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삼위일체 사건으로서의 설교
본문
종려 주일전 토요일 저녁에 새로운 목사와 함께 설교에 대해 이야기 했다. “신대원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요.. ” 그녀가 말했다. “설교라는 것은 나에대한 이야기나 다른 사람들이 믿거나 믿지 않거나에 대한 이야가 아니예요” 그녀의 선언은 한편으로는 개인적 의견이나 해석이 들어간 설교, 다른 한편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를 대조하는 표현이었다. 나는 눈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이 말은 내가 항상 들었고, 가르쳤고, 설교한 개혁주의 설교와 공명하는 표현이었다.
이 말을 모든 그리스도인이 동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또 다른 혼란의 근원이 있을지도 모르는 기독교 전통의 한 흐름에 어떤 한 가지 공리가 있는 것처럼 여겼는가 내가 속한 교의 논문 위원으로 있었던 카톨릭 교인을 기억한다. 나는 그녀의 전통과 개혁주의 전통간의 공교회적 바탕을 얻기 위해 성실한 노력을 했어다. 이 위원회에서 나는 칼빈에 대한 큰 오해가 있다고 강하게 주장했었다. 그녀는 계시에 대한 칼빈의 관점이 삼위일체적이라는 나의 명확한 표현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함께 몇몇 주요 본문을 살펴볼 때까지, 그녀는 칼빈과 같은 가장 중요한 개신교 신학자의 아래와 같은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설교단에 올라간다. ···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여기, 우리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 자신을 주시는 매우 큰 은혜이다. 이것은 보통 사람을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로 삼으시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말로서의 설교
사람의 설교가 특별히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말을 전달한다는 생각은 로마교를 믿는 교수에게는 뽐내거나 건방지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장로교안에서 물의를 일으킨 적은 한번도 없다. 그 반대로, 루터교와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이라는 모순없는 양탄자를 짜는데 있어서 밝은 실이 되었다. 루터, 부써, 멜랑히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칼빈, 낙스 그리고 많은 16세기 개신교의 모든 목소리는 참된 교회의 주된 표지(nota)가, 바른 설교인것을 모두 인정했다. 아마도 취리히의 하인리히 불링거는 설교가 개혁교회의 가장 힘있고 기억할만한 궤도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제 2차 스위스 신앙고백에서는(Second Helvetic Confession) 선포를 설명하면서 두가지(성경과 설교)를 비교하고 있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
두번째로, 예상외로 대담한 제목을 쓴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미묘하지만 덜 주목받은 것은 미묘하지만, 삼위일체적인 균형이다. 불링거는 외적인 설교의 필연성과 권위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선물로서, 인간의 마움에 빛을 주는 내적 조명을 주시는 성령님사이를 유지하고자 애썼다. 이러한 관점은 개혁교회 전통이 뿌리박히면서부터 시작됐다. 1955년에 장-자크-폰-알멘Jean-Jacques-Allmen은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면서 설교의 특징을 삼위일체적으로 보는 것이 개혁교회의 일치된 의견으로 요약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설교의 재료로 많은 대상을 주시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설교는 여호와 하나님에 관한 말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한 말이어야 한다. ” 알멘은 계속 쓰고 있다.
만약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일하시지 않는다면 그곳에는 진리를 말하는 설교란 없다. … 참으로, 성령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고 행하신일, 그리고 또한 그분이 말씀하시고 행하실 일을 효과적으로 적용하시는 주된 사역자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설교는 삼위일체 교리로부터 떨어져서 이해될 수 없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의 과거의 사역 그리고 미래의 사역의 바탕 위에서 행하실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는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구원을 이루시고, 나타날 희망을 주셨다.
역사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신적 계시와 분리될 수 없는 말씀과 성령은 가장 중요한 방편이다.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의 교리는 예배 공동체 배경에서 인간의 설교를 통해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가에대한 개혁파 신학의 이해에 영향을 주었다.
다른 방향에서 보자면, 칼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개혁파 수사학과 해석학의 전통적 방식은 보다 뚜렷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찾으려는 휠 씬 더 분명한 인간 활동과의 상호 관계를 따르고 있다. 세계적인 개혁교회 전통의 중심은 지난 50년동안에 설교의 신학적인 기초에 강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한국으로 이동했다. 어떻게 인간의 말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대한 고민을 포함해서 말이다. 이러한 문제는 정장복 교수의 가르침과 저술을 통해서 부각되었다. 정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에 증명되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다는 사실은 설교 사역을 통해서 선포되어야 한다. ” 정교수는 매주 기초가 되어야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이 시간에 있는가”라는 성령님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설교자의 도전이라는 중요한 한 가지를 이해했다..
최근의 미국으로 가보자, Jana Childers의 편집과 영향력있는 미국의 설교자들의 헌신이 담긴 전집은 설교의 목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Childers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휠씬더 중요한 것은 적어도 설교자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 또는 남자 여호와 하나님이 또는 여자 여호와 하나님을 통한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설교법의 적절한 훈련이다. 그러나 설교의 삼위일체 신학은 반드시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신학적 뿌리는 바로 성육신에 있다.
Childers는 계속 1877년 예일대학의 Phillips Brooks의 책 Lectures on Preaching의 용어를 사용해가며 간단한 틀을 만든다. “진리는 반드시 한 인격person을 통해 온다. 사람을 입술을 통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설교자의 이해나 펜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의 특성인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을 통해 온다. 지성과 도덕적 존재 전체를 통해서 온다. ” 브룩스는 이 견해를 더 확장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설교자 안에서 육화되고 설교자는 “진정한 여호와 하나님의 메신저”가된다고 말한다.
현대 장로교 신학자들이 설교안에 있는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에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을때, 아마도 칼 바르트는 이미 이 배경에 잠복하고 있었다. 이것을 알자, 이 논문의 두번째 부분에서 더 건설적인 제안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할 때, 여러번 바르트를 옹호 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 본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1932년 초기에 출판된, 그의 교회 교의학 Ι/1에서 바르트는 역사적 개혁파 논쟁에대해 고민하고 있다. 이 논쟁에서 바르트는 칼빈, 불링거와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과 설교의 상호 관계를 탐색하기 위해 아주 익숙한 방식으로 시작한다. 몇몇 칼케돈 신학자들을 특징지었던 방식으로, 바르트는 적당한 가치를 인정하고 성경과 설교의 인간적인 측면과 신적인 측면의 미묘하고 복잡한 관계를 이해했다. 의심할 필요 없이 다음과 같은 그의 영감있는 명확한 표현에 친숙하게 될 것이다. “세 개로 포개어진 형태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이 논쟁은 “선포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것은 곧장 “기록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문제로 계속 진행 되었다. 마지막으로 “계시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논쟁은 최고조에 달한다. 이 순서는 의미심장하다. 바르트는 내 생각으로도 올바르게, 예배 공동체 정황 안에서의 설교는 믿는 자들에게 중심이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접근하는 가장 일관된 방식이다. 여호와 하나님 말씀과 소통하는 설교를 위해서는 성경을 믿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계시가 한 번에 이루어졌으며. 그래서 믿는 증인을 낳을 수 있는 확실한 범위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다.
