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잃은 것을 다시 찾는 삶!
본문
오늘은 한민족의 명절인 구정입니다. 고국에서는 3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움직인다 합니다. 중국도 설인 춘절을 맞이하여 20억 이상의 사람들이 대 이동을 한다고 합니다. 고향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과도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도 늘 푸근한 삶이 되었으면 하고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금주 수요일 성회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는데,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부활절을 준비하는 참회기간을 말합니다. 부활절 전까지 6주간 반 계속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금식한 것을 본받아서 일요일을 제외한 40일을 금식기간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동방교회에서는 부활절 8주 전부터 시작하며, 토요일과 일요일을 모두 금식일에서 제외합니다. 부활절 축제 전에 준비와 금식의 기간을 지킨 것은 사도시대부터였습니다. 이 기간은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준비하는 시기였고, 죄인들에게는 참회의 기간이었습니다. 초기의 수세기 동안 금식규율은 엄격했으며, 동방교회에서는 지금도 그렇게 지키고 있습니다. 서방에서는 이 규율이 점차 완화되어 엄격한 금식 규정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면제되어 재의 수요일과 성 금요일만이 사순절 금식일로 지켜졌으나, 참회예절은 여전히 강조되고 있습니다. 영국성공회의 〈성공회 기도서〉는 사순절을 금식으로 지킬 것을 규정하고 있고 루터교를 비롯한 개신교 교회에서 사순절을 다양한 예배와 전례로 지키고 있습니다.
눅 15장에는 세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첫째 비유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잃은 양에 관한 비유요, 둘째는 잃은 동전에 관한 비유요, 셋째는 잃은 아들에 관한 비유 등이 그러합니다. 이 세 비유의 공통점은 잃어버렸으나, 다시 찾았다 하는 것이요, 이로 말미암아 기쁨과 즐거움이 풍성해졌다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6절) “나와 함께 즐기자. ”(9절) “우리가 먹고 즐거워하자. ”(24절) 이 말씀들은 잃은 것을 다시 찾은 그 마음이 얼마나 기쁜가를 진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관점은 잃은 것에 있지 아니하고, 다시 찾은 그 기쁨, 곧 이 기쁨이 얼마나 큰 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접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함께 묵상해 보며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더욱 알고자 애쓰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무슨 관계를 회복해야 하는가
1. 첫째로, 여호와 하나님과의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은 죄된 모양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 상실했던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당신이 지으시고 섭리하시던 세상이 어둠의 세상으로 빠져 방황하고 있을 때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건입니다. 주께서 오시던 그 날에 천지에 큰 별이 나타난 사건은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도 충분히 입증할 정도입니다. 주께서 강림하신 것은 우리가 연약하여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인류의 두 손을 붙잡아 주시어 삐뚤어진 역사가 제대로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던 우리가 담대히 나아가 주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내 이성과 능력으로 여호와 하나님과의 잃은 관계를 회복하게 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시련의 연속이기에, 신앙인치고 시험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찾아 볼 길이 없습니다. 때문에 주님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 6장 13절)라고 기도하라 가르쳐 주심으로써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에 의존해야 함을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자 율법을 향하여는 죽었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갈 2장 19절).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 “진리되신 주님을 향하여 사는 삶”, 이것이 분명해야 관계가 제대로 회복이 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말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장 4절)는 믿음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 믿음을 통해야만 신앙인은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가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 질 수가 있습니다. 또한 이 믿음이 있어야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전적으로 깨닫고, 우리가 저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임을 깊이 느끼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 내가 신봉하던 문자적인 믿음생활로 말미암아 영적인 세계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되어 여호와 하나님을 더욱 간절히 찾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허망한 생각과 미련한 마음”(롬 1장 21절)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잃은 양 한 마리를 보시고 너무도 기뻐하시며, 그 양을 어깨에 매시고 세상에 선포하셨습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 주님은 “자기에게 속한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요 10장 3절)주시는 분입니다. 