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부활에 관한 지혜
본문
고린도는 헬라의 도시였습니다. 헬라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아덴(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했을 때 어떤 자들은 바울을 비웃었습니다(행17:32). 대부분의 헬라 학자들은 인간의 몸을 일종의 감옥으로 보았기 때문에, 죽음을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보아서 오히려 환영했습니다. 이러한 헬라 철학의 회의 적인 입장은 교회에까지 침투해 들어와, 바울은 이 문제와 정면으로 출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부활의 진리는 성도들의 삶에 있어 교리적으로나 실생활에 있어서나 그 함축하는 의미가 컸기 때문에 무시해 버리기에는 너무도 중요한 진리였습니다. 바울은 네 가지 근본적인 문제에 답변함으로써 부활의 진리를 다룹니다.
1. 부활은 사실인가(증거)(15:1-19)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고린도의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그 기본적인 사실로부터 부활에 관한 논증을 시작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말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확신시키기 위해 세 가지 증거를 제시합니다.
첫 번째 증거/구원(15:1-2) 바울이 고린도에 와서 복음을 전했을 때 고린도 인들의 신앙은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은 복음의 메시지에서 빠뜨릴 수 없는 요소입니다. 죽은 구세주는 아무도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고,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구원의 확증으로서의 말씀 위에 굳게 서 있습니다. 그들의 확고한 태도는 곧 그들의 믿음이 속 빈 것이 아니라 진실한 것임을 증거해 줍니다.
두 번째 증거/구약 성경(15:3-4) “먼저”(3절)라는 말은 “제일 중요한”이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은 교회가 선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사회 활동이나 인류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일에 참여하는 것도 유익한 일이나 그러한 것들이 복음에 우선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시고, 그리고 여러 성도들에게 보이신 것은 복음이 발판으로 삼고 있는 근본적인 역사적 사실입니다(3-5절).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라는 말은 그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신학적 설명입니다. 로마 제국은 많은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세상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희생 제물은 오직 한 분뿐이셨습니다. “성경대로”(3절)라는 표현에서 바울이 언급한 이 성경은 구약 성경입니다. 구약 시대의 희생 제사 제도에는 우리의 대속자와 구주로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한 부분이 많습니다. 속죄일의 제사(레16장)와 이사야서 53장의 예언 역시 그리스도의 죽음을 알려 줍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 중 그리스도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을 선포하는 구절은 어디일까요? 예수께서는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셨습니다. (마12:38-41).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첫 열매로 비유합니다. 첫 열매는 구약에서 유월절 다음의 안식일 이튿날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졌던 것이었습니다(레23:9-14/고전15:23). 안식일은 늘 일곱째 날에 해당하기 때문에 안식일 이튿날은 한 주간의 첫 날, 또는 주일에 해당되며 그 날은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유대력에서는 이 기간(안식일에서 안식일 이튿날까지의 기간)이 3일에 해당합니다. 이 초실절 외에도 구약 성경에는 메시아의 부활에 대한 다른 예언들도 있습니다(시16:8-11/22:22이하 /사53:1-12/ 시2:7. 이들은 각각 행2:25-28/ 히2:12/ 행13:32-33에 인용되어 있음)
세 번째 증거/증인들(15:5-11) 십자가의 예수님은 불신자들의 눈에도 보여졌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을 증거할 수 있는 믿는 자들에게만 보이셨습니다(행1:22/ 2:32/ 3:15/ 5:32).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으며 한 곳에 모였던 제자들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친형제인 야고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신자가 되었습니다(요7:5/ 행1:14). 또 500여명의 형제가 동시에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했습니다(6절).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은 절대 착각이나 기만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 일은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일어났었을 것입니다(마28:16이하). 그러나 주님의 부활에 대한 가장 뚜렷한 증인은 바울 자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불신자였을 때 그는 예수님의 죽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이 삶의 근본적인 변화, 그로 하여금 핍박받게 만들고 고통 당하게 만든 그 변화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셨다는 데 대한 생생한 증거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구원이 순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며, 자신이 주를 섬길 때에도 그 은혜가 자신 안에서, 그리고 자신을 통해서 역사 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는 표현은 바울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광 중에 계신 메시아를 볼 때 있을 이스라엘의 미래의 구원을 언급하는 말일 것입니다(슥12:10-13:6/ 딤전1:16). 이러한 바울의 설명에 대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예,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부할 하셨다는 사실에는 동의합니다” 라고 말했다면 바울은 "너희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면 또한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도 믿어야 할 것이다"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 진정한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가 체험하는 모든 것, 범죄만 빼놓고 모든 것을 체험하셨습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복음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이 없다면 우리들이 믿고 있는 것은 헛것이며, 우리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셈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이미 죽은 성도들은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결코 다시 보지 못할 것입니다.
결론은 분명합니다. 이 세상에서 고통만 받으면, 기대할 만한 장차의 영광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는가?(29-34절에서 바울은 이러한 생각을 설명합니다). 부활은 단순히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부활은 언제 있는가?(15:20-28) 바울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세 가지 비유적 표현을 들어 설명합니다. " 첫 열매(15:20, 23) 이에 대해선 구약 시대의 절기를 통해서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레23:9-14).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예수께서 유월절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한 묶음의 첫 열매로서 예수께서는 장사된 지 사흘 후인 주간의 첫 날에 부활하셨습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첫 곡식 단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흔드는 것은 수확한 곡식이 모두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것은 우리도 장차의 수확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데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보증이십니다. 신자들이게 있어 죽음은 그저 ‘잠자는’ 것일 뿐입니다. 육체는 잠자지만 영혼은 주님과 함께 본향에 거합니다(빌1:21-23/ 고후5:1-8). 부활 때, 잠자던 육체는 깨어나서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입니다. 아담(15:21-23) 바울은 아담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을 보되, 대조적인 모습의 표상을 봅니다(롬5:12-21참조).