더 특별하게는 계시와 설교의 관계는 무엇인가 바르트의 대답은 많은 개혁파 선배들보다 휠씬 더 복잡하고 미묘하다. 성경과 설교는 직접적인 계시 그 자체와 동일시 될 수는 없다. 더욱이 성경은 선포 “사건”으로서 계시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은 있다. 선포에대한 바르트의 카테고리는 이중적 형태를 갖는다. 설교와 성례가 완전히 선포를 감싼다. 바르트는 특별히 이 두 가지의 신학적 명료성을 동시에 붙잡고자한다. “선포는 반드시 때때로 가끔 선포가 되어야한다. ” “왜냐하면 진정한 선포 사건은 모든 사람들을 다스리는 교회의 생명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선포사건 안에서 그리스도 자신은 반드시 때때로 가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 선포 사건의 전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 계시와 성경 사이의 연결은 전제되어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예상돨 수도 없다. 오리려, “성경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사건이 언제 어디인지 모르게 일어나게된다. 즉, 성경의 말이 언제인지 어디인지 모르게 증인의 말로 일하게 된다. ” 여기서, 그는 아주 잘 알려진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의 제단’이라는 그림에 있는 십자가를 비유로 들어 말한다. 바르트의 연구가 거기에 달려서 재생산 된다. 이 그림 안에는 세례 요한의 긴 집계 손가락이 십자가에 달린 “장엄함과 완전함”을 그리고 “감동적이며 드러난 현실”을 지시하고 있다. 바르트는 여기서 영광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며 선포와 성경과 계시 사이의 적절한 관계적 우선권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유로 반드시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다. 성경과 선포는 이것들이 계시가 될 때라야 여호와 하나님 말씀이 된다. ” “성경과 선포의 증인으로서 교회는 과거의 계시를 떠올린다. 그리고 미래 계시의 참된 언약을 성경적 증인이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부여잡고 선포한다. ” “여기서 자기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성령과 동떨어진 증인이 아닌 참된 증인을 필요로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부여잡고 기뻐하는 믿음을 필요로 하신다. ” 설교하는 것의 인간적인 면과 신적인 면의 기능이 마치 거룩한 것으로 변화되어 버리는 유혹을 바르트는 피하고자 했다. 대신에, 교회 선포의 전제는 설교와 성례라는 이중적 형태를 갖는다. 바르트는 설교에서 신적인 면과 인간적인 면의 관계를 같이 다루어 실험 하기를 원했다. 이것은 16세기 스위스 개혁가들이 성례안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현존에 관한 논쟁에 있었던 것이다. 성찬례의 유비는 십자가이다.
설교는 인간의 의지나 어떤 방식을 특성화 시키기위한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리고 결정적으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행위일때 계시와 믿음의 기적이 일어난다.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 할때, 우리를 위할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리고 결정적으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말이다.
바르트는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계속 요약해 나간다. “인간의 말중 그것의 동기, 주제, 그리고 판단하는 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거기에 있는 동안에 그렇다. ” 이와는 달리 “로마 카톨릭 원리는 변하고 있다. ” 우리는 “선포하는 인간의 의지와 행위가 참된 선포를 위해 따로 준비해 놓은 어떤 본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빵은 빵을 남기고 포도주는 포도주를 남긴다. 는 성찬 용어에 다 들어가 있다. ”
다른 한편으로는 의의 새옷을 집어 던지고으로, 이 땅에서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지배하는 그곳에서 새로운 사건을 일으키신다. 인간의 말은 여호와 하나님에의해 제외된다. 그러나 우리는 찬양할 것이다. 새로운 사건으로서의 참된 설교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설교 훈련을 위한 이와같은 바르트의 생각의 확장은 1932-1933에 있었던 ‘설교 준비 훈련’이라는 제목의 본대학 수업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거기서 설교 준비와 책임감에대한 목회자의 훈련과같은 자신의 목회적 경험을 서술한다. 설교는 반드시 우리에게 주어진“계시를 대면해야한다”하며 “크리스마스와 그리스도의 날”사이에 있어야한다고 강조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설교를 통해 성육신이라는 중대한 역사적 계시에대한 믿음과 그리스도의 재림의 기대를 확장하기위해 말씀하신다. “이것을 이름하여 이중적 움직임라 부른다. 신약 성경의 계시에 따라 설교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계시하셨고, 자기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다. ”
바르트의 계시에대한 삼중적 형태의 설명에 한 가지가 더 남아 있다. 경륜적 삼위일체 에대한 이해와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와 말에대한 것이다. 바르트는 매우 대담하게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대한 이 교의는 하나의 유비이다. 실제적으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대한 교의는 계시의 개념을 발전시켜 가장 기초가 되는 교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에대한 교의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삼중형태 교의의 신학은 여호와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의 교의의 기초적인 신학에서 유래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행위이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적인 언어로 옮겨간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 사건으로서의 여호와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소와 시간은 성경과 선포를 통해 동시대가 된다. ”는 주권 아래에 들어가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 바르트는 계속 지적한다. 성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에대한 서방신학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사건으로 이해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말씀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힘은 말씀의 힘과 다른 힘이 아니다. 그러나 그 힘은 살아있는 말씀에의한 힘이다. ”
이런 역사적인 배경으로, 이 장의 나머지 부분은 칼빈과 불링거 그리고 바르트가 다룬 동일한 주제에 대한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설교라는 인간의 말을 통해서 말씀하신다는 신학적으로 명확한 주장에 뒷받침될 수 있는 삼위일체 사건으로서의 설교 이해를 제시하기위한 것이다. 우리의 건설적인 고민은 다양하고 중요한 성경 텍스트안에 있는 신적인 말과 신적인 조명간의 상호작용을 성경적 은유의 방식으로 고려 할 것이다.
나는 완전히 발전된 개혁교회 삼위일체 신학의 재료인, 말과 시각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말씀과 성령님 안에 있는 신적 계시의 뚜렷한 상호관계는 말과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소통과 관계되어 있다. 나의 건설적인 제안은 삼위일체 사건으로서의 설교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공동체적 예배 상황에서 설교의 인간적인 면과 신적인 면, 둘 다가 신학적으로 정확하고 동등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제안이다. 개혁교회 예배 전통에 있는 성령의 조명을 구하는 삼위일체적 기도를 말하면서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가 될 수 있으며, 인간의 설교를 통해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질 수 있는가에 대한 우리의 신학적 노력을 이야기 할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말과 여호와 하나님의 조명
Divine Speech and Divine Illumination in Scripture
창세기 1장에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라는 구절의 장엄함과 진동과 시적인 반복에서부터, 우레와같이 울리는 선지자적인 말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셨다”라는 구절까지, 구약성경을 통해서 나타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적 증인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대한 결정적인 구절이다. 단지 몇 개의 드라마틱한 경우를 제외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인간을 사용하셨다.
창세기 1장에서 시작해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말씀과 신적인 조명을 동반하는 복잡한 상호관계는 의도된 것이다. “빛이 있으라. ”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첫 번째 말씀이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창1:3-4) 빛의 부재와 그리고 생성은 모든 이방 종교의 창조 이야기에 시적인 형식으로 규범화된 패턴이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1:5) 각각의 연속되는 창조의 단계는 아침과 저녁으로 잇달아 일어나는 순환은 패턴화 되어있다. 빛의 부재가 나타나면 빛의 임재가 따라온다.
신성의 말과 신적 조명을 비슷하게 섞어놓은 은유는 네 번째 복음서의 서문에도 반영된다. 거기서 저자는 그리스어ho logos(요1:1-3)를 다시 새롭게 초점을 맞춤으로서, 창조 이야기 안에 있는 언어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의 은유의 상호작용을 모으고 또한 재현한다. 그 후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신적 자기 계시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에대한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확실성이 여기에서 그 근본적은 기원를 가지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으로서의 ho logos의 지배적인 은유와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의 근본적이며 중요한 자기 계시로서의 ho logos는 요한복음1:4-9의 신성의 말과 신적 조명의 혼합을 통해 상세히 말해지고 강화되고 있다. Ho logos안에 있었던 생명은 모든 사람들의 빛이며 결코 어둠에의해 정복되지 않는다. (요1:4-5) 이 참 빛이 세상에 옴으로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이되었다고 말한다. (요1:9)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에대한 신중하고 명확한 교리는 4세기까지 그리스도교 역사에 나타나지 않는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사로잡았던 여호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이해의 중요한 뿌리는 몇몇 중요한 본문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오래 전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말과 신-인의 소통을 통해 계시된 선지자적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구약성경의 개념이 있었다. 또한, 신적 계시로 사용된 원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도 이를 뒷받해 주는 한 몫을 했다. 이 모든 것들이 초대 교회의 삼위일체적 인식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만약 ho logos가 세상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밝히는 지식이라면, 현재적이고 즉각적인 신적 조명은 시간과 공간의 모양을 갖추는 창조 이야기의 배경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요소이다. 우리는 말씀과 성령간의 상호내주적인 작용과 관계의 신학적 정리를위한 기름진 토양을 제공하는 초기 모판을 여기서 발견한다. 이것은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의 설교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인가에 대한 개혁파의 이해의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서론을 계속 이어가면, ho logos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소통의 방식은 다음과 같다. Ho logos는 육신을 입었고 우리 가운데 사셨고, 그리고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고, 그 영광은 아버지의 아들의 영광이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을 주장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소통의 방식이 되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이 사건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얻는 경험, 특별히 눈을 통해서 얻는 일반적인 지식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마지막 형태인, 만져서 그리고 시각으로 육화된 신성이 되었다는 주장을 포함한, 말과 시각적 이미지가 의도적으로 혼합된 것을 본다.
