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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부활소망에참예한신앙자세

본문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 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 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요11:25-26) 그리스도의 부활은 복음의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부활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리스도의 부 활이 없는 기독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14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 도 헛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이토록 부활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얼마나 이 부활에 대한 소망을 품고 있는지 점검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저 이 세상의 삶의 체바퀴를 따라 돌아 가느라 정신없이 가다듬을 겨를도 없이 허둥대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삶의 여유와 풍족함을 어디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물질은 있어도 없어도 여전히 우리 를 피곤하게 만듭니다. 명예와 권세도 우리를 만족하게 만들어 주기 보다 우리를 더욱더 긴장과 초조로 몰아가기가 일수입니다. 인생에게서 무었을 기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같은 인생에 구원의 비치 비추었습니다. 그 빛은 생명의 빛인 부활의 빛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부활에 참예 할 성도로서의 마땅한 신앙의 자세에 관하여 살펴 보고자 합니다.
I. 승리의 부활(23-28절).
1.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23절). 구약에서 첫 열매는 대표성의 의미가 내포됩니다. 이스라엘이 추수하여 처음으로 거둔 열매를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라고 명령하셨는데 이것은 모든 열매 들이 다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로서 첫 열매를 바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든 열매를 다 받으신 것으로 간주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진 것은 그리스도 이후 에 맺히게 될 성도들의 부활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열납하시고 인정하시고 확정하 셨다는 의미로서의 대표성을 지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앞으 로 우리에게 있을 부활에 대한 증표요, 보증입니다. 이제 앞으로 우리들은 이 고해의 장막을 벗어나 저 영원한 복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의 부 활에 앞서간 성도들로 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부활에 참예하게 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부활은 절대 승리자 권세의 상징입니다(24-28절). 인생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유일한 폭군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의 문을 통해 우리를 짖밟아오는 죽음이라는 폭군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강한 군왕이요, 천하가 벌벌 떠는 정복자라 할지라도 죽음의 폭군 앞에서는 모두 아무런 저항도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힘없이 당해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죽음의 폭군과 싸워 조금의 타협이라도 이끌어 낸 위인은 없었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찾아오면 아무리 바쁘고 할일이 많 고 중요한 직책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사정이 참작되지 않았습니다. 일방적 으로 인생을 어두움있는 죽음 저편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 은 실제적으로 인생에게 왕노릇을 하였던 것입니다. 사단은 죄라는 미끼로 인생을 죽음으로 끌고 가는데 성공하므로 이 세상에서 권세 정사와 능력을 마음껏 행사하는 실세였습니다. 이러므로 성경은 사단을 가리켜 이 세상의 왕이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같이 인생에게 절대적인 권세로 군림하던 죽음의 원인을 제거 하시러 이땅에 오셨던 거입니다. 죽음이 죄로 인하였 기에 그리스도께서는 무섭고도 괴로운 죄값을 홀로 치루시려고 외로이 저 험한 십자가로 올라 가셨습니다. 나를 대신하여 지옥의 죽음으로 죄 값을 대신 치루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리고서는 사흘만에 천하무적인 죽 음의 쇠사슬을 부활의 권능으로 끊어버렸습니다. 우리 인생에게 새 소망을 선사하셨습니다. 이 땅의 악한 사단의 모든 권세와 정사와 폭군적인 죽음 의 공포를 말끔히 없이하셨습니다. 이제 모든 만물들을 사단의 권세까지 굴복시킨 그리스도께서는 진정한 이 세상의 권세자요, 주인이요, 만유의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그리스도를 과연 얼마나 가슴으로 느끼고 있습니까? 습성과 타성에 젖어 굳어있는 그리스도에 관한 이해가 지금 나를 점점 매마른 신 앙으로 몰고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매마른 타성의 벽을 깨뜨리고, 영적 무감각의 질병을 고침 받지 않고서는 진정한 감격과 부활의 영광에 참예하 기 어려울 것입니다.

2. 부활의 소망(29-34절).
