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빈 집은 위험합니다
본문
고향에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명절! 얼마나 좋은 날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정말 좋은 날이라고 기뻐하면서 지내셨습니까
아니면 명절만 돌아오면 "명절증후군"이라는 것에 시달리지는 않습니까
아무리 좋은 설명절이라도 신앙인들에게는 또 다른 갈등(고민)이 있습니다. 모든 집안이 다 신앙생활을 해도 종종 의견의 불일치가 있는데, 홀로 믿는다든지 아니면 일부만 믿는 가정에서는 여러 가지로 불편한 일들이 많습니다. 교회 이야기라도 나오면 늘상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가끔씩 매스컴이나 뉴스를 통해서 이단 집단이나 사교에 빠져서 가족도 돌보지 않는 사람들이나, 또는 집을 나가 집단생활을 하며 집문서, 땅문서 모두 바쳐서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을 가끔 보도를 통해서 보았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은 하되 너무 깊이 빠지지는 말아라"는 충고를 듣기도 합니다. 이럴 때에는 교회에 나가지 말고, 예수 믿지 말라고 협박하는 것보다는 더 나은 듯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밑바탕에는 "중용"(中庸)을 도덕적 규범으로 삼는 중용사상(中庸思想)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중용(中庸)이라는 것은 중국 유교(儒敎)의 경전으로, 사서(書)의 하나,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내용은 한 마디로 "치우침이나 과부족(過不足)이 없이 떳떳하며 알맞은 상태나 정도"를 말합니다.
지나치게 열중할 필요도 없고 또 지나치게 냉담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남이 하는 만큼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이나 생각이 지닌 가장 큰 문제는 능동적이며 적극적이어야 할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설교도 결단을 강요하며 부담을 주는 설교보다 평안한 마음으로 부담 없이 앉았다가 일어설 수 있는 쪽을 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어떤 본성보다도 우리의 문화적인 영향보다도 우리는 성경의 교훈,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옳습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은 그 시작부터 중립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마음과 태도는 미지근해서는 안 된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사역의 초기 산상보훈 설교에서, 그리고 부활하신 후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 5:37)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
예수님은 우리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런 상태를 싫어합니다. "옳으면 옳다고, 아니면 아니라고" 분명해야 합니다. "차든지 덥든지" 분명해야 합니다. 성경적인 신앙은 철저한 결단과 철저한 헌신을 요구합니다. 그 때 신앙은 제 값을 합니다. 결단 없는 신앙생활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헌신 없는 신앙생활은 진정한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결코 중립적이거나 중용적인 입장에 설 수 없음을 주님은 선언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관계를 맺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의 위험을 "빈집"의 비유를 통해 경고하십니다.
본문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벙어리 귀신들렸던 사람을 예수님께서 쫓아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 귀신은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다가 얻지 못하고 다시 자기 집에 돌아와 보니 집이 깨끗하게 소제되고 수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친구들까지 집에 데려와서 거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서 이 집을 점령하니 그 사람의 나중 상태가 처음 상태보다 훨씬 심각해졌다는 내용입니다.
빈집의 비유를 통해서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신앙의 필요를 주님은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빈집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지적합니다.
이렇게 위험한 빈집, 이 빈집은 어떤 집을 말하는 것일까요
1. 강한 영적 군사로 무장되어 있지 않는 마음은 빈집과 같습니다(본문 21-22절).
"21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22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본문 21-22절)
"강한 자"라도 "더 강한 자"에게는 먹히고 마는 법입니다.
흔히 우리는 이러한 자연 현상을 "먹이사슬"이라고 합니다. 초식동물을 육식동물이, 그 육식동물을 다른 더 강한 육식동물이 잡아먹는 관계를 말합니다.