비록 성령님이 요한 복음의 서론에 특별히 언급되지 않았을 지라도, 요한 복음서의 중심 주제이다. 예수님이 세례 이야기에 들어있는 성령님의 드라마틱한 소개는 영과 말씀이라는 서로 충돌하는 문학적 평행이 함께 자리잡고 있다. 말씀과 성령은 세례 요한이 권위있는 증인인 예수님을 왕으로 선포하는 이 이야기에서 두 개의 신적 관계로 나타난다. 이 본문은 후기 삼위일체 신학의 풍성한 재료가 되어 신학적 주제의 깊이와 명확성을 더욱 뚜렷하게 해 주게 된다. 우리의 목적은 초기 삼위일체신학의 배경이 성육신 안에 있는 인성과 신성이 일체로 존재한다는 모순에대해 건설적이며 통합적이고 시적인 해설을 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성육신이 화행speech-act으로 드러나고, 설교가 삼위일체적 사건이라는 연결은 중요하다. 이점에서 요한복음1:18절은 적당한 클라이막스를 이루고 있다. 특별히 여기서 신적인 조명과 나타남에대한 요한복음 서론의 강조가 있다. “본래 여호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고정된 시각적 이미지로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고착된 구약적 인간이, 육신으로서 창조된 시간과 공간에 들어오시고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신 예수님을 단순히 구두 계시, 예수님의 설교만으로 그분을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표현으로 그들이 수용 할 수 있는지를 병행하고 대조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2:14-4:15에서 사도 바울은 구두로 아니면 편지로 표현한 바울의 말이 진리와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를 전달할 수 있는가에대한 문제와 깊이 씨름하고 있다. 이 단락은 난해한 바울 서신의 권위문제를 매력적으로 담고 있다. 명확하게 말씀과 성령을 연결시키고, 신적인 말과 신적인 조명에대한 관심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설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권위의 문제를 명확하게하려는 그의 노력으로 인간의 말과 그 말함을 통해 계시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은 여기서 후기 삼위일체론의 영향을 준 풍성한 개념을 제공하는 신학적인 패턴을 소개한다. 편지를 받은 교회에 있었던 비난과 의심은 완고하게도,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호소하는 바울의 권위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렇게 교환된 편지 안에는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케하는 인간적 연약함에대한 바울의 인식이 매우 고상하게 표현되었다. 이에 답하기를,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설교의 인간적인 면과 신적인 면의 관계에대한 미묘하고 여러면에서 가치를 지닌 생각을 명확히 말 해 준다. 그리스도인의 설교는 의도적으로 된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을 드러내는 패턴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후에 삼위일체적 인식라 불리는 바울 서신의 사도적 시선에 주위를 돌릴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적 권위에 대한 초기 교회의 신적인 면과 인간적인 면 사이의 의미없는 개념적 이분법을 무모화시키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신에 인간의 설교가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의 말이 되어야 한다는 위치와 이유를 시종일관 신학적으로 동일한 이해를 발전시켰다.
고린도후서의 두 번째 부분에서 바울의 독특한 통찰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성육신에대한 규범화된 복음의 패턴 때문에 나오게 되었다. 신적 계시는 가장 심오하며, 가장 진실하며 그리고 가장 독특하게 그리고 평범하며, 피조되었으며, 필사의 존재인 인간의 말과 설교자을 통해 소통된다. 그의 놀랄만한 은유는 우아한 역설paradox로 표현된다.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의 “보화”는 아주 흔하며, 겉은 울퉁불퉁하며, 깨어지기 쉽고, 평상시에 쓰는 흙으로 만든 그릇인 평범한 “동양에서 쓰는 그릇”인 질그릇 안에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고 말한다. 이 일은 특수한 신학적 이유로인해 일어난다. “이는 심히 큰 능력은 여호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6-7) 이 중요한 논점에서 사용된 언어는 뚜렷하게 시각적인 것과 신성의 조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방식은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를 설명하는 6절에 명백한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대한 우리의 선포가 기초라는 말에서 나타난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6)
돈이나 보석을 양말에 숨겨 본 적이 있는가 고대 근동에서는 집이 매우 좁아서 대부분 가치있는 무엇인가를 숨겨놓을 장소가 없다. 또한 믿을 만한 자물쇠도 없다. 그래서 가족이 집을 떠날 일이 생길때, 도둑의 시선을 끄는 아름다운 보석함에 가장 귀한 보물을 넣어두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에,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장 평범하게 보이는 병에 보석이나 향수 병을 넣어 두었다. 이와 비슷하게, 인상적인 방식으로, 바울이 제안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의 엄청난 힘을 숨기기로 하셨고, 평범한 것 속에, 흔히 볼수 있는, 거의 다 부숴진 질그릇 안에 그리고 타락하고, 오류가 많은, 상처받기 쉬운, 불완전한 인간의 말과 그 삶가운데 예수님을 숨겨놓으셨다.
흔한 질그릇 속에 있는 보물과같은 계시는 분명히 첫 순위로 그리고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참된 인간이시다. 그분은 똑 같은 인간의 삶, 우리의 삶의 모든 불확실성과 애매함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현재 문맥에서는, 예수님께서 가지신 인성이 창조되지 않았으며, 필사의 인성이라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것은 또한 타락하고 오류가 많으며 상처받기 쉬우며 불완전하고 깨어지기 쉬운 심지어 죄된 인간성이다.
그리고 이와같은 원리를 적용해서 보면, 인간은 다른 사람을 위한 그리고 교회를 위한 여호와 하나님 말씀과(고후2:17;4:2),영광(고후3:7-18;4:4,6) 진리(고후4:2) 그리고 빛(고후4:4,6)과 소통하기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설교자의 신적인 면과 인간적인 면의 관계에대한 바울의 요약은 후기 칼빈과 불링거 또는 바르트와 관련된 동일한 역설적인 긴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도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4:5) 여호와 하나님은 급진적이며 예상하지 못하게, 그러게 되지 않을 것같은 방식으로 인간과 소통하셨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것은 성실하며(고후2:17) 꾸밈이 없고(고후3:1-2), 겸손하고(고후3:4-6), 투명하고(고후3:18) 믿을만하며(고후4:2) 깨어지기 쉬운(고후4:8-11)인간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비취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의 소통이다. 주님은 영이시다라는 사실과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함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인간성, 결점, 부족함을 최소화하고, 감추지 않는 투명함을 통해서 이 소통이 가능하다. 대신에, 베일을 벗은 얼굴로, 우리는 거울에 반사된 것처럼 주인의 영광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렇게 시선을 고정시킴으로, 영광에서부터 다른 영광에까지이르기 까지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고후3:17-18)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 인간의 말로 변형하셨다. 이것을 삼위일체 사건의 언어로 더욱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에의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독특하게 인간의 말을 입고 이 말을 변형시킨다. 성경은 예배시간에 모인 공동체의 안에서 신실하게 선포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설교자는 믿을 만하며 신학 교육을 잘 받아야 한다. 이 설교자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말을 통해서 전해질 것이며, 우리의 인간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명확한 범위 안에서 말해지며, 이미 인간의 말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안에서 말해지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성으로 완전해지며 변형될 소망 안에서 말해질 것이다.
성령의 조명을 구하는 삼위일체적 기도
Trinitarian Prayers For Illumination
종종 개혁교회 전통이 간과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신성의 말과 신성의 조명에대해 성경이 읻 둘을 합치기위해 아주 많이 언급한다는 점이다. 또한 설교 사건은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의 역동성이다. 전통적으로 개혁겨회의 기도는 성령님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이다. 이것은 성경과 설교를 봉독하기 전에 전형적인 개혁교회 역사의 예배 구조 속에 있었던 특별하고 독특한 기도이다. 지금까지 계속되온 개혁교회 전통의 한 예로서, 이러한 전통적 기도의 신학적 의미는 특별히 주목 할 만하다.