첫째 아담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으나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는(15:45-47) 하늘로부터 오셨습니다. 첫째 아담은 여호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이 세상에 죄와 사망을 가져다주었지만, 둘째 아담은 여호와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써 의와 영생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23절에 언급된 “차례”(order)라는 말은 원래 군대의 서열(序列)을 의미하는 용어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부활에 일련의 질서, 또는 순서를 설정해 놓으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25-29절과 요한계시록 20장 같은 말씀들은 성경에 ?만인 부활?(general resurrection)과 같은 가르침은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공중에 재림하실 때, 그분은 당신의 교회를 들어올리실 것이며 동시에 모든 믿는 사람과 믿음 안에서 죽은 자들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동시에 모든 믿는 사람과 믿음 안에서 죽은 자들을 일으키실 것입니다(살전4:13-18). 예수께서는 그것을 “생명의 부활”(요5:29)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심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실 때 죄인들은 “심판의 부활”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요5:29/ 계 20:11-15).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 중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며, 둘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15:24-28)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오실 때,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천년 동안 죄악들을 몰아내시고 당신의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계20:1-6). 그때 신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스리며 주님의 영광과 권세에 동참할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도 예언된 이 나라는 예언의 가르치는 교사들에 의해 ?천년 왕국?(the millennium)이라 칭해집니다. 이 말은 라틴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밀레"(mille)는 “천”(千)을 의미하며, "아눔"(annum)은 “년수”(年數)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천년 왕국 후에도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최후의 반역이 있게 됩니다(계20:7-10). 예수께서는 이 반역을 당신의 권세로 멸하실 것입니다. 그때에 죄인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고 불 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또한 그때에 죽음 자체도 지옥에 던져져서 최후의 적인 사망이 궤멸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의 발 아래 두시고 나라를 여호와 하나님께 바쳐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 상태가 시작될 것입니다(계21-22장). 건전하고 경건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자들도 예언에 나타난, 종말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 그 세세한 사항에 다 의견의 일치를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된 진리는 분명하게 일치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현재 하늘에서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모든 권세가 “예수님의 발 아래”있습니다. (시110편 /엡1:15-23). 사단과 인간에겐 아직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통제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지금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시2편). 구원받은 자의 부활은 아직까지 실현되지 않았고, 죄인들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딤후2:17-18)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 당신의 교회로 돌아 오실 까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은 “순식간에 홀연히”(15:51)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요일2:28-3:3).
3. 부활은 왜 있는가?(15:29-34/49-58) 육체의 부활은 장차 일어날 사건으로서 우리 개인의 삶에 긴밀한 함축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미래를 생각할 필요없이 우리 좋은 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우리가 죽는다 해도 그 분이 오실 때 우리는 부활해서 영광된 몸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의 사실과 관련이 있는 성도의 삶의 네 가지 영역을 설명합니다.
1. 복음전도(15:29)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일부 사람들은 이 말이 성도가 죽은 친척을 위해 "대시 받는 세례"를 말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세례에 대한 그러한 가르침이 전혀 없습니다. 주후 2세기 경에는 ?대행 세례?를 주장하는 몇몇 이단 그룹들이 있었으나, 일반 교회는 그런 관행을 절대로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구원은 각자가 스스로 결정해야 할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또 구원받기 위해서 세례를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아마 ‘죽은 자들 편에 서서 세례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달리 말하면, 만일 부활이 없다면 왜 복음 전도에 열심을 내며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고 애쓰느냐는 것입니다. 죄인으로 하여금 세례를 받게 해놓고 결국 죽은 자들 편에 서게 한다면(죽은 자들과 한통속이 되게 한다면) 굳이 세례를 받게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저 죽음을 향해 가는 하나의 길에 불과하다면, 차라리 그 길에서 벗어나 나오라! 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지상에서의 삶에 따라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여 천국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심판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어 지옥에 들어간다(요5:28,29), 우리는 죽은 신자들을 위해서 울지만, 아직까지 구원받을 기회를 가지고 있으면서 여전히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불신자들을 위해서도 애통해 해야 합니다. 부활의 사실성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만드는 동기입니다.
2. 고난(15:30-32) “날마다 죽노라”는 바울의 말은 로마서 6장에서처럼 “자아에 대헤서 죽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당명한 육체적 위험을 의미합니다(고후4:8-5 /11:23-28) (고후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4: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은 대적들로부터 끊임없이 위헙을 받았으며 죽을 뻔한 위기를 수없이 많이 넘겼습니다. 그런데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왜 쓸데없이 그러한 고난과 위험을 견디어 내겠습니까? “내일 죽으리리 먹고 마시자”(사22:13)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서 하는 일들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뒤돌아보게 될 것입니다(고후5:10).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만을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인(全人)을 주관하십니다. 육체도 구원받습니다(롬8:18-23) (롬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8:19) 피조물의 고대 하는 바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롬8: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롬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롬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육체의 고난을 참고 견디면 부활의 때에 영광을 받게 됩니다(고후4:7-18). 우리들의 육체에 기대할 만한 미래가 없다면, 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으며 죽기까지 하겠습니까?