또는 약육강식(弱肉强食),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먹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는 강한 자에게는 한없이 약한 자로,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강한 자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벧전 5:8)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딤후 2:3)
신앙생활의 시작은 훈련병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강하고 풍성해도 영적인 세계는 세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처음 예수를 믿으면 나이에 상관없이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중생" 또는 "거듭남" 또는 "새사람"이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으면 세상의 유혹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아직도 세상의 것을 다 버리지 못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맙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육신에 속한 자"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라고 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예수를 믿었어도 영적으로는 어린 아이 같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강한 자입니까
마귀의 세력에도 대항하여 싸워 이길 수 있는 영적인 힘이 있습니까
말씀으로, 기도로, 성령충만으로, 은혜로 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말씀했던 영적인 군사로서의 모습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나에게 적용하여 무엇이 필요하며, 무엇이 부족한 것인지 확인해 보도록 하십시오.
"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0-13)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 6:14-18)
이제 아시겠습니까
왜 영적인 군사로서의 무장, 여호와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필요한지 아시겠습니까
나에게 필요한 전신갑주는 무엇인지 확인하셨습니까
2. 참 믿음이 없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위험한 빈집과 같습니다(본문 24절).
더러운 귀신이 나갔다가 안식처를 얻지 못해서 다시 돌아왔을 때 청소 된 집을 바라보면서 혼자 말을 합니다.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24절)
그 집을 보고 "내 집"이라 고 합니다. 귀신은 아직도 이 집을 자기 집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사람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그런데도 귀신은 내 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빈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청소만 되었지 주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새 주인이 들어 오셔야 합니다. 그 집의 주인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악한 영이 내 집이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 되게 하십시오.
새 주인이 없으면 더러운 귀신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이것은 내 집이야! 교회에는 나와 앉아 있지만 너는 아직도 내 집이야!'라고 하면서 소유권을 주장하게 됩니다.
회개했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 믿음이 없다면 위험한 빈집과 같습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의 출발점은 회개와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세례요한도 "회개하라"는 말로 첫 번째 설교를 시작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회개는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고 죄로부터 돌이키게 만드는 사건이라면, 믿음은 죄에서 돌아선 다음에 내가 새롭게 믿어야 할 분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 분과 더 불어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 분과 더불어 한 걸음 한 걸음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절대자에 대한 막연한 신뢰가 생겼습니다.
신에 대한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는 데까지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치 오늘 비유의 빈집과 같은 상태의 사람들입니다.
더러운 빈집은 청소했지만 새로운 주인을 모시지 못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일 아침이 되면 교회에 나옵니다.
어떤 날은 특별한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죄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잘못을 뉘우치고 혼자 마음 속으로 '이렇게 계속 살아서는 안 되지, 이 죄에서 떠나야 해'라고 생각도 합니다.
때로는 과거의 죄에 대한 아픔을 느끼고 눈물도 흘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집회에 참석했다가 특별한 감동을 받습니다. 마음 아파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이런 삶을 중단하고 앞으로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고 그렇게 기도하고 '아멘'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 버리면 큰일납니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마음 아파했습니다.
뉘우쳤습니다.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결심도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납니다.
예배가 끝났습니다.
사흘이 못되어 옛날 생활로 돌아갑니다.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습니다.
돼지가 씻고 나서 더러운 구덩이로 다시 돌아가 그 자리에 눕는 것과 같습니다.
단순한 뉘우침, 죄에 대해서 아파하는 마음은 있지만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모신 적이 없습니다.
그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따라 가는 삶으로 연결되지 못합니다.
예수와 더불어 새로운 삶을 출발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 상태는 일시적인 귀신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나 빈집에 불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집은 깨끗합니까
여러분의 삶은 깨끗합니까
여러분의 심령은 깨끗합니까
지금까지 잘못된 모든 것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없이는 깨끗한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하여 죄를 지으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하)
참회개와 믿음이 여러분을 깨끗하게 만들었다면 이제 그 다음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는 그 빈집에 누구를 모시고 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빈집은 절대로 안됩니다.
빈집은 절대적으로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빈집이 도적이나 강도의 표적이 되듯 주인이 없는 빈집은 절대로 안됩니다.
3. 전적인 헌신이 없이 두 주인을 섬기는 사람은 위험한 빈집과 같습니다(본문 23절).
