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본문
민족의 최대의 명절인 설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고향과 부모님을 찾아갔습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님들 가운데 많은 분들도 고향을 찾아갔고 이 예배를 마친 후에 많은 가족들이 이동하리라 생각됩니다. 안전 운행하시고 즐거운 설날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지난 수요일에도 잠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주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설날’에서 ‘설’이라는 우리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자료들을 찾아 보았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있는데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설날은 ‘낯설다’라는 말의 어근인 ‘설’에서 그 어원을 찾는 것입니다. ‘새해에 대한 낯설음’ ‘아직 익숙하지 않은 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설날은 묵은 해가 가고 새해가 왔는데 그 새 날이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삼가다’ 또는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라는 뜻의 옛말인 ‘섧다'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합니다. 새로운 시간 질서에 완전히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언행을 조심하여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세째는 설날은 ‘선날’ 즉 개시라는 뜻의 ‘선다’라는 말에서 ‘새해 새날이 시작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선날’이 시간이 흐르면서 연음화 되어 설날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들의 첫날이라는 의미의 설날이 주는 시간적인 의미는 매우 미래 지향적입니다. 그런데 그 미래 지향적인 시간인 설날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과거 지향적인 행동을 보입니다. 새해를 맞아 어른들과 조상들을 찾아 뵙고 새해 인사를 드린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그러나 조상들에게 제사를 드리며 복을 비는 전통의식 뒷면에는 미래에 대한 도전의식 보다는 과거라는 경험의 세계에서 편안함을 느껴 보려고 하는 과거 지향적인면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현재와 과거의 편함과 경험을 통해 익숙한 의식과 환경을 떠나 새로운 미래의 세계를 향해 과감하게 떠났던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의 새로운 시작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임하셔서 그를 복의 근원으로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미래에 대한 약속을 주시면서 고향과 친척과 부모를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는 비전을 주시며 그 비전은 묵은 땅, 묵은 관습, 묵은 의식, 묵은 관계로부터의 떠남에서 시작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정든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여호와 하나님의 가치의 세계로 떠나는 아브라함을 향해 여호와 하나님은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설날을 맞아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하신 선포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선포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을 향해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라 고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선포를 통해 진정한 복이 무엇인가를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어거스터스’라는 작품속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내외분이 오랫동안 아기가 없어서 몹시도 애를 태우다가 마침내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온 집안이 기뻐했습니다. 그 부부의 기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아이의 어머니 꿈에 한 신비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 아이를 위해서 한 가지 소원을 말하라. 그 소원을 내가 들어주마’ 라고 말했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어떤 소원을 빌까 고민하다가 ‘내 아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살아가게 해 주십시오’ 라고 소원을 말했습니다. 그 노인은 그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자라면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습니다. 선생님과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습니다. 어느 날 그 신비한 노인이 아이 어머니의 꿈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래 아이가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니 만족하느냐’ 하고 아이 어머니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아이가 자라면서 사랑만 받다 보니 자기는 당연히 사랑을 받아야 될 줄로 알아 이기적이고 교만해져서 극단적인 정신적 미숙아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신비한 노인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내 아이가 사랑 받기 보다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라고 간절히 요청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설날을 맞이해 우리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소원들이 있는 줄 압니다. 어떤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게 해 달라는 소원이 있습니까 더 많은 재물을 얻고, 질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게 해 달라는 소원이 있습니까 모두가 귀한 소원입니다. 그런데 혹시 성도 여러분들 가운데 ‘금년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위로 받기 보다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로하고 많는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라는 소원을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하는 분이 계십니까
우리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면 행복할 것이고 그것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소유의 욕망은 어느 순간에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채우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사람의 욕심이고 욕망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행복은 얼마나 소유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만족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얼마나 받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베풀며 사느냐에 있습니다. 받는 복되 좋지만 주는 복은 더 크다는 말입니다. 진정한 복은 베푸는데서 나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받는 자 보다 주는 자가 더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네 고향, 친척, 아비를 떠나라’고 명령하시면서 그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고 축복하십니다. ‘네가 복되게 살이라’가 아니고 ‘네가 복의 근원이 되리라’입니다. 이 말씀은 ‘너도 행복하지만 너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놀라운 축복입니다. 진정한 축복은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성데 다른 사람들이 불행하면 그것은 진정한 복이 아닙니다.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 할 때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고 축복입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가지고 주변의 사람들과 다른 족속들로 하여금 복되게 만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를 가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번 설을 쇠면서 온 가족들이 모여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기도를 올릴 때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의 가정이, 우리 교회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사는 가운데 복의 근원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난 주 같은 날에 일어난 두 가지의 사건을 보면서 행복과 희망을 만드는 지혜와 불행과 절망은 만드는 어리석음을 보았습니다. 지난 20일에 버락 오바마가 미국의 44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는 취임사에서 네 가지의 정신을 강조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봉사입니다.