3. 죄로부터의 분리(15:33-34)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하는 일은 장차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부도덕함은 고린도인들의 삶의 일부였습니다. 또한 고린도 교회의 일부 성도들은 자신들의 죄를 합리화하기 위해 부활의 진리를 거부했습니다.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는 말은 헬라의 시인 메난(Menander)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그 말을 틀림없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신자의 몸은 여호와 하나님의 전(殿)이기 때문에 세상의 죄와 분리되어 있어야 합니다(고후6:14-7:1). “열매없는 어두움의 일”(엡5:6-17)에 참여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전을 더럽히는 일일 뿐입니다. 그때는 고린도의 성도들이 깨어 근신할 때였습니다(살전5:4-11) 죄와 타협하는 신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주위의 죄인들에게 그분을 증거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어가는 때에 성도가 죄 가운데서 이기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4. 사망(15:50-58) 천국은 혈과 육이 있는 우리의 현재의 몸을 위햇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그때, 살아있는 몸은 순식간에 그리스도의 몸처럼 변화될 것입니다(요일3:1-3). 그리고 죽었던 신자들은 새롭게 영광을 입은 몸으로 부활될 것입니다. 부활한 우리의 몸은 노쇠하거나 죽지 않습니다. 정신의학의 터를 닦은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종국(終局)에는 죽음이라는 고통스러운 수수께끼가 있다. 거기에는 아직까지 아무런 해결책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망 안에서, 그리고 사망에 대해서 승리합니다. 왜인가?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신 그리스도로 인해서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14:19) 죄 사망, 율법은 병행합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며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롬6:23).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들의 죄를 짊어지셨고(벧전2:24) 또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셨습니다(갈3:13). 우리의 이 승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고, 우리는 지금 이 승리를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57절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자면,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계속 이김을 주시느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노니”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복종할 때 우리는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빌3:10) (빌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58절은 주님께 대한 바울의 찬양이며 교회를 향한 바울의 결론적 교훈이기도 합니다. 사망을 정복하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확신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결코 헛됨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은 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봉사하는 일에 흔들지 않고, 고난 속에서도 요동하지 않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을 위해 더욱 힘써 일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헛되다”는 말을 78차례나 했는데, 58절은 솔롬의 그 슬픔 외침에 대한 답변입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1)고 솔로몬은 말하지만, 바울은 승리의 노래를 부릅니다.
4. 어떻게 부활하는가?(15:35-49) 철학적 기질이 다분한 헬라인들은 인간 육체의 부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결국 흙으로 변해, 다른 육체들을 위한 자양분을 내놓습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가 먹는 음식물은 오래 전 세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육체를 이루고 있었던 요소들의 일부입니다. 로드 아일랜드 주(州)의 창건자인 로저 월리엄스(Roger Williams)의 무덤이 발굴되었을 때, 곁에 있던 사과나무의 뿌리가 관 속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사과나무의 열매를 먹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월리엄스의 몸을 먹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다면 썩어서 흩어진 몸이 어떻게 다시 부활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극한 질병과 고통 가운데 죽은 자들은 때론 화장을 합니다. 그리곤 그 재를 강물에 뿌립니다. 이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이러한 추론(推論)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매우 퉁명스럽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바울은 부활은 육체가 재구성(reconstruction)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성경 어느 곳에도 부활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흩어진 조각들을 다시 모아 우리의 이전의 몸으로 돌이킨다고 말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부활에는 연속성은 있지만(부활한 몸이 우리이 몸이라는 점에서), 동일성은 없습니다(부활한 몸은 이전과 같은 몸이 아니라는 점에서). 바울은 그러한 기적이 말로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활의 이 교리를 분명하기 위해 세 가지의 유추적 표현을 사용하여 설명합니다.
씨앗(15:35-38, 42-48) (고전15: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고전15:36)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고전15:37)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고전15:38) 여호와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고전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15: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15: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고전15: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15: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씨를 뿌릴 때에 위는 그것과 똑같은 씨를 추수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씨는 죽지만, 그 죽음에서 생명이 탄생합니다(요12:23-29에서 우리 주님도 이와 동일한 유추적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요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12: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요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요12: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비록 얼마 안 되는 밀알들을 뿌렸어도 그 식물이 자라서 추수할 때에는 많은 밀알을 얻습니다. 그러나 새로 추수한 곡식이 처음에 심겨졌던 종자와 똑같은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밀을 심었는데 보리를 거두지는 않습니다. 더욱, 추수 때에 얻은 것들은 종자로 심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습니다. 그 특별한 한 예로 튜울립을 들 수 있습니다. 튜울립의 구근(球根)처럼 못생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부활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우리를 옛 모습 그대로 환원시키시는 것이 고작이라면, 하나도 나아지는 것이 없습니다. 또한 혈과 육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늘의 영광을 향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에 합당한 몸을 갖는 것입니다. 42-48절에서 바울은 부활 때의 이 놀라운 변화를 상세히 설명합니다. 몸은 썪은 것으로 심겨집니다(무덤에 묻힙니다). 땅에 묻히면 몸은 부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할 때에는 썪지 아니할 몸으로 부활합니다. (장의사들이 아무리 아름답게 화장을 시켜도) 몸은 욕된 것으로 묻힙니다. 그러나 육체는 영광 중에 부활합니다. 땅에 묻히는 인간의 육체는 연약하나 부활때의 변화된 몸은 강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될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자연적인 몸은 이 지상의 환경에 적합합니다. 우리의 몸은 최초의 조상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아담이 흙으로 지음받았듯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창2:7). 그러나 부활한 몸은 영적 환경에 적합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신속히 움직이실 수 있었으며 잠겨진 문을 그대로 통과하실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분은 음식을 드실 수도 있었으며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손으로 만지고 촉감을 느겼습니다(요20:9-29) (요20:9)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요20: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요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요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요20:13)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요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못하더라 (요20:1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요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요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여호와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니ㅁ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요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요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요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요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요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20:24)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요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요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요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니이다 (요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합니다. 부활의 몸은 구속의 사역의 완성이며 우리로 구주 예수님의 형상을 닮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성(人性)의 면에 있어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지만, 몸(body)에 관한한 아담의 형상을 닮게 될 것입니다. 40절은 중요한 성경적 원리를 진술합니다. 즉, 먼저 육이요(또는 땅의 것), 그 다음에 신령한 것(또는 하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첫번째 출생은 우리에게 육적인 것을 주지만, 두번째 출생은 영적인 것을 제공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처음의 것, 육적인 것을 거부하시면서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버리시고 아벨을 선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첫 아들 이스마엘은 거부하시고 둘째 아들 이삭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첫번째 출생에 의존하면 장차 영원한 정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출생을 체험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축복받게 될 것입니다. 육체(15:39) (고전15: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여기서 바울은 종류가 다른 동물의 세포 조직은 서로 다르다는 과학적 발견을 예고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다양한 종(種)의 생물들을 아무 구별도 없이 번식시킬 수 없습니다. 인간의 몸은 한 종류의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짐승, 새, 물고기는 다 그 나름대로의 고유한 육체적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과 짐승과 새와 물고기의 육체를 각각 다르게 만드실 수 있다면,. 