죄에서 자신을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 없는 것은 위험한 빈집과 같습니다.
유보적인, 타협적인, 반신반의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려는 두 주인의 삶은 신앙에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무어라고 말하든지 상관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어떻게 취급하더라도 신경 쓰지 마십시오. 결단 없이는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미지근한 교인은 세상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도 없고 칭찬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전적 헌신만이 주님이 바라시는 신앙인의 수준입니다. 전적 헌신만이 여러분과 제가 하늘의 기쁨을 누리며 신앙 생활하는 길입니다.
본문 23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볼까요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본문 23절)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다른 말로 하면 '적극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적극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헤치는 자라고 했습니다.
회개하려다가 마는 자리에서 끝난 것 아닙니다.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회개한 잘못에 대해서 더 이상 여간 해서는 그 잘못을 지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그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은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지 않는 것, 그것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행동입니다. 소극적인 종교 생활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작년 1년 돌아보면서 "어이쿠! 난 특별히 적자 보지는 않았어. " 작년까지 어려울 때야 그러고 지나갈지 모르겠습니다. IMF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10년씩이나 나는 적자는 안 봤어. " 그러고 사업을 하고 있다면 그런 대리점을 그대로 두겠습니까 얼마나 흑자를 내느냐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뭘 안 했느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무엇을 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보통 신앙 생활할 때 그럴 때가 있어요.
바리새인의 경우를 살펴볼까요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
나는 저 세리처럼 간음하지도 않았습니다. 도적질도 안 했습니다. 저 죄인들과 같은 삶은 내게는 없었습니다. 이렇게만 스스로 만족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금식도 하고 십일조도 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신앙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보다 훨씬더 깨끗하고 열성적인 신앙생활 아닙니까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을 향하여 의롭다고 했습니까 아뇨,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교회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살인하지도 간음하지도 도적질하지도 않았을지 모릅니다.
아니 그보다 더 적극적인 삶을 사셨을 수 있습니다.
일주일에 적어도 두 번은 교회에 출석하고 소득의 십일조도 정확하게 나는 여호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혹시 그래서 생각하는 분 있습니까
그게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전부입니까
그것은 신앙생활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해야할 의무입니다.
그것이 나의 신앙을 내세우는 하나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안 했다는 것만으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여러분이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사역하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언제나 큰 잘못 범하지 않는 것만 가지고 만족하는 상태에서 이제는 조금 더 나아가서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안 했다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조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보고를 받을 때마다 안타까울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하려고 갈망해 왔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쏟아 주신 사랑에 보답하려고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회 성도 여러분!
삶의 변화가 없이는 그저 눈에 보이는 곳을 청소만 해 놓는 격에 지나지 않습니다.
혹시 교회에 발을 디딘 후부터 두 갑 피우던 담배를 한 갑으로 줄였습니까
아니면, 왠만해서는 화를 내거나 더러운 욕설을 입에 담지 아니하려고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죄를 안 지으려고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열매가 풍성해야만 합니다.
벌레 먹은 열매가 더 이상 달려 있지 않았다고 좋은 과목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무가 좋은 나무라는 것이 입증되기 위해서는 좋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릴 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한테는 나쁜 열매가 하나도 안보여요. 그렇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4. 적극적으로 주님의 지배를 받지 못한 마음은 위험한 빈집과 같습니다(본문 25,26절).