바로 이렇게 내 이름을 아시는 주님, 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영생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는 이 주님을 다시 여러분의 중심에 모시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둘째로, 내 주변과의 잃은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기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눅 10장 27절, 마 19장 19절) 하심으로써 이웃 사랑의 고귀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말씀에 이어서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29절)라고 자신을 뻐기며 묻던 율법사에게 강도를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푼 자가 이웃이라고 하시며 “너도 이와 같이 하라”(37절)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믿음 생활에는 여호와 하나님 사랑과 더불어 이웃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던 시대에는 서로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짝하며 여호와 하나님과 멀어지면서 사람들은 서로간에도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마음 놓고 이야기할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급기야 서로의 마음을 굳게 닫고 외형적인 일만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사람들 간에는 높은 담만 쌓여 있게 됩니다. 이 악마의 책략은 친구 사이, 부부 사이, 교인 사이, 이웃 사이에도 넓은 골을 만들며, 불신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을 험담하게 하며 장점보다는 허물을 들추어 내고, 이웃보다는 자기 자신의 장점을 은밀히 헤아리게 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 13장 34절) 그렇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주님의 제자임이 분명합니다.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동안 이웃과의 잃어버린 관계를 다시 회복하게 됩니다. 이 사랑이 식어질 때에 나와 이웃간에 담이 생기며 율법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보혈로 우리 사이에 있던 이 담을 허무시고 화평이 되시어 원수 되었던 우리를 먼저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시고 내 이웃과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웃과의 잃은 관계를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장 9절)고 말씀함으로써 이웃 사랑 안에 모든 율법이 들어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는 사람과의 잃은 신뢰와 사랑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이 회복의 길은 “선으로 악을 이기며”(롬 12장 20절) 주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약 4장 10절) 이웃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셋째로, 회복의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의 자녀 여러분, 잃은 자를 다시 찾으신 우리 주님의 기쁨을 정확하게 표현할 길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실 때에 우리는 그 기쁨을 충분히 맛보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에 우리는 또한 내 자신과의 잃은 관계를 회복하게 됩니다. 서양 철학은 지금까지 바로 이 내 `자신'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으나, 답변을 찾지 못합니다. 바울도 바로 이 세상 이성에 따라 살았을 때에는 자신의 참 존재를 찾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중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자 하였고, 자기 중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다 보니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서 역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부족한 자신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온전하신 모습을 찾고자 했으나,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의 약점과 부족함을 초월하시기에 거기서 찾을 길 없었습니다. 결국 이 인격적인 여호와 하나님을 체험하고 나서 바울은 크게 깨닫고서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 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 3장 8절-9절)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의 마침은 멸망이라 했고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장 19절)고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영적으로 무장하며 살아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도와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이 잠잠히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의 심령에 폭풍우가 몰아친다 하여도, 홍수가 나서 내 영혼이 잠긴다 하여도, 내가 간절히 주를 바라볼 때에, 나를 도우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심을 굳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수 1장 6절),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막 6장 50절)고 말씀해 주심으로써 저 항구를 향하여 돛을 높게 올린 우리 모두를 안전하게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눅 15장 32절)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다시 찾으시기를 거룩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금주 수요일 성회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는데,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부활절을 준비하는 참회기간을 말합니다. 부활절 전까지 6주간 반 계속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금식한 것을 본받아서 일요일을 제외한 40일을 금식기간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동방교회에서는 부활절 8주 전부터 시작하며, 토요일과 일요일을 모두 금식일에서 제외합니다. 부활절 축제 전에 준비와 금식의 기간을 지킨 것은 사도시대부터였습니다. 이 기간은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준비하는 시기였고, 죄인들에게는 참회의 기간이었습니다. 초기의 수세기 동안 금식규율은 엄격했으며, 동방교회에서는 지금도 그렇게 지키고 있습니다. 서방에서는 이 규율이 점차 완화되어 엄격한 금식 규정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면제되어 재의 수요일과 성 금요일만이 사순절 금식일로 지켜졌으나, 참회예절은 여전히 강조되고 있습니다. 영국성공회의 〈성공회 기도서〉는 사순절을 금식으로 지킬 것을 규정하고 있고 루터교를 비롯한 개신교 교회에서 사순절을 다양한 예배와 전례로 지키고 있습니다.
