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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바람처럼 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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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개인적으로 목회하면서 물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원도 횡성지방에서는 그 산골짜기 깊숙한 곳이지만 교회 앞에 작은 냇가가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항상 풍성한 곳은 아니지만 장마철에는 물이 무섭다는 것을 느끼도록 세차게 물결이 몰아치기도 하고 (실제로 2001년도 7월에는 수해를 당하기도 했지만.. ) 메마를 때면 꺽지나 모래무지 등의 물고기들이 숨을 헐떡이기도 하는 그런 냇가입니다.
 그리고 이곳 목천에는 교회 앞에 용연저수지가 있어 좁은 가슴을 넓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예배를 위해 성도들을 모시러 오가는 길에 저수지를 보면서 근간이 보일 것처럼 메마른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느낀 것은 역시 저수지는 물이 넘듯 말 듯 찰랑거리는 것이 가장 보기에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저수지에는 물이 가득 차 있어야 보기에도 좋고 본래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신앙인에게도 심령에 은혜로 충만해야 보기도 좋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그래서 이 주일에 무엇보다 우리 서흥교회에 그리고 이 자리에 함께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모든 이들의 심령에 성령이 충만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어제 토요일에 아이들을 데리고 흑성산에 올랐습니다. 오르는 길이 포장이 되어 있어 자연미는 떨어졌지만 그래도 오를만한 곳이었습니다. 목회자가 토요일에 말씀 준비는 안하고 무슨 한가하게 산행이냐고 하실 분도 있겠지만 사실은 혜원이의 아토피 피부염을 치료하는데 등산이 도움이 된다는 한의사의 권면에 따른 행동입니다.
다른 요일은 아이가 학교 갔다 오면 시간이 부족하고 주일은 그렇고, 그러다보니 토요일이 제일 적당한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개인적으로도 1차로 설교 준비를 다 해놓고 보다 더 구체적으로 내용을 정리하는데 등산하면서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어렵게 산을 오르고 내려오면서 혜원이가 하는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세상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짐승이 있다는 겁니다.
혹시 아세요 저도 잘 몰라서 무어냐고 물었습니다. 아이가 대답하기를 먼저, 공작이랍니다. 이유는 교만해서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다음은 뭐냐니까 치타랍니다. 불량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싫어 한다나요 그게 그렇게 불량합니까 그러면서 여러 짐승들을 나열하는데 마지막에 의아한 한마디가 나왔습니다. 다름 아닌 사람이랍니다.
그래서 제가 아니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싫어하신다니 그게 말이나 되냐고 제가 따지듯 물었더니 아이가 하는 말이 다 이유가 있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이유는 분명 문제가 있는 거라고 확신하면서 다그쳤더니 딸 아이 입에서 말하는 이유는 사람은 속에 돈만 채우려고 하니까 였습니다.
아이들의 눈에 어른인 사람이 그렇게 비추어진 걸까요, 아니면 우리는 그렇게 돈을 채우려고 애쓰고 있는 걸까요 여러분 비록 아이의 지나가는듯한 이야기이지만 오늘 우리 사람들이 생각해보아야 할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특별히 신앙인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채우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뒤 돌아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 시간 무엇을 채우기를 소망했던지 여호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채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올 때는 각자가 다른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나아왔지만 갈 때는 한 마을을 채우고 돌아가십시다. 은혜를 채우고 돌아가십시다. 내적기쁨이 충만하기를 소망합니다. 성령이 충만하길 바랍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임했던 그 바람처럼 불처럼 강하게 역사했던 성령이 이 시간 성령강림절을 맞아 우리 교회에도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바람처럼! 불처럼!!!
물론 여러분들은 성령의 중요성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긴 알지만 그래도 아직 확신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고 경험하지 않아 실감하지 못하는 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에 오늘은 기억을 되새겨 보고, 새로운 경험을 사모하기도 하며, 이미 경험한 성도에게는 더 충만함을 얻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성령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성령의 중요성에 대하여 간단히 예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산주의를 제창한 사람이 칼 마르크스라는 것은 잘 아십니다. 그런데 그가 그 이념의 토대를 성경에서 가져왔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알지는 못합니다. 아무튼 그는 새로운 세상의 모델을 어디서 찾았느냐면 초대교회의 모습이 기록된 사도행전2장 43절 이후입니다.
함께 만들고 동등하게 나누고, 서로를 존중하며 이해하며 공산, 공생, 공분의 세상, 그래서 온 백성에게 칭송을 듣는 그런 세상을 성경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제창한 공산주의는 지금, 몰락한 이념이고, 실패한 사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이 판단에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그렇습니다.