요즈음 시골에 가면 빈집이 많습니다. 주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에 주인이 살고 있지 않기에 비어 있는 것입니다. 주인이 집을 자주 돌아보지도 못하고 보살피지 않으면 비록 주인이 있어도 빈집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집들은 주인이 다 있는 집들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살지 않기에 빈집과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교인들이 의외로 상당히 많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구주라고 고백하며 한때 주님을 영접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그 삶을 주장하는 주인 노릇을 하도록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들어오시기는 했는데 마음의 왕좌에는 아직도 누가 앉아 있습니까
내가 앉아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주인이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누가 주인이 되어 있어요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모든 일에 대한 결정도 자기 맘대로,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으로, 집안의 큰 일을 결정할 때도 자기의 형편과 유익만을 위해서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언제 그 문제를 놓고 여호와 하나님과 기도했습니까
언제 그 문제를 놓고 성경적인 해답을 고민해 보았습니까
언제 그 결정을 놓고 신앙적인 갈등을 경험해 보았습니까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 맘대로 결정하고 살아왔으면서 여호와 하나님은 내 인생의 주인이요, 예수님은 나의 삶의 주인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그저 주님이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의 왕좌에 앉아 있는 내가 결정해 놓은 일을 뒤치다꺼리 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대우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마치 알라딘의 요술 램프에 나오는 시종 같습니다. 램프를 비벼 대면 나와서 "예. 주인님! 뭘 도와 드릴까요"라고 말하는 시종 말입니다.
때로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각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방망이를 두드리며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혹시 여러분들의 신앙에는 이런 신앙의 모습은 없습니까 모든 중요 결정은 여러분들이 다 하시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 결정 뒷바라지 해주는 것 밖에 없다고 하면 여러분은 아직도 예수님을 여러분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말씀이 주인으로 모신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결코 아무도 다스리지 않는 비무장지대처럼 비워져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거룩한 영으로 충만함을 받지 못하면 별수 없이 이 집은 다시 더러운 귀신들의 처소로 전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25절과 26절을 자세히 묵상해 보십시오,
"25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26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본문 25-26절)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와서 거하니 나중 형편이 더 심하게 망가졌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없는 집에 마귀가 주인 노릇하게되면 더 형편이 안좋아진다는 말씀입니다.
귀신의 지배 아래 사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늘 무당 데려다가 굿이나 하고 점이나 보는 이들을 보십시오.
아무것도 못합니다.
이사도 맘대로 못합니다.
자식들 대학도 제대로 못 보냅니다.
장가, 시집도 맘대로 보내지 못합니다.
모두가 마귀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비참한 상태로 빠져들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 상태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은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나의 주인 노릇을 하고 계십니까
주님의 주권을 마음으로 인정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이 나의 삶을 지배하도록 나를 맡기고 있습니까
그분의 거룩한 영으로 내 마음과 내 생각을 지배하도록 허용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배하시기에 감히 더러운 귀신이 넘볼 수 없는 영역이 되었습니까
4.결론 및 적용 : 빈집은 위험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심각한 영적 도전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철저하게 돌아오지 않고서 약간의 변화에 만족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스러운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교회에 나옴으로 약간의 변화가 주어지죠.
주일에는 전에 없이 일찍 일어나서 머리도 빗고 깨끗한 옷을 갈아입고 일주일에 한번씩 교회에도 나옵니다.
목장모임도 참석하고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론 기도회도 참석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할 수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으나 아직 성령께서 들어가서 다스리지 아니하는 마음 상태는 폭풍전야와 같습니다.
겉모습 가지고는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독일에 옛 성당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너희는 나를 주여 주여 불렀지만 한번도 나를 주인 대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날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리라"
사랑하는 교회 성도여러분!
빈집은 위험합니다.
세상적인 것이 가득한 집은 더 위험합니다.
더더욱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집은 정말로 위험합니다.
여러분의 집은 빈집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집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그런 집이 되어야 합니다.
회개하고 참 믿음을 가지십시오.
옛 삶을 청산하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새 삶으로 나아가십시오.
