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주는 자가 받는 복
본문
내일부터 설날 연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제부터 문을 닫는 업체가 많아서 설날 연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번 기간동안 3천만 이상의 인구가 이동할 것이라고 하니 과연 추석과 설날은 민족 최대의 명절입니다. 예부터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보면 설날 3일 동안은 길거리에 많은 남녀들이 떠들썩하게 왕래하는데, 울긋불긋한 옷차림이 빛나며,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새해에 안녕하시오'고 하거나 '올해는 꼭 과거에 급제하시오’'생남 하시오' '돈을 많이 버시오' 등 덕담(德談)을 합니다.
설날에 내려오는 풍습으로는 남녀가 1년 간 빗질할 때 빠진 머리카락을 모아 빗 상자 속에 넣었다가 설날, 황혼을 기다려 문 밖에서 태움으로써 나쁜 병을 물리친다고 합니다. 그리고 속담에 나오는 야광(夜光)이라는 귀신은 설날 밤, 인가에 내려와 아이들의 신을 두루 신어보고 발에 맞으면 곧 신고 가버리는 데, 그 신의 주인은 불길하다 하여 아이들은 이 귀신을 두려워하여 모두 신을 감추고 불을 끄고 잤다고 합니다.
또한 체를 마루 벽이나 뜰에 걸어 두는 풍습이 있는데 그것은 야광신이 와서 이 체의 구멍을 세느라고 아이들의 신을 훔칠 생각을 잊고 있다가 닭이 울면 도망간다고 믿기도 했습니다. 이 날 사당에 지내는 제사를 지내는 데 그것을 차례(茶禮)라 하며, 아이들은 고운 한복을 입고 어른들을 찾아다니면서 세배를 하기도 합니다. 설날의 놀이로서는 남녀가 방안에서 다 같이 윷놀이를 하고, 젊은 부녀자들은 널뛰기, 남자들은 연날리기를 합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러한 고유 풍습은 다 사라지고 있습니다. 어느 때는 열 몇 시간을 차로 달려서 도착한 다음에 제사나 성묘를 하고 부모님에게 세배를 한 후에 무엇이 급한지 그 날로 돌아와 스키장을 가거나 관광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날을 맞으면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부모님들과 형제, 친척 분들에게 사랑을 통해서 전도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아무리 부모님들에 최고의 선물과 음식을 드리고 돌아가신 후에 몇 십 만원 들여서 제사를 지낸다 할지라도 구원받지 못하시고 지옥에 가시게 했다면 기독교인으로서는 최대의 불효나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지난 주일 말씀드린 대로 여러분이 진정 부모님과 자녀들, 형제들을 사랑한다면 울면서 호소해서라도 그들이 구원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영혼구원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느 여자 집사님은 말하기를 자기 남편은 다른 말은 다 들어주는 데, 교회 나오자는 말에는 성질을 부리며 반대하니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전도는 영적인 싸움으로 사탄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력을 다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남편이나 자녀들, 부모님들을 전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내가 변화된 삶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월간목회지(誌) 2월호에는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일류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게된 어느 청년이 "나는 꼭 세계를 변화시키는 큰일을 해낼 거야. "라고 말하면서 패기만만하게 대학 문을 나섰습니다. 10년 후, 그는 "세계는 변화시키지 못했지만. 이 나라는 꼭 변화시키고 말 것이야. "라고 했습니다. 또 10년 후, 그는 다시 "아니, 나라는 변화시키지 못했지만 내 회사만은 변화시키고 말 거야. "라고 했습니다.
다시 10년 후, 회사도 변화시키지 못한 그는 "이제는 내 가정만이라도 변화시켜야지. "라고 했지만 그로부터 10년 후 중병에 걸리어 가족들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외로이 병석에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대학 친구가 찾아와 그 친구의 비참한 임종을 지켜보면서 "안타깝게도 자네는 인생을 거꾸로 생각하며 살아온 것 같네. 이제라도 먼저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을 해보게. "라고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변하지 않고는 가정도 직장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안에서 변화 받은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식구들을 전도하면 속으로 "당신을 보면 더 이상 믿고 싶은 마음이 없소. 열심히 교회 다니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 같으나 성질 부릴 것 다 부리고 욕심은 여전하니 교회 나가서 달라진 것이 무엇이 있소 그렇게 나이롱 집사로 다닐 바에는 차라리 교회를 그만 뒤요.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변화된 모습을 보이면 남편이나 자녀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기에 아내를, 우리 어머니를 저렇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라면서 감동을 받기 시작할 것이요, 식구들이 강하게 영향을 받게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 구원의 관건은 자기 자신부터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주안에서 변화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배우고자 합니다. 내 모습 이대로를 받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탕자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물려받은 다음에, 아버지의 간섭이 미치지 않는 먼 나라로 갔습니다. 그리고 곧 파산을 당했습니다. 외지에 나가서 사업이랍시고 벌리다가 사기를 당했는지, 아니면 물정을 모르고 돈을 함부로 쓰다가 보니 그렇게 되었는지, 혹은 나쁜 친구나 여자들의 꾀임에 빠져서 허랑방탕하게 낭비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지 몰라도 모든 재산을 다 날리고 파산 당하는 날을 만났습니다.
