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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평안을 누리는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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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회 절기상으로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50일이 지난 주일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령강림절을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성령강림주일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보혜사 성령님을 선물로 보내 주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성령님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주일이 돼서는 안됩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죄와 세상을 이기는 힘을 얻는 주일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무력감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작은 시련과 고통 앞에서 쉽게 넘어지고,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세상의 유행과 풍조에 휩쓸릴 때도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위로하며 격려하고 살아야 됨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줄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성령님의 인도와 다스림 가운데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쉽게 말씀드리면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with us). 인성을 지닌 예수님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우리와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네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육신의 몸을 입고 3차원의 삶을 사는 자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항상 동시에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와 어떤 상황, 어떤 곳에서도 동시에 함께하실 수 있도록 성령님을 보내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가르치시는 분이십니다(teach us).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이해가 되고, 감동이 되는 것은 바로 성령님이 우리를 가르쳐주시고, 깨우쳐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지식으로 많이 알아도 성령님께서 감화 감동시켜주시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helpus). 원래 ‘보혜사’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이 말은 ‘곁에서 도와주시는 분’ 이란 뜻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 다가오셔서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도와주십니다. 이 은혜가 예배에 참여하신 여러분 가운데 함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분들에게 최고로 악한 말이 뭘까요 ‘성령 받지 못하고 예수 믿어라’ 라는 말이랍니다. 성령님의 임재와 성령님의 능력을 덧입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가장 불행한 일입니다.
유명한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간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기독교인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의 것을 가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의 것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그를 업신여겨도 그는 세상을 이길 힘이 없으며, 깨끗하게 되기를 힘써도 그는 결코 깨끗해질 수 없다. 그는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불신자보다도 못한 사람이 될 것이다. ”
성령님의 능력을 받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바로 맛있는 고급정식 요리에서 애피타이저(appetizer)만 먹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메인 요리는 뒤에 나오는데 앞에서 실컷 입맛 돋우는 음식만 먹고, 이 요리는 별로라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생활이 좀 답답하고, 따분하고, 뭔가 2%가 부족하다고 느끼시면 바로 성령 충만을 사모하라는 주님의 사인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성령 충만을 받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먼저 사모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성령님은 간절히 찾고 부르짖는 자에게 역사하십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120명의 성도가 모였습니다. 그들은 한 마음으로 간절히 약속하신 성령님을 사모하며 기다립니다. 그때 하늘이 열리고, 놀라운 성령의 능력이 임합니다. 사모하며 기다리며 기도할 때 성령님은 역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바유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 주님은 지금도 사모하며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회개할 때 성령의 능력이 임합니다. 성령님은 이름 그대로 거룩한 영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죄의 쓰레기로 채워져 있고, 악취가 나면 성령님은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먼저 우리 자신의 마음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의 능력으로 죄를 날마다 씻어야 합니다.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모할 때 성령님을 부어주십니다.
진리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성령의 능력이 임합니다(행5:32).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따라서 진리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성령님의 능력은 충만하게 임합니다.
또한 우리가 뜨겁게 찬양할 때 성령님은 역사하십니다. 찬양은 기도입니다. 찬양 속에 임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전심으로 찬양할 때 성령님은 감화 감동하십니다. 우리의 가슴을 만져주시고,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치유와 회복의 은혜가 임합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 가운데도 성령님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주의 말씀을 사모하고, 진리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일 때 여러분의 질병이 떠납니다. 문제가 응답됩니다.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넘칩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선지자 가운데 많은 능력을 행한 분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특별한 자가 아닙니다. 원래부터 우리와 다른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분도 아닙니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분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약5:17).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해서 850대 1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와 대결을 벌여서 승리했습니까
그가 어떻게 3년 반이나 비가 오지 않던 땅에 비를 내리게 했습니까 엘리야는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하늘에서 주의 성령의 불이 임하기를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는 금식을 하며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또한 믿음으로 매달렸습니다. 그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의 불이 임했습니다. 가뭄으로 갈라진 땅에 비가 내렸습니다.
오늘 우리도 엘리야처럼 기도하면 성령님의 역사는 얼마든지 나타납니다. 믿습니까 성령님은 우리의 메마르고 갈급한 심령을 은혜의 단비로 채워주십니다. 우리의 삶의 곤고함과 목마름을 생수의 강물로 채워주십니다. 세상의 물은 아무리 마셔도 목마름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을 보십시오. 그녀는 남편을 다섯 번이 바꾼 여인입니다.
