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
본문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1절에서는 그것을 "신령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헬라어로는 “프뉴마티콘”입니다. 은사를 성령을 뜻하는 “프뉴마”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은사(恩師)가 성령(聖靈)에 속한 것이라는 사실(事實)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은 이를 “영적인 선물”(Spiritual gifts)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는 "은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헬라어로는 “카리스마톤”으로서 이는 신적(神的)인 측면을 강조(强調)하고 있습니다. 즉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慈悲) 때문에 오는 것이지 인간(人間)의 공로(功勞)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님을 뜻하고 있습니다.
1. 은사의 목적(目的)입니다. 고전12:7절에 “각 사람에게 성령(聖靈)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 했습니다. 1)예수를 주로 고백(告白)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은사는 예수를 구세주로 알고 고백하도록 하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가 없습니다. (고전12:3절). 지혜의 은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그의 대속(代贖)적(的) 죽음의 의미(意味)를 깨달을 수 있으며, 믿음의 은사를 통해서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迎接)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능력(能力)의 은사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能力)을 보여 줌으로써 효과적(效果的)으로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을 전파(轉派)할 수가 있습니다. 실례(實例)로 오순절 방언(放言)의 은사는 언어의 장벽을 단숨에 뛰어넘어 생명의 말씀을 전파했던 것입니다.
2)믿음에 유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성령의 은사를 허락해 주시는 이유는 그 개인을 우상화하거나 그에게 어떤 카리스마적인 속성을 부여해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목적(目的)은 각 사람에게 신앙(信仰)의 유익(有益)을 주고, 결과적(結果的)으로 교회(敎會)에 유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방언의 은사 받은 것을 자랑하면서 그렇지 못한 사람을 업신여기고 멸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행동(行動)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교회(敎會)에 유익을 주기 위해서 준 은사를 자기 자랑의 기회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직분을 감당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가 사도이든 선지자이든 교사이든 간에 먼저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개인적인 능력을 갖추어야만 합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어지러운 말세에는 영분별의 은사를 통해서 적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을 구별해 낼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2. 은사의 종류입니다. 고전12:8-10절에 “어떤 이 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能力)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豫言)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靈)들 분별(分別)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各種) 방언(放言)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라고 했습니다.
1)어지러운 은사들입니다. 지혜의 말씀은 영적인 지혜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합니다. 영적인 지혜(知慧)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의 정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은사는 복음에 의해서는 얻을 수가 없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과의 교통 가운데서 얻어지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리석고도 미련하게 보이겠지만 구원을 얻은 성도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전1: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 했습니다. 지식의 말씀은 영적인 능력에 따라 어떤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인식하게 해 주는 은사를 뜻합니다. 이것은 복음을 변증하고 해설하는 데 필요한 지식의 측면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또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인간적인 용어와 논리 체계를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지식의 은사는 보다 실제적이며 구체적으로 생활의 여러 가지 상황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믿음의 은사는 권능(權能)을 행할 수 있는 믿음을 뜻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으며 병(病)든 자(者)를 일으키고 가뭄 때에 비가 오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마17:20절에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고 했습니다.
약5:15-17절에 “믿음의 기도(祈禱)는 병든 자를 구원(救援)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 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은사를 주는 이유(理由)는 특별(特別)한 목적(目的)을 성취(成就)하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能力)을 드러내야 할 필요성(必要性)이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 의지(意志)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2)능력의 은사들입니다. 병 고치는 은사, 즉 신유의 은사란 여러 가지 질병을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복음을 확증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복음(福音)이 전파(轉派)되는 곳에는 반드시 병 고치는 은사가 수반되었습니다. 신유의 은사는 고통과 질병,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해방이라는 측면을 갖고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라는 성품을 제시해 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죄의 고백과 용서와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능력 행함의 은사는 이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칼빈은 이 은사가 마귀를 대적하고 위선자를 축출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예수께서 마귀를 쫓아내는 일, 바울이 복음 전파를 방해한 박수 엘루마의 눈을 멀게 한 일(행13:11), 베드로가 범죄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축출한 일(행5:1-11) 등입니다. 이 은사는 오늘날 선교 현장에서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복음(福音)의 방해(妨害) 요소(要所)를 제거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의 은사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메시지를 말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예언이란 단어의 일반적(1般的)인 용례처럼 미래(未來)에 있을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전달(傳達)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다른 곳에는 “대언(代言)의 영”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계19:10절에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고 했습니다.
