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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삼위일체 하나님

본문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고 믿는다. 그런데 그 한 분 여호와 하나님은 3위(位; personality)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본문을 보면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호와 하나님은 한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3위 여호와 하나님이 동시에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 성령이 임하셨다(16). 그리고 하늘에서 예수님을 두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온다. 이렇게 한 사건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여호와 하나님을 ‘삼위일체(位1體) 여호와 하나님’으로 부른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직접 언급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본문에는 3위 여호와 하나님이 동시에 나타나신다. 우리는 이렇게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을 성부(聖父), 예수님을 성자(聖子), 성령님을 성령(聖靈)이라고 표현한다. ‘성(聖)’이란 말은 ‘구별된다’는 의미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세상과 구별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성도(聖徒)란 말 역시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자를 의미한다.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처럼 여러 위(位)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3세기와 4세기 동안에는 기독교를 대항하여 주로 삼위일체 교리를 반대하는 이단들이 나타났다. 당시에 나타난 이단들 중 ①단일신론(單1神論)은 그리스도와 성령이 그들의 구속 사역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바로 그들의 본질에 있어서도 성부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보는 이단이었다. 즉 그리스도와 성령보다 성부가 크시다는 이단이었다.
②양식적(樣式的) 단일신론은 여호와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얼굴을 가지시고 한 번에 한 얼굴로만 나타나시는 한 분이라고 가르친 이단이었다. 이것은 마치 물의 원소기호는 H2O인데 그것은 각각 얼음이라는 고체, 물이라는 액체, 그리고 수증기라는 기체로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③그리고 아리우스파의 교리에서는 그리스도와 성령은 단지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한 인격체이시며 한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삼위일체의 원어인 그리스어 ‘트리아스’(trias)나 라틴어 ‘트리니타스’(trinitas)는 하나에 셋, 혹 셋인 하나, 하나인 셋을 의미한다. 삼위일체 신앙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셋이 하나이며 하나가 셋이라는 것이다.
삼위일체를 간단히 말하면, 삼위는 구분되지만 결단코 나뉘지 않고, 사랑 가운데서 한 몸을 이루신다. 또한 한 몸을 이루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관계에 계신 것이다.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성에 빠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말씀하셨다(창 2:24). 부부는 한 몸이다. 그러면 실제로 그런가 비록 부부지만 생각이 달라 다투는 일이 많다. 우리는 자기 몸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 부부가 싸움을 하면 때로는 가장 상처가 되는 말을 골라서 하는 경우도 많다. 이것은 실제로 하나가 되지 못함을 보여준다.
TV에서 평생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부부도 보았다.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가 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표면적으로는 싸움을 하지는 않았지만 배우자에게서 기분이 상한 감정을 갖게 되는 것도 하나가 아니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성경은 교회를 한 몸으로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남의 아픔을 곧 나의 아픔으로 생각하는가 그렇지 못하다. 어떤 사람은 고통스러워 잠을 자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한 몸이라고 하는 우리는 곤한 잠에 빠지곤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아프간에 피랍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휴가를 가서 즐겁게 놀지 않는가 그렇기에 완전하게 하나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듯 죄에 오염된 우리 인간은 하나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은 우리가 스스로 깨달아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초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해결될 수밖에 없다.
한 나라의 의식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 나라 국민의 종교이다. 폴 틸리히에 의하면 한 나라의 문화와 윤리 도덕은 그 민족이 가진 종교에 의해 결정된다. 역으로 말하자면 한 나라의 국민성 변화를 위해서는 종교를 바꾸는 것이 핵심이란 말이 된다. 물론 종교를 사람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성도들이 바른 삼위일체관을 가지고 있다면 교회는 변화될 수밖에 없다.
각 종교들은 저마다 각각 다른 신관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종교들은 다신론을 가지고 있다. 범신론(汎神論)도 어떤 의미에서는 다신론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기독교는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다. 이러한 삼위일체 사상은 다른 어떤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삼위일체 신앙은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을 한 마디로 나타낸 신앙고백이다.