자신의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얼마나 몸부림친 여인입니까 그 여인이 우물가에서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 그녀의 삶이 새롭게 변화됐습니다. 그녀는 물동이를 집어 던지고 동네로 달려가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자랑합니다.
아직도 내 안에 목마름이 있고, 삶의 염려와 근심이 있습니까 지금이 바로 성령님의 능력을 사모하며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그곳에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병든 자가 치유됩니다. 문제가 해결됩니다. 마음에 평화가 임합니다. 부정적인 사람이 긍정의 사람으로 바뀝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우리 성지교회 가운데도 성령님의 역사가 지금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간증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많은 분들이 말씀을 듣다가, 기도하다가 성령님의 능력을 덧입고,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난 번 알파 성령 수양회에서도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주로 초신자와 불신자들이 참여했기에 준비과정에서부터 조심스러웠습니다. 혹시 지나치게 뜨겁게 기도하면 광신자 집단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어서 이번에는 기도를 조용히 했습니다. 도우미들에게 방언기도도 가급적 자제하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런데도 사모하는 자에게 성령님의 역사는 일어났습니다. 가슴 쪽에 연골염증으로 통증을 느끼시던 분이 계셨습니다. 기도회 마지막 부분에서 제가 게스트들만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는 가운데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더니 통증이 사라졌답니다. 할렐루야!
성령님은 살아계셔서 오늘 우리 가운데도 함께하십니다. 우리를 가르쳐주시고, 도와주십니다.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날마다 성령님의 능력을 사모하셔서 치유되고 회복되는 역사가 여러분 가운데 날마다 나타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특별히 평안의 능력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다같이 27절 말씀을 읽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 평강, 평화를 주시기 원하십니다. 히브리어로 평안을 ‘샬롬(shalom)’ 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인사가 ‘샬롬’입니다. 샬롬은 다양한 의미로 번역됩니다. 온전한 상태, 건강한 상태, 평화로운 상태, 행복한 상태 등 다양합니다.
한 마디로 샬롬은 여호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온전함의 상태를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평강의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왜 우리들은 평강을 누리지 못할까요
 첫째로,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샬롬이 온전하게 보전된 곳이 바로 에덴동산입니다. 그곳은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샬롬의 동산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는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샬롬을 깨뜨립니다.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게 됩니다. 평강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깨져버린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려고 보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치유하심으로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십니다. 결국 진정한 이 땅의 평화는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내 인생의 구주로 모시고 살 때만 가능합니다.
 둘째로,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평강의 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지나친 욕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미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면 원망과 불평이 앞섭니다. 그리고 욕심이 극대화됩니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더 가지고, 더 많이 쌓아두고, 더 많은 것을 누리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결국 평안을 빼앗습니다.
 셋째로, 삶의 목표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삶의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마음의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평강의 상대적인 개념은 ‘염려와 근심’입니다. 염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메림나조(mrimnazo)’인데 ‘마음이 나누어지다’ 라는 뜻입니다. 두 마음을 품고 있을 때 염려와 불안이 생깁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헷갈릴 때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뜻을 확실히 정하고 나면 마음에 평강이 임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마6:34)
오늘을 여호와 하나님이 지켜주셨다면 내일도 역시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을 믿으십시오.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닙니다. 미리 가불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이 주신 안식과 평강을 누리면 그것이 축복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삶 가운데 평강을 누리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나를 지으시고,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심을 믿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내 편에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붙드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좋아하는 말씀 가운데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이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여호와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
우리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바로 임마누엘,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주님의 능력의 지팡이로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모든 상황에서 위로해 주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원수의 목전에서도 상을 베풀어 주시고, 언제나 잔잔한 물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주시는 영원한 목자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부족함이 없다(I shall not be want)’ 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이 이 고백을 할 때는 모든 삶이 풍족한 샬롬의 상태가 아닙니다. 그 인생의 말년에 가장 힘들고 어려운 상황입니다.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겠다고 쿠테타를 일으킵니다. 다윗은 신발도 신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도망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어찌 이런 일이 있느냐며 원망합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다윗은 너무나 평화스럽고 목가적인 시편 23편을 썼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이 바로 영원한 목자가 되셔서 여전히 함께 하고 계심을 믿음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많은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때로는 삶의 결핍으로 인한 아픔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와 상황을 보면 우리는 평강을 잃어버립니다. 그 속에 다가오시는 평강의 주님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다윗처럼 믿음의 눈을 열어서 우리의 목자가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께서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심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분께 내 삶의 모든 아픔과 문제를 내려놓으십시오. 주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스터키입니다. 문제 해결의 근원자이십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음으로 고백할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라는 평강의 고백을 드릴 수 있습니다.