부활 때의 우리의 몸을 왜 다르게 만드시지 못하겠습니까( 애완동물도 부활 할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하나의 예로 들었을 뿐이다) 하늘의 육체(15:40-41) (고전15: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고전15:41)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땅에 속한 육체도 있지만 하늘에 속한 육체도 있습니다. 양자는 서로 다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하늘에 속한 육체의 영광도 서로 다릅니다. 여기서 바울은 비록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영화롭게 된 몸을 가지게 될지라도 그 영광 중에서 신자들은 서로 다를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천국에 있는 그릇은 가득 체워지지만 어떤 그릇은 다른 그릇보다 클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사엥 있을 때의 충성과 헌신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비유적 설명은 부활의 몸에 관한 우리의 의문점을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확증은 제시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의 새로운 생활에 적합한 영광과 몸을 우리들에게 부여하실 것입니다. 태양빛이 지하실 안의 전등불 빛과 다른 것처럼, 부활한 몸은 그 속성이 오늘날 우리들의 육체와는 다를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활의 몸으로 장차 영원히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여호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부활에 관한 바울의 이러한 논의는 단순히 신자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님을 기억합시다. 바울은 사실 몇 가지 실제적 교훈을 우리에게 납득시켜야 했고, 29-34절에서 그것들을 명백히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가 육체의 부활을 정말 믿는다면, 우리는 현재의 육체로 여호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6:6-14) (고전6:9) 불의한 자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 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고전6:10)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전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고전6: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고전6:13)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여호와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고전6:14) 여호와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끝으로, 죄인들은 지옥에 합당한 육체를 부여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것입니다(마25:41/살후1:7-10/계20:11-15) (마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살후1:7)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살후1:8)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살후1:9)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살후1:10) 그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계20: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계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계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계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구원받은 우리들은 마땅히 그들을 심판에서 구원하려고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고후5:11)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만약 당신이 구주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늦기 전에 바로 지금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5. 영광스런 승리(15:50-58) 마라톤 선수가 42. 195Km라는 긴 거리를 달리기 위해서는 적절한 힘의 안배와 더불어 많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가치와 진실한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특히 이 세상에 살면서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부활의 완성을 대망 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많은 고투(苦鬪)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고진 감래’(苦盡甘來)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부활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성도들에게 승리를 주는 분이며, 성도들은 부활의 승리를 위해서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58절)가 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혈과 육으로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을 좀더 자세히 살피면서 부활에 이르는 성도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승리를 얻기 위해 근신해야 한다 (막13: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둘째, 승리를 얻기 위해 동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고후6:1)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셋째, 승리를 얻기 위해 용기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넷째, 승리를 얻기 위해 감사의 생활이 있어야 한다.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니라 다섯째,궁극적인 승리를 얻기 위해 성도들은 낙관적인 견해를 가져야 한다. (골1: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여섯째, 승리를 위해서는 신뢰의 자세가 필요하다. (마24:35)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1. 혈과 육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영광된 부활을 대망하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육체적인 요인으로는 성취되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바울은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물론 일차적으로, 역사의 종말에 이루어질 완성된 부활이 현재 우리 육체로서 감당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보다 깊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미 이 역사 선상에서 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도들의 삶이 하늘나라의 삶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는 생활이란 점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혈과 육’으로 받을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란 육체의 소욕을 채우는 방법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다는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이루며, 또 미래에 완성된 모습으로 성취할 부활은 단순한 우리 몸의 변신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삶을 담보한 근본적인 변화요 비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광된 부활을 바라보는 성도는 이 부활의 현재적 삶에 참여한 것이기에 썩어질 육체의 방법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이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보상적 차원이나 기복적(祈福的) 차원에서 부활을 생각하는 경향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부활의 영광된 삶을 추구하며 그 완성의 날을 기다린다는 것은 곧 하늘 나라의 방법으로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2.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도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러한 새로운 차원의 삶, 즉 부활의 삶을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이에 대해서 오직 한 가지의 길만이 있다고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예수만이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오늘도 성령을 통하여 역사 하시면서 우리들이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내용을 담은 실질적인 생활을 하도록 독려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서(빌2:5) 주께서 가신 길을 따라감으로써 부활의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이기에 만군의 여호와이신 주께 의지하는 것만이(시84:12) 영원한 삶을 향하여 전진하며 살아가는 길이란 말입니다. 이미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이 세상에서 살면서도 얼마나 자주 예수님의 마음에서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의 길을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실로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입니다. 부활의 삶을 완성하는 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일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점에서 뼈아픈 자기 성찰(自己省察)과 비판을 가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성도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걸 맞는 실질적인 내용의 삶을 살아가고 세워야 할 근본적인 의무와 책임이 부과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3. 흔들리지 말며 주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 바울은 이제 부활을 바라보고 사는 성도들이 소망을 잃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완전하게는 아니라 할지라도 이미 성도들은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는 삶을 지금 여기에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늘 나라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자라면 더욱 그 소망의 확신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는 삶으로 매진(邁進)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는 동안에 겪는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음을 알고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주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58절). 그러므로 성도는 각기 자기가 처한 환경 속에서 자기가 하는 일 속에서 끊임없이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의를 추구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현대 사회의 많은 분야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된 가치를 추구하는 훌륭한 도구로 사용되어질 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부활의 영광을, 그 찬란한 소망의 날을 기다린다는 것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연명하며 기다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이 세상에서 실현하며 살아간다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든 성도가 그리고 그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이 세상에서 존재한다는 그 자체는 영원한 생명력을 지닌 부활의 삶을 이미 살아가는 것이며, 완벽한 그 날의 성취를 위해 노력을 다하여 힘쓰는 역동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성도의 생활이 어떻게 추구되어지고 무엇을 그 내용으로 해야 하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부활의 승리를 바라보는 성도의 생활은 오로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좇아서,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주의 일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현대 사회 속에서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습니다. 여러 가지 가치의 혼돈과 갈등이 있는 사회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하는 노력을 일관되게 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1. 부활은 사실인가(증거)(15:1-19)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고린도의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그 기본적인 사실로부터 부활에 관한 논증을 시작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말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확신시키기 위해 세 가지 증거를 제시합니다.