지금까지 부자 아버지 밑에서 풍족하게 살았고,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 부족함이 없었던 그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먹을 것이 없는 신세가 되었으니 너무나 기가 막힙니다. 그 때부터 탕자는 인생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무일푼 신세가 되고 나니 그렇게 가깝던 친구들도 슬슬 피하기 시작합니다. 한 때는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아양을 부리던 여인들도 자기의 주머니에 돈이 떨어진 것을 안 뒤부터는 다른 사내들을 시켜 문전박대합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인심들이 더 고약합니다.
그 때부터 그는 아버지의 진정한 사랑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행패를 부리며 유산을 강제로 뺐다시피 함에도 끝까지 자기를 타이르며 달래던 아버지, 떠나던 날도 동구 밖까지 눈물을 글썽이며 배웅하던 아버지, 그리고 인편에 들으니 천하 불효자식인 자기가 떠나는 날부터 자주 동구밖에 나와서 자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아버지, 그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성공한 모습으로 돌아가겠다. "고 큰소리 치며 떠났는데, 자존심이 있지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어떻게 돌아갑니까
그러면 그 잘난 체 하는 형이나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비난하겠습니까 죽으면 죽었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여기 저기 다니면서 얻어먹을지언정, 그리고 굶지나 말자는 심산으로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돼지를 치는 신세가 되었을지언정, 절대로 고향에 안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굶은 데야 무슨 장수가 있습니까 어느 날 너무 배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으려고 하지만 그것마저도 주는 자가 없으니 너무나 배고 고팠습니다.
그는 목이 메어서 외치기를 17절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일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 탕자는 아버지의 사랑이 견딜 수 없도록 그리웠습니다. 마침내 그는 결심하기를 "내가 이렇게 객지에서 굶어 죽어 들개의 밥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아버지에게 문전박대를 당하고 종들에 의해서 매를 맞고 죽는 것이 나을 것이다. 만의 하나 품군의 하나라도 써주신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랴"라고 하면서 아버지 집을 향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가까스로 자기 고향 동네에 가까이 왔을 때 어느 노인이 달려오는 것이 보입니다. 아버지였습니다. 처음에는 몽둥이로 쫓아낼 것 같아 너무나 겁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달려온 아버지는, 완전히 거지가 되어 남루하기 짝이 없는 자기의 목을 끌어안고 웁니다. 아버지를 향해 함부로 말하던 자기의 입에 입을 맞춥니다. 추한 모습 이대로 받아주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는 울면서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내가 아들을 잃었다가 다시 찾았는데 무슨 소리냐"라면서 하인들에게 명하기를 온갖 죄를 짓고 돌아온 몸뚱이에 제일 좋은 옷을 입히라 합니다. 음란과 투전과 주먹질 등 온갖 더러운 죄만 짓던 손에 가락지를 끼우라 합니다. 죄를 짓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던 발에 신을 신기라 합니다.
그 다음 어떻게 했습니까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가 잔치를 벌렸습니다. 아버지가 온 동네 사람들에게 요청해서 "저 놈을 매를 때려서 동구 밖으로 내어 쫓아달라. "고 요청만 해도 온 동네 사람들이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도 앞장서서 그렇게 할 정도인데, 오히려 제일 좋은 송아지를 잡아서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가 잔치를 벌리면서 탕자를 다시 아들로 인정하여 주었던 것입니다. 탕자가 그 사랑 앞에 완전히 녹아지고 변화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아마, 일생동안 그 사랑, 그 은혜를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시카고에 허름한 차림의 소년이 주일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거지같은 부랑아'라고 놀렸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파라라고 하는 주일학교 교사는 이 소년을 껴안고 사랑으로 격려하며 환영해 주었습니다. 이 떠돌이 소년이 후에 수십만 명을 전호난 드와이트 무디였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바로 그런 탕자가 아니었습니까
우리 스스로 살펴보면 죄를 짓지 아니한 곳이 없을 정도로 온 몸이 죄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의 머리와 마음은 미움, 시기, 질투, 혈기, 욕심으로 가득 차 있고, 우리의 입과 손과 발은 죄성이 요구한 대로 죄를 지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처단한다면 우리 중에 단 한 사람도 구원 받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 주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가락지를 끼워주시고 능력의 신을 신겨주사 좁은 길을 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으며 모든 천사들 앞에서 잔치를 벌려주셨던 것입니다.