죄 짓기를 그치는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무엇보다도 주님과의 관계를 맺었다는 것에 머물러 있지 마십시오,
그 주님의 기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이제 나의 주님이라고 불렀으면 주님께서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하시도록 맡기십시오.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이제 주님으로 섬기는 자리에 나아가야만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새 삶을 살기 위해 소제되고 수리된 정도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새로운 주인을 모시고 철저하게 새 주인의 지배를 받을 때에 여러분이 변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새 삶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여러분의 변화된 삶을 통하여 큰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분의 남은 인생의 집에 여호와 하나님으로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갈 때마나 여러분의 모든 삶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좋은 날이라고 기뻐하면서 지내셨습니까
아니면 명절만 돌아오면 "명절증후군"이라는 것에 시달리지는 않습니까
아무리 좋은 설명절이라도 신앙인들에게는 또 다른 갈등(고민)이 있습니다. 모든 집안이 다 신앙생활을 해도 종종 의견의 불일치가 있는데, 홀로 믿는다든지 아니면 일부만 믿는 가정에서는 여러 가지로 불편한 일들이 많습니다. 교회 이야기라도 나오면 늘상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가끔씩 매스컴이나 뉴스를 통해서 이단 집단이나 사교에 빠져서 가족도 돌보지 않는 사람들이나, 또는 집을 나가 집단생활을 하며 집문서, 땅문서 모두 바쳐서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을 가끔 보도를 통해서 보았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은 하되 너무 깊이 빠지지는 말아라"는 충고를 듣기도 합니다. 이럴 때에는 교회에 나가지 말고, 예수 믿지 말라고 협박하는 것보다는 더 나은 듯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밑바탕에는 "중용"(中庸)을 도덕적 규범으로 삼는 중용사상(中庸思想)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중용(中庸)이라는 것은 중국 유교(儒敎)의 경전으로, 사서(書)의 하나,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내용은 한 마디로 "치우침이나 과부족(過不足)이 없이 떳떳하며 알맞은 상태나 정도"를 말합니다.
지나치게 열중할 필요도 없고 또 지나치게 냉담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남이 하는 만큼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이나 생각이 지닌 가장 큰 문제는 능동적이며 적극적이어야 할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설교도 결단을 강요하며 부담을 주는 설교보다 평안한 마음으로 부담 없이 앉았다가 일어설 수 있는 쪽을 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어떤 본성보다도 우리의 문화적인 영향보다도 우리는 성경의 교훈,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옳습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은 그 시작부터 중립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마음과 태도는 미지근해서는 안 된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사역의 초기 산상보훈 설교에서, 그리고 부활하신 후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 5:37)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
예수님은 우리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런 상태를 싫어합니다. "옳으면 옳다고, 아니면 아니라고" 분명해야 합니다. "차든지 덥든지" 분명해야 합니다. 성경적인 신앙은 철저한 결단과 철저한 헌신을 요구합니다. 그 때 신앙은 제 값을 합니다. 결단 없는 신앙생활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헌신 없는 신앙생활은 진정한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결코 중립적이거나 중용적인 입장에 설 수 없음을 주님은 선언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관계를 맺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의 위험을 "빈집"의 비유를 통해 경고하십니다.
본문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벙어리 귀신들렸던 사람을 예수님께서 쫓아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 귀신은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다가 얻지 못하고 다시 자기 집에 돌아와 보니 집이 깨끗하게 소제되고 수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친구들까지 집에 데려와서 거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서 이 집을 점령하니 그 사람의 나중 상태가 처음 상태보다 훨씬 심각해졌다는 내용입니다.
빈집의 비유를 통해서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신앙의 필요를 주님은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빈집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지적합니다.
이렇게 위험한 빈집, 이 빈집은 어떤 집을 말하는 것일까요
1. 강한 영적 군사로 무장되어 있지 않는 마음은 빈집과 같습니다(본문 21-22절).
"21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22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본문 21-22절)
"강한 자"라도 "더 강한 자"에게는 먹히고 마는 법입니다.
흔히 우리는 이러한 자연 현상을 "먹이사슬"이라고 합니다. 초식동물을 육식동물이, 그 육식동물을 다른 더 강한 육식동물이 잡아먹는 관계를 말합니다.