첫 번째 증거/구원(15:1-2) 바울이 고린도에 와서 복음을 전했을 때 고린도 인들의 신앙은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은 복음의 메시지에서 빠뜨릴 수 없는 요소입니다. 죽은 구세주는 아무도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고,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구원의 확증으로서의 말씀 위에 굳게 서 있습니다. 그들의 확고한 태도는 곧 그들의 믿음이 속 빈 것이 아니라 진실한 것임을 증거해 줍니다.
두 번째 증거/구약 성경(15:3-4) “먼저”(3절)라는 말은 “제일 중요한”이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은 교회가 선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사회 활동이나 인류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일에 참여하는 것도 유익한 일이나 그러한 것들이 복음에 우선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시고, 그리고 여러 성도들에게 보이신 것은 복음이 발판으로 삼고 있는 근본적인 역사적 사실입니다(3-5절).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라는 말은 그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신학적 설명입니다. 로마 제국은 많은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세상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희생 제물은 오직 한 분뿐이셨습니다. “성경대로”(3절)라는 표현에서 바울이 언급한 이 성경은 구약 성경입니다. 구약 시대의 희생 제사 제도에는 우리의 대속자와 구주로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한 부분이 많습니다. 속죄일의 제사(레16장)와 이사야서 53장의 예언 역시 그리스도의 죽음을 알려 줍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 중 그리스도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을 선포하는 구절은 어디일까요? 예수께서는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셨습니다. (마12:38-41).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첫 열매로 비유합니다. 첫 열매는 구약에서 유월절 다음의 안식일 이튿날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졌던 것이었습니다(레23:9-14/고전15:23). 안식일은 늘 일곱째 날에 해당하기 때문에 안식일 이튿날은 한 주간의 첫 날, 또는 주일에 해당되며 그 날은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유대력에서는 이 기간(안식일에서 안식일 이튿날까지의 기간)이 3일에 해당합니다. 이 초실절 외에도 구약 성경에는 메시아의 부활에 대한 다른 예언들도 있습니다(시16:8-11/22:22이하 /사53:1-12/ 시2:7. 이들은 각각 행2:25-28/ 히2:12/ 행13:32-33에 인용되어 있음)
세 번째 증거/증인들(15:5-11) 십자가의 예수님은 불신자들의 눈에도 보여졌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을 증거할 수 있는 믿는 자들에게만 보이셨습니다(행1:22/ 2:32/ 3:15/ 5:32).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으며 한 곳에 모였던 제자들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친형제인 야고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신자가 되었습니다(요7:5/ 행1:14). 또 500여명의 형제가 동시에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했습니다(6절).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은 절대 착각이나 기만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 일은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일어났었을 것입니다(마28:16이하). 그러나 주님의 부활에 대한 가장 뚜렷한 증인은 바울 자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불신자였을 때 그는 예수님의 죽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이 삶의 근본적인 변화, 그로 하여금 핍박받게 만들고 고통 당하게 만든 그 변화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셨다는 데 대한 생생한 증거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구원이 순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며, 자신이 주를 섬길 때에도 그 은혜가 자신 안에서, 그리고 자신을 통해서 역사 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는 표현은 바울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광 중에 계신 메시아를 볼 때 있을 이스라엘의 미래의 구원을 언급하는 말일 것입니다(슥12:10-13:6/ 딤전1:16). 이러한 바울의 설명에 대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예,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부할 하셨다는 사실에는 동의합니다” 라고 말했다면 바울은 "너희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면 또한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도 믿어야 할 것이다"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 진정한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가 체험하는 모든 것, 범죄만 빼놓고 모든 것을 체험하셨습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복음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이 없다면 우리들이 믿고 있는 것은 헛것이며, 우리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셈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이미 죽은 성도들은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결코 다시 보지 못할 것입니다.
결론은 분명합니다. 이 세상에서 고통만 받으면, 기대할 만한 장차의 영광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는가?(29-34절에서 바울은 이러한 생각을 설명합니다). 부활은 단순히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부활은 언제 있는가?(15:20-28) 바울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세 가지 비유적 표현을 들어 설명합니다. " 첫 열매(15:20, 23) 이에 대해선 구약 시대의 절기를 통해서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레23:9-14).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예수께서 유월절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한 묶음의 첫 열매로서 예수께서는 장사된 지 사흘 후인 주간의 첫 날에 부활하셨습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첫 곡식 단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흔드는 것은 수확한 곡식이 모두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것은 우리도 장차의 수확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데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보증이십니다. 신자들이게 있어 죽음은 그저 ‘잠자는’ 것일 뿐입니다. 육체는 잠자지만 영혼은 주님과 함께 본향에 거합니다(빌1:21-23/ 고후5:1-8). 부활 때, 잠자던 육체는 깨어나서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입니다. 아담(15:21-23) 바울은 아담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을 보되, 대조적인 모습의 표상을 봅니다(롬5:12-21참조).