내 추한 모습 이대로 받아주심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변화는 십자가 사랑 안에서 깨닫고 녹아질 때 우리의 영이 부활되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이, 한번은 특강 때문에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님을 뵙게되었는데 거기에서 그 교회에 출석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군을 만났습니다. 그 당시에 박지만 군이 방탕의 길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소망교회 나온 지가 일년 반이 되었대요. 일년 반이 얼마나 놀라운지요, 사람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렇게도 자기의 힘으로도 안되고, 많은 사람들이 애써도 안 되고, 감옥에 3번이나 가도 안되고, 박태준 회장이 그렇게 애써도 안되고, 누나들이 힘써도 안되고, 이성으로도, 노력으로도. 때려도 안되었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변호사에 이끌려 교회에 나왔습니다. 교회로 오면서 서서히 사람이 소생하는 거예요. 거름더미에 장미꽃이 피어나듯이 그 마음에 안정을 얻고, 힘을 얻고, 소생함을 얻은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만이 사람들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큰아들이 변화 받지 못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데 있습니다. 큰아들은 어릴 때부터 아주 모범생이었습니다. 항상 부모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써 왔고, 항상 바르게 살려고 애쓰면서 악한 데 절대로 빠지지 않았으므로 별로 회개할 것이 없는 삶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얼마나 본받을 만한 삶입니까 문제는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과 다른 사람의 결점이나 잘못에 대해서 용납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아버지에 대해서 오해를 하기를 자기가 착하고 모범적인 아들이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한다고 생각한 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의 사랑을 율법적이며 타산적인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탕자의 사건을 만나면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둘째가 아버지의 유산을 뺏다시피 해서 떠난 후에 자기에게 '큰 얘야, 그 동안 둘째 때문에 너무나 속이 상했지만 이렇게 훌쩍 떠나고 나니 오히려 잘 되었다. 이제는 그 놈은 내 자식이 아니다. 호적에서 아예 파버리겠다. 이제는 오직 너만 의지하고 살겠다. "라고 말했어야 옳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너무나 한심합니다. 둘째가 떠난 후에 거의 모든 일을 미루어두고 쩍하면 동구 밖에 나가서 둘째만 기다리고 있으니 너무 화가 납니다. 그런데다가 어느 날 밭에서 땀흘려 일하다가 돌아와 보니 둘째가 돌아왔다고 상이 쩍 벌어지게 음식을 차려 놓고 잔치를 벌리고 있습니다. 너무나 화가 나서 자기를 달래려고 왔던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한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라면서 마구 공박했습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아버지가 아무리 달래도 집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마, '앞으로 온 집안을 망신시키고 내 체면을 여지없이 꾸겨버린 저런 나쁜 놈과 한 집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독립해서 나가 사는 것이 났겠다"는 생각이 불일 듯 일어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바리새인들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탕자는 이방인과 세리와 죄인들을 가리키는 것이요, 큰아들은 바로 가장 율법적으로 산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기들만이 가장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요, 상급과 칭찬을 받을 사람들은 자기들뿐이라는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라면 어느 누구보다도 자기들과만 관계하면서 자기들을 통해서 사역을 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셔서 무식한 어부들과, 특히 세리 마태 같은 자들을 제자로 삼고 사역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계속 반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저처럼 어릴 때부터 교회를 나오는 분들 중에 큰아들과 같은 바리새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교회를 습관적으로 나오다 보니 겉으로 보면 교인처럼 보입니다. 별로 탈선하는 적도 없고 꾸준히 충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십자가의 체험이 없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도 깊이 깨닫지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둘째 아들처럼, 과거 허랑방탕하게 살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교회를 나올 때 별로 곁을 안 줍니다. 그러다가 조금만 실수하면 사정없이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랑의교회는 주변에 좋은 주거지도 있지만 나쁜 환경도 있지 않습니까 우물가 선교회를 통해서 지난 10여 동안 유흥가에서 종사하던 사람들이 여러 명 예수 믿고 이 교회로 들어 왔고 심지어 까페니 술집이니 하면서 아주 좋지 못한 영업을 했던 사람들도 까페 문을 닫고 회개하고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다락방에 들어가서 함께 성경공부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부인은 제자훈련반에도 들어갔지만 한 사람도 그곳에 정착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 대부분이 왕따를 당해 다 나갔어요. 