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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화평한 사람들의 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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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설날입니다. 온 가족이 모두 모여 차례를 지내고 아버지께 세배를 할 차례입니다. 그런데 왠지 아버지는 시종 침울한 표정이시더니 손자들이 세배를 하자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까닭인 즉 이 집안의 큰 아들이 I M F 때문에 사업에 실패하게 되여 이것 때문에 형제간에 불화가 일어났고, 결국 형은 집을 나가버린 것입니다. 아버지는 혹시나 하고 기다려 왔으나 끝내 큰 아들이 나타나지 않자 말할 수 없이 마음이 괴로운 것입니다. 다른 아들들이 집을 나간 형님 몫까지 합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했지만 그것 가지고는 아버지의 슬픈 마음을 위로 해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화평이 없는 가정은 가정이 아닙니다. 가정의 근본은 무엇보다 화평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보면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 보다 나으니라"(잠 17 : 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화평하지 못하면 행복은 없습니다. 옛 글에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하였습니다. 화평이 우선이요 근본입니다. 만일에 화목하지 못하다면 그 가정은 지옥입니다.
또한 화평이 없는 효도는 효도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바가 형제들의 화목인데, 그것 없이 어찌 효도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화목 없이 드리는 좋은 옷, 좋은 음식은 결코 효도가 아닙니다.
독일의 학자요 시인이었던 괴테는 '한 사람이 임금이 되든, 천하를 호령하는 장군이 되든 자기 가정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는 자는 가장 불행한 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천하를 호령한다고 할 지라고 가정에서 편안한 안식과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산다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밀레니엄 시대에 첫 번째 맞이하는 이 설날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이 날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찾아 그리고 싶어하는 화가가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목사님을 만나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은 신앙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말에 시원한 대답을 얻지 못한 화가는 얼마 후 신혼부부를 만나 똑같은 질문을 하자 신혼부부는 사랑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도 그에게는 대답이 되지 못했습니다. 얼마 후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한 상이 군인에게 물었습니다. 그 군인은 평화라고 대답했습니다. 화가는 많은 사람들의 대답을 들었지만 만족한 대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실망 속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자녀들이 달려나와 매달립니다.. 그의 아내가 정성스럽게 차려놓은 식탁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기도 드리는 그 순간 화가는 사랑, 신뢰, 평화의 모습을 가정에서 발견했고, 그 자리에서 가족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이렇듯 가정은 삶의 보금자리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곳입니다.
오늘 말씀에 "너희는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즉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는 절대 조건으로서 화평과 거룩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평이라는 것을 말할 때 질적인 차원에서는 세 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상대적인 화평입니다. 종속적인 것이지요. 다른 사람이 화평하면 나도 화평합니다. 다른 사람이 기쁘면 나도 기쁩니다. 정세가 좀 나아지면 증권 시장의 주식 값이 오르고, 주식 값이 오르내림에 따라 주식을 산 사람들의 낯빛이 죽었다 살았다 하는 것과도 같은 현상입니다. 이와 같이, 형편에 따라 종속적으로 끌려 다니는 상대적인 화평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절대적인 화평이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돈도 많고 명예도 있지마는 마음에 평화가 없는 회의주의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어느 날은, 아주 가난하게 살아가는 농부 한 사람을 눈여겨보았습니다. 농부는 감자 한 자루를 짊어지고 가면서 즐겁게 찬송을 부릅니다. 하도 즐거워 보여서 "이 사람아, 자네는 뭐가 그리 기쁜가" 하고 물어 보니,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서 즐겁고 기쁩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구원받은 증거가 무엇인가" 하고 다시 물어보자 그 농부는 감자 보따리를 땅바닥에 내려놓더니 "내가 감자 보따리 내려놓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하고 되묻습니다.
"아, 그야 자네 어깨가 편하겠지"하고 그 사람이 대답하자 농부는 말합니다. "내 마음이 편안하니까요. 이것이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죄를 사함 받고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따라서 지금부터 당하는 고난이나 가난은 어떤 것이든 모두 나를 사랑하셔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기쁩니다. " '그가 나를 의롭다 하시면 누가 나를 정죄 하겠느냐'고 바울은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구속받은 자유의 감격 안에서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적 화평입니다. 누구도 어떤 환경도 이 화평을 저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순교자의 얼굴은 천사 와 같습니다.
세 번째는 창조적 화평이 있습니다.
내가 화평하고야 남을 화평케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편하고야 남의 마음을 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창조적 화평으로 그것을 성취하고 계십니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을 하나로 만들어서 십자가로 화평을 성취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 2 14),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시며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신다(엡 2 : 16)"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기다리시고 회개케 하시고 용서하시고 화해하십니다. 기다림과 용서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거룩한 역사를 창조하고 계십니다. 화평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늘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막 9 50)고 하셨습니다. 소금이란 다른 물질에 들어가면 자신은 녹아 없어지지만 그 본질은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자기 형체는 비록 녹아지지만 다른 물건을 짜게 만들어 자기 본질을 그대로 지 키는 것이 소금입니다. 가령 배추나 무우에 소금을 치면 뻣뻣한 채소들이 부드러워지는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이런 화목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교만한 사람, 오만한 사람에게 소금 한번 쳐서 다들 부드럽게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도 이런 뜻에서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화목한답시고 술집에 가고, 화목한다는 미명하에 도박을 하고 있으니 언제 화목이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어디를 가나 소금처럼 자기 본질을 잃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희생함은 있으나 불의와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성결함과 깨끗한 본질을 지킬 때에만 화목이 있는 것입니다.