첫째 아담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으나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는(15:45-47) 하늘로부터 오셨습니다. 첫째 아담은 여호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이 세상에 죄와 사망을 가져다주었지만, 둘째 아담은 여호와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써 의와 영생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23절에 언급된 “차례”(order)라는 말은 원래 군대의 서열(序列)을 의미하는 용어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부활에 일련의 질서, 또는 순서를 설정해 놓으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25-29절과 요한계시록 20장 같은 말씀들은 성경에 ?만인 부활?(general resurrection)과 같은 가르침은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공중에 재림하실 때, 그분은 당신의 교회를 들어올리실 것이며 동시에 모든 믿는 사람과 믿음 안에서 죽은 자들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동시에 모든 믿는 사람과 믿음 안에서 죽은 자들을 일으키실 것입니다(살전4:13-18). 예수께서는 그것을 “생명의 부활”(요5:29)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심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실 때 죄인들은 “심판의 부활”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요5:29/ 계 20:11-15).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 중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며, 둘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15:24-28)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오실 때,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천년 동안 죄악들을 몰아내시고 당신의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계20:1-6). 그때 신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스리며 주님의 영광과 권세에 동참할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도 예언된 이 나라는 예언의 가르치는 교사들에 의해 ?천년 왕국?(the millennium)이라 칭해집니다. 이 말은 라틴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밀레"(mille)는 “천”(千)을 의미하며, "아눔"(annum)은 “년수”(年數)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천년 왕국 후에도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최후의 반역이 있게 됩니다(계20:7-10). 예수께서는 이 반역을 당신의 권세로 멸하실 것입니다. 그때에 죄인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고 불 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또한 그때에 죽음 자체도 지옥에 던져져서 최후의 적인 사망이 궤멸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의 발 아래 두시고 나라를 여호와 하나님께 바쳐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 상태가 시작될 것입니다(계21-22장). 건전하고 경건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자들도 예언에 나타난, 종말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 그 세세한 사항에 다 의견의 일치를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된 진리는 분명하게 일치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현재 하늘에서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모든 권세가 “예수님의 발 아래”있습니다. (시110편 /엡1:15-23). 사단과 인간에겐 아직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통제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지금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시2편). 구원받은 자의 부활은 아직까지 실현되지 않았고, 죄인들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딤후2:17-18)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 당신의 교회로 돌아 오실 까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은 “순식간에 홀연히”(15:51)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요일2:28-3:3).
3. 부활은 왜 있는가?(15:29-34/49-58) 육체의 부활은 장차 일어날 사건으로서 우리 개인의 삶에 긴밀한 함축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미래를 생각할 필요없이 우리 좋은 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우리가 죽는다 해도 그 분이 오실 때 우리는 부활해서 영광된 몸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의 사실과 관련이 있는 성도의 삶의 네 가지 영역을 설명합니다.
1. 복음전도(15:29)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일부 사람들은 이 말이 성도가 죽은 친척을 위해 "대시 받는 세례"를 말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세례에 대한 그러한 가르침이 전혀 없습니다. 주후 2세기 경에는 ?대행 세례?를 주장하는 몇몇 이단 그룹들이 있었으나, 일반 교회는 그런 관행을 절대로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구원은 각자가 스스로 결정해야 할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또 구원받기 위해서 세례를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아마 ‘죽은 자들 편에 서서 세례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달리 말하면, 만일 부활이 없다면 왜 복음 전도에 열심을 내며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고 애쓰느냐는 것입니다. 죄인으로 하여금 세례를 받게 해놓고 결국 죽은 자들 편에 서게 한다면(죽은 자들과 한통속이 되게 한다면) 굳이 세례를 받게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저 죽음을 향해 가는 하나의 길에 불과하다면, 차라리 그 길에서 벗어나 나오라! 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지상에서의 삶에 따라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여 천국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심판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어 지옥에 들어간다(요5:28,29), 우리는 죽은 신자들을 위해서 울지만, 아직까지 구원받을 기회를 가지고 있으면서 여전히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불신자들을 위해서도 애통해 해야 합니다. 부활의 사실성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만드는 동기입니다.
2. 고난(15:30-32) “날마다 죽노라”는 바울의 말은 로마서 6장에서처럼 “자아에 대헤서 죽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당명한 육체적 위험을 의미합니다(고후4:8-5 /11:23-28) (고후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4: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은 대적들로부터 끊임없이 위헙을 받았으며 죽을 뻔한 위기를 수없이 많이 넘겼습니다. 그런데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왜 쓸데없이 그러한 고난과 위험을 견디어 내겠습니까? “내일 죽으리리 먹고 마시자”(사22:13)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서 하는 일들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뒤돌아보게 될 것입니다(고후5:10).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만을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인(全人)을 주관하십니다. 육체도 구원받습니다(롬8:18-23) (롬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8:19) 피조물의 고대 하는 바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롬8: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롬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롬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육체의 고난을 참고 견디면 부활의 때에 영광을 받게 됩니다(고후4:7-18). 우리들의 육체에 기대할 만한 미래가 없다면, 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으며 죽기까지 하겠습니까?
3. 죄로부터의 분리(15:33-34)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하는 일은 장차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부도덕함은 고린도인들의 삶의 일부였습니다. 또한 고린도 교회의 일부 성도들은 자신들의 죄를 합리화하기 위해 부활의 진리를 거부했습니다.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는 말은 헬라의 시인 메난(Menander)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그 말을 틀림없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신자의 몸은 여호와 하나님의 전(殿)이기 때문에 세상의 죄와 분리되어 있어야 합니다(고후6:14-7:1). “열매없는 어두움의 일”(엡5:6-17)에 참여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전을 더럽히는 일일 뿐입니다. 그때는 고린도의 성도들이 깨어 근신할 때였습니다(살전5:4-11) 죄와 타협하는 신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주위의 죄인들에게 그분을 증거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어가는 때에 성도가 죄 가운데서 이기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4. 사망(15:50-58) 천국은 혈과 육이 있는 우리의 현재의 몸을 위햇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그때, 살아있는 몸은 순식간에 그리스도의 몸처럼 변화될 것입니다(요일3:1-3). 그리고 죽었던 신자들은 새롭게 영광을 입은 몸으로 부활될 것입니다. 부활한 우리의 몸은 노쇠하거나 죽지 않습니다. 정신의학의 터를 닦은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종국(終局)에는 죽음이라는 고통스러운 수수께끼가 있다. 거기에는 아직까지 아무런 해결책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망 안에서, 그리고 사망에 대해서 승리합니다. 왜인가?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신 그리스도로 인해서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14:19) 죄 사망, 율법은 병행합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며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롬6:23).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들의 죄를 짊어지셨고(벧전2:24) 또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셨습니다(갈3:13). 우리의 이 승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고, 우리는 지금 이 승리를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57절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자면,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계속 이김을 주시느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노니”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복종할 때 우리는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빌3:10) (빌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58절은 주님께 대한 바울의 찬양이며 교회를 향한 바울의 결론적 교훈이기도 합니다. 사망을 정복하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확신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결코 헛됨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은 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봉사하는 일에 흔들지 않고, 고난 속에서도 요동하지 않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을 위해 더욱 힘써 일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헛되다”는 말을 78차례나 했는데, 58절은 솔롬의 그 슬픔 외침에 대한 답변입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1)고 솔로몬은 말하지만, 바울은 승리의 노래를 부릅니다.