오바마는 미국의 국민들에게 미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그는 경제적인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모든 국민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국민들에게 남들을 도울 수 있는 여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팔을 걷어 붙이고 일어나 주변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자고 호소했습니다. 그의 호소는 국민들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조금이라도 남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봉사를 선언하기 시작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미국과 우리나라 사이에 약간의 시차는 있습니다만 같은 날 우리나라에서는 용산 뉴타운 재개발을 진행하는 가운데 ‘용산 참사’라는 비참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건을 보는 시각에 따라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 사이에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의 내면을 보면 더 크고, 더 넓고, 더 쾌적한 주거 환경을 만들기 위해 가난하고 삶에 지친 많은 사람들의 보금자리와 삶의 터전이 눈물과 고통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밀어 붙이면 결국 저항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밀려나 약자의 서러움과 화를 품고 더 어두운 곳으로 내려갑니다.
그러나 경제 성장과 발전이라는 명분에 밀려 약자들이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 사회가 행복한 사회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배려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를 성숙한 사회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권력의 힘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더 가진 사람이 없는 사람을 향해 봉사할 것을 호소하는 사회와 권력의 힘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더 가진 사람이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약자들을 힘으로 밀어 붙이는 사회 중 어디가 더 행복하고 성숙한 사회인가를 묻는 것은 우문 중의 우문입니다. 권력과 법은 약자의 편이어야 합니다. 강자에게는 사실은 권력과 법이 필요없습니다. 그들은 권력과 법을 지배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과 법이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입니다. 좀더 가진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베푸는 정신이 살아 있는 곳이 행복한 사회입니다.
우리 홈피 게시판에 ‘세계를 감동시킨 사진 한 장’이라는 제목으로 김홍석 장로님께서 글을 올렸습니다. 그 사진과 글을 읽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 사진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이 사진입니다.
잭 캘리라는 기자가 소말리아의 비극을 취재하다가 겪은 경험담과 함께 실은 사진입니다. 소말리아는 극한 기근으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기자가 한 마을에 들어 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어 있었습니다. 기자는 한 작은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소년은 온 몸이 벌레에 물려 있었고, 영양실조로 배는 불룩했습니다. 머리카락은 빨갛게 변해 있었고 피부는 백살이나 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마침 일행 중의 한 사진 기자가 과일 하나를 갖고 있어서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너무 허약해서 그것을 들고 있을 힘이 없었습니다. 기자는 그것을 반으로 잘라서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소년을 그것을 받아 들고는 고맙다는 눈짓을 하더니 마을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기자 일행이 소년의 뒤를 따라갔지만 소년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소년이 마을에 들어섰을 때 이미 죽은 것처럼 보이는 한 작은 아이가 땅바닥에 누워있었습니다. 아이의 눈은 완전히 감겨 있었습니다. 이 작은 아이는 소년의 동생이었습니다. 형은 자신의 동생 곁에 무릎을 꿇더니 손에 쥐고 있던 과일을 한입 베어서는 그것을 씹었습니다. 그리고는 동생의 입을 벌리고는 그것을 입 안에 넣어 주었습니다. 소년은 동생의 턱을 잡고 입을 벌렸다 오므렸다 하면서 동생이 씹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기자 일행은 그 소년이 자기 동생을 위해 보름 동안이나 그렇게 해 온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결국 소년은 영양실조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동생은 끝내 살아 남았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게시판에서 본 이 그림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소년이 과일을 한입 물어 그 과일을 씹어 동생의 입에 넣어주고 손으로 동생의 턱을 잡고 벌렸다 오므렸다를 반복하며 동생을 먹일 때와 자신이 먹을 때와 어느 때가 더 행복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신의 주린 배를 채우는 것도 행복하지만 아마 자신의 것을 나누어 동생에게 사랑으로 먹일 때가 더 행복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행복은 베푸는 마음에 있습니다. 복은 나누는 곳에서 더 풍성해 집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통곡과 울부짖음을 뒤로 하고 누리는 풍요는 진정한 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소박한 삶의 자리를 무너뜨리고 그 위에 마천루를 쌓아 올리다 해도 그곳이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함께 나누고, 조금 더디 가더라도 함께 끌어 앉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며 발전하는 사회가 행복한 것이고, 그 사람들이 성숙한 사람들입니다.