역사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조명을 구하는 기도는 초기 16세기 개혁파 전통의 자료 안에 있음으로 신학적 근거로 조심스럽게 소개될 수는 있겠다. 일반적으로 확실한 예배 공동체가 의지하는 성령님, 신적 조명으로 은유된 성령님이 기도의 중심에 계신다. 이러한 성령님은 삼위일체 사건을 선포하는 인간 설교자 안에서 그리고 인간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보증이 되신다.
“그의 거룩하고 영원한 말씀을 우리에게 열어주소서”라는 기도는 1525년 쯔빙글리의 예배 설교 규정에 나와있다. 그러나 성경을 봉독하고 설교하기 전에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예배 전통은 설교를 통해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청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향후 10년 뒤에 서방으로 흐르는 론강과 라인강을 따라 나타났고, 마틴 부써, 윌리암 파렐, 요한 칼빈까지 그 흔적을 추적할 수 있다. 이 전통은 로마 카톨릭 학생들이 십계명 회중 찬송을 부른 후, 설교단에 들어가기 전에 칼빈이 규칙적으로 기도한 내용을 직접 필사하기 시작한, 1545년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처음 나타났다.
이것이 끝났을때, 목사는 제단처럼 만든 나무 테이블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 제단은 목사가 있는 교회 중앙에 위치 해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모든 사람이 이해할수 있게 크고 명확한 목소리로 청중의 언어로 백성들을 위해 기도한다. 기도가 끝나면, 목사는 강대상으로 가서 일곱시 반부터 9시까지 설교한다. 설교는 놀랍게도 매우 잘 들린다.
칼빈의 Forme des prieres et chantz ecclesiastiques에 있는 예전은 목사에대해 명확하게 지시하고 있다. “기도하는 것, 성령의 은혜를 여호와 하나님께 간청하는 것은 교회를 훈육하기위해 그의 이름과 영광과 엄위가 상세히, 성실하게, 성경말씀으로 설명되어야 하며 겸손과 순종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형식은 목사의 지시사항으로 남겨져 있다. ” 칼빈의 실제적인 기도의 이런 예는 칼빈의 스승인 마르틴 부써의 스트라스부르크의 예배 지침에서가져와 제네바에서 사용한 것인데, 기록이 남겨져 있다.
전능하시고 은혜로우신 아버지여, 우리의 온전한 구원은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대한 지식안에 서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세상적인 생각들과 육신에대한 욕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으로 지금 우리를 강건하게 하소서. 우리가 듣고, 같은 말씀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 원합니다. 참된 기쁨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찬송과 영광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습니다. 아멘,
성경을 봉독하고 설교하기 전에 성령님의 특별한 조명을 구하는 기도의 예는 서방교회나 라틴 전통에서 온 것은 아니다. 성경의 봉독과 선포의 앞서 삼위일체적 기도가 존재하는 흥미로운 예가 고대 이집트와 시리아 예배, 기도 지침서에 있다. 적어도 라틴 서방 전통에는, 초기 어떤 시기에 그 예가 존재했었지만 종교개혁 전에 사라졌다. 성경을 봉독하기 전에 헌금 순서an assigned collect가 위치한 중세의 패턴은 교회력에 바탕을 둔 것이며, 규범이 되었다. 반대로, 형식적이며, 강한표현의 기도는 적어도 16세기 스트라스부르크와 제네바에서 일반화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예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현존과 말씀 선포를 위해 성령의 조명을 구할 것을 강조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패턴에 따르면, 삼위 여호와 하나님은 설교의 목적으로, 설교에 반영되는 것보다 설교의 주제로서 더 많이 다루어진다. 이것은 이 논문 초두에 언급한 폰 알멘이 말한 것이다.
성령님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는 형식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준비되어 있다. 이 기도의 형식적 구성은 청교도와 웨스트민스터 예배 규칙서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다른 종교개혁 전통에서는 그 빈도가 낮게 나타난다. “성령님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는” 신학적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장로교 예배 순서에 설교하기 전 그리고 예배의 필수요소 이 기도가 언급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많은 청교도 목사들은 간략하게나마 자발적으로, 개인적인 기도로 계속 유지하거나, 설교를 시작할 때 조용한 목소리의 기도로 되뇌이곤 했다.
오늘날에 16세기의 초기 개혁교회의 이러한 전통 다시 시작되고 있다. 성령님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는 역사적으로 개혁교회라 불리는 곳에서 법적인 측면에서 형식적으로 복구되었다. John Witvliet는 예배 역사 안에서 “성령님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가 아직도 시도하고 있으며 진행중 예라고 말했다. 이 기도는 함께 모인 예배 회중안에 성령님의 실재성과 현존하는 예배를 인정하기위한 것이다. 특별히, 그는 개혁교회의 성령님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와 고대 동방교회의 성찬에서의 에피클레시스성령님을 구하는 기도 사이를 비교하고 있다. 거기서 아버지는 성령을 보내달라는 간구와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깨닫게 해달라는 기도를 요청받는다. 개혁교회의 성찬론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의 직무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강하게 강조한다. 최근 이 독특한 예배적 관심은 중중하는 마음으로 개혁교회와 여러 동방교회의 예배 전통의 공통점을 찾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논문에서 건설적으로 제안했던 것을 다시 요약하고자 한다. 본질적으로 삼위일체 사건으로서의 설교는 설교의 인간적 측면과 여호와 하나님 편의 측면이 신학적으로 명확하며, 예배 공동체의 상황과 조화될 수 있다. 이를 염두해 두고, 훈련된 교회 설교는 성령님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의 예배 전통을 구현한다. 회중은 설교라는 사건을 기대하고 준비함으로서, 인간 설교자와 인간 회중이 설교를 돕는 기도를 함께 드린다. 이 기도는 성령님의 사역으로, 말하는 인간 설교자가 회중에게 설교할 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것을 위해 기도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성찬이라는 시간, 공간안에서 삼위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분이 되시고, 말씀이 되시고, 호흡이 되시는 이 특별한 사건 안에서 함께 기도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초월적인 힘을 가진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를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계신 곳은 평범하며 흔히 볼 수 있으며 거의 다 부숴진 질그룻안에 그리고 실수가 많으며, 상처받기 쉬우며, 불완전한 인간의 말과 삶 속이다. 이러한 삼위일체적인 기도는 설교자로 하여금 믿음을 충만히 채우는 설교를 하게되고, 회중으로 하여금 삶에 대한 희망적인 기대로 순종에대한 예민성과 집중을 제공한다. 삼위 여호와 하나님은 성령님의 도움으로 사람 설교자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실제로 교제하실 것이다. 고의적인 인간의 행동을 고백하는 것은 그 양심이 심사숙고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인데, 이런 면에서 성령님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간 설교자는 확실히 불가피하게 또는 내재적으로 또는 자동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공동체의 예배 현장에서, 설교라는 사건 안에 있는 삼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적 역사의 결과로서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제안은 성령님의 조명을 구하는 현대 삼위일체 기도에대한 묵상과 고민을 실제적으로 제시한 최고의 설명과 확인이 될 것이다. 우리는 다음의 결론에 초점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a)삼위일체 사건으로서의 설교는 인간의 설교를 통해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이 신적인 말을 성령님을 통해 하는 것이다.
(b)말씀의 내재적 상호관계와 성경으로서의 성령님의 중요성은 성찬이 있는 예배에서 봉독되고 선포된다.
(c)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복음의 패턴 때문에 신적 계시는 가장 심오하고, 사실임이 증명되고, 성령님에 의해서 그리고 평범하고 지음 받은 인간의 말과 설교자를 통해 특별하게 소통된다.
우리를 인도하소서, 오, 여호와 하나님
당신의 말씀과 성령님으로
당신의 빛을 우리가 보게 하소서
당신의 진리안에서 자유를 찾게 하소서
그리고 당신의 뜻안에서 평화를 발견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 우리의 도움
당신의 성령님으로, 우리의 마음을 여소서
그럼으로 성경이 읽혀지게 하시고
당신의 말씀이 선포되게 하소서
당신의 진리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소서
그리고 당신의 뜻을 가르치소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으로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 빛의 근원이시여
당신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당신은 우리의 영혼에 빛을 주시네
우리에게 흘러넘치게 하소서
지혜와 지식의 영이시여
거룩한 성령으로 당신을 알게하소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말씀을 알게위해 열려 있나이다.