또는 약육강식(弱肉强食),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먹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는 강한 자에게는 한없이 약한 자로,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강한 자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벧전 5:8)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딤후 2:3)
신앙생활의 시작은 훈련병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강하고 풍성해도 영적인 세계는 세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처음 예수를 믿으면 나이에 상관없이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중생" 또는 "거듭남" 또는 "새사람"이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으면 세상의 유혹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아직도 세상의 것을 다 버리지 못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맙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육신에 속한 자"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라고 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예수를 믿었어도 영적으로는 어린 아이 같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강한 자입니까
마귀의 세력에도 대항하여 싸워 이길 수 있는 영적인 힘이 있습니까
말씀으로, 기도로, 성령충만으로, 은혜로 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말씀했던 영적인 군사로서의 모습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나에게 적용하여 무엇이 필요하며, 무엇이 부족한 것인지 확인해 보도록 하십시오.
"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0-13)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 6:14-18)
이제 아시겠습니까
왜 영적인 군사로서의 무장, 여호와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필요한지 아시겠습니까
나에게 필요한 전신갑주는 무엇인지 확인하셨습니까
2. 참 믿음이 없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위험한 빈집과 같습니다(본문 24절).
더러운 귀신이 나갔다가 안식처를 얻지 못해서 다시 돌아왔을 때 청소 된 집을 바라보면서 혼자 말을 합니다.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24절)
그 집을 보고 "내 집"이라 고 합니다. 귀신은 아직도 이 집을 자기 집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사람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그런데도 귀신은 내 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빈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청소만 되었지 주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새 주인이 들어 오셔야 합니다. 그 집의 주인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악한 영이 내 집이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 되게 하십시오.
새 주인이 없으면 더러운 귀신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이것은 내 집이야! 교회에는 나와 앉아 있지만 너는 아직도 내 집이야!'라고 하면서 소유권을 주장하게 됩니다.
회개했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 믿음이 없다면 위험한 빈집과 같습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의 출발점은 회개와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세례요한도 "회개하라"는 말로 첫 번째 설교를 시작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회개는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고 죄로부터 돌이키게 만드는 사건이라면, 믿음은 죄에서 돌아선 다음에 내가 새롭게 믿어야 할 분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 분과 더 불어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 분과 더불어 한 걸음 한 걸음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절대자에 대한 막연한 신뢰가 생겼습니다.
신에 대한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는 데까지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치 오늘 비유의 빈집과 같은 상태의 사람들입니다.
더러운 빈집은 청소했지만 새로운 주인을 모시지 못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일 아침이 되면 교회에 나옵니다.
어떤 날은 특별한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죄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잘못을 뉘우치고 혼자 마음 속으로 '이렇게 계속 살아서는 안 되지, 이 죄에서 떠나야 해'라고 생각도 합니다.
때로는 과거의 죄에 대한 아픔을 느끼고 눈물도 흘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집회에 참석했다가 특별한 감동을 받습니다. 마음 아파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이런 삶을 중단하고 앞으로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고 그렇게 기도하고 '아멘'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 버리면 큰일납니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마음 아파했습니다.
뉘우쳤습니다.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결심도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납니다.
예배가 끝났습니다.
사흘이 못되어 옛날 생활로 돌아갑니다.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습니다.
돼지가 씻고 나서 더러운 구덩이로 다시 돌아가 그 자리에 눕는 것과 같습니다.
단순한 뉘우침, 죄에 대해서 아파하는 마음은 있지만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모신 적이 없습니다.
그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따라 가는 삶으로 연결되지 못합니다.
예수와 더불어 새로운 삶을 출발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 상태는 일시적인 귀신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나 빈집에 불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집은 깨끗합니까
여러분의 삶은 깨끗합니까
여러분의 심령은 깨끗합니까
지금까지 잘못된 모든 것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없이는 깨끗한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하여 죄를 지으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하)
참회개와 믿음이 여러분을 깨끗하게 만들었다면 이제 그 다음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는 그 빈집에 누구를 모시고 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빈집은 절대로 안됩니다.
빈집은 절대적으로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빈집이 도적이나 강도의 표적이 되듯 주인이 없는 빈집은 절대로 안됩니다.
3. 전적인 헌신이 없이 두 주인을 섬기는 사람은 위험한 빈집과 같습니다(본문 23절).