그러한 측면(側面)에서 볼 때 이것은 오늘날 설교자(說敎者)의 역할(役割)에 해당(解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3)영적(靈的)인 은사들입니다. 영(靈)분별(分別)의 은사는 일반적인 상식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영적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즉 참된 사역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구별하는 능력입니다.
구약시대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으며, 신약시대에도 거짓 교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요일4: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속 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거짓 교사(敎師)들이 활동(活動)하고 있으므로 이 은사가 절실(切實)하게 필요(必要)합니다. 방언(放言)의 은사는 크게 두 가지로 구별(久別)할 수 있습니다.
즉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의 방언은 자기(自己)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다른 나라 언어로 복음을 전파하게 했습니다. 이 경우에는 통역(通譯)이 필요치 않았고 성령이 임하셨다는 사실에 대한 확증이었습니다.
그것은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이며 일시적(1時的)인 경험(經驗)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14장에 나오는 방언(放言)은 사람들이 이해(理解)할 수 없는 영적(靈的)인 언어로 말하거나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통역이 필요했습니다. 방언 통역의 은사는 방언의 의미를 알려 주어 교회에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해석 능력(能力)으로써 방언의 은사에 보충적인 역할을 합니다.
3. 은사의 필요성(必要性)입니다. 고전12:12절에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肢體)가 있고 몸의 지체(肢體)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고 했습니다.
1)다양한 지체(肢體)들이 필요(必要)합니다. 바울은 은사를 받은 성도(聖徒)들의 상호관계를 인간의 몸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먼저 인간의 몸에는 손과 발, 눈과 귀, 그리고 코 등과 같이 다양한 지체들이 있습니다.
교회(敎會)도 그와 같이 다양한 직분(職分)들을 필요(必要)로 합니다. 초대(初代) 교회(敎會)에는 사도(使徒), 선지자(先知者), 교사(敎師), 능력(能力)을 행하는 자, 병(病)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 방언(放言)을 말하는 자, 통역(通譯)하는 자 등의 다양한 사역(使役)자들이 있었습니다.
고전12:28-30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 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使徒) 겠느냐 다 선지자(先知者) 겠느냐 다 교사(敎師)겠느냐 다 능력(能力)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通譯)하는 자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을 선포(宣布)하고 효과적(效果的)으로 전파(轉派)하기 위해서는 교회(敎會)내에 다양(多樣)한 은사(恩師)를 가진 직분(職分)자(者)들이 필요(必要)합니다.
2)통일(統1)된 몸이 필요(必要)합니다. 인간(人間)의 몸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敎會)도 모든 지체(肢體)들이 조화(調和)를 이루는 가운데 각자(各自) 자기(自己)의 기능을 담당할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고전12:14-20).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몸 가운데서 분쟁(分爭)치 아니하고 여러 지체(肢體)가 서로 조화(調和)있게 활동(活動)토록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만일 한 지체(肢體)가 고통(苦痛)을 받으면, 모든 지체(肢體)도 함께 고통(苦痛)을 받고
한 지체(肢體)가 영광(榮光)을 받으면, 모든 지체(肢體)도 함께 즐거워합니다. 고전12:27절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肢體)의 각(各)부분(部分)이라"고 했습니다.
4,말씀을 정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도(聖徒)들에게 신령(神鈴)한 선물(膳物), 즉 성령(聖靈)의 은사들을 허락(許諾)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주신 목적(目的)은 주님을 구세주(救世主)로 고백(告白)하고, 개인과 교회에
유익을 가져다주기 위한 것입니다. 은사에는 여러 가지 종류(種類)가 있습니다.
인간의 몸에 다양한 지체들이 필요하듯이 교회에도 여러 가지 종류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필요(必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조화(調和)를 이루는 가운데 유기적(有機的)인 통일성(統1性)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 속에서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기를 칭찬해 주고 자기 자신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내가 먼저 작은 배려를 하면서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입니다. 혼자 보다는 여러 성도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나타납니다.
자기(自己)가 섬기는 교회(敎會)에 먼저 등록(登錄)하였다고 봉사(奉事)하는 일에 독차지 하려고 하면 나중에 등록(登錄)된 성도(聖徒)는 소외당함을 느낍니다. 그러면 교회(敎會) 문(門)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등록(登錄)하신 분도 함께 봉사(奉事)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配慮)하는 사람이 지혜(知慧)롭고 성령(聖靈)님의 인도(引導)하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敎會) 속에서 남을 나보다 났게 여기고 서로 합력(合力)하여 선(善)을 이루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榮華)롭게 하는 성도(聖徒)의 복(福)된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祝願)합니다.
