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행복은 원한 있는 자의 것이다
본문
지난 주간은 우리 명절 가운데 가장 큰 설날이었습니다. 설날이 되면 우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는 축복을 합니다. 그 축복과 덕담의 내용은 대부분 5복이라고 일컫는 부귀, 장수, 강녕, 유호덕, 고종명 등일 것입니다. 그야말로 미풍양속인 것 같습니다. 한 해 동안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덕담을 나눕니다.
우리 민족은 유달리 예로부터 복에 집착한 것 같습니다. 옷에도 ’福’(복) 자를 새기고 밥그릇에도 숟가락에도 젓가락에도 방석에도 이불에도 심지어는 장판과 벽지에도 온통 새겨 놓습니다. 그런데 복받으라는 축복을 많이 해주지만 실은 자기가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복 자가 새겨진 물건들을 사다가 자기 집에 두는 것입니다. 복주머니나 복조리를 사서 남 주는 것 보았습니까 자기 집에 문에 걸어 놓지 않습니까 심지어는 남이 꾼 ’복 꿈’까지 자기가 받고 싶어서 자기가 돈을 주고라도 사 버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설날 복받으라고 해서 그 복을 받는 사람 보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순수한 아이들도 어른들에게 ’복 많이 받으십시오’ 라고 절을 하지만 어른 들이 실제로 그 복을 받으리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절을 한 다음에 어른들이 덕담을 해 주어도 그 덕담이 자기에게 이루어 진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아주 관심조차 없습니다. 세배 돈 외에는… 저는 그 아이들의 마음을 잘 알고 ’복 많이 받으세요~’하면 ’니나 많이 받아라~’ 합니다. 물론 속으로 그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새 목적을 잃고 방편에만 얽매이고 있습니다. 삶의 목적인 행복은 추구하지 않고 수단들인 5복만 추구합니다. 수단들이 얻어져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고 수단들이 부족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수단들이 풍족해도 행복을 잃어버린다면, 행복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풍요로울 수 없습니다. 영과 육을 불문하고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기를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本論
1. 행복은 원한을 많이 가진 자가 얻게 됩니다.
어떤 도시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과부는 어떤 내용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남편이 없으므로 인하여 심히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 과부는 그를 억울하게 한 원수에 대한 원한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과부는 그 억울한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었습니다. 주변에도 그 억울한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과부를 억울하게 한 원수는 그 과부가 어떻게 할 수 없는 형편에 있다는 것을 알고 더욱 담대했습니다. 그 과부는 원수에 대한 원한이 점점 사무쳤습니다. 스스로 원수를 갚을 능력도 없고 주변에서 도와줄 사람도 없지만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원수를 갚아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이제 그 과부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므로 원수를 갚아야 하겠다는 마음이 강해집니다. 그래서 그 과부는 그 도시를 책임지는 재판관에게 상소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재판관은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이지만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줄 자는 그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그의 상소를 들어줄 리가 없었습니다. 듣는 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부는 매일 같이 찾아가 울면서 원한을 풀어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속으로 ’오늘 안 들어 주면 내일 또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생각하고는 그의 상소를 들어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 18:2-5의 내용을 각색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이야기를 하고 나서 선언하기를 ’불의한 재판관도 밤낮 부르짖는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는데 하물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한 백성의 원한을 풀어 주시지 않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눅18:6-8). 여호와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입니다.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십니다 (시7:11, 68:5). 원한을 많이 가진 자일수록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며 지속적으로 구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를 괴롭게 하는 원수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①마귀입니다 (베드로전서5:8). ②죄입니다 (히브리서12:4). ③우리 자신입니다 (고린도전서9:27, 마15:19-20, 막7:21~23). ④여호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나가는 데 방해 되는 모든 환경입니다 (마태복음16:23). 그런 것들이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 갑니다.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고 고통을 당하게 합니다. 그 원수들에 대한 원한을 가져야 합니다.