 둘째로,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순간순간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우리 가운데 불안과 염려가 찾아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는 생명줄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호흡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들이 한 순간이라도 호흡을 멈추지 않아야 살 수 있듯이 영적인 생명은 기도를 통해서 유지됩니다. 따라서 기도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스스로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산소마스크를 쓰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언제라도 산소 마스크를 벗기면 그 생명은 끝납니다. 영적인 무호흡증처럼 무서운 병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강조합니다. 아무리 많은 봉사와 섬김을 해도 기도하지 않으면 중환자실에서 산소 마스크를 쓰고 있는 영적 환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긴밀함의 대화 채널이 연결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거장들은 모두 기도로 문제를 돌파한 자들입니다. 기도할 때 여호와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주십니다.
크리소스톰은 기도의 능력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기도의 능력은 불의 세력을 정복했습니다. 사자들의 입을 다물게 했고, 무질서를 평온으로 이끌었습니다. 전쟁을 그치게 했고, 악한 귀신들을 쫓아냈습니다. 죽음의 쇠사슬을 끊어버리고 하늘의 문을 열게 했습니다. 기도는 질병을 물리치고, 멸망의 상황에서 나라를 건져내며, 태양을 머물게 했습니다. 기도는 수많은 축복의 뿌리요 근원이요 어머니입니다. " 아멘! 기도의 능력을 가진 자는 세상의 어떤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립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
염려하지 말고 먼저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 가운데 기도와 간구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평강의 복으로 채워주십니다.
주님 앞에 깨어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염려와 근심을 물리치고 하늘 아버지가 주시는 평강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셋째로,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갈대와 같습니다. 상황 따라 환경 따라 흔들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아픔도 고통도 이길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여기서 ‘도우신다’는 표현이 ‘순안티람바노마이(sun-anti-lambanomai)’입니다.
여기에서 순이란 ‘곁에 다정하게 있다’는 의미입니다. 안티는 ‘반대편’ 혹은 ‘건너편’이라는 의미로서 ‘내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람바노마이란 ‘번쩍 들어서 옮겨준다’는 뜻입니다. 즉 ‘도우신다’는 말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건너편에서, 내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내가 안고 있는 문제를 번쩍 들어서 옮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도무지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거대한 바위에 가로막혀 한걸음도 앞으로 움직일 수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그 때 어느 힘 있는 분이 나타나서 거대한 바위를 번쩍 들어서 옮겨 주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을 ‘순안티람바노마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골리앗과 같은 인적 장애물이 여러분 앞에 있습니까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처럼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혀 있습니까 내 힘으로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라도 성령님을 의지하면 넘어설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의 현장에 다가 오셔서 순안티람바노마이 해주시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이 성령님의 능력을 믿고 따라가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평강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는 성령님의 도우심과 능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극복하고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령 충만이 필요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세상의 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마귀의 궤계를 멸할 수 있습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슬픈 탄식을 새 노래로 바꿀 수 있습니다. 멸망 길로 달려가는 영혼을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황무한 이 땅에 거룩한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부흥을 이룰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성령에 사로잡힌 성령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지금 이 시간 성령님을 인정하십시오. 성령님을 의지하십시오. 성령님의 능력을 사모하십시오. 성령 충만함을 간구하십시오. 그리하여 성령의 강력한 기름 부으심을 통하여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며, 꿈을 꾸는 놀라운 역사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찾아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가르쳐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내가 낙심하여 기도하지 못할 때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울 때 함께 우시고, 우리가 고통당할 때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십니다. 우리가 웃을 때 함께 웃으시고 춤을 추십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의 모든 막힌 담을 허시고 참된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평화를 만드는 Peace-maker 삼으셔서 세상으로 파송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 강림주일을 맞이하여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성령님이 주시는 참된 위로와 평강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내가 누리고 있는 평강의 복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평강의 통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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