생명과 거룩이 당신에게 속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통하여.
이 말을 모든 그리스도인이 동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또 다른 혼란의 근원이 있을지도 모르는 기독교 전통의 한 흐름에 어떤 한 가지 공리가 있는 것처럼 여겼는가 내가 속한 교의 논문 위원으로 있었던 카톨릭 교인을 기억한다. 나는 그녀의 전통과 개혁주의 전통간의 공교회적 바탕을 얻기 위해 성실한 노력을 했어다. 이 위원회에서 나는 칼빈에 대한 큰 오해가 있다고 강하게 주장했었다. 그녀는 계시에 대한 칼빈의 관점이 삼위일체적이라는 나의 명확한 표현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함께 몇몇 주요 본문을 살펴볼 때까지, 그녀는 칼빈과 같은 가장 중요한 개신교 신학자의 아래와 같은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설교단에 올라간다. ···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여기, 우리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 자신을 주시는 매우 큰 은혜이다. 이것은 보통 사람을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로 삼으시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말로서의 설교
사람의 설교가 특별히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말을 전달한다는 생각은 로마교를 믿는 교수에게는 뽐내거나 건방지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장로교안에서 물의를 일으킨 적은 한번도 없다. 그 반대로, 루터교와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이라는 모순없는 양탄자를 짜는데 있어서 밝은 실이 되었다. 루터, 부써, 멜랑히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칼빈, 낙스 그리고 많은 16세기 개신교의 모든 목소리는 참된 교회의 주된 표지(nota)가, 바른 설교인것을 모두 인정했다. 아마도 취리히의 하인리히 불링거는 설교가 개혁교회의 가장 힘있고 기억할만한 궤도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제 2차 스위스 신앙고백에서는(Second Helvetic Confession) 선포를 설명하면서 두가지(성경과 설교)를 비교하고 있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
두번째로, 예상외로 대담한 제목을 쓴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미묘하지만 덜 주목받은 것은 미묘하지만, 삼위일체적인 균형이다. 불링거는 외적인 설교의 필연성과 권위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선물로서, 인간의 마움에 빛을 주는 내적 조명을 주시는 성령님사이를 유지하고자 애썼다. 이러한 관점은 개혁교회 전통이 뿌리박히면서부터 시작됐다. 1955년에 장-자크-폰-알멘Jean-Jacques-Allmen은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면서 설교의 특징을 삼위일체적으로 보는 것이 개혁교회의 일치된 의견으로 요약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설교의 재료로 많은 대상을 주시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설교는 여호와 하나님에 관한 말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한 말이어야 한다. ” 알멘은 계속 쓰고 있다.
만약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일하시지 않는다면 그곳에는 진리를 말하는 설교란 없다. … 참으로, 성령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고 행하신일, 그리고 또한 그분이 말씀하시고 행하실 일을 효과적으로 적용하시는 주된 사역자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설교는 삼위일체 교리로부터 떨어져서 이해될 수 없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의 과거의 사역 그리고 미래의 사역의 바탕 위에서 행하실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는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구원을 이루시고, 나타날 희망을 주셨다.
역사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신적 계시와 분리될 수 없는 말씀과 성령은 가장 중요한 방편이다.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의 교리는 예배 공동체 배경에서 인간의 설교를 통해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가에대한 개혁파 신학의 이해에 영향을 주었다.
다른 방향에서 보자면, 칼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개혁파 수사학과 해석학의 전통적 방식은 보다 뚜렷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찾으려는 휠 씬 더 분명한 인간 활동과의 상호 관계를 따르고 있다. 세계적인 개혁교회 전통의 중심은 지난 50년동안에 설교의 신학적인 기초에 강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한국으로 이동했다. 어떻게 인간의 말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대한 고민을 포함해서 말이다. 이러한 문제는 정장복 교수의 가르침과 저술을 통해서 부각되었다. 정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에 증명되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다는 사실은 설교 사역을 통해서 선포되어야 한다. ” 정교수는 매주 기초가 되어야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이 시간에 있는가”라는 성령님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설교자의 도전이라는 중요한 한 가지를 이해했다..
최근의 미국으로 가보자, Jana Childers의 편집과 영향력있는 미국의 설교자들의 헌신이 담긴 전집은 설교의 목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Childers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휠씬더 중요한 것은 적어도 설교자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 또는 남자 여호와 하나님이 또는 여자 여호와 하나님을 통한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설교법의 적절한 훈련이다. 그러나 설교의 삼위일체 신학은 반드시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신학적 뿌리는 바로 성육신에 있다.
Childers는 계속 1877년 예일대학의 Phillips Brooks의 책 Lectures on Preaching의 용어를 사용해가며 간단한 틀을 만든다. “진리는 반드시 한 인격person을 통해 온다. 사람을 입술을 통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설교자의 이해나 펜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의 특성인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을 통해 온다. 지성과 도덕적 존재 전체를 통해서 온다. ” 브룩스는 이 견해를 더 확장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설교자 안에서 육화되고 설교자는 “진정한 여호와 하나님의 메신저”가된다고 말한다.
현대 장로교 신학자들이 설교안에 있는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에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을때, 아마도 칼 바르트는 이미 이 배경에 잠복하고 있었다. 이것을 알자, 이 논문의 두번째 부분에서 더 건설적인 제안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할 때, 여러번 바르트를 옹호 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 본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1932년 초기에 출판된, 그의 교회 교의학 Ι/1에서 바르트는 역사적 개혁파 논쟁에대해 고민하고 있다. 이 논쟁에서 바르트는 칼빈, 불링거와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과 설교의 상호 관계를 탐색하기 위해 아주 익숙한 방식으로 시작한다. 몇몇 칼케돈 신학자들을 특징지었던 방식으로, 바르트는 적당한 가치를 인정하고 성경과 설교의 인간적인 측면과 신적인 측면의 미묘하고 복잡한 관계를 이해했다. 의심할 필요 없이 다음과 같은 그의 영감있는 명확한 표현에 친숙하게 될 것이다. “세 개로 포개어진 형태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이 논쟁은 “선포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것은 곧장 “기록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문제로 계속 진행 되었다. 마지막으로 “계시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논쟁은 최고조에 달한다. 이 순서는 의미심장하다. 바르트는 내 생각으로도 올바르게, 예배 공동체 정황 안에서의 설교는 믿는 자들에게 중심이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접근하는 가장 일관된 방식이다. 여호와 하나님 말씀과 소통하는 설교를 위해서는 성경을 믿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계시가 한 번에 이루어졌으며. 그래서 믿는 증인을 낳을 수 있는 확실한 범위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다.
더 특별하게는 계시와 설교의 관계는 무엇인가 바르트의 대답은 많은 개혁파 선배들보다 휠씬 더 복잡하고 미묘하다. 성경과 설교는 직접적인 계시 그 자체와 동일시 될 수는 없다. 더욱이 성경은 선포 “사건”으로서 계시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은 있다. 선포에대한 바르트의 카테고리는 이중적 형태를 갖는다. 설교와 성례가 완전히 선포를 감싼다. 바르트는 특별히 이 두 가지의 신학적 명료성을 동시에 붙잡고자한다. “선포는 반드시 때때로 가끔 선포가 되어야한다. ” “왜냐하면 진정한 선포 사건은 모든 사람들을 다스리는 교회의 생명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선포사건 안에서 그리스도 자신은 반드시 때때로 가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 선포 사건의 전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 계시와 성경 사이의 연결은 전제되어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예상돨 수도 없다. 오리려, “성경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사건이 언제 어디인지 모르게 일어나게된다. 즉, 성경의 말이 언제인지 어디인지 모르게 증인의 말로 일하게 된다. ” 여기서, 그는 아주 잘 알려진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의 제단’이라는 그림에 있는 십자가를 비유로 들어 말한다. 바르트의 연구가 거기에 달려서 재생산 된다. 이 그림 안에는 세례 요한의 긴 집계 손가락이 십자가에 달린 “장엄함과 완전함”을 그리고 “감동적이며 드러난 현실”을 지시하고 있다. 바르트는 여기서 영광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며 선포와 성경과 계시 사이의 적절한 관계적 우선권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유로 반드시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다. 성경과 선포는 이것들이 계시가 될 때라야 여호와 하나님 말씀이 된다. ” “성경과 선포의 증인으로서 교회는 과거의 계시를 떠올린다. 그리고 미래 계시의 참된 언약을 성경적 증인이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부여잡고 선포한다. ” “여기서 자기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성령과 동떨어진 증인이 아닌 참된 증인을 필요로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부여잡고 기뻐하는 믿음을 필요로 하신다. ” 설교하는 것의 인간적인 면과 신적인 면의 기능이 마치 거룩한 것으로 변화되어 버리는 유혹을 바르트는 피하고자 했다. 대신에, 교회 선포의 전제는 설교와 성례라는 이중적 형태를 갖는다. 바르트는 설교에서 신적인 면과 인간적인 면의 관계를 같이 다루어 실험 하기를 원했다. 이것은 16세기 스위스 개혁가들이 성례안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현존에 관한 논쟁에 있었던 것이다. 성찬례의 유비는 십자가이다.