원한을 적극적인 용어로 바꾼다면 소원에 대한 열망입니다. 무엇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행각합니까 우리 나라에 이름만 대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부자가 한 말이 있습니다. 그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어느 목사님이 그분을 만나서 ”회장님은 행복하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 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행복이라고 나는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항상 초조하고 불안하다네. ” 물질이 행복의 조건은 아닙니다. 우리는 물질과 건강과 명예에 만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에 소원을 두어야 합니다. 자기의 인격이 만들어지지 못한 것, 여호와 하나님 말씀의 은혜를 입지 못하는 것, 성령의 감동을 좇지 못한 것, 자기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 등 때문에 진정한 행복이 없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 그것을 얻고자 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양보하고라도 그것을 얻고자 하는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
사무엘상 1장과 2장에 보면, 엘가나의 아내 한나는 브닌나에게 많은 멸시와 무시와 모욕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브닌나는 아들을 낳았고 한나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나는 아들이 없으므로 인하여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에 원한을 가졌습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에 여호와 하나님의 묵시가 그쳐져 이스라엘을 블레셋 가운데서 구원할 자가 없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들어가 엘리 제사장이 볼 때에 술에 취한 것으로 오해를 할 정도로 여호와 하나님께 마음을 토해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한나의 기도를 들으셔서 사무엘을 낳게 했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 구원운동을 하셨습니다. 한나로 하여금 이런 기도하게 된 것은 고난으로 인한 원한과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위한 열망이 컸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원한을 가지기 바랍니다. 열의를 가지기를 바랍니다.
2. 행복은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자가 얻게 됩니다.
사오정 시리즈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사오정이 식당에 갔습니다. 사오정이 식당 주인에게 자기가 먹을 것을 주문합니다. ”아저씨, 돈까스와 우유 주세요. ” ”돈까스는 없습니다. ” ”그러면 돈까스와 커피주세요. ” ”돈까스는 없단 말입니다. ” ”아, 알았습니다. 그러면 돈까스만 주세요. ” 그냥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유머이지만, 이렇듯 상대방이 뭐라고 그러던 집요하게 계속해서 자기의 메뉴를 고집하는 이 사오정의 우직함이 우리 신앙인에게도 필요합니다. 이 끈기 있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끈질긴 집요함을 가지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한다면 분명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실 것입니다.
기도란 해바라기 꽃과 같습니다. 아침에 동쪽을 향하여 몸을 돌리는 해바라기는 어두움 속에서 찬란하게 떠오른 해를 사모하며 기다립니다. 점심 때가 되고 저녁 노을이 질 때까지 해바라기는 계속 해를 움직입니다. 해가 져서 캄캄한 밤이 되어도 해바라기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내일 또 다시 해가 뜰 것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캄캄한 밤에도 해바라기는 쉬지 않고 계속 자기의 몸을 해가 뜨는 동쪽으로 움직입니다. 기도란 해바라기가 빛을 필요로 하여 계속 빛을 향해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식구들을 데리고 먼 길을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여행을 하다가 보니 먹을 것이 다 떨어지고 몸이 기진맥진해졌습니다. 자기 아내와 자식들이 굶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가까운 친구를 찾아가기로 마음먹고는 밤 중에 그 친구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며 떡 세덩어리만 빌려 달라고 강청했습니다. 친구는 잠을 자기 위해 온 식구가 침소에 들었습니다. 다시 일어나 옷을 입고 나가서 떡을 찾아 준다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습니다. 그도 그렇지만 어려워서 먹을 것을 빌리러 온 이에게 무엇을 빌려 준다는 것은 마음에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주식형제는 천인유요 급난붕우는 일인 무라’고 하지만 그 애원하는 친구의 소리를 들으며 안 된다고 거절할 수 없어서 일어나 떡을 주었습니다 (눅11:5-7).
주님은 이 이야기를 하고 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고 선언했습니다 (눅11:8-13).