4. 어떻게 부활하는가?(15:35-49) 철학적 기질이 다분한 헬라인들은 인간 육체의 부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결국 흙으로 변해, 다른 육체들을 위한 자양분을 내놓습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가 먹는 음식물은 오래 전 세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육체를 이루고 있었던 요소들의 일부입니다. 로드 아일랜드 주(州)의 창건자인 로저 월리엄스(Roger Williams)의 무덤이 발굴되었을 때, 곁에 있던 사과나무의 뿌리가 관 속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사과나무의 열매를 먹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월리엄스의 몸을 먹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다면 썩어서 흩어진 몸이 어떻게 다시 부활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극한 질병과 고통 가운데 죽은 자들은 때론 화장을 합니다. 그리곤 그 재를 강물에 뿌립니다. 이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이러한 추론(推論)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매우 퉁명스럽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바울은 부활은 육체가 재구성(reconstruction)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성경 어느 곳에도 부활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흩어진 조각들을 다시 모아 우리의 이전의 몸으로 돌이킨다고 말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부활에는 연속성은 있지만(부활한 몸이 우리이 몸이라는 점에서), 동일성은 없습니다(부활한 몸은 이전과 같은 몸이 아니라는 점에서). 바울은 그러한 기적이 말로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활의 이 교리를 분명하기 위해 세 가지의 유추적 표현을 사용하여 설명합니다.
씨앗(15:35-38, 42-48) (고전15: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고전15:36)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고전15:37)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고전15:38) 여호와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고전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15: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15: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고전15: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15: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씨를 뿌릴 때에 위는 그것과 똑같은 씨를 추수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씨는 죽지만, 그 죽음에서 생명이 탄생합니다(요12:23-29에서 우리 주님도 이와 동일한 유추적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요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12: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요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요12: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비록 얼마 안 되는 밀알들을 뿌렸어도 그 식물이 자라서 추수할 때에는 많은 밀알을 얻습니다. 그러나 새로 추수한 곡식이 처음에 심겨졌던 종자와 똑같은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밀을 심었는데 보리를 거두지는 않습니다. 더욱, 추수 때에 얻은 것들은 종자로 심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습니다. 그 특별한 한 예로 튜울립을 들 수 있습니다. 튜울립의 구근(球根)처럼 못생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부활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우리를 옛 모습 그대로 환원시키시는 것이 고작이라면, 하나도 나아지는 것이 없습니다. 또한 혈과 육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늘의 영광을 향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에 합당한 몸을 갖는 것입니다. 42-48절에서 바울은 부활 때의 이 놀라운 변화를 상세히 설명합니다. 몸은 썪은 것으로 심겨집니다(무덤에 묻힙니다). 땅에 묻히면 몸은 부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할 때에는 썪지 아니할 몸으로 부활합니다. (장의사들이 아무리 아름답게 화장을 시켜도) 몸은 욕된 것으로 묻힙니다. 그러나 육체는 영광 중에 부활합니다. 땅에 묻히는 인간의 육체는 연약하나 부활때의 변화된 몸은 강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될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자연적인 몸은 이 지상의 환경에 적합합니다. 우리의 몸은 최초의 조상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아담이 흙으로 지음받았듯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창2:7). 그러나 부활한 몸은 영적 환경에 적합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신속히 움직이실 수 있었으며 잠겨진 문을 그대로 통과하실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분은 음식을 드실 수도 있었으며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손으로 만지고 촉감을 느겼습니다(요20:9-29) (요20:9)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요20: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요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요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요20:13)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요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못하더라 (요20:1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요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요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여호와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니ㅁ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요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요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요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요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요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20:24)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요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요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요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니이다 (요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합니다. 부활의 몸은 구속의 사역의 완성이며 우리로 구주 예수님의 형상을 닮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성(人性)의 면에 있어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지만, 몸(body)에 관한한 아담의 형상을 닮게 될 것입니다. 40절은 중요한 성경적 원리를 진술합니다. 즉, 먼저 육이요(또는 땅의 것), 그 다음에 신령한 것(또는 하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첫번째 출생은 우리에게 육적인 것을 주지만, 두번째 출생은 영적인 것을 제공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처음의 것, 육적인 것을 거부하시면서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버리시고 아벨을 선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첫 아들 이스마엘은 거부하시고 둘째 아들 이삭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첫번째 출생에 의존하면 장차 영원한 정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출생을 체험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축복받게 될 것입니다. 육체(15:39) (고전15: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여기서 바울은 종류가 다른 동물의 세포 조직은 서로 다르다는 과학적 발견을 예고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다양한 종(種)의 생물들을 아무 구별도 없이 번식시킬 수 없습니다. 인간의 몸은 한 종류의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짐승, 새, 물고기는 다 그 나름대로의 고유한 육체적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과 짐승과 새와 물고기의 육체를 각각 다르게 만드실 수 있다면,. 부활 때의 우리의 몸을 왜 다르게 만드시지 못하겠습니까( 애완동물도 부활 할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하나의 예로 들었을 뿐이다) 하늘의 육체(15:40-41) (고전15: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고전15:41)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땅에 속한 육체도 있지만 하늘에 속한 육체도 있습니다. 양자는 서로 다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하늘에 속한 육체의 영광도 서로 다릅니다. 여기서 바울은 비록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영화롭게 된 몸을 가지게 될지라도 그 영광 중에서 신자들은 서로 다를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천국에 있는 그릇은 가득 체워지지만 어떤 그릇은 다른 그릇보다 클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사엥 있을 때의 충성과 헌신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비유적 설명은 부활의 몸에 관한 우리의 의문점을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확증은 제시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의 새로운 생활에 적합한 영광과 몸을 우리들에게 부여하실 것입니다. 태양빛이 지하실 안의 전등불 빛과 다른 것처럼, 부활한 몸은 그 속성이 오늘날 우리들의 육체와는 다를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활의 몸으로 장차 영원히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여호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부활에 관한 바울의 이러한 논의는 단순히 신자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님을 기억합시다. 