레데를 가지고 충족한 성령과 충만한 성령을 구분해서 설명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는 언제나 충족하지만 사람의 순종 여하에 따라 충분으로 끝나기도 하고 충만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내가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아도 운동하지 않고, 활동하지 않으면 그 잠재력이 발휘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충분한 잠재력을 가진 선수가 그것을 100% 활용하면 반드시 훌륭한 선수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모라비안 선교사가 존 웨슬리에게 말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믿음을 얻기 위하여 전도하시오.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으로 전도하시오” 믿음은 하나의 소유물이 아니고 하나의 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에게 항상 헬라말로 Problema, 즉 “앞에 던져져 있는 것”이요, 미래이며 임무요, 그로써 매일 매일 받아야만 하는 선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증거를 할 수 있는 충분한 은혜를 이미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복음전도에 시간과 재능과 전력을 바치지 않았음으로 충만한 자리,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열매 맺게 하는 자리에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주신 주님의 최후 최종의 명령은 “너희가 땅끝까지 이르러 천하 만민에게 다니며 복음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하여 또는 순종하는 자를 위하여 충만한 성령의 은혜는 이미 확보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에 충만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래서 담대한 권능의 사람이 되고 또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서부터, 삶의 현장에서부터 복음증거를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있는 구원하시기에 충분한 성령의 은혜는 곧장 복음을 증거하시는 충만한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오순절날 성령이 각 사람 위에 불의 혀 같은 모양으로 임하였고 사람들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충분한 성령은 복음증거를 통하여 비로소 충만한 성령으로 역사하십니다. 가득한 성령이 넘쳐 흐르는 성령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능력과 생명이 교회를 교회되게 만듭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눅 4:18). 오순절 이후 교회는 늘 성령충만을 강조해 왔고, 계속해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 아래 전진해 왔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은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말한 구속론적 표현이요, 공간적 표현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음으로 구원을 얻는가 하면, 성령에 충만함으로 주의 복음을 이땅 위에 편만하게 채울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을 받음으로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가 참으로 생동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군대로서 일사분란하게 진행할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을 받음으로 거듭난 성도가 진정한 성도로 변합니다. 거룩한 사랑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을 받음으로 비로소 이땅 위에 사는 성도가 입을 열고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생애를 바쳐 복음의 증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가장 좋은 것을 주지 않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사랑하셨기 때문에 가장 좋은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우리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시자 가장 좋은 성령님을 우리에게 부어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가장 좋은 은사요, 교회의 가장 좋은 영적 유산입니다. 성령충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교회질서와 도덕적 무장과 복음증거를 가능하게 하는 기독교 윤리의 기초와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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