눅 15장에는 세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첫째 비유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잃은 양에 관한 비유요, 둘째는 잃은 동전에 관한 비유요, 셋째는 잃은 아들에 관한 비유 등이 그러합니다. 이 세 비유의 공통점은 잃어버렸으나, 다시 찾았다 하는 것이요, 이로 말미암아 기쁨과 즐거움이 풍성해졌다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6절) “나와 함께 즐기자. ”(9절) “우리가 먹고 즐거워하자. ”(24절) 이 말씀들은 잃은 것을 다시 찾은 그 마음이 얼마나 기쁜가를 진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관점은 잃은 것에 있지 아니하고, 다시 찾은 그 기쁨, 곧 이 기쁨이 얼마나 큰 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접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함께 묵상해 보며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더욱 알고자 애쓰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무슨 관계를 회복해야 하는가
1. 첫째로, 여호와 하나님과의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은 죄된 모양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 상실했던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당신이 지으시고 섭리하시던 세상이 어둠의 세상으로 빠져 방황하고 있을 때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건입니다. 주께서 오시던 그 날에 천지에 큰 별이 나타난 사건은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도 충분히 입증할 정도입니다. 주께서 강림하신 것은 우리가 연약하여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인류의 두 손을 붙잡아 주시어 삐뚤어진 역사가 제대로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던 우리가 담대히 나아가 주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내 이성과 능력으로 여호와 하나님과의 잃은 관계를 회복하게 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시련의 연속이기에, 신앙인치고 시험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찾아 볼 길이 없습니다. 때문에 주님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 6장 13절)라고 기도하라 가르쳐 주심으로써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에 의존해야 함을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자 율법을 향하여는 죽었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갈 2장 19절).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 “진리되신 주님을 향하여 사는 삶”, 이것이 분명해야 관계가 제대로 회복이 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말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장 4절)는 믿음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 믿음을 통해야만 신앙인은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가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 질 수가 있습니다. 또한 이 믿음이 있어야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전적으로 깨닫고, 우리가 저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임을 깊이 느끼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 내가 신봉하던 문자적인 믿음생활로 말미암아 영적인 세계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되어 여호와 하나님을 더욱 간절히 찾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허망한 생각과 미련한 마음”(롬 1장 21절)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잃은 양 한 마리를 보시고 너무도 기뻐하시며, 그 양을 어깨에 매시고 세상에 선포하셨습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 주님은 “자기에게 속한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요 10장 3절)주시는 분입니다. 바로 이렇게 내 이름을 아시는 주님, 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영생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는 이 주님을 다시 여러분의 중심에 모시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둘째로, 내 주변과의 잃은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기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눅 10장 27절, 마 19장 19절) 하심으로써 이웃 사랑의 고귀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말씀에 이어서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29절)라고 자신을 뻐기며 묻던 율법사에게 강도를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푼 자가 이웃이라고 하시며 “너도 이와 같이 하라”(37절)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믿음 생활에는 여호와 하나님 사랑과 더불어 이웃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던 시대에는 서로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짝하며 여호와 하나님과 멀어지면서 사람들은 서로간에도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마음 놓고 이야기할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급기야 서로의 마음을 굳게 닫고 외형적인 일만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사람들 간에는 높은 담만 쌓여 있게 됩니다. 이 악마의 책략은 친구 사이, 부부 사이, 교인 사이, 이웃 사이에도 넓은 골을 만들며, 불신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을 험담하게 하며 장점보다는 허물을 들추어 내고, 이웃보다는 자기 자신의 장점을 은밀히 헤아리게 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 13장 34절) 그렇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주님의 제자임이 분명합니다.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동안 이웃과의 잃어버린 관계를 다시 회복하게 됩니다. 이 사랑이 식어질 때에 나와 이웃간에 담이 생기며 율법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보혈로 우리 사이에 있던 이 담을 허무시고 화평이 되시어 원수 되었던 우리를 먼저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시고 내 이웃과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웃과의 잃은 관계를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장 9절)고 말씀함으로써 이웃 사랑 안에 모든 율법이 들어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는 사람과의 잃은 신뢰와 사랑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이 회복의 길은 “선으로 악을 이기며”(롬 12장 20절) 주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약 4장 10절) 이웃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셋째로, 회복의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의 자녀 여러분, 잃은 자를 다시 찾으신 우리 주님의 기쁨을 정확하게 표현할 길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실 때에 우리는 그 기쁨을 충분히 맛보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에 우리는 또한 내 자신과의 잃은 관계를 회복하게 됩니다. 서양 철학은 지금까지 바로 이 내 `자신'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으나, 답변을 찾지 못합니다. 바울도 바로 이 세상 이성에 따라 살았을 때에는 자신의 참 존재를 찾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중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자 하였고, 자기 중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다 보니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서 역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부족한 자신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온전하신 모습을 찾고자 했으나,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의 약점과 부족함을 초월하시기에 거기서 찾을 길 없었습니다. 결국 이 인격적인 여호와 하나님을 체험하고 나서 바울은 크게 깨닫고서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 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 3장 8절-9절)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의 마침은 멸망이라 했고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장 19절)고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영적으로 무장하며 살아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도와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이 잠잠히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의 심령에 폭풍우가 몰아친다 하여도, 홍수가 나서 내 영혼이 잠긴다 하여도, 내가 간절히 주를 바라볼 때에, 나를 도우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심을 굳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수 1장 6절),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막 6장 50절)고 말씀해 주심으로써 저 항구를 향하여 돛을 높게 올린 우리 모두를 안전하게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눅 15장 32절)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다시 찾으시기를 거룩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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