즐거운 명절입니다. 즐거운 명절이지만 함께 모인 가족들 가운데서도 가장 어려운 가족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사랑과 정을 나눌 수 있는 명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는 명절이 되면 더 외로워하고 힘들어 하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조금이라도 더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명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언제나 세상에서 약한 자들의 친구가 되고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그것을 우리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나눔으로 진정한 복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수요일에도 잠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주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설날’에서 ‘설’이라는 우리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자료들을 찾아 보았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있는데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설날은 ‘낯설다’라는 말의 어근인 ‘설’에서 그 어원을 찾는 것입니다. ‘새해에 대한 낯설음’ ‘아직 익숙하지 않은 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설날은 묵은 해가 가고 새해가 왔는데 그 새 날이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삼가다’ 또는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라는 뜻의 옛말인 ‘섧다'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합니다. 새로운 시간 질서에 완전히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언행을 조심하여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세째는 설날은 ‘선날’ 즉 개시라는 뜻의 ‘선다’라는 말에서 ‘새해 새날이 시작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선날’이 시간이 흐르면서 연음화 되어 설날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들의 첫날이라는 의미의 설날이 주는 시간적인 의미는 매우 미래 지향적입니다. 그런데 그 미래 지향적인 시간인 설날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과거 지향적인 행동을 보입니다. 새해를 맞아 어른들과 조상들을 찾아 뵙고 새해 인사를 드린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그러나 조상들에게 제사를 드리며 복을 비는 전통의식 뒷면에는 미래에 대한 도전의식 보다는 과거라는 경험의 세계에서 편안함을 느껴 보려고 하는 과거 지향적인면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현재와 과거의 편함과 경험을 통해 익숙한 의식과 환경을 떠나 새로운 미래의 세계를 향해 과감하게 떠났던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의 새로운 시작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임하셔서 그를 복의 근원으로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미래에 대한 약속을 주시면서 고향과 친척과 부모를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는 비전을 주시며 그 비전은 묵은 땅, 묵은 관습, 묵은 의식, 묵은 관계로부터의 떠남에서 시작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정든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여호와 하나님의 가치의 세계로 떠나는 아브라함을 향해 여호와 하나님은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설날을 맞아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하신 선포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선포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을 향해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라 고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선포를 통해 진정한 복이 무엇인가를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어거스터스’라는 작품속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내외분이 오랫동안 아기가 없어서 몹시도 애를 태우다가 마침내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온 집안이 기뻐했습니다. 그 부부의 기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아이의 어머니 꿈에 한 신비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 아이를 위해서 한 가지 소원을 말하라. 그 소원을 내가 들어주마’ 라고 말했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어떤 소원을 빌까 고민하다가 ‘내 아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살아가게 해 주십시오’ 라고 소원을 말했습니다. 그 노인은 그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자라면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습니다. 선생님과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습니다. 어느 날 그 신비한 노인이 아이 어머니의 꿈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래 아이가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니 만족하느냐’ 하고 아이 어머니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아이가 자라면서 사랑만 받다 보니 자기는 당연히 사랑을 받아야 될 줄로 알아 이기적이고 교만해져서 극단적인 정신적 미숙아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신비한 노인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내 아이가 사랑 받기 보다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라고 간절히 요청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설날을 맞이해 우리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소원들이 있는 줄 압니다. 어떤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게 해 달라는 소원이 있습니까 더 많은 재물을 얻고, 질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게 해 달라는 소원이 있습니까 모두가 귀한 소원입니다. 그런데 혹시 성도 여러분들 가운데 ‘금년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위로 받기 보다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로하고 많는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라는 소원을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하는 분이 계십니까
우리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면 행복할 것이고 그것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소유의 욕망은 어느 순간에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채우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사람의 욕심이고 욕망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행복은 얼마나 소유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만족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얼마나 받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베풀며 사느냐에 있습니다. 받는 복되 좋지만 주는 복은 더 크다는 말입니다. 진정한 복은 베푸는데서 나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받는 자 보다 주는 자가 더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네 고향, 친척, 아비를 떠나라’고 명령하시면서 그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고 축복하십니다. ‘네가 복되게 살이라’가 아니고 ‘네가 복의 근원이 되리라’입니다. 이 말씀은 ‘너도 행복하지만 너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놀라운 축복입니다. 진정한 축복은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성데 다른 사람들이 불행하면 그것은 진정한 복이 아닙니다.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 할 때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고 축복입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가지고 주변의 사람들과 다른 족속들로 하여금 복되게 만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를 가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번 설을 쇠면서 온 가족들이 모여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기도를 올릴 때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의 가정이, 우리 교회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사는 가운데 복의 근원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난 주 같은 날에 일어난 두 가지의 사건을 보면서 행복과 희망을 만드는 지혜와 불행과 절망은 만드는 어리석음을 보았습니다. 지난 20일에 버락 오바마가 미국의 44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는 취임사에서 네 가지의 정신을 강조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봉사입니다.