파생된 것으로서 은사(恩師)가 성령(聖靈)에 속한 것이라는 사실(事實)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은 이를 “영적인 선물”(Spiritual gifts)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는 "은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헬라어로는 “카리스마톤”으로서 이는 신적(神的)인 측면을 강조(强調)하고 있습니다. 즉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慈悲) 때문에 오는 것이지 인간(人間)의 공로(功勞)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님을 뜻하고 있습니다.
1. 은사의 목적(目的)입니다. 고전12:7절에 “각 사람에게 성령(聖靈)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 했습니다. 1)예수를 주로 고백(告白)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은사는 예수를 구세주로 알고 고백하도록 하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가 없습니다. (고전12:3절). 지혜의 은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그의 대속(代贖)적(的) 죽음의 의미(意味)를 깨달을 수 있으며, 믿음의 은사를 통해서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迎接)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능력(能力)의 은사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能力)을 보여 줌으로써 효과적(效果的)으로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을 전파(轉派)할 수가 있습니다. 실례(實例)로 오순절 방언(放言)의 은사는 언어의 장벽을 단숨에 뛰어넘어 생명의 말씀을 전파했던 것입니다.
2)믿음에 유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성령의 은사를 허락해 주시는 이유는 그 개인을 우상화하거나 그에게 어떤 카리스마적인 속성을 부여해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목적(目的)은 각 사람에게 신앙(信仰)의 유익(有益)을 주고, 결과적(結果的)으로 교회(敎會)에 유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방언의 은사 받은 것을 자랑하면서 그렇지 못한 사람을 업신여기고 멸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행동(行動)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교회(敎會)에 유익을 주기 위해서 준 은사를 자기 자랑의 기회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직분을 감당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가 사도이든 선지자이든 교사이든 간에 먼저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개인적인 능력을 갖추어야만 합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어지러운 말세에는 영분별의 은사를 통해서 적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을 구별해 낼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2. 은사의 종류입니다. 고전12:8-10절에 “어떤 이 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能力)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豫言)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靈)들 분별(分別)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各種) 방언(放言)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라고 했습니다.
1)어지러운 은사들입니다. 지혜의 말씀은 영적인 지혜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합니다. 영적인 지혜(知慧)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의 정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은사는 복음에 의해서는 얻을 수가 없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과의 교통 가운데서 얻어지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리석고도 미련하게 보이겠지만 구원을 얻은 성도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전1: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 했습니다. 지식의 말씀은 영적인 능력에 따라 어떤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인식하게 해 주는 은사를 뜻합니다. 이것은 복음을 변증하고 해설하는 데 필요한 지식의 측면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또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인간적인 용어와 논리 체계를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지식의 은사는 보다 실제적이며 구체적으로 생활의 여러 가지 상황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믿음의 은사는 권능(權能)을 행할 수 있는 믿음을 뜻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으며 병(病)든 자(者)를 일으키고 가뭄 때에 비가 오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마17:20절에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고 했습니다.
약5:15-17절에 “믿음의 기도(祈禱)는 병든 자를 구원(救援)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 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은사를 주는 이유(理由)는 특별(特別)한 목적(目的)을 성취(成就)하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能力)을 드러내야 할 필요성(必要性)이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 의지(意志)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2)능력의 은사들입니다. 병 고치는 은사, 즉 신유의 은사란 여러 가지 질병을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복음을 확증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복음(福音)이 전파(轉派)되는 곳에는 반드시 병 고치는 은사가 수반되었습니다. 신유의 은사는 고통과 질병,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해방이라는 측면을 갖고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라는 성품을 제시해 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죄의 고백과 용서와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능력 행함의 은사는 이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칼빈은 이 은사가 마귀를 대적하고 위선자를 축출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예수께서 마귀를 쫓아내는 일, 바울이 복음 전파를 방해한 박수 엘루마의 눈을 멀게 한 일(행13:11), 베드로가 범죄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축출한 일(행5:1-11) 등입니다. 이 은사는 오늘날 선교 현장에서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복음(福音)의 방해(妨害) 요소(要所)를 제거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의 은사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메시지를 말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예언이란 단어의 일반적(1般的)인 용례처럼 미래(未來)에 있을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전달(傳達)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다른 곳에는 “대언(代言)의 영”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계19:10절에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고 했습니다.