여러분 이유를 알겠어요 받아 주지를 않는 거요. 겉으로는 웃지만 받아 주지를 않아, 그 사람 없는 곳에서는 수근수근, 손가락질 견딜 수가 없는 거요. 그러므로 한 두 명씩 눈물을 흘리고 다 떠났습니다. 나에게 너무나 비참한 편지를 써 보내고는 떠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탕자가 돌아왔다고 춤을 추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아니예요. 사랑의 교회, 천만예요. 우리는 바리새인의 이미지를 갖고 있어요. 우리는 큰형의 이미지를 갖고 있어요. 그런 사람이 오면 오히려 속이 분이 나는 감정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은혜 받고 좋아서 두 손 들고 찬송하면 오히려 비웃는 그런 감정이 있어요. 저나 여러분이나 비슷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모습이 바로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이요, 우리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아니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변화 받지 않는 바리새인, 큰아들같은 모범생보다는 차라리 과거에는 허랑방탕하게 살았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 깨어져 변화 받는 자들을 더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아들같은 모범생이나 둘째 아들같은 탕자가 우리 모두는 내 모습 이대로 십자가 안에서 깨어짐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때 변화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 다음, 우리 할 일은 사랑의 빚진 자로서 남에게 사랑을 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마, 탕자의 비유의 다음 이야기는 탕자의 변화된 삶일 것입니다. 탕자는 과거에는 강팍한 사람이었습니다. 집안의 종들을 함부로 대하고 화가 나면 때리기도 하면서 박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큰사랑을 체험한 다음에는 사랑의 빚진 자의 자세로 집안의 종들이나 동네 사람들에게나 심지어 노골적으로 자기를 회피하는 형에게까지 사랑의 가슴으로 다가갔을 것입니다. 사랑의 빚진 자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자녀 중에 여러분의 속을 무진 태우는 자녀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남편이 다른 여인과 바람을 피우고 있습니까 아니면 허랑방탕합니까 여러분의 시부모나 며느리나, 혹은 이웃 사람이나 교우들 중에 여러분에게 괴롬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식구들에게 아무리 설교해 보십시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설교를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십자가 사랑으로 끌어안으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과거에 우리가 말할 수 없는 허물과 죄를 지으면서 허랑방탕하게 살 때라도 참아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이의 허물과 죄를 참으면서 기도로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날 그들이 깨닫고 돌아올 때가 반드시 올 것인데, 그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과거 우리에게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 주시고 자녀의 자격을 나타내는 가락지를 끼워주시고 천사들과 잔치를 벌리신 것처럼 우리도 그들에게 사랑의 환대를 나타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받았으니 우리도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자에게 값없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랑을 주되 억지로 주지 마십시오. 용서를 주되 승리자의 교만은 금물입니다. 대접을 하되 무슨 대가를 바라는 심정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사랑의 빚진 자세로 해야 변화의 능력이 상대방에게 전달됩니다. 어떤 사람이 빚을 갚을 때 큰소리치면서 갚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저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빚을 갚는 것입니다.
그러한 빚진 자세로 사랑을 주면 놀랍지요, 여호와 하나님의 강한 역사 하심을 따라 우리가 더 깊이 변화 받을 뿐 아니라 그런 사람에게 복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눅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고전10:24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일하는 팔에 더 힘이 오듯이 주는 자에게 더 큰 능력, 더 큰 은혜가 임한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어느 날 전 재산이 반 크라운1. 2실링 6펜스 밖에 안 되는데, 마침 가난한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갓난아이를 안은 어머니가 몸져누워 있었습니다. 하룻밤을 넘기기 힘든 엄마와 아기였습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가진 돈 중에1. 2실링 6펜스만 주려고 생각으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늘에는 자비로우시고 사랑 많으신 아버지가 계십니다”고 권면했습니다. 그런데 속에서 음성이 들리기를“이 위선자야, 이 사람들에게 사랑 많으신 여호와 하나님 운운하면서 네 주머니에 있는 반 크라운을 움켜만 쥐고 있다니. ”하는 소리가 그의 가슴속에 울려왔습니다.
