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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새해 덕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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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미년을 보내고 갑신년을 맞은 음력 구정도 지났습니다. 정초에는 음력 보름까지 덕담을 나누는 전통 한국의 풍습이 있습니다. “새해 행복 하세요”의 새해 인사를 드리면서 덕담을 나누어 보려 합니다.
삶의 가치관은 삶에 대한 우리 신조의 표현입니다. 무엇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 삶의 목표와 뜻과 의미에 역점을 두고 살아가느냐,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의 방식이요 태도냐, 무엇이 소중하고 무엇이 소중하지 않은가, 이런 문제에 대한 우리의 판단과 선택과 신념이 곧 가치관입니다. 어떤 이는 현명한 판단을 내리고, 어떤 이는 어리석은 판단을 내립니다. 어떤 이는 올바른 선택을 하고, 어떤 이는 그릇된 선택을 합니다. 어떤 이는 깊은 신념을 가지고, 어떤 이는 얕은 신념을 갖습니다.
 여기에 따라 바람직한 가치관과 바람직하지 못한 가치관, 이상적 가치관과 퇴폐적 가치관, 높은 가치관과 낮은 가치관의 차이가 생깁니다. 예수는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을까 소크라테스는 왜 독배를 마셨습니까 모두가 그들의 가치관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상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온 국민이 각자 자리에서 자기의 자리에서 제 분수를 알고 제 분수에 맞게 양심에 어긋남 없이 푯대를 정하여 가야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왜 동분서주한 생활을 하는가 부와 권력을 아무리 쌓아놓아도 보람을 못 느낀다면 그 인생은 허망한 것입니다. 명예와 지위를 아무리 가져도 그에게 삶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면 무의미한 생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야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인생관이고 깊은 생활철학입니다. 목적과 수단의 체계를 이루면 인간의 목적, 인간의 궁극적인 뜻을 우리는 스스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을 위해서 물건이 있습니다.
 사물을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 조직이나 제도를 위하여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목적이요, 사물과 제도는 인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당연한 질서입니다. 그러나 목적과 수단의 가치와 질서가 전도할 때 인간의 비극과 문명의 위기가 생깁니다. 고인(古人)은 수처위주(隨處爲主)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주인이 되고 목적이 되고 주체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명명백백한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 논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왜곡되어 도착을 일으킵니다. 인간이 도구나 수단이나 물건의 자리로 전락하여서 많은 비극을 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불안한 과도기를 맞고 있습니다. 기존의 질서와 체제와 질서가 바뀌고 있습니다. 의견과 이해가 사분오열되어 있습니다. 남과 북, 노와 사, 청년과 기성의 모순이 너무나 큽니다. 거기서 오는 상처가 너무 깊습니다. 오늘의 분열과 갈등은 빨리 수습되어야 합니다. 활동적인 시민은 이미 준비를 끝냈습니다. 시민단체들은 참여 민주주의를 부르짖고 나오고 있습니다. 지도층이 아직도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창조적인 지도층이 빨리 나서야 합니다. 그들은 사리보다는 대의, 소아보다는 대아의 가치에 헌신하는 지도층이 되어야 합니다. 병든 가지는 치고, 낡은 피는 새로 갈아야 합니다. 이런 정신적 기조 위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를 모아야 하는 지도층이 안일 보다는 고뇌하고, 쾌락보다는 진통을 겪고, 수혜보다는 희생을 선택하여 나아갈 때, 어지러운 세상의 풍파, 방황은 끝날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대대적인 변화의 소명 앞에 서있습니다. 그것은 거칠게 말하면 지금까지의 천박한 물질적인 근대화가 아니라 훨씬 더 깊은 의미의 정신적 근대화를 달성해야 할 소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요구이기도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본래의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세상에 보내신 창조의 뜻에 그 목적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 목적의 실현을 위해 우리는 자아실현을 구현해야 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를 표현하면서 살아갑니다. 내가 내 마음에 창조적 표현을 할 때, 생에 기쁨이 있고 삶의 행복이 있습니다. 자기표현을 못하는 생은 불행한 생입니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활동한다는 것이요, 활동한다는 것은 자기표현을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개성으로 살아갑니다. 저마다 제 멋에 살아가야 합니다. 각각 자기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나는 나의 길을 가고 너는 너의 길이 있습니다. 내가 너의 길을 가고, 네가 나의 길을 갈 때 우리는 서로 불행합니다. 내가 나의 길을 간다는 것은 60억 인구가 모두 개성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듯이 나에게 주어진 그 천분과 재능과 특색을 발휘하면서 표현하듯이 자아실현을 하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나를 보내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가 나답게 사는 것이 인생을 인생답게 사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창조충동과 소유충동이 있습니다. 돈이나 물건을 많이 가지려는 것은 소유충동의 원인이요, 작품이나 예술을 많이 창조하려고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 창조 충동의 표현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창조충동의 만족에 있는가, 소유충동의 만족에 있는가 하면 창조충동의 만족에 인간의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많이 소유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많이 창조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 뜻을 실현하고 자아실현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그러한 인생관을 가질 때, 우리는 창조적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결같은 것은 인간의 욕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욕구 충족에서 오는 흐뭇한 정신적 만족감을 갖게 됩니다.