설교는 인간의 의지나 어떤 방식을 특성화 시키기위한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리고 결정적으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행위일때 계시와 믿음의 기적이 일어난다.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 할때, 우리를 위할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리고 결정적으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말이다.
바르트는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계속 요약해 나간다. “인간의 말중 그것의 동기, 주제, 그리고 판단하는 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거기에 있는 동안에 그렇다. ” 이와는 달리 “로마 카톨릭 원리는 변하고 있다. ” 우리는 “선포하는 인간의 의지와 행위가 참된 선포를 위해 따로 준비해 놓은 어떤 본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빵은 빵을 남기고 포도주는 포도주를 남긴다. 는 성찬 용어에 다 들어가 있다. ”
다른 한편으로는 의의 새옷을 집어 던지고으로, 이 땅에서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지배하는 그곳에서 새로운 사건을 일으키신다. 인간의 말은 여호와 하나님에의해 제외된다. 그러나 우리는 찬양할 것이다. 새로운 사건으로서의 참된 설교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설교 훈련을 위한 이와같은 바르트의 생각의 확장은 1932-1933에 있었던 ‘설교 준비 훈련’이라는 제목의 본대학 수업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거기서 설교 준비와 책임감에대한 목회자의 훈련과같은 자신의 목회적 경험을 서술한다. 설교는 반드시 우리에게 주어진“계시를 대면해야한다”하며 “크리스마스와 그리스도의 날”사이에 있어야한다고 강조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설교를 통해 성육신이라는 중대한 역사적 계시에대한 믿음과 그리스도의 재림의 기대를 확장하기위해 말씀하신다. “이것을 이름하여 이중적 움직임라 부른다. 신약 성경의 계시에 따라 설교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계시하셨고, 자기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다. ”
바르트의 계시에대한 삼중적 형태의 설명에 한 가지가 더 남아 있다. 경륜적 삼위일체 에대한 이해와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와 말에대한 것이다. 바르트는 매우 대담하게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대한 이 교의는 하나의 유비이다. 실제적으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대한 교의는 계시의 개념을 발전시켜 가장 기초가 되는 교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에대한 교의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삼중형태 교의의 신학은 여호와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의 교의의 기초적인 신학에서 유래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행위이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적인 언어로 옮겨간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 사건으로서의 여호와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소와 시간은 성경과 선포를 통해 동시대가 된다. ”는 주권 아래에 들어가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 바르트는 계속 지적한다. 성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에대한 서방신학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사건으로 이해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말씀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힘은 말씀의 힘과 다른 힘이 아니다. 그러나 그 힘은 살아있는 말씀에의한 힘이다. ”
이런 역사적인 배경으로, 이 장의 나머지 부분은 칼빈과 불링거 그리고 바르트가 다룬 동일한 주제에 대한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설교라는 인간의 말을 통해서 말씀하신다는 신학적으로 명확한 주장에 뒷받침될 수 있는 삼위일체 사건으로서의 설교 이해를 제시하기위한 것이다. 우리의 건설적인 고민은 다양하고 중요한 성경 텍스트안에 있는 신적인 말과 신적인 조명간의 상호작용을 성경적 은유의 방식으로 고려 할 것이다.
나는 완전히 발전된 개혁교회 삼위일체 신학의 재료인, 말과 시각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말씀과 성령님 안에 있는 신적 계시의 뚜렷한 상호관계는 말과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소통과 관계되어 있다. 나의 건설적인 제안은 삼위일체 사건으로서의 설교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공동체적 예배 상황에서 설교의 인간적인 면과 신적인 면, 둘 다가 신학적으로 정확하고 동등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제안이다. 개혁교회 예배 전통에 있는 성령의 조명을 구하는 삼위일체적 기도를 말하면서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가 될 수 있으며, 인간의 설교를 통해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질 수 있는가에 대한 우리의 신학적 노력을 이야기 할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말과 여호와 하나님의 조명
Divine Speech and Divine Illumination in Scripture
창세기 1장에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라는 구절의 장엄함과 진동과 시적인 반복에서부터, 우레와같이 울리는 선지자적인 말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셨다”라는 구절까지, 구약성경을 통해서 나타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적 증인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대한 결정적인 구절이다. 단지 몇 개의 드라마틱한 경우를 제외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인간을 사용하셨다.
창세기 1장에서 시작해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말씀과 신적인 조명을 동반하는 복잡한 상호관계는 의도된 것이다. “빛이 있으라. ”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첫 번째 말씀이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창1:3-4) 빛의 부재와 그리고 생성은 모든 이방 종교의 창조 이야기에 시적인 형식으로 규범화된 패턴이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1:5) 각각의 연속되는 창조의 단계는 아침과 저녁으로 잇달아 일어나는 순환은 패턴화 되어있다. 빛의 부재가 나타나면 빛의 임재가 따라온다.
신성의 말과 신적 조명을 비슷하게 섞어놓은 은유는 네 번째 복음서의 서문에도 반영된다. 거기서 저자는 그리스어ho logos(요1:1-3)를 다시 새롭게 초점을 맞춤으로서, 창조 이야기 안에 있는 언어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의 은유의 상호작용을 모으고 또한 재현한다. 그 후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신적 자기 계시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에대한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확실성이 여기에서 그 근본적은 기원를 가지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으로서의 ho logos의 지배적인 은유와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의 근본적이며 중요한 자기 계시로서의 ho logos는 요한복음1:4-9의 신성의 말과 신적 조명의 혼합을 통해 상세히 말해지고 강화되고 있다. Ho logos안에 있었던 생명은 모든 사람들의 빛이며 결코 어둠에의해 정복되지 않는다. (요1:4-5) 이 참 빛이 세상에 옴으로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이되었다고 말한다. (요1:9)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에대한 신중하고 명확한 교리는 4세기까지 그리스도교 역사에 나타나지 않는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사로잡았던 여호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이해의 중요한 뿌리는 몇몇 중요한 본문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오래 전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말과 신-인의 소통을 통해 계시된 선지자적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구약성경의 개념이 있었다. 또한, 신적 계시로 사용된 원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도 이를 뒷받해 주는 한 몫을 했다. 이 모든 것들이 초대 교회의 삼위일체적 인식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만약 ho logos가 세상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밝히는 지식이라면, 현재적이고 즉각적인 신적 조명은 시간과 공간의 모양을 갖추는 창조 이야기의 배경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요소이다. 우리는 말씀과 성령간의 상호내주적인 작용과 관계의 신학적 정리를위한 기름진 토양을 제공하는 초기 모판을 여기서 발견한다. 이것은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의 설교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인가에 대한 개혁파의 이해의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서론을 계속 이어가면, ho logos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소통의 방식은 다음과 같다. Ho logos는 육신을 입었고 우리 가운데 사셨고, 그리고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고, 그 영광은 아버지의 아들의 영광이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을 주장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소통의 방식이 되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이 사건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얻는 경험, 특별히 눈을 통해서 얻는 일반적인 지식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마지막 형태인, 만져서 그리고 시각으로 육화된 신성이 되었다는 주장을 포함한, 말과 시각적 이미지가 의도적으로 혼합된 것을 본다.
