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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아름다운 설 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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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의 뜻에 반대되는 말을 사용하는 반어법이 있습니다.
옛날 어른들은 이 반어법을 너무 당연히 사용하시기 때문에 신세대 사람들은 그 말을 알아 듣기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며느리의 말을 들어 보았습니다.
어머님께서 가까이 사시는데 난데 없이
"오늘 저녁 너희 집에 갈란다. 저녁은 간단히 밥 물 말아 먹고 갈란다"
그리고 대답도 할 겨를 없이 전화를 끊어 버립니다.
그래서 왜 물을 말아 먹고 오시나 이왕이면 오셔서 같이 잡수시지 생각을 하면서 그래도 어머니 오셨는데 자기들만 먹기가 미안해서 어머님 오시기 전에 신속히 먹고 상을 치웁니다.
집안에 음식냄새가 가득한데 어머니는 들어 오셔서 무엇을 주시려고 가져 오신 것들을 주섬주섬 내 놓으십니다. 아이들 양말, 시금치, 마늘 등등 말입니다.
고마워서 인사하면서
"왜 진지를 물 말아 드시고 오세요 우리와 같이 드시지요"
하고 여쭈어 보면 인상이 진지를 안 잡수신 것입니다.
쉐타를 사 드리면 입어 보고 너무 좋아 하십니다.
그래서 마음에 드시나 보다 하고 좋아하시는 것을 보고 이제 되었나 보다 하면 잠시 후에 더 밝은 색은 없냐 하시고 은근히 바꾸어 오게 하십니다.
“얘, 아가, 이번 아버지 생신엔 우리 둘이 여행 간다. 그러니 오면 헛걸음이다. 무거운 거 들고 왔다 가 그냥 가야 한다. ”
그렇다고 안 가면 큰일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전화해 놓고도 어머니는 하루종일 길에 나와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때로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망설일 때가 있기는 합니다.
이번엔 정말로 여행을 떠나시면 어떡하지
어머니 없는 빈집에 갔다 가 그냥 돌아올 수도 없고…. 생신 선물로 비싼 스웨터를 샀다가 마음에 안 드신다면 어떡하지 혼동이 될 때가 있답니다.
명절 몇 일 전 이른 아침 전화가 옵니다.
“얘, 아가. 나다. 이번 명절엔 오지 마라. 과일도, 찰떡도, 고기도 사 올 필요 없다. ”
며느리는 그 전화를 받으면서 메모합니다.
‘꼭 갈 것. 과일은 물론 찰떡에 고기까지 준비할 것!’ 이런 며느리는 그래도 센스가 빠른 며느리입니다.
이런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는 며느리들은 이해한 며느리와 이해하지 못한 며느리사이에 갈등이 커집니다.
그래서 즐겁고 아름다운 명절이 도리어 갈등과 심지어 다투는 명절이 되기 쉽습니다.
명절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힘든 날일수록 명절을 더 즐겁게 지킵니다.
우리도 금주 토요일이 설날입니다.
설날을 그리스도인으로 더욱 아름답고 은혜롭게 보내는 방법을 말씀을 통하여 발견하려 합니다.
먼저 명절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지키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희랍사람들은 세 가지를 감사하였답니다.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하고,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하고,
야만인이 아닌 희랍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남자로 태어난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고,
희랍인이 되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최고의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감사의 대상은 홀로 하나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만 드려야 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구약에 최고의 명절이 셋 있었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며 감사합니다.
오순절은 추수하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초막절은 사막을 40년간 통과하면서도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모든 필요를 때를 따라 채워 주신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명절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여호와 하나님을 모를 때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 감사하였습니다.
사람이 자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너무 적습니다.
만일 여호와 하나님께서 해를 없애시거나 공기를 혼란시키거나 물을 얻지 못하게 하시면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지하수를 개발하여 올릴 수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하수의 근본인 물을 막으시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군가
에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를 때임으로 우리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살기는 하는데 누군지 몰라서 조상에게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을 어리석게 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문제는 조상을 신으로 보는 것입니다.
부모님이나 조상은 우리의 가문을 이어 준 고마우신 분이지만 신앙의 대상은 아닙니다.
산소를 잘 쓰면 후손이 잘 되고 잘 못 쓰면 망한다는 생각은 잘 못 된 것입니다.
조상이 묻히면 흙이 되는데 어떻게 복을 줄 수가 있습니까
부모님이나 조상을 종교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유교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유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학적인 측면에서 종교가 되려면
1)신앙의 대상인 신이 있어야 하고
2)내세관이 분명해야 하고
3)도덕적으로 민중을 선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교는 중요한 신이 없습니다.
이것을 안 유생들이 죽은 조상을 신의 자리에 앉혀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의 조건을 갖추어 보려 한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신 부모님을 추모하고 그 뜻을 기려 축복의 가문을 이어 갈 수 있지만 부모님이 신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장례식에 가서 조문 하실 때는 시신이나 사진 앞에서 절하면 안 됩니다.