마음에 가책을 받은 허드슨 테일러는 그들에게 자기가 갖고 있던 반 크라운을 다 꺼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시골길을 지나 단칸방으로 걸어오면서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주는 자는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 빌려드린 것이 오래 가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저는 내일 점심부터 굶어야 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다음 날 우체부 편으로 상당한 금액의 돈이 우송되어 왔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우편으로 부쳐온 돈 때문에 기뻐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즉시로 응답해 주신 것을 감사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여러분의 생활이 힘들더라도 사랑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식구들이나 친척. 이웃과 직장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십시오, 용서를 주십시오.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불우한 자들에게 주는 생활을 계속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심는 것이니, 여호와 하나님의 추수 때가 되면 반드시 30배, 60배, 100배로 거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여러분의 가정과 친척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까 이번 설 연휴동안을 전도의 기회로 삼으시고 진정 여러분들이 먼저 변화되는 모습을 보이십시오. 그리고 사랑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사랑의 마음과 용서와 물질을 주므로 더 큰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설날에 내려오는 풍습으로는 남녀가 1년 간 빗질할 때 빠진 머리카락을 모아 빗 상자 속에 넣었다가 설날, 황혼을 기다려 문 밖에서 태움으로써 나쁜 병을 물리친다고 합니다. 그리고 속담에 나오는 야광(夜光)이라는 귀신은 설날 밤, 인가에 내려와 아이들의 신을 두루 신어보고 발에 맞으면 곧 신고 가버리는 데, 그 신의 주인은 불길하다 하여 아이들은 이 귀신을 두려워하여 모두 신을 감추고 불을 끄고 잤다고 합니다.
또한 체를 마루 벽이나 뜰에 걸어 두는 풍습이 있는데 그것은 야광신이 와서 이 체의 구멍을 세느라고 아이들의 신을 훔칠 생각을 잊고 있다가 닭이 울면 도망간다고 믿기도 했습니다. 이 날 사당에 지내는 제사를 지내는 데 그것을 차례(茶禮)라 하며, 아이들은 고운 한복을 입고 어른들을 찾아다니면서 세배를 하기도 합니다. 설날의 놀이로서는 남녀가 방안에서 다 같이 윷놀이를 하고, 젊은 부녀자들은 널뛰기, 남자들은 연날리기를 합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러한 고유 풍습은 다 사라지고 있습니다. 어느 때는 열 몇 시간을 차로 달려서 도착한 다음에 제사나 성묘를 하고 부모님에게 세배를 한 후에 무엇이 급한지 그 날로 돌아와 스키장을 가거나 관광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날을 맞으면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부모님들과 형제, 친척 분들에게 사랑을 통해서 전도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아무리 부모님들에 최고의 선물과 음식을 드리고 돌아가신 후에 몇 십 만원 들여서 제사를 지낸다 할지라도 구원받지 못하시고 지옥에 가시게 했다면 기독교인으로서는 최대의 불효나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지난 주일 말씀드린 대로 여러분이 진정 부모님과 자녀들, 형제들을 사랑한다면 울면서 호소해서라도 그들이 구원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영혼구원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느 여자 집사님은 말하기를 자기 남편은 다른 말은 다 들어주는 데, 교회 나오자는 말에는 성질을 부리며 반대하니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전도는 영적인 싸움으로 사탄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력을 다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남편이나 자녀들, 부모님들을 전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내가 변화된 삶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월간목회지(誌) 2월호에는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일류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게된 어느 청년이 "나는 꼭 세계를 변화시키는 큰일을 해낼 거야. "라고 말하면서 패기만만하게 대학 문을 나섰습니다. 10년 후, 그는 "세계는 변화시키지 못했지만. 이 나라는 꼭 변화시키고 말 것이야. "라고 했습니다. 또 10년 후, 그는 다시 "아니, 나라는 변화시키지 못했지만 내 회사만은 변화시키고 말 거야. "라고 했습니다.
다시 10년 후, 회사도 변화시키지 못한 그는 "이제는 내 가정만이라도 변화시켜야지. "라고 했지만 그로부터 10년 후 중병에 걸리어 가족들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외로이 병석에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대학 친구가 찾아와 그 친구의 비참한 임종을 지켜보면서 "안타깝게도 자네는 인생을 거꾸로 생각하며 살아온 것 같네. 이제라도 먼저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을 해보게. "라고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변하지 않고는 가정도 직장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안에서 변화 받은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식구들을 전도하면 속으로 "당신을 보면 더 이상 믿고 싶은 마음이 없소. 열심히 교회 다니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 같으나 성질 부릴 것 다 부리고 욕심은 여전하니 교회 나가서 달라진 것이 무엇이 있소 그렇게 나이롱 집사로 다닐 바에는 차라리 교회를 그만 뒤요.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변화된 모습을 보이면 남편이나 자녀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기에 아내를, 우리 어머니를 저렇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라면서 감동을 받기 시작할 것이요, 식구들이 강하게 영향을 받게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 구원의 관건은 자기 자신부터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주안에서 변화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배우고자 합니다. 내 모습 이대로를 받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탕자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물려받은 다음에, 아버지의 간섭이 미치지 않는 먼 나라로 갔습니다. 그리고 곧 파산을 당했습니다. 외지에 나가서 사업이랍시고 벌리다가 사기를 당했는지, 아니면 물정을 모르고 돈을 함부로 쓰다가 보니 그렇게 되었는지, 혹은 나쁜 친구나 여자들의 꾀임에 빠져서 허랑방탕하게 낭비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지 몰라도 모든 재산을 다 날리고 파산 당하는 날을 만났습니다.