바울은 사실 몇 가지 실제적 교훈을 우리에게 납득시켜야 했고, 29-34절에서 그것들을 명백히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가 육체의 부활을 정말 믿는다면, 우리는 현재의 육체로 여호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6:6-14) (고전6:9) 불의한 자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 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고전6:10)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전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고전6: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고전6:13)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여호와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고전6:14) 여호와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끝으로, 죄인들은 지옥에 합당한 육체를 부여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것입니다(마25:41/살후1:7-10/계20:11-15) (마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살후1:7)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살후1:8)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살후1:9)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살후1:10) 그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계20: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계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계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계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구원받은 우리들은 마땅히 그들을 심판에서 구원하려고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고후5:11)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만약 당신이 구주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늦기 전에 바로 지금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5. 영광스런 승리(15:50-58) 마라톤 선수가 42. 195Km라는 긴 거리를 달리기 위해서는 적절한 힘의 안배와 더불어 많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가치와 진실한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특히 이 세상에 살면서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부활의 완성을 대망 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많은 고투(苦鬪)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고진 감래’(苦盡甘來)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부활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성도들에게 승리를 주는 분이며, 성도들은 부활의 승리를 위해서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58절)가 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혈과 육으로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을 좀더 자세히 살피면서 부활에 이르는 성도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승리를 얻기 위해 근신해야 한다 (막13: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둘째, 승리를 얻기 위해 동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고후6:1)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셋째, 승리를 얻기 위해 용기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넷째, 승리를 얻기 위해 감사의 생활이 있어야 한다.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니라 다섯째,궁극적인 승리를 얻기 위해 성도들은 낙관적인 견해를 가져야 한다. (골1: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여섯째, 승리를 위해서는 신뢰의 자세가 필요하다. (마24:35)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1. 혈과 육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영광된 부활을 대망하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육체적인 요인으로는 성취되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바울은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물론 일차적으로, 역사의 종말에 이루어질 완성된 부활이 현재 우리 육체로서 감당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보다 깊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미 이 역사 선상에서 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도들의 삶이 하늘나라의 삶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는 생활이란 점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혈과 육’으로 받을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란 육체의 소욕을 채우는 방법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다는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이루며, 또 미래에 완성된 모습으로 성취할 부활은 단순한 우리 몸의 변신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삶을 담보한 근본적인 변화요 비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광된 부활을 바라보는 성도는 이 부활의 현재적 삶에 참여한 것이기에 썩어질 육체의 방법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이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보상적 차원이나 기복적(祈福的) 차원에서 부활을 생각하는 경향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부활의 영광된 삶을 추구하며 그 완성의 날을 기다린다는 것은 곧 하늘 나라의 방법으로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2.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도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러한 새로운 차원의 삶, 즉 부활의 삶을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이에 대해서 오직 한 가지의 길만이 있다고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예수만이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오늘도 성령을 통하여 역사 하시면서 우리들이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내용을 담은 실질적인 생활을 하도록 독려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서(빌2:5) 주께서 가신 길을 따라감으로써 부활의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이기에 만군의 여호와이신 주께 의지하는 것만이(시84:12) 영원한 삶을 향하여 전진하며 살아가는 길이란 말입니다. 이미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이 세상에서 살면서도 얼마나 자주 예수님의 마음에서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의 길을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실로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입니다. 부활의 삶을 완성하는 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일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점에서 뼈아픈 자기 성찰(自己省察)과 비판을 가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성도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걸 맞는 실질적인 내용의 삶을 살아가고 세워야 할 근본적인 의무와 책임이 부과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3. 흔들리지 말며 주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 바울은 이제 부활을 바라보고 사는 성도들이 소망을 잃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완전하게는 아니라 할지라도 이미 성도들은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는 삶을 지금 여기에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늘 나라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자라면 더욱 그 소망의 확신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는 삶으로 매진(邁進)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는 동안에 겪는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음을 알고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주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58절). 그러므로 성도는 각기 자기가 처한 환경 속에서 자기가 하는 일 속에서 끊임없이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의를 추구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현대 사회의 많은 분야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된 가치를 추구하는 훌륭한 도구로 사용되어질 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부활의 영광을, 그 찬란한 소망의 날을 기다린다는 것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연명하며 기다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이 세상에서 실현하며 살아간다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든 성도가 그리고 그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이 세상에서 존재한다는 그 자체는 영원한 생명력을 지닌 부활의 삶을 이미 살아가는 것이며, 완벽한 그 날의 성취를 위해 노력을 다하여 힘쓰는 역동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성도의 생활이 어떻게 추구되어지고 무엇을 그 내용으로 해야 하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부활의 승리를 바라보는 성도의 생활은 오로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좇아서,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주의 일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현대 사회 속에서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습니다. 여러 가지 가치의 혼돈과 갈등이 있는 사회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하는 노력을 일관되게 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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