오바마는 미국의 국민들에게 미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그는 경제적인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모든 국민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국민들에게 남들을 도울 수 있는 여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팔을 걷어 붙이고 일어나 주변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자고 호소했습니다. 그의 호소는 국민들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조금이라도 남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봉사를 선언하기 시작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미국과 우리나라 사이에 약간의 시차는 있습니다만 같은 날 우리나라에서는 용산 뉴타운 재개발을 진행하는 가운데 ‘용산 참사’라는 비참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건을 보는 시각에 따라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 사이에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의 내면을 보면 더 크고, 더 넓고, 더 쾌적한 주거 환경을 만들기 위해 가난하고 삶에 지친 많은 사람들의 보금자리와 삶의 터전이 눈물과 고통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밀어 붙이면 결국 저항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밀려나 약자의 서러움과 화를 품고 더 어두운 곳으로 내려갑니다.
그러나 경제 성장과 발전이라는 명분에 밀려 약자들이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 사회가 행복한 사회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배려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를 성숙한 사회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권력의 힘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더 가진 사람이 없는 사람을 향해 봉사할 것을 호소하는 사회와 권력의 힘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더 가진 사람이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약자들을 힘으로 밀어 붙이는 사회 중 어디가 더 행복하고 성숙한 사회인가를 묻는 것은 우문 중의 우문입니다. 권력과 법은 약자의 편이어야 합니다. 강자에게는 사실은 권력과 법이 필요없습니다. 그들은 권력과 법을 지배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과 법이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입니다. 좀더 가진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베푸는 정신이 살아 있는 곳이 행복한 사회입니다.
우리 홈피 게시판에 ‘세계를 감동시킨 사진 한 장’이라는 제목으로 김홍석 장로님께서 글을 올렸습니다. 그 사진과 글을 읽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 사진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이 사진입니다.
잭 캘리라는 기자가 소말리아의 비극을 취재하다가 겪은 경험담과 함께 실은 사진입니다. 소말리아는 극한 기근으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기자가 한 마을에 들어 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어 있었습니다. 기자는 한 작은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소년은 온 몸이 벌레에 물려 있었고, 영양실조로 배는 불룩했습니다. 머리카락은 빨갛게 변해 있었고 피부는 백살이나 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마침 일행 중의 한 사진 기자가 과일 하나를 갖고 있어서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너무 허약해서 그것을 들고 있을 힘이 없었습니다. 기자는 그것을 반으로 잘라서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소년을 그것을 받아 들고는 고맙다는 눈짓을 하더니 마을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기자 일행이 소년의 뒤를 따라갔지만 소년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소년이 마을에 들어섰을 때 이미 죽은 것처럼 보이는 한 작은 아이가 땅바닥에 누워있었습니다. 아이의 눈은 완전히 감겨 있었습니다. 이 작은 아이는 소년의 동생이었습니다. 형은 자신의 동생 곁에 무릎을 꿇더니 손에 쥐고 있던 과일을 한입 베어서는 그것을 씹었습니다. 그리고는 동생의 입을 벌리고는 그것을 입 안에 넣어 주었습니다. 소년은 동생의 턱을 잡고 입을 벌렸다 오므렸다 하면서 동생이 씹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기자 일행은 그 소년이 자기 동생을 위해 보름 동안이나 그렇게 해 온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결국 소년은 영양실조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동생은 끝내 살아 남았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게시판에서 본 이 그림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소년이 과일을 한입 물어 그 과일을 씹어 동생의 입에 넣어주고 손으로 동생의 턱을 잡고 벌렸다 오므렸다를 반복하며 동생을 먹일 때와 자신이 먹을 때와 어느 때가 더 행복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신의 주린 배를 채우는 것도 행복하지만 아마 자신의 것을 나누어 동생에게 사랑으로 먹일 때가 더 행복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행복은 베푸는 마음에 있습니다. 복은 나누는 곳에서 더 풍성해 집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통곡과 울부짖음을 뒤로 하고 누리는 풍요는 진정한 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소박한 삶의 자리를 무너뜨리고 그 위에 마천루를 쌓아 올리다 해도 그곳이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함께 나누고, 조금 더디 가더라도 함께 끌어 앉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며 발전하는 사회가 행복한 것이고, 그 사람들이 성숙한 사람들입니다.
즐거운 명절입니다. 즐거운 명절이지만 함께 모인 가족들 가운데서도 가장 어려운 가족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사랑과 정을 나눌 수 있는 명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는 명절이 되면 더 외로워하고 힘들어 하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조금이라도 더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명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언제나 세상에서 약한 자들의 친구가 되고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그것을 우리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나눔으로 진정한 복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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