 첫째로, 성경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은 초월자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피조 세계의 피조물들과는 그 근원부터가 다른 분이시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초월성이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 신앙의 핵심이다. 그러면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근거에서 이 우주와는 뿌리로부터 다른 분이신가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여호와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여호와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여호와 하나님, 이삭의 여호와 하나님, 야곱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 3:13-15)
여호와 하나님은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대답하셨다. 이것은 다른 말로 “나는 곧 나다”라는 말이다.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신 것을 볼 수 없다. 창세기 32:29과 사사기 13:18에도 이런 사상이 나타난다. 여호와 하나님은 얍복강 가의 야곱에게 끝내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다. 사사기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삼손의 아버지에게 다만 ‘비밀’이라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이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만물과는 그 뿌리부터 다른 분이시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며, 영원하며, 거룩하며, 창조자이시며,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언제나 하나의 비밀로 남아 있는 분이시다. 십계명의 제 2계명도 이런 정신을 담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명령은 여호와 하나님의 초월성을 의미한다. 만일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든다면, 그것은 필시 인간의 사고 속에 갇힌 우상일 따름이다.
 둘째로,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은 끝까지 인간과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인간과는 전혀 다른 분이시면서 동시에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출애굽기 3:15에서 이 사실을 볼 수 있다. 14절에서는 “나는 곧 나다”라고 대답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15절에서는 “나는 아브라함의 여호와 하나님, 야곱의 여호와 하나님, 이삭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라고 말씀하셨다. 이 사실은 성경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이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은 다른 종교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제단 위에서 존경만 받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제단에서 내려와 우리 인간과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이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차이가 여러 가지 있으나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기독교의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어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인간이 당해야 할 죄의 짐을 대신 짊어지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다른 종교의 신은 영원하고 절대적인 존재로 존경을 받으나,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을 낮추지는 못한다. 여기에 기독교 여호와 하나님의 참 여호와 하나님 되심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다.
 셋째로,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셔서 성령을 통하여 구원 사역을 이루어 가는 분이시다. 성령 여호와 하나님은 따로 존재하시는 어떤 분이 아니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토록 나오신다. 그러므로 결코 분리하려 해서는 안된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오늘날 ‘성령을 받아야 한다’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그런데 이 말은 삼위일체를 분리하지 않는 의미에서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초월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의미이며, 인간의 고통을 짊어지시고 역사 속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의미와 동일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이 오셔서 하실 일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요한복음 14:26에서는 성령 여호와 하나님을 성부께서 보내시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요한복음 15:26에서는 같은 성령 여호와 하나님을 성자께서 보내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은 완전한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우리로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으로 이 사실을 알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이제까지의 세 가지를 요약하면, 첫 번째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분이시며, 두 번째 우리와 다른 분이시지만 동시에 끝까지 우리 인간과 함께 하시는 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세 번째 그분은 2천 년 전에 우리를 찾아오심으로써 끝나신 것이 아니라, 오늘도 성령 가운데서 우리를 찾아 오셔서 그분의 사랑과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런 속성, 곧 그분의 초월성, 그분의 역사성, 그리고 그분의 현재성을 한 마디로 묶어서 말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앙이다. 성부 여호와 하나님이 초월적인 여호와 하나님을 나타내신다면, 성자 여호와 하나님은 2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역사적인 여호와 하나님을, 그리고 성령 여호와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셔서, 우리 가운데에서 당신의 구원의 사역을 이루시는 현재적인 여호와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삼위일체 신앙은 모든 것을 계획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희생으로 이루시는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또한 이끌어 가시는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나타낸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삼위일체 신앙을 가지지 않는다면 기독교 신앙은 존재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설명되는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삼위일체관은 다른 종교에서 흔히 나타나는 지배 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복종이 나타나지만, 이것은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의 동시적인 뜻이며, 동시적인 복종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삼위일체는 지배 관계를 갖지 않고 공동체를 갖는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인간 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은 그들이 믿고 있는 신관에 의해 그들이 생활이 결정된다. 해탈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자신이 믿고 있는 신이 이 세상과는 초연하기 때문이다. 힌두교인들은 현세에서 부자로 살면 다음 세계에서 가난한 자로 태어난다는 교리를 갖고 있다. 그래서 힌두교를 믿고 있는 나라들은 가난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신관에 따라 삶의 모습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나타나는 권위주의적인 행동들은 그들이 믿고 있는 권위주의적인 신관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권력을 가지고 그것을 빙자하여 남의 위에 군림하는 인간 군상들도 마찬가지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하여 기독교적인 바른 삼위일체관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을 스스로 낮추셔서 인간의 죄악을 친히 짊어지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그 희생을 본받고자 한다.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고, 자신의 것을 나누어주는 가운데 그 고난에 참여하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고자 한다. 이러한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이 많이 설교될 때 교회는 진리 가운데 든든히 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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