지금까지 부자 아버지 밑에서 풍족하게 살았고,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 부족함이 없었던 그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먹을 것이 없는 신세가 되었으니 너무나 기가 막힙니다. 그 때부터 탕자는 인생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무일푼 신세가 되고 나니 그렇게 가깝던 친구들도 슬슬 피하기 시작합니다. 한 때는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아양을 부리던 여인들도 자기의 주머니에 돈이 떨어진 것을 안 뒤부터는 다른 사내들을 시켜 문전박대합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인심들이 더 고약합니다.
그 때부터 그는 아버지의 진정한 사랑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행패를 부리며 유산을 강제로 뺐다시피 함에도 끝까지 자기를 타이르며 달래던 아버지, 떠나던 날도 동구 밖까지 눈물을 글썽이며 배웅하던 아버지, 그리고 인편에 들으니 천하 불효자식인 자기가 떠나는 날부터 자주 동구밖에 나와서 자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아버지, 그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성공한 모습으로 돌아가겠다. "고 큰소리 치며 떠났는데, 자존심이 있지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어떻게 돌아갑니까
그러면 그 잘난 체 하는 형이나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비난하겠습니까 죽으면 죽었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여기 저기 다니면서 얻어먹을지언정, 그리고 굶지나 말자는 심산으로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돼지를 치는 신세가 되었을지언정, 절대로 고향에 안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굶은 데야 무슨 장수가 있습니까 어느 날 너무 배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으려고 하지만 그것마저도 주는 자가 없으니 너무나 배고 고팠습니다.
그는 목이 메어서 외치기를 17절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일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 탕자는 아버지의 사랑이 견딜 수 없도록 그리웠습니다. 마침내 그는 결심하기를 "내가 이렇게 객지에서 굶어 죽어 들개의 밥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아버지에게 문전박대를 당하고 종들에 의해서 매를 맞고 죽는 것이 나을 것이다. 만의 하나 품군의 하나라도 써주신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랴"라고 하면서 아버지 집을 향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가까스로 자기 고향 동네에 가까이 왔을 때 어느 노인이 달려오는 것이 보입니다. 아버지였습니다. 처음에는 몽둥이로 쫓아낼 것 같아 너무나 겁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달려온 아버지는, 완전히 거지가 되어 남루하기 짝이 없는 자기의 목을 끌어안고 웁니다. 아버지를 향해 함부로 말하던 자기의 입에 입을 맞춥니다. 추한 모습 이대로 받아주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는 울면서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내가 아들을 잃었다가 다시 찾았는데 무슨 소리냐"라면서 하인들에게 명하기를 온갖 죄를 짓고 돌아온 몸뚱이에 제일 좋은 옷을 입히라 합니다. 음란과 투전과 주먹질 등 온갖 더러운 죄만 짓던 손에 가락지를 끼우라 합니다. 죄를 짓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던 발에 신을 신기라 합니다.
그 다음 어떻게 했습니까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가 잔치를 벌렸습니다. 아버지가 온 동네 사람들에게 요청해서 "저 놈을 매를 때려서 동구 밖으로 내어 쫓아달라. "고 요청만 해도 온 동네 사람들이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도 앞장서서 그렇게 할 정도인데, 오히려 제일 좋은 송아지를 잡아서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가 잔치를 벌리면서 탕자를 다시 아들로 인정하여 주었던 것입니다. 탕자가 그 사랑 앞에 완전히 녹아지고 변화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아마, 일생동안 그 사랑, 그 은혜를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시카고에 허름한 차림의 소년이 주일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거지같은 부랑아'라고 놀렸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파라라고 하는 주일학교 교사는 이 소년을 껴안고 사랑으로 격려하며 환영해 주었습니다. 이 떠돌이 소년이 후에 수십만 명을 전호난 드와이트 무디였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바로 그런 탕자가 아니었습니까
우리 스스로 살펴보면 죄를 짓지 아니한 곳이 없을 정도로 온 몸이 죄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의 머리와 마음은 미움, 시기, 질투, 혈기, 욕심으로 가득 차 있고, 우리의 입과 손과 발은 죄성이 요구한 대로 죄를 지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처단한다면 우리 중에 단 한 사람도 구원 받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 주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가락지를 끼워주시고 능력의 신을 신겨주사 좁은 길을 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으며 모든 천사들 앞에서 잔치를 벌려주셨던 것입니다.