죄에서 자신을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 없는 것은 위험한 빈집과 같습니다.
유보적인, 타협적인, 반신반의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려는 두 주인의 삶은 신앙에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무어라고 말하든지 상관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어떻게 취급하더라도 신경 쓰지 마십시오. 결단 없이는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미지근한 교인은 세상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도 없고 칭찬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전적 헌신만이 주님이 바라시는 신앙인의 수준입니다. 전적 헌신만이 여러분과 제가 하늘의 기쁨을 누리며 신앙 생활하는 길입니다.
본문 23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볼까요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본문 23절)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다른 말로 하면 '적극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적극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헤치는 자라고 했습니다.
회개하려다가 마는 자리에서 끝난 것 아닙니다.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회개한 잘못에 대해서 더 이상 여간 해서는 그 잘못을 지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그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은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지 않는 것, 그것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행동입니다. 소극적인 종교 생활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작년 1년 돌아보면서 "어이쿠! 난 특별히 적자 보지는 않았어. " 작년까지 어려울 때야 그러고 지나갈지 모르겠습니다. IMF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10년씩이나 나는 적자는 안 봤어. " 그러고 사업을 하고 있다면 그런 대리점을 그대로 두겠습니까 얼마나 흑자를 내느냐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뭘 안 했느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무엇을 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보통 신앙 생활할 때 그럴 때가 있어요.
바리새인의 경우를 살펴볼까요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
나는 저 세리처럼 간음하지도 않았습니다. 도적질도 안 했습니다. 저 죄인들과 같은 삶은 내게는 없었습니다. 이렇게만 스스로 만족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금식도 하고 십일조도 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신앙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보다 훨씬더 깨끗하고 열성적인 신앙생활 아닙니까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을 향하여 의롭다고 했습니까 아뇨,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교회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살인하지도 간음하지도 도적질하지도 않았을지 모릅니다.
아니 그보다 더 적극적인 삶을 사셨을 수 있습니다.
일주일에 적어도 두 번은 교회에 출석하고 소득의 십일조도 정확하게 나는 여호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혹시 그래서 생각하는 분 있습니까
그게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전부입니까
그것은 신앙생활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해야할 의무입니다.
그것이 나의 신앙을 내세우는 하나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안 했다는 것만으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여러분이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사역하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언제나 큰 잘못 범하지 않는 것만 가지고 만족하는 상태에서 이제는 조금 더 나아가서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안 했다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조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보고를 받을 때마다 안타까울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하려고 갈망해 왔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쏟아 주신 사랑에 보답하려고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회 성도 여러분!
삶의 변화가 없이는 그저 눈에 보이는 곳을 청소만 해 놓는 격에 지나지 않습니다.
혹시 교회에 발을 디딘 후부터 두 갑 피우던 담배를 한 갑으로 줄였습니까
아니면, 왠만해서는 화를 내거나 더러운 욕설을 입에 담지 아니하려고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죄를 안 지으려고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열매가 풍성해야만 합니다.
벌레 먹은 열매가 더 이상 달려 있지 않았다고 좋은 과목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무가 좋은 나무라는 것이 입증되기 위해서는 좋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릴 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한테는 나쁜 열매가 하나도 안보여요. 그렇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4. 적극적으로 주님의 지배를 받지 못한 마음은 위험한 빈집과 같습니다(본문 25,26절).