그러므로 응답받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합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21일 동안 작정기도를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다니엘이 기도하기를 작정한 날부터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시기로 생각하고 가브리엘 천사(계시전달을 맡은 천사장)를 통해 응답 내용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서 바사국군으로 비유된 사탄이 가로 막았습니다. 그래서 미가엘 천사(전쟁을 수행하는 천사장)가 와서 대신 싸워 주었습니다. 그래서 미가엘이 사탄을 물리치고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을 가지고 도착한 날이 21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단9:21-). 그러므로 기도는 도중에 그만두면 안됩니다. 작정한 날을 다 채우기가지, 응답이 있을 때까지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모니카는 16년 만에 기도가 이루어졌고, 죠지뮬러는 38년만에 이루어진 내용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것이 있을 지라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에스겔36:37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고 했고, 야고보1:5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結言
우리는 우리가 누구 때문에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지 심각하게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로 인하여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데 대한 사무친 원한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께 원수를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이 없어서 불행한지 생각하고 그 문제를 붙들고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에 행복에 대한 소원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다른 길을 모색하지 않겠습니다.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여호와 하나님이 해결해 주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음의 선한 소원을 이루어 주시지 않는 한 나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는 비장한 열의를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은 유달리 예로부터 복에 집착한 것 같습니다. 옷에도 ’福’(복) 자를 새기고 밥그릇에도 숟가락에도 젓가락에도 방석에도 이불에도 심지어는 장판과 벽지에도 온통 새겨 놓습니다. 그런데 복받으라는 축복을 많이 해주지만 실은 자기가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복 자가 새겨진 물건들을 사다가 자기 집에 두는 것입니다. 복주머니나 복조리를 사서 남 주는 것 보았습니까 자기 집에 문에 걸어 놓지 않습니까 심지어는 남이 꾼 ’복 꿈’까지 자기가 받고 싶어서 자기가 돈을 주고라도 사 버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설날 복받으라고 해서 그 복을 받는 사람 보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순수한 아이들도 어른들에게 ’복 많이 받으십시오’ 라고 절을 하지만 어른 들이 실제로 그 복을 받으리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절을 한 다음에 어른들이 덕담을 해 주어도 그 덕담이 자기에게 이루어 진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아주 관심조차 없습니다. 세배 돈 외에는… 저는 그 아이들의 마음을 잘 알고 ’복 많이 받으세요~’하면 ’니나 많이 받아라~’ 합니다. 물론 속으로 그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새 목적을 잃고 방편에만 얽매이고 있습니다. 삶의 목적인 행복은 추구하지 않고 수단들인 5복만 추구합니다. 수단들이 얻어져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고 수단들이 부족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수단들이 풍족해도 행복을 잃어버린다면, 행복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풍요로울 수 없습니다. 영과 육을 불문하고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기를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本論
1. 행복은 원한을 많이 가진 자가 얻게 됩니다.
어떤 도시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과부는 어떤 내용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남편이 없으므로 인하여 심히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 과부는 그를 억울하게 한 원수에 대한 원한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과부는 그 억울한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었습니다. 주변에도 그 억울한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과부를 억울하게 한 원수는 그 과부가 어떻게 할 수 없는 형편에 있다는 것을 알고 더욱 담대했습니다. 그 과부는 원수에 대한 원한이 점점 사무쳤습니다. 스스로 원수를 갚을 능력도 없고 주변에서 도와줄 사람도 없지만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원수를 갚아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이제 그 과부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므로 원수를 갚아야 하겠다는 마음이 강해집니다. 그래서 그 과부는 그 도시를 책임지는 재판관에게 상소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재판관은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이지만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줄 자는 그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그의 상소를 들어줄 리가 없었습니다. 듣는 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부는 매일 같이 찾아가 울면서 원한을 풀어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속으로 ’오늘 안 들어 주면 내일 또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생각하고는 그의 상소를 들어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 18:2-5의 내용을 각색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이야기를 하고 나서 선언하기를 ’불의한 재판관도 밤낮 부르짖는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는데 하물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한 백성의 원한을 풀어 주시지 않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눅18:6-8). 여호와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입니다.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십니다 (시7:11, 68:5). 원한을 많이 가진 자일수록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며 지속적으로 구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를 괴롭게 하는 원수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①마귀입니다 (베드로전서5:8). ②죄입니다 (히브리서12:4). ③우리 자신입니다 (고린도전서9:27, 마15:19-20, 막7:21~23). ④여호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나가는 데 방해 되는 모든 환경입니다 (마태복음16:23). 그런 것들이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 갑니다.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고 고통을 당하게 합니다. 그 원수들에 대한 원한을 가져야 합니다.