내 추한 모습 이대로 받아주심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변화는 십자가 사랑 안에서 깨닫고 녹아질 때 우리의 영이 부활되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이, 한번은 특강 때문에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님을 뵙게되었는데 거기에서 그 교회에 출석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군을 만났습니다. 그 당시에 박지만 군이 방탕의 길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소망교회 나온 지가 일년 반이 되었대요. 일년 반이 얼마나 놀라운지요, 사람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렇게도 자기의 힘으로도 안되고, 많은 사람들이 애써도 안 되고, 감옥에 3번이나 가도 안되고, 박태준 회장이 그렇게 애써도 안되고, 누나들이 힘써도 안되고, 이성으로도, 노력으로도. 때려도 안되었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변호사에 이끌려 교회에 나왔습니다. 교회로 오면서 서서히 사람이 소생하는 거예요. 거름더미에 장미꽃이 피어나듯이 그 마음에 안정을 얻고, 힘을 얻고, 소생함을 얻은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만이 사람들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큰아들이 변화 받지 못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데 있습니다. 큰아들은 어릴 때부터 아주 모범생이었습니다. 항상 부모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써 왔고, 항상 바르게 살려고 애쓰면서 악한 데 절대로 빠지지 않았으므로 별로 회개할 것이 없는 삶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얼마나 본받을 만한 삶입니까 문제는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과 다른 사람의 결점이나 잘못에 대해서 용납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아버지에 대해서 오해를 하기를 자기가 착하고 모범적인 아들이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한다고 생각한 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의 사랑을 율법적이며 타산적인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탕자의 사건을 만나면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둘째가 아버지의 유산을 뺏다시피 해서 떠난 후에 자기에게 '큰 얘야, 그 동안 둘째 때문에 너무나 속이 상했지만 이렇게 훌쩍 떠나고 나니 오히려 잘 되었다. 이제는 그 놈은 내 자식이 아니다. 호적에서 아예 파버리겠다. 이제는 오직 너만 의지하고 살겠다. "라고 말했어야 옳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너무나 한심합니다. 둘째가 떠난 후에 거의 모든 일을 미루어두고 쩍하면 동구 밖에 나가서 둘째만 기다리고 있으니 너무 화가 납니다. 그런데다가 어느 날 밭에서 땀흘려 일하다가 돌아와 보니 둘째가 돌아왔다고 상이 쩍 벌어지게 음식을 차려 놓고 잔치를 벌리고 있습니다. 너무나 화가 나서 자기를 달래려고 왔던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한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라면서 마구 공박했습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아버지가 아무리 달래도 집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마, '앞으로 온 집안을 망신시키고 내 체면을 여지없이 꾸겨버린 저런 나쁜 놈과 한 집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독립해서 나가 사는 것이 났겠다"는 생각이 불일 듯 일어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바리새인들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탕자는 이방인과 세리와 죄인들을 가리키는 것이요, 큰아들은 바로 가장 율법적으로 산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기들만이 가장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요, 상급과 칭찬을 받을 사람들은 자기들뿐이라는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라면 어느 누구보다도 자기들과만 관계하면서 자기들을 통해서 사역을 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셔서 무식한 어부들과, 특히 세리 마태 같은 자들을 제자로 삼고 사역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계속 반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저처럼 어릴 때부터 교회를 나오는 분들 중에 큰아들과 같은 바리새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교회를 습관적으로 나오다 보니 겉으로 보면 교인처럼 보입니다. 별로 탈선하는 적도 없고 꾸준히 충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십자가의 체험이 없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도 깊이 깨닫지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둘째 아들처럼, 과거 허랑방탕하게 살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교회를 나올 때 별로 곁을 안 줍니다. 그러다가 조금만 실수하면 사정없이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랑의교회는 주변에 좋은 주거지도 있지만 나쁜 환경도 있지 않습니까 우물가 선교회를 통해서 지난 10여 동안 유흥가에서 종사하던 사람들이 여러 명 예수 믿고 이 교회로 들어 왔고 심지어 까페니 술집이니 하면서 아주 좋지 못한 영업을 했던 사람들도 까페 문을 닫고 회개하고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다락방에 들어가서 함께 성경공부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부인은 제자훈련반에도 들어갔지만 한 사람도 그곳에 정착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 대부분이 왕따를 당해 다 나갔어요. 여러분 이유를 알겠어요 받아 주지를 않는 거요. 겉으로는 웃지만 받아 주지를 않아, 그 사람 없는 곳에서는 수근수근, 손가락질 견딜 수가 없는 거요. 그러므로 한 두 명씩 눈물을 흘리고 다 떠났습니다. 나에게 너무나 비참한 편지를 써 보내고는 떠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탕자가 돌아왔다고 춤을 추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아니예요. 사랑의 교회, 천만예요. 우리는 바리새인의 이미지를 갖고 있어요. 우리는 큰형의 이미지를 갖고 있어요. 그런 사람이 오면 오히려 속이 분이 나는 감정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은혜 받고 좋아서 두 손 들고 찬송하면 오히려 비웃는 그런 감정이 있어요. 