그러한 측면(側面)에서 볼 때 이것은 오늘날 설교자(說敎者)의 역할(役割)에 해당(解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3)영적(靈的)인 은사들입니다. 영(靈)분별(分別)의 은사는 일반적인 상식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영적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즉 참된 사역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구별하는 능력입니다.
구약시대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으며, 신약시대에도 거짓 교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요일4: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속 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거짓 교사(敎師)들이 활동(活動)하고 있으므로 이 은사가 절실(切實)하게 필요(必要)합니다. 방언(放言)의 은사는 크게 두 가지로 구별(久別)할 수 있습니다.
즉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의 방언은 자기(自己)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다른 나라 언어로 복음을 전파하게 했습니다. 이 경우에는 통역(通譯)이 필요치 않았고 성령이 임하셨다는 사실에 대한 확증이었습니다.
그것은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이며 일시적(1時的)인 경험(經驗)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14장에 나오는 방언(放言)은 사람들이 이해(理解)할 수 없는 영적(靈的)인 언어로 말하거나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통역이 필요했습니다. 방언 통역의 은사는 방언의 의미를 알려 주어 교회에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해석 능력(能力)으로써 방언의 은사에 보충적인 역할을 합니다.
3. 은사의 필요성(必要性)입니다. 고전12:12절에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肢體)가 있고 몸의 지체(肢體)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고 했습니다.
1)다양한 지체(肢體)들이 필요(必要)합니다. 바울은 은사를 받은 성도(聖徒)들의 상호관계를 인간의 몸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먼저 인간의 몸에는 손과 발, 눈과 귀, 그리고 코 등과 같이 다양한 지체들이 있습니다.
교회(敎會)도 그와 같이 다양한 직분(職分)들을 필요(必要)로 합니다. 초대(初代) 교회(敎會)에는 사도(使徒), 선지자(先知者), 교사(敎師), 능력(能力)을 행하는 자, 병(病)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 방언(放言)을 말하는 자, 통역(通譯)하는 자 등의 다양한 사역(使役)자들이 있었습니다.
고전12:28-30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 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使徒) 겠느냐 다 선지자(先知者) 겠느냐 다 교사(敎師)겠느냐 다 능력(能力)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通譯)하는 자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을 선포(宣布)하고 효과적(效果的)으로 전파(轉派)하기 위해서는 교회(敎會)내에 다양(多樣)한 은사(恩師)를 가진 직분(職分)자(者)들이 필요(必要)합니다.
2)통일(統1)된 몸이 필요(必要)합니다. 인간(人間)의 몸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敎會)도 모든 지체(肢體)들이 조화(調和)를 이루는 가운데 각자(各自) 자기(自己)의 기능을 담당할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고전12:14-20).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몸 가운데서 분쟁(分爭)치 아니하고 여러 지체(肢體)가 서로 조화(調和)있게 활동(活動)토록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만일 한 지체(肢體)가 고통(苦痛)을 받으면, 모든 지체(肢體)도 함께 고통(苦痛)을 받고
한 지체(肢體)가 영광(榮光)을 받으면, 모든 지체(肢體)도 함께 즐거워합니다. 고전12:27절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肢體)의 각(各)부분(部分)이라"고 했습니다.
4,말씀을 정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도(聖徒)들에게 신령(神鈴)한 선물(膳物), 즉 성령(聖靈)의 은사들을 허락(許諾)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주신 목적(目的)은 주님을 구세주(救世主)로 고백(告白)하고, 개인과 교회에
유익을 가져다주기 위한 것입니다. 은사에는 여러 가지 종류(種類)가 있습니다.
인간의 몸에 다양한 지체들이 필요하듯이 교회에도 여러 가지 종류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필요(必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조화(調和)를 이루는 가운데 유기적(有機的)인 통일성(統1性)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 속에서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기를 칭찬해 주고 자기 자신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내가 먼저 작은 배려를 하면서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입니다. 혼자 보다는 여러 성도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나타납니다.
자기(自己)가 섬기는 교회(敎會)에 먼저 등록(登錄)하였다고 봉사(奉事)하는 일에 독차지 하려고 하면 나중에 등록(登錄)된 성도(聖徒)는 소외당함을 느낍니다. 그러면 교회(敎會) 문(門)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등록(登錄)하신 분도 함께 봉사(奉事)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配慮)하는 사람이 지혜(知慧)롭고 성령(聖靈)님의 인도(引導)하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敎會) 속에서 남을 나보다 났게 여기고 서로 합력(合力)하여 선(善)을 이루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榮華)롭게 하는 성도(聖徒)의 복(福)된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祝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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