원한을 적극적인 용어로 바꾼다면 소원에 대한 열망입니다. 무엇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행각합니까 우리 나라에 이름만 대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부자가 한 말이 있습니다. 그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어느 목사님이 그분을 만나서 ”회장님은 행복하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 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행복이라고 나는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항상 초조하고 불안하다네. ” 물질이 행복의 조건은 아닙니다. 우리는 물질과 건강과 명예에 만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에 소원을 두어야 합니다. 자기의 인격이 만들어지지 못한 것, 여호와 하나님 말씀의 은혜를 입지 못하는 것, 성령의 감동을 좇지 못한 것, 자기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 등 때문에 진정한 행복이 없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 그것을 얻고자 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양보하고라도 그것을 얻고자 하는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
사무엘상 1장과 2장에 보면, 엘가나의 아내 한나는 브닌나에게 많은 멸시와 무시와 모욕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브닌나는 아들을 낳았고 한나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나는 아들이 없으므로 인하여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에 원한을 가졌습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에 여호와 하나님의 묵시가 그쳐져 이스라엘을 블레셋 가운데서 구원할 자가 없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들어가 엘리 제사장이 볼 때에 술에 취한 것으로 오해를 할 정도로 여호와 하나님께 마음을 토해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한나의 기도를 들으셔서 사무엘을 낳게 했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 구원운동을 하셨습니다. 한나로 하여금 이런 기도하게 된 것은 고난으로 인한 원한과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위한 열망이 컸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원한을 가지기 바랍니다. 열의를 가지기를 바랍니다.
2. 행복은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자가 얻게 됩니다.
사오정 시리즈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사오정이 식당에 갔습니다. 사오정이 식당 주인에게 자기가 먹을 것을 주문합니다. ”아저씨, 돈까스와 우유 주세요. ” ”돈까스는 없습니다. ” ”그러면 돈까스와 커피주세요. ” ”돈까스는 없단 말입니다. ” ”아, 알았습니다. 그러면 돈까스만 주세요. ” 그냥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유머이지만, 이렇듯 상대방이 뭐라고 그러던 집요하게 계속해서 자기의 메뉴를 고집하는 이 사오정의 우직함이 우리 신앙인에게도 필요합니다. 이 끈기 있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끈질긴 집요함을 가지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한다면 분명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실 것입니다.
기도란 해바라기 꽃과 같습니다. 아침에 동쪽을 향하여 몸을 돌리는 해바라기는 어두움 속에서 찬란하게 떠오른 해를 사모하며 기다립니다. 점심 때가 되고 저녁 노을이 질 때까지 해바라기는 계속 해를 움직입니다. 해가 져서 캄캄한 밤이 되어도 해바라기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내일 또 다시 해가 뜰 것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캄캄한 밤에도 해바라기는 쉬지 않고 계속 자기의 몸을 해가 뜨는 동쪽으로 움직입니다. 기도란 해바라기가 빛을 필요로 하여 계속 빛을 향해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식구들을 데리고 먼 길을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여행을 하다가 보니 먹을 것이 다 떨어지고 몸이 기진맥진해졌습니다. 자기 아내와 자식들이 굶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가까운 친구를 찾아가기로 마음먹고는 밤 중에 그 친구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며 떡 세덩어리만 빌려 달라고 강청했습니다. 친구는 잠을 자기 위해 온 식구가 침소에 들었습니다. 다시 일어나 옷을 입고 나가서 떡을 찾아 준다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습니다. 그도 그렇지만 어려워서 먹을 것을 빌리러 온 이에게 무엇을 빌려 준다는 것은 마음에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주식형제는 천인유요 급난붕우는 일인 무라’고 하지만 그 애원하는 친구의 소리를 들으며 안 된다고 거절할 수 없어서 일어나 떡을 주었습니다 (눅11:5-7).
주님은 이 이야기를 하고 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고 선언했습니다 (눅11:8-13).
그러므로 응답받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합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21일 동안 작정기도를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다니엘이 기도하기를 작정한 날부터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시기로 생각하고 가브리엘 천사(계시전달을 맡은 천사장)를 통해 응답 내용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서 바사국군으로 비유된 사탄이 가로 막았습니다. 그래서 미가엘 천사(전쟁을 수행하는 천사장)가 와서 대신 싸워 주었습니다. 그래서 미가엘이 사탄을 물리치고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을 가지고 도착한 날이 21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단9:21-). 그러므로 기도는 도중에 그만두면 안됩니다. 작정한 날을 다 채우기가지, 응답이 있을 때까지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모니카는 16년 만에 기도가 이루어졌고, 죠지뮬러는 38년만에 이루어진 내용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것이 있을 지라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에스겔36:37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고 했고, 야고보1:5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結言
우리는 우리가 누구 때문에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지 심각하게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로 인하여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데 대한 사무친 원한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께 원수를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이 없어서 불행한지 생각하고 그 문제를 붙들고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에 행복에 대한 소원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다른 길을 모색하지 않겠습니다.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여호와 하나님이 해결해 주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음의 선한 소원을 이루어 주시지 않는 한 나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는 비장한 열의를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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