그럼, 왜 성경에 근거한 사상이 몰락이 되어 버렸을까요 무엇이 잘못이었을까요 마르크스가 부패한 사람이라서 그런걸까요 아니면 다른 이유들이 있을까요 저는 그 이유를 신앙적으로 판단해서 말씀에 근거하기는 했지만 그 속에 말씀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즉, 초대 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을 본 받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그 모습대로 실천해 낼 수 있는 힘을 그가 간과하지 않았나 입니다.
즉, 초대교회는 단순히 계명을 지키는 차원에서 그런 삶을 산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도록 이끄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 성령의 능력을 마르크스는 간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능력을 의지하는 교회는 2천년이 지나도 이렇게 융성하고 앞으로도 부흥하겠지만 아무리 성경을 모델로 삼는다 할지라도 그 속에 성령의 역사를 의지하지 않으면 필패한다는 것이 공산주의를 통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성도도 신앙적으로 성공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좋아하시는 사람이 되려면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신앙인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교회력에 따라 성령강림은 오늘 본문 1절에서처럼 오순절날에 일어났던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오순절이란 무엇일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유월절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최고의 명절은 유월절입니다. 출애굽 당시, 죽음의 천사가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의 집은 건너뛰고, 애굽인의 집에 들어가 첫 생물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이란 노예 생활을 하던 히브리 백성들이 구원을 얻음과 동시에 해방을 얻게 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은 이 절기를 마치고 50일째 되는 날을 말합니다. 또 다른 말로 칠칠절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일주일을 일곱 번 보낸 다음날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밀농사를 지은 후 그 첫 열매를 드리는 축제날을 오순절이라고도 했습니다. 또 10이란 숫자가 5번 있다는 말로서 유월절로부터 50일이 되는 때를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구약의 유래라면 신약에서 말하는 오순절이란 예수님께서는 이 유월절 축제가 막 끝나던 때에 십자가 처형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 40일간 이 세상에 더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후 제자들이 열흘 간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중에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성령강림의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유월절로부터 50일이 되던 때입니다. 그래서 이날을 오순절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오순절을 가리켜 교회 역사의 최대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인류역사의 최대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이었다면 교회적으로는 이 성령강림(Pentecost) 사건이 됩니다.
그럼 이토록 성령강림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곁으로 가시게 되지만, 이 땅에 남겨놓고 가시는 제자들과 모든 성도들을 위해 성령의 강림을 약속하신 것이고, 나아가 성령의 강림은 예수님의 약속에 대한 응답, 성취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 성령강림이 그토록 교회 역사에 중요한 이유는 바로 성령의 임재와 능력 없이는 교회는 결코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며, 성령강림은 교회를 구성하고 인간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위대한 일을 그 성도들이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내려오신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요20:22절에서 성령을 받으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즉, 성령 충만은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선택 사항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고 본 받는 성도라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일이기에 중요한 줄 믿습니다.
그럼, 왜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나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주님이 승천하시고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 사람은 다른 것으로 채우며 살다가는 멸망의 길을 가게 되고, 혹은 공허한 상태에서 살다가는 그 날이 오기 전에 빈사상태가 되어 신랑을 온전히 맞이할 수 없게 되니까 주님께서 성령님이 되셔서 우리를 돕고(Halper), 가르쳐 주시고(Teacher), 인도해 주시고(Guider), 위로해 주시려고(Comforter)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요14:16-27)
여러분! 실망하고 계십니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계십니까 괴로운 일로 좌절하고 의심하고 자포자기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외로워하고 계십니까 성령의 도우심을, 위로를, 안내를, 지도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목말라 하며 정신이 혼미해 하는 삼손에게 엔학고레의 샘물을 터치시고 회복하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삿15:19)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저 나를 저 연못에 넣어주기만을 기다리는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걸게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성령의 역사입니다(요5:1~). 너무나 힘들고 외로워 혼자 남았다는 쓸쓸함에 광야로 들어가 죽고 싶다고 호소하는 엘리야에게 “어찌하여 네가 여기 있느냐”고 음성들 들려주시며, “일어나서 먹으라”고 원기를 회복시키시며 할 일을 알려 주시는 그래서 새 힘을 얻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심이 성령의 능력입니다(왕상19:1-18). 그리고 범죄 한 다윗이 회개하며 죄를 자복하자 상한 심령을 받으시고 정한 마음을 창조하게 하시는 것이 성령의 능력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시51:11).
또 우리가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하는 이유는 권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행1:8). 베드로와 요한 같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았기에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하고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니 고넬료의 가정이 믿게 되었고, 사울이 바울이 되었고, 스데반이 순교를 각오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하니 에베소 지역으로 전도를 나갔던 바울에게서 희한한 능력이 나왔고, 그래서 그 지역의 많은 병자와 악귀 들린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행19장에는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능력을 받고, 영적인 힘도 주어집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내가 하는 것 같지만 기도도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울리는 꽹가리가 됩니다. 깊은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지질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힘입니까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성령의 능력을 많이 받아 기도로 활 활 타오르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은혜 받았다는 것도 그것입니다.