사랑의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가 무엇입니까 야만인과 미개인은 생물학적 욕구의 충족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들은 생존의 차원에서 살아갑니다. 하루세끼 밥이나 먹고 자녀를 낳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들은 그저 생존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지식인이고 문화인이고 교양인이고 신앙을 갖는 사람은 생물학적 생존만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원합니다. 생존의 욕구 충족만으로는 삶의 의미를 못 느낍니다. 우리는 삶의 보람을 느끼고 자아실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삶의 진정한 의미와 보람을 찾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사랑의 욕구를 주셨습니다. 인간의 욕구 중에서 애정의 욕구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이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우리는 절대로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회 사랑이 없는 사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삶을 주시고 사랑의 달란트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랑 속에는 애정의 욕구가 있습니다. 애정의 욕구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누구를 사랑하고 싶은 욕구, 또 하나는 누구에게 사랑을 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전자는 내가 애정의 주체가 되려는 것이요, 후자는 내가 애정의 객체가 되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사랑을 받고 싶은 욕구가 강합니다.
 누구를 사랑하고 싶은 욕구는 적습니다. 그러나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면 누구를 사랑하고 싶은 욕구가 점차 강해집니다.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다, 이것처럼 중요한 복합어는 없습니다. 이리하여 철학과 사색의 천재였던 희랍인들은 인간의 사랑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무엇을 사랑하느냐, 즉 사랑의 성격에 따라 사랑의 성격과 내용과 특성이 각각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옳은 통찰이요, 깊은 파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종교적인 사랑을 아가페라고 했고, 젊은 남녀간의 뜨거운 사랑을 에로스라고 했고, 넓은 의미의 인간적 우정을 필리아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수 없습니다.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동물이 아닙니다. 사랑을 먹고 사는 동물입니다. 빵은 육체의 양식이요, 사랑은 인간 영혼의 양식입니다. 아니, 전 인격의 양식입니다. 빵은 결코 영혼의 양식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인간의 주성분이라고 철학자 피히테는 말했습니다. 물이 우리의 몸의 주성분을 이루는 것처럼 사랑은 인간 존재의 주성분을 이룹니다. 소금에서 짠맛을 빼면 소금이 아닙니다. 사탕에서 단맛을 빼면 사탕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고추에서 매운 맛을 빼면 고추가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게서 사랑을 빼면 허무해집니다. 사랑이 없는 인생은 향기가 없는 꽃과 같고 꽃이 없는 화원과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을 사랑할 책임을 주셨습니다. 우리나라는 봄철인 식목일을 전후하여 아주 많은 나무를 심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90% 정도는 죽고 약 10%만이 살아난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돌보지 않아서 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을 맡겨주셨습니다. 잘 관리하고 돌보아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갈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의 첫 번째 사명은 세상을 향한 관심과 사랑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구석구석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품은 그리스도인들이 깊은 관심과 사랑을 행함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점점 거룩하고 아름답게 가꾸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사랑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궁극적인 이유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독생자를 보내신 이유가 무엇인가 타락한 세상과 피조물들의 탄식을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화해입니다. 타락한 세상과 인간들의 마지막은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만 정해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과 인간들을 위해 영원한 화해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적인 이유인 것입니다. 교회가 그 사회의 책임사회를 위해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관심과 책임과 이해와 헌신이 따릅니다. 교회가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사회에 대한 관심과 이해로 접근해 가야하며 주어진 현실적 삶의 형태와 그 상황에 대해 현상적인 책임과 헌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회에 대한 교회의 사명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는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위한 작업 그리고 구조적 결의의 회복의 과제를 수행하는 일과 더불어 자본주의 사회가 간과하기 쉬운 인간의 존엄성 회복의 문제를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 요소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경쟁적 사회에서 경쟁에 뒤진 이들 효율적 사회에서 뒤진 장애자들을 돌보는 일 그리고 경쟁과 효율성을 가지지 못한 아이들 그리고 노인들의 인권보호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는 의식적으로 사회 정책에 대하여 비판 평가 그리고 창안할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사회 내 약한 이들을 도와 인간 피해의 최소화를 기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경쟁을 유발시키거나 부추김으로서 자본주의의 사회적 원리를 이용하여 외적인 가치에 성공의 척도를 두는 일을 삼가야 할뿐 아니라 영적인 가치의 확대를 선포하는 것이 옳으며 또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교회는 먼저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어야 하며 나아가서 우리의 사회와 세계를 위한 책임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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