비록 성령님이 요한 복음의 서론에 특별히 언급되지 않았을 지라도, 요한 복음서의 중심 주제이다. 예수님이 세례 이야기에 들어있는 성령님의 드라마틱한 소개는 영과 말씀이라는 서로 충돌하는 문학적 평행이 함께 자리잡고 있다. 말씀과 성령은 세례 요한이 권위있는 증인인 예수님을 왕으로 선포하는 이 이야기에서 두 개의 신적 관계로 나타난다. 이 본문은 후기 삼위일체 신학의 풍성한 재료가 되어 신학적 주제의 깊이와 명확성을 더욱 뚜렷하게 해 주게 된다. 우리의 목적은 초기 삼위일체신학의 배경이 성육신 안에 있는 인성과 신성이 일체로 존재한다는 모순에대해 건설적이며 통합적이고 시적인 해설을 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성육신이 화행speech-act으로 드러나고, 설교가 삼위일체적 사건이라는 연결은 중요하다. 이점에서 요한복음1:18절은 적당한 클라이막스를 이루고 있다. 특별히 여기서 신적인 조명과 나타남에대한 요한복음 서론의 강조가 있다. “본래 여호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고정된 시각적 이미지로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고착된 구약적 인간이, 육신으로서 창조된 시간과 공간에 들어오시고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신 예수님을 단순히 구두 계시, 예수님의 설교만으로 그분을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표현으로 그들이 수용 할 수 있는지를 병행하고 대조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2:14-4:15에서 사도 바울은 구두로 아니면 편지로 표현한 바울의 말이 진리와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를 전달할 수 있는가에대한 문제와 깊이 씨름하고 있다. 이 단락은 난해한 바울 서신의 권위문제를 매력적으로 담고 있다. 명확하게 말씀과 성령을 연결시키고, 신적인 말과 신적인 조명에대한 관심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설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권위의 문제를 명확하게하려는 그의 노력으로 인간의 말과 그 말함을 통해 계시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은 여기서 후기 삼위일체론의 영향을 준 풍성한 개념을 제공하는 신학적인 패턴을 소개한다. 편지를 받은 교회에 있었던 비난과 의심은 완고하게도,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호소하는 바울의 권위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렇게 교환된 편지 안에는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케하는 인간적 연약함에대한 바울의 인식이 매우 고상하게 표현되었다. 이에 답하기를,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설교의 인간적인 면과 신적인 면의 관계에대한 미묘하고 여러면에서 가치를 지닌 생각을 명확히 말 해 준다. 그리스도인의 설교는 의도적으로 된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을 드러내는 패턴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후에 삼위일체적 인식라 불리는 바울 서신의 사도적 시선에 주위를 돌릴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적 권위에 대한 초기 교회의 신적인 면과 인간적인 면 사이의 의미없는 개념적 이분법을 무모화시키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신에 인간의 설교가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의 말이 되어야 한다는 위치와 이유를 시종일관 신학적으로 동일한 이해를 발전시켰다.
고린도후서의 두 번째 부분에서 바울의 독특한 통찰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성육신에대한 규범화된 복음의 패턴 때문에 나오게 되었다. 신적 계시는 가장 심오하며, 가장 진실하며 그리고 가장 독특하게 그리고 평범하며, 피조되었으며, 필사의 존재인 인간의 말과 설교자을 통해 소통된다. 그의 놀랄만한 은유는 우아한 역설paradox로 표현된다.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의 “보화”는 아주 흔하며, 겉은 울퉁불퉁하며, 깨어지기 쉽고, 평상시에 쓰는 흙으로 만든 그릇인 평범한 “동양에서 쓰는 그릇”인 질그릇 안에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고 말한다. 이 일은 특수한 신학적 이유로인해 일어난다. “이는 심히 큰 능력은 여호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6-7) 이 중요한 논점에서 사용된 언어는 뚜렷하게 시각적인 것과 신성의 조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방식은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를 설명하는 6절에 명백한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대한 우리의 선포가 기초라는 말에서 나타난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6)
돈이나 보석을 양말에 숨겨 본 적이 있는가 고대 근동에서는 집이 매우 좁아서 대부분 가치있는 무엇인가를 숨겨놓을 장소가 없다. 또한 믿을 만한 자물쇠도 없다. 그래서 가족이 집을 떠날 일이 생길때, 도둑의 시선을 끄는 아름다운 보석함에 가장 귀한 보물을 넣어두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에,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장 평범하게 보이는 병에 보석이나 향수 병을 넣어 두었다. 이와 비슷하게, 인상적인 방식으로, 바울이 제안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의 엄청난 힘을 숨기기로 하셨고, 평범한 것 속에, 흔히 볼수 있는, 거의 다 부숴진 질그릇 안에 그리고 타락하고, 오류가 많은, 상처받기 쉬운, 불완전한 인간의 말과 그 삶가운데 예수님을 숨겨놓으셨다.
흔한 질그릇 속에 있는 보물과같은 계시는 분명히 첫 순위로 그리고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참된 인간이시다. 그분은 똑 같은 인간의 삶, 우리의 삶의 모든 불확실성과 애매함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현재 문맥에서는, 예수님께서 가지신 인성이 창조되지 않았으며, 필사의 인성이라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것은 또한 타락하고 오류가 많으며 상처받기 쉬우며 불완전하고 깨어지기 쉬운 심지어 죄된 인간성이다.
그리고 이와같은 원리를 적용해서 보면, 인간은 다른 사람을 위한 그리고 교회를 위한 여호와 하나님 말씀과(고후2:17;4:2),영광(고후3:7-18;4:4,6) 진리(고후4:2) 그리고 빛(고후4:4,6)과 소통하기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설교자의 신적인 면과 인간적인 면의 관계에대한 바울의 요약은 후기 칼빈과 불링거 또는 바르트와 관련된 동일한 역설적인 긴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도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4:5) 여호와 하나님은 급진적이며 예상하지 못하게, 그러게 되지 않을 것같은 방식으로 인간과 소통하셨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것은 성실하며(고후2:17) 꾸밈이 없고(고후3:1-2), 겸손하고(고후3:4-6), 투명하고(고후3:18) 믿을만하며(고후4:2) 깨어지기 쉬운(고후4:8-11)인간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비취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의 소통이다. 주님은 영이시다라는 사실과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함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인간성, 결점, 부족함을 최소화하고, 감추지 않는 투명함을 통해서 이 소통이 가능하다. 대신에, 베일을 벗은 얼굴로, 우리는 거울에 반사된 것처럼 주인의 영광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렇게 시선을 고정시킴으로, 영광에서부터 다른 영광에까지이르기 까지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고후3:17-18)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 인간의 말로 변형하셨다. 이것을 삼위일체 사건의 언어로 더욱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에의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독특하게 인간의 말을 입고 이 말을 변형시킨다. 성경은 예배시간에 모인 공동체의 안에서 신실하게 선포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설교자는 믿을 만하며 신학 교육을 잘 받아야 한다. 이 설교자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말을 통해서 전해질 것이며, 우리의 인간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명확한 범위 안에서 말해지며, 이미 인간의 말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안에서 말해지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성으로 완전해지며 변형될 소망 안에서 말해질 것이다.
성령의 조명을 구하는 삼위일체적 기도
Trinitarian Prayers For Illumination
종종 개혁교회 전통이 간과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신성의 말과 신성의 조명에대해 성경이 읻 둘을 합치기위해 아주 많이 언급한다는 점이다. 또한 설교 사건은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의 역동성이다. 전통적으로 개혁겨회의 기도는 성령님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이다. 이것은 성경과 설교를 봉독하기 전에 전형적인 개혁교회 역사의 예배 구조 속에 있었던 특별하고 독특한 기도이다. 지금까지 계속되온 개혁교회 전통의 한 예로서, 이러한 전통적 기도의 신학적 의미는 특별히 주목 할 만하다.