저나 여러분이나 비슷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모습이 바로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이요, 우리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아니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변화 받지 않는 바리새인, 큰아들같은 모범생보다는 차라리 과거에는 허랑방탕하게 살았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 깨어져 변화 받는 자들을 더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아들같은 모범생이나 둘째 아들같은 탕자가 우리 모두는 내 모습 이대로 십자가 안에서 깨어짐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때 변화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 다음, 우리 할 일은 사랑의 빚진 자로서 남에게 사랑을 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마, 탕자의 비유의 다음 이야기는 탕자의 변화된 삶일 것입니다. 탕자는 과거에는 강팍한 사람이었습니다. 집안의 종들을 함부로 대하고 화가 나면 때리기도 하면서 박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큰사랑을 체험한 다음에는 사랑의 빚진 자의 자세로 집안의 종들이나 동네 사람들에게나 심지어 노골적으로 자기를 회피하는 형에게까지 사랑의 가슴으로 다가갔을 것입니다. 사랑의 빚진 자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자녀 중에 여러분의 속을 무진 태우는 자녀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남편이 다른 여인과 바람을 피우고 있습니까 아니면 허랑방탕합니까 여러분의 시부모나 며느리나, 혹은 이웃 사람이나 교우들 중에 여러분에게 괴롬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식구들에게 아무리 설교해 보십시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설교를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십자가 사랑으로 끌어안으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과거에 우리가 말할 수 없는 허물과 죄를 지으면서 허랑방탕하게 살 때라도 참아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이의 허물과 죄를 참으면서 기도로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날 그들이 깨닫고 돌아올 때가 반드시 올 것인데, 그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과거 우리에게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 주시고 자녀의 자격을 나타내는 가락지를 끼워주시고 천사들과 잔치를 벌리신 것처럼 우리도 그들에게 사랑의 환대를 나타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받았으니 우리도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자에게 값없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랑을 주되 억지로 주지 마십시오. 용서를 주되 승리자의 교만은 금물입니다. 대접을 하되 무슨 대가를 바라는 심정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사랑의 빚진 자세로 해야 변화의 능력이 상대방에게 전달됩니다. 어떤 사람이 빚을 갚을 때 큰소리치면서 갚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저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빚을 갚는 것입니다.
그러한 빚진 자세로 사랑을 주면 놀랍지요, 여호와 하나님의 강한 역사 하심을 따라 우리가 더 깊이 변화 받을 뿐 아니라 그런 사람에게 복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눅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고전10:24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일하는 팔에 더 힘이 오듯이 주는 자에게 더 큰 능력, 더 큰 은혜가 임한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어느 날 전 재산이 반 크라운1. 2실링 6펜스 밖에 안 되는데, 마침 가난한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갓난아이를 안은 어머니가 몸져누워 있었습니다. 하룻밤을 넘기기 힘든 엄마와 아기였습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가진 돈 중에1. 2실링 6펜스만 주려고 생각으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늘에는 자비로우시고 사랑 많으신 아버지가 계십니다”고 권면했습니다. 그런데 속에서 음성이 들리기를“이 위선자야, 이 사람들에게 사랑 많으신 여호와 하나님 운운하면서 네 주머니에 있는 반 크라운을 움켜만 쥐고 있다니. ”하는 소리가 그의 가슴속에 울려왔습니다.
마음에 가책을 받은 허드슨 테일러는 그들에게 자기가 갖고 있던 반 크라운을 다 꺼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시골길을 지나 단칸방으로 걸어오면서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주는 자는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 빌려드린 것이 오래 가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저는 내일 점심부터 굶어야 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다음 날 우체부 편으로 상당한 금액의 돈이 우송되어 왔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우편으로 부쳐온 돈 때문에 기뻐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즉시로 응답해 주신 것을 감사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여러분의 생활이 힘들더라도 사랑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식구들이나 친척. 이웃과 직장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십시오, 용서를 주십시오.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불우한 자들에게 주는 생활을 계속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심는 것이니, 여호와 하나님의 추수 때가 되면 반드시 30배, 60배, 100배로 거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여러분의 가정과 친척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까 이번 설 연휴동안을 전도의 기회로 삼으시고 진정 여러분들이 먼저 변화되는 모습을 보이십시오. 그리고 사랑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사랑의 마음과 용서와 물질을 주므로 더 큰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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