은혜란 내적 기쁨을 말하는데 내적기쁨이란 아무리 마음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임할 때 내적기쁨이 주어지는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이 내적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은혜 받았다고 하면 가치관이 달라지는 겁니다. 사고의 기준이 달라져요.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은혜 받은 사람을 비하하여 제정신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충만해지면 믿지 않는 사람들 기준에 제정신이 아닌 사람같이 보여 지고 그렇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을 의식하는데 신기하게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그 하나하나의 평가에 예민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말은 가치가 없거나 무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신앙적 문제들도 믿지 않는 사람들의 평가나 판단에 좌우된다면 당신은 무엇으로 믿음이 있음을 증명하겠습니까
찬송가 495장을 작시한 (C,F,Bulter) 벌터라는 사람이 제정신으로 그와 같은 찬송시를 지었겠습니까 저는 제정신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성령의 정신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벌터와 같은 성령의 정신이 있으셔서 그 어디나 하늘나라에서 사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감리교 운동을 시작한 웨슬리 목사님은 88년을 사셨는데 그 중 52년을 전도자의 삶을 사셨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은퇴를 하셨어야 할 연세임에도 왕성하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그렇게 제정신이 아닌 모습으로 복음을 전한 반면에 집에서는 불만이 가득한 부인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복음을 전하고 집으로 남편이 말을 타고 들어 오는 소리를 듣고 아내가 준비한 것이 물바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은 좋아라 했는지 모르지만 부인은 대단히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집에서 쉬고 충전하기 위해 문을 열고 웨슬리가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부인은 그 얼굴에 사정없이 물을 끼얹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상상해 보건데 “나가! 꼴도 보기 싫어! 그렇게 좋은 예수하고나 살어. 이 인간아!”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얼굴에 물이 흠뻑 젖은 채로 멍하니 하늘을 보던 웨슬리 목사님이 이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복음을 전하려 나갔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를 하루도 쉬지 않게 하시는구나” 여러분 이게 제정신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올더스게이트에서 체험한 바람처럼 불처럼 임한 성령의 능력이 그를 휘감았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에 사로잡힌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보면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이란 표현은 폭풍을 연상케 합니다. 특히 "소리가 온 집에 가득했다. "는 말은 태풍이나 회오리바람을 생각게 합니다. 꼼짝없이 어떤 대응도 할 수 없이 강력한 힘이 작용한 겁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자는 꼼짝없이 바울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즉 세상의 바람에 이리 저리 나부꼈던 사람에게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면 꼼짝없이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고 변화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토록 좋아하셨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에덴동산의 처음 창조된 인간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기 서흥 교회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셨던 그 바람, 그 생령이 강하게 불어 닥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래서 회복하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시고 보기 좋으셨던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겁니다. 세상의 길로 향했던 마음과 발걸음과 흔들렸던 우리 육신을 이제 성령의 바람! 생령의 바람으로 충전하여 중심을 잡고 진리의 길로, 영생의 길로 그리고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한 길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교회에 임해야 합니다.
바람처럼!!! 성령이여 불어오소서!!!
또 하나 오늘 본문에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니까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불이 임하는 겁니다. 다 태워 버리는 겁니다. 죄도 태웁니다. 걱정과 근심과 괴로움을 태웁니다. 옛사람을 태웁니다. 교만한 자아를 태웁니다.
의심했던 마음도 태웁니다. 미워하고 시기하던 마음도 태웁니다. 모든 불신앙적인 여호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모습을 성령의 불이 태워버립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임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용광로와 같은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올라서 새 생명이 싹트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적기쁨! 은혜가, 만족함이 가득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바람처럼! 불처럼! 성령이 임하면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에덴동산에서 평화롭게 살며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었던 그 모습이 지금 초대 교회에 실현되고 있는 겁니다. 저는 상징적 비유를 쓰는 것을 즐겨 하지 않지만 여기서 말하는 방언이란 죄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사람이 그 코에 불어 넣어 주신 생령(성령)을 다시 받음으로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상태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즉, 원상회복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충만은 원상회복입니다. 에덴동산의 지기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일입니다. 에덴동산이란 어디입니까 거기가 하늘나라 아닙니까 거기는 슬픔과 눈물이 없고 한숨과 걱정이 없고 돈으로 채우려는 욕심이 없는 곳임을 저는 믿습니다. 그런 그곳에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바람처럼! 불처럼! 성령이 이곳 서흥 교회와 성도들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싫어하시는 것이 아니라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가 가득하다는 겁니다.
그럼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비록 사막이라도 거친 들이라도 거기가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다같이 천국 백성이 됩시다.
함께 갑시다 천국으로.
그러기 위해서는 임해야 합니다.
불어야 합니다.
바람처럼! 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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