역사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조명을 구하는 기도는 초기 16세기 개혁파 전통의 자료 안에 있음으로 신학적 근거로 조심스럽게 소개될 수는 있겠다. 일반적으로 확실한 예배 공동체가 의지하는 성령님, 신적 조명으로 은유된 성령님이 기도의 중심에 계신다. 이러한 성령님은 삼위일체 사건을 선포하는 인간 설교자 안에서 그리고 인간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보증이 되신다.
“그의 거룩하고 영원한 말씀을 우리에게 열어주소서”라는 기도는 1525년 쯔빙글리의 예배 설교 규정에 나와있다. 그러나 성경을 봉독하고 설교하기 전에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예배 전통은 설교를 통해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청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향후 10년 뒤에 서방으로 흐르는 론강과 라인강을 따라 나타났고, 마틴 부써, 윌리암 파렐, 요한 칼빈까지 그 흔적을 추적할 수 있다. 이 전통은 로마 카톨릭 학생들이 십계명 회중 찬송을 부른 후, 설교단에 들어가기 전에 칼빈이 규칙적으로 기도한 내용을 직접 필사하기 시작한, 1545년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처음 나타났다.
이것이 끝났을때, 목사는 제단처럼 만든 나무 테이블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 제단은 목사가 있는 교회 중앙에 위치 해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모든 사람이 이해할수 있게 크고 명확한 목소리로 청중의 언어로 백성들을 위해 기도한다. 기도가 끝나면, 목사는 강대상으로 가서 일곱시 반부터 9시까지 설교한다. 설교는 놀랍게도 매우 잘 들린다.
칼빈의 Forme des prieres et chantz ecclesiastiques에 있는 예전은 목사에대해 명확하게 지시하고 있다. “기도하는 것, 성령의 은혜를 여호와 하나님께 간청하는 것은 교회를 훈육하기위해 그의 이름과 영광과 엄위가 상세히, 성실하게, 성경말씀으로 설명되어야 하며 겸손과 순종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형식은 목사의 지시사항으로 남겨져 있다. ” 칼빈의 실제적인 기도의 이런 예는 칼빈의 스승인 마르틴 부써의 스트라스부르크의 예배 지침에서가져와 제네바에서 사용한 것인데, 기록이 남겨져 있다.
전능하시고 은혜로우신 아버지여, 우리의 온전한 구원은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대한 지식안에 서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세상적인 생각들과 육신에대한 욕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으로 지금 우리를 강건하게 하소서. 우리가 듣고, 같은 말씀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 원합니다. 참된 기쁨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찬송과 영광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습니다. 아멘,
성경을 봉독하고 설교하기 전에 성령님의 특별한 조명을 구하는 기도의 예는 서방교회나 라틴 전통에서 온 것은 아니다. 성경의 봉독과 선포의 앞서 삼위일체적 기도가 존재하는 흥미로운 예가 고대 이집트와 시리아 예배, 기도 지침서에 있다. 적어도 라틴 서방 전통에는, 초기 어떤 시기에 그 예가 존재했었지만 종교개혁 전에 사라졌다. 성경을 봉독하기 전에 헌금 순서an assigned collect가 위치한 중세의 패턴은 교회력에 바탕을 둔 것이며, 규범이 되었다. 반대로, 형식적이며, 강한표현의 기도는 적어도 16세기 스트라스부르크와 제네바에서 일반화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예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현존과 말씀 선포를 위해 성령의 조명을 구할 것을 강조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패턴에 따르면, 삼위 여호와 하나님은 설교의 목적으로, 설교에 반영되는 것보다 설교의 주제로서 더 많이 다루어진다. 이것은 이 논문 초두에 언급한 폰 알멘이 말한 것이다.
성령님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는 형식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준비되어 있다. 이 기도의 형식적 구성은 청교도와 웨스트민스터 예배 규칙서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다른 종교개혁 전통에서는 그 빈도가 낮게 나타난다. “성령님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는” 신학적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장로교 예배 순서에 설교하기 전 그리고 예배의 필수요소 이 기도가 언급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많은 청교도 목사들은 간략하게나마 자발적으로, 개인적인 기도로 계속 유지하거나, 설교를 시작할 때 조용한 목소리의 기도로 되뇌이곤 했다.
오늘날에 16세기의 초기 개혁교회의 이러한 전통 다시 시작되고 있다. 성령님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는 역사적으로 개혁교회라 불리는 곳에서 법적인 측면에서 형식적으로 복구되었다. John Witvliet는 예배 역사 안에서 “성령님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가 아직도 시도하고 있으며 진행중 예라고 말했다. 이 기도는 함께 모인 예배 회중안에 성령님의 실재성과 현존하는 예배를 인정하기위한 것이다. 특별히, 그는 개혁교회의 성령님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와 고대 동방교회의 성찬에서의 에피클레시스성령님을 구하는 기도 사이를 비교하고 있다. 거기서 아버지는 성령을 보내달라는 간구와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깨닫게 해달라는 기도를 요청받는다. 개혁교회의 성찬론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의 직무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강하게 강조한다. 최근 이 독특한 예배적 관심은 중중하는 마음으로 개혁교회와 여러 동방교회의 예배 전통의 공통점을 찾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논문에서 건설적으로 제안했던 것을 다시 요약하고자 한다. 본질적으로 삼위일체 사건으로서의 설교는 설교의 인간적 측면과 여호와 하나님 편의 측면이 신학적으로 명확하며, 예배 공동체의 상황과 조화될 수 있다. 이를 염두해 두고, 훈련된 교회 설교는 성령님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의 예배 전통을 구현한다. 회중은 설교라는 사건을 기대하고 준비함으로서, 인간 설교자와 인간 회중이 설교를 돕는 기도를 함께 드린다. 이 기도는 성령님의 사역으로, 말하는 인간 설교자가 회중에게 설교할 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것을 위해 기도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성찬이라는 시간, 공간안에서 삼위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분이 되시고, 말씀이 되시고, 호흡이 되시는 이 특별한 사건 안에서 함께 기도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초월적인 힘을 가진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를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계신 곳은 평범하며 흔히 볼 수 있으며 거의 다 부숴진 질그룻안에 그리고 실수가 많으며, 상처받기 쉬우며, 불완전한 인간의 말과 삶 속이다. 이러한 삼위일체적인 기도는 설교자로 하여금 믿음을 충만히 채우는 설교를 하게되고, 회중으로 하여금 삶에 대한 희망적인 기대로 순종에대한 예민성과 집중을 제공한다. 삼위 여호와 하나님은 성령님의 도움으로 사람 설교자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실제로 교제하실 것이다. 고의적인 인간의 행동을 고백하는 것은 그 양심이 심사숙고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인데, 이런 면에서 성령님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간 설교자는 확실히 불가피하게 또는 내재적으로 또는 자동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공동체의 예배 현장에서, 설교라는 사건 안에 있는 삼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적 역사의 결과로서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제안은 성령님의 조명을 구하는 현대 삼위일체 기도에대한 묵상과 고민을 실제적으로 제시한 최고의 설명과 확인이 될 것이다. 우리는 다음의 결론에 초점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a)삼위일체 사건으로서의 설교는 인간의 설교를 통해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이 신적인 말을 성령님을 통해 하는 것이다.
(b)말씀의 내재적 상호관계와 성경으로서의 성령님의 중요성은 성찬이 있는 예배에서 봉독되고 선포된다.
(c)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복음의 패턴 때문에 신적 계시는 가장 심오하고, 사실임이 증명되고, 성령님에 의해서 그리고 평범하고 지음 받은 인간의 말과 설교자를 통해 특별하게 소통된다.
우리를 인도하소서, 오, 여호와 하나님
당신의 말씀과 성령님으로
당신의 빛을 우리가 보게 하소서
당신의 진리안에서 자유를 찾게 하소서
그리고 당신의 뜻안에서 평화를 발견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 우리의 도움
당신의 성령님으로, 우리의 마음을 여소서
그럼으로 성경이 읽혀지게 하시고
당신의 말씀이 선포되게 하소서
당신의 진리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소서
그리고 당신의 뜻을 가르치소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으로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 빛의 근원이시여
당신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당신은 우리의 영혼에 빛을 주시네
우리에게 흘러넘치게 하소서
지혜와 지식의 영이시여
거룩한 성령으로 당신을 알게하소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말씀을 알게위해 열려 있나이다.
생명과 거룩이 당신에게 속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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