요즈음 시골에 가면 빈집이 많습니다. 주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에 주인이 살고 있지 않기에 비어 있는 것입니다. 주인이 집을 자주 돌아보지도 못하고 보살피지 않으면 비록 주인이 있어도 빈집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집들은 주인이 다 있는 집들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살지 않기에 빈집과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교인들이 의외로 상당히 많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구주라고 고백하며 한때 주님을 영접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그 삶을 주장하는 주인 노릇을 하도록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들어오시기는 했는데 마음의 왕좌에는 아직도 누가 앉아 있습니까
내가 앉아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주인이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누가 주인이 되어 있어요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모든 일에 대한 결정도 자기 맘대로,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으로, 집안의 큰 일을 결정할 때도 자기의 형편과 유익만을 위해서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언제 그 문제를 놓고 여호와 하나님과 기도했습니까
언제 그 문제를 놓고 성경적인 해답을 고민해 보았습니까
언제 그 결정을 놓고 신앙적인 갈등을 경험해 보았습니까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 맘대로 결정하고 살아왔으면서 여호와 하나님은 내 인생의 주인이요, 예수님은 나의 삶의 주인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그저 주님이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의 왕좌에 앉아 있는 내가 결정해 놓은 일을 뒤치다꺼리 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대우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마치 알라딘의 요술 램프에 나오는 시종 같습니다. 램프를 비벼 대면 나와서 "예. 주인님! 뭘 도와 드릴까요"라고 말하는 시종 말입니다.
때로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각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방망이를 두드리며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혹시 여러분들의 신앙에는 이런 신앙의 모습은 없습니까 모든 중요 결정은 여러분들이 다 하시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 결정 뒷바라지 해주는 것 밖에 없다고 하면 여러분은 아직도 예수님을 여러분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말씀이 주인으로 모신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결코 아무도 다스리지 않는 비무장지대처럼 비워져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거룩한 영으로 충만함을 받지 못하면 별수 없이 이 집은 다시 더러운 귀신들의 처소로 전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25절과 26절을 자세히 묵상해 보십시오,
"25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26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본문 25-26절)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와서 거하니 나중 형편이 더 심하게 망가졌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없는 집에 마귀가 주인 노릇하게되면 더 형편이 안좋아진다는 말씀입니다.
귀신의 지배 아래 사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늘 무당 데려다가 굿이나 하고 점이나 보는 이들을 보십시오.
아무것도 못합니다.
이사도 맘대로 못합니다.
자식들 대학도 제대로 못 보냅니다.
장가, 시집도 맘대로 보내지 못합니다.
모두가 마귀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비참한 상태로 빠져들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 상태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은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나의 주인 노릇을 하고 계십니까
주님의 주권을 마음으로 인정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이 나의 삶을 지배하도록 나를 맡기고 있습니까
그분의 거룩한 영으로 내 마음과 내 생각을 지배하도록 허용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배하시기에 감히 더러운 귀신이 넘볼 수 없는 영역이 되었습니까
4.결론 및 적용 : 빈집은 위험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심각한 영적 도전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철저하게 돌아오지 않고서 약간의 변화에 만족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스러운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교회에 나옴으로 약간의 변화가 주어지죠.
주일에는 전에 없이 일찍 일어나서 머리도 빗고 깨끗한 옷을 갈아입고 일주일에 한번씩 교회에도 나옵니다.
목장모임도 참석하고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론 기도회도 참석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할 수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으나 아직 성령께서 들어가서 다스리지 아니하는 마음 상태는 폭풍전야와 같습니다.
겉모습 가지고는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독일에 옛 성당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너희는 나를 주여 주여 불렀지만 한번도 나를 주인 대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날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리라"
사랑하는 교회 성도여러분!
빈집은 위험합니다.
세상적인 것이 가득한 집은 더 위험합니다.
더더욱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집은 정말로 위험합니다.
여러분의 집은 빈집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집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그런 집이 되어야 합니다.
회개하고 참 믿음을 가지십시오.
옛 삶을 청산하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새 삶으로 나아가십시오.
죄 짓기를 그치는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무엇보다도 주님과의 관계를 맺었다는 것에 머물러 있지 마십시오,
그 주님의 기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이제 나의 주님이라고 불렀으면 주님께서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하시도록 맡기십시오.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이제 주님으로 섬기는 자리에 나아가야만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새 삶을 살기 위해 소제되고 수리된 정도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새로운 주인을 모시고 철저하게 새 주인의 지배를 받을 때에 여러분이 변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새 삶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여러분의 변화된 삶을 통하여 큰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분의 남은 인생의 집에 여호와 하나님으로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갈 때마나 여러분의 모든 삶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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