조화를 드리고 묵념하고 추모만 하여야 합니다.
상주와 맞절하는 것은 인사임으로 상관이 없습니다.
인사할 때는
"슬픔 중에 주님의 위로하심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
우리가 감사할 대상은 일월성신도 아닙니다.
고목나무도 아닙니다.
산도 바다도 아닙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설날에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불평스럽고 짜증나는 일도 있겠지만 나를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시편136:25~26에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면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 번 설날에는 어떤 경우라도 감사합시다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래서 아름다운 설날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설날에는 새 옷을 입습니다.
자랄 때 설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두 가지가 좋았고 기다려 졌습니다.
하나는 맛있는 것이 많습니다.
떡, 부침이, 과자, 객지에서 돌아온 가족들이 사온 사탕등등 이 기다려집니다.
두 번째는 새 옷을 입습니다.
어머니께서 설날 입도록 새 옷을 준비하면 몇 일 동안을 입어만 보고 잘 모셔 둡니다.
그리고 디 데이 설날에 쫙 입고 밖으로 나갑니다.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옷의 기원을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옷은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입습니다. 추울 때는 따뜻하라고 입습니다.
뜨거운 여름에는 햇볕에 피부를 보호하기 위하여 입습니다.
또 예의를 갖추기 위하여 입습니다.
옷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말해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모든 사람은 새 옷을 입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새옷을 입어야 할 옷이 있는데 예수님의 공로로 입은 구원의 옷입니다.
예수님은 결점이 많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편지하기를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하라" 하십니다. (계3:18)
레위기 13장에 보면 문둥병자의 옷은 불태워 버립니다.
에베소서에 "너희는 유혹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여호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4:22~24) 좀 더 새로워 집시다.
시력이 많이 떨어진 한 노인이 눈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후 시력은 회복되었으나 이번에는 기억력이 저하되기 시작했습니다.
기억력을 회복하는 치료를 장기간하며 기억력이 많이 좋아졌으나 다시 시력이 떨어졌습니다.
그는 담당의사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과거에 집착하는 기억력을 찾으시겠습니까
아니면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시력을 찾겠습니까
둘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과거를 생각하면 불평하며 짜증내면서 살겠습니까 미래를 바라보면 소망 가운데 감사하면서 사시겠습니까
말도 생각도 믿음도 새 옷을 입고 부끄러움을 가리우고 감사와 축복의 생활로 새 옷을 입는 설날이 되도록 기도하고 경건에 힘쓰는 아름다운 설날을 지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설날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저는 종종 고향을 생각합니다.
영철이와 계윤이와 함께 묘지에서 씨름하고 자치기하고 하루 종일 놀던 생각이 납니다.
지금도 가서 놀아보고 싶습니다.
도시락을 가지고 갔는데 젖가락을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답답하여 아카시아 나무를 꺽어서 나무 냄새 맡으며 밥 먹먹던 기억이 납니다.
설날이면 뽀드득 눈을 밟으면 큰 집에 가던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 품에서 따뜻하게 잠들던 생각이 납니다.
예전에 설날이면 교통이 않 좋아도 심지어 기차 지붕을 타고 그 추운데 몇 시간을 타면서 갔습니다.
고향 이북이신 분들은
"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를 부르면 서글퍼 합니다.
예멘에 43,000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2,000년을 조국을 그리며 살다가 조국이 건설되었다
는 소식을 듣고 특별한 형편의 1,000명을 제외하고 42,000명이 모든 것을 버리고 조국으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정부는 수송기로 조국으로 데려와 정착을 시켰습니다.
이들은 처음 비행기를 타지만 두렵지 않았습니다.
삼상22:11에 "바람날개 위에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 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에 믿음의 사람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한다" 하십니다.
사람은 육의 고향이 흙에 있고 영의 고향은 여호와 하나님께 있습니다.
늙을 수록 흙 냄새가 좋듯이 하늘 냄새를 그리워 하게 됩니다.
거기 하늘 나라는 영원히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습니다.
눈물도 이별도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있어서 햇볕이 쓸데 없습니다.
베드로도 인생을 나그네라고 하였습니다.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슬픔도 없네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승리만 있네
고통은 모두 다 사라져 버리고
영광만 가득하겠네
우리의 주님과 함께 있을 때는
영원한 기쁨 있겠네
설날에는 조상들이 가신 부모님이 가신 또 우리 모두 누구도 빠짐없이 가야 할 본향을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 곳을 바라보고 어떤 핍박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히11:33절 이하를 다시 읽어 보시겠습니다.
이 세상은 나그네입니다.
올 해 설날을 맞이 한다는 것은 나그네의 길이 점점 본향으로 가까워 진다는 것입니다.
소망 중에 진정으로 아름다운 설날을 맞이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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