화평이란 사회적이고 공동체(community)적인데 비해, 거룩함은 개인적인 경건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한데 어우러져 이루어집니다. 신앙적인 문제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문제입니다. 요즘은 단결은 있으나 진리가 없고, 건설은 있으나 화평이 없습니다. 화평이란 자기 마음에 기쁨이 있고, 그리고 그가 속한 사회 전체에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가령 가정에서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참고 견디기만 하면 화평이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고요함일뿐 화평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참는 것에서는 한(恨)을 만들며 화평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인격으로 형성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진정한 화평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문제를 소화하고 기뻐하는 자세입니다.
어느 부인이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으니, 전에는 보기 싫던 남편이 갑자기 좋아지며 사는 것이 그렇게도 즐거워 졌다고 합니다. 남편이 얼마나 좋은지 잠잘 때에도 눈을 뜨고 남편을 보면서 자고 싶다고 말합니다.
화평 이란 개인적인 기쁨과 감격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대 우리 가정들은 감격도 없고 기쁨도 없습니다. 왜 이토록 불행해 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 가정 속에 깊이 파고든 쾌락주의와 한탕주의와 물질주의가 우리 가정을 병들게 하고, 따라서 우리가 사는 사회가 이토록 병들게 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요즘 미국사회에서는 소위 "Dink족"(딩크족)이라는 새로운 말이 나왔습니다. '딩크족'이란 것은 결혼의 유일한 목적은 인생을 즐기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가리켜서 현대판 쾌락주의자들이라고 합니다. 'DINK족'이란 말의 뜻은 "아이를 낳지 않고 부부가 맞벌이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Double Income, No Kid) 이들은 아이를 못 낳는 불임도 아니요, 부득이한 사정으로 출산을 연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이들은 인생을 즐기기 위하여 출산을 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부부가 맞벌이를 하게 되니 수입이 두 배가되고 거추장스러운 아이들이 없으니 풍족하게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름이나 겨울철에 부담 없이 휴가를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부부가 살다가 서로 실증이 나면 아이들 때문에 골치 아픈 일없이 간단하게 이혼을 할 수 있다는 기가 막힌 이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천지 창조 이후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 친히 주례하시고 가정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최초의 가정 제도를 제정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하시고 친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家庭은 기쁘고 즐거운 가정이어야 합니다.
사랑이 있고, 믿음이 있고, 소망이 있는 집이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가정이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찬송이 있고, 기도가 있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집이어야 합니다. 저녁이 되면 모든 하던 일손을 놓고 가족이 그립고, 보고 싶어 돌아가는 쉼이 있는 가정이어야 합니다.. 아침이 되면 배웅을 받고 일터로 향해 힘차게 나설 수 있는 가정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가정을 여호와 하나님이 바라시고 원하시는 가정입니다.
우리가 집이라고 할 때 House가 있고 Home이 있습니다. House는 돈으로 살 수 있으나, Home은 만들어지는 것이겠습니다.
가정은 하나의 작은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병들면 사회가 병들게 됩니다. 가정이 병들면 여기서부터 온갖 불행한 일들이 생겨납니다. (문제아,버려진 부모, 모두가 가정에서 생깁니다. ) 그러므로 밝고 좋은 사회, 아름답고 평화가 넘치는 사회,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신 화평한 가정을 만들도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 나가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화평 없이는 누구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 12 : 14),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원수를 용서하고 화평을 찾았을 때 하늘이 열림을 보았습니다. "
야곱은 축복 받으려는 소원으로 남달리 극성스러웠던 사람입니다. 당초 그에게 있어 축복의 개념은 물질에 있고, 그리고 가정에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여서라도 축복만 받으면, 그래서 부자만 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쫓겨나 타관에 나가서도 20년 동안이나 갖은 고생 다하면서 큰 부자가 되었고, 네 여자의 남편으로, 열 한 자녀의 아버지로, 또 한 큰 족장으로, 이른바 성공을 했습니다.
그러나 평화가 없었습니다. 형을 만나러 가다가 얍복 강변에서 얼마나 심한 고통을 겪는지 모릅니다. 재산과 가족들을 다 건네 보내고 홀로 남아서 밤새 천사와 씨름을 하며 기도를 합니다. 기도 제목은 오직 하나, 화평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형님을 이기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요 화목하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형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또한 본문은 화평과 거룩함을 좇으라고 강력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 중에서 최우선적으로 화목을 만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화평케 하는 자, 즉 화목을 만드는 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화평에는 적이 많습니다. 심리학적으로는 탐욕과 야망과 질투와 분노와 교만 등이 화평의 적입니다. 내 마음에 어두움이 있으면 이웃과의 화평이 없으며, 이웃과의 화평이 없으면 거짓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화평할 때에 비로소 주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서로 쌍둥이였지만 화목하지 못했습니다. 욕심과 이권 때문에 서로 질시하다가 비로소 재회하여 끌어안고 입 맞추는 감격을 갖게 됩니다. 이 순간을 야곱은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내가 형님의 얼굴을 보니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 "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은 감격으로 형님을 본다고 형제간의 화해의 극치를 표현했습니다. 소유보다 명예 보다 성취보다 화평이 우선임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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