1. 부활의 소망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는 모든 것은 헛된 것입니다(29절). 본문 29절은 난해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죄 사함의 표로 행해지는 세 례가 타인에 의해 대신 치러질 수 있다면 죄의 당사자 만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죄를 해결되어야 할 죄가(겔18:2-4) 타인의 노력에 의해서도 해결될 수 있 다는 이상한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는 오직 자신에게만 책임이 있다는 겔18:2-4절의 말씀과 부딪치게 되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것을 바울이 인정하으리라고 볼 수 없습니다. 당시 초대교회의 이단들 중 마르시온 이단 같은 곳에서는 죽은 자들을 대신하여 세례를 받으면 효력이 나타난다고 가르친 이단이 있었습니다. 아마 이같은 이단의 영향을 받아서 잘못된 세례를 행하는 것에 대하여 빗대어 한 말일것입니다. 결국, 부활을 믿지않고 세례를 받으면 그 모든 세례가 아무런 가치가 없 다는 뜻인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으면 세례 뿐만 아니라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이 헛된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 신앙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2. 부활 신앙이 가져다 주는 유익(30-32절).
(1)부활 신앙은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담대함을 줍니다(30절). 본문 30절에서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릎쓰리요"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열정 때문에 무수히도 많은 환란과 핍박과 곤고를 겪었습니다(고후11:23-27). 그러나 바울은 이처럼 힘들고 괴로운 삶을 원망하거나 수치스럽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바울은 그 리스도를 위하여 많은 고통과 핍박과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 겼습니다. 어떻게하여서 이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었는가 하면, 그것은 바 울에게 부활에 대한 분명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활의 확신이 있었기에 모든 곤고한 삶 뒤에 있을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고 모든 어려움 을 기쁨으로 이길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부활의 소망이 없는 자같이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혀 이 세상 일로 낙담하고 좌절하며 우울한 삶을 계속하고 있습니까? 도대체 이 모든 것을 능히 극복하고 밝고 기쁘게 살아가게 하는 부활의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눈이 이 세상의 물질과 부귀 영화 그 이상의 것들을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시야가 너무도 좁아 터 져 괴로움과 눈물과 한숨과 좌절 낙심으로 고개를 숙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찬란한 소망을 향하여 눈을 높이 들어야 합니다. 그 리할 때에 비로소 현재의 어려움이 기쁨으로 변할 것입니다. 내 앞에 다가 오는 어떠한 삶의 어려움도 담대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 도로 말미암아 당하는 조롱과 환란과 모함에 넘어지지 않고 다가올 영광스 런 천국과 부활을 바라보며 담대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2)부활 신앙이 없는 자는 쾌락과 사악함에 빠지고 맙니다(32-34절). 32절 하반절에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터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 했습니다. 다시말해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 은 자포자기에 빠져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죽음으로서 모든 것 이 막을 내리고 만다고 여기기 때문에 항상 종말이라는 강박 관념 속에서 사로잡혀 현재 하루하루의 삶에 대한 쾌락을 추구하므로 최대한 자신을 위 해 시간을 사용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어떠한 삶 의 진지한 자세도 경건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로지 먹고 마시며 쾌락을 추구하는 극히 동물적인 모습 밖에 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병적으로 발전하면 본문 33절 말씀처럼 악한 동무들로 선한 행실을 더럽히 게 됩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기에 스스로 삶에 대한 애착을 잊어버리 고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피하고 도망하여 하루하루 순간적인 쾌락 에 점점 가까이 접근해 들어 가는 것입니다. 타락의 길에서 일상에 다가오 는 시한부적 삶에 대한 압박과 절망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과 도박과 비틀거리는 밤속으로 탈출합니다. 심지어 마약으로 도 피하기도 합니다. 이같이 부활이 소망이 없는 시한부적 인생들은 무의미한 일상의 타성의 수레바퀴에 정신없이 돌아가든지 아니면 정신을 차린다손 치더라도 거기에는 자포자기의 흔들림과 쾌락과 죄악의 소굴로의 도피 뿐 입니다. (3)부활의 소망이 있는 자는 깨어서 의를 행합니다(34절). 부활의 소망을 간작하고 살아가는 자들은 그 삶이 판이합니다. 이들 은 항상 내일을 준비합니다. 내일이 있기에 오늘의 최선이 있습니다. 오늘 의 삶을 소중히 여기며 그렇다고 조급하지 않고 안정되고 평화로운 가운데 경건하고도 진지한 하루하루를 엮어가는 것입니다. 항상 깨어서 자기의 일 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타락한 세상이 될수록 올바른 신앙을 가지기 어렵 지만 의를 위해서 끈기있게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려 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참다운 인간 의 삶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에겐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습니다. 이제 모든 세상의 일들을 바라보 는 시각이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흥청망청거리며 큰소리와 헛기 침 하며 위세를 떨치는 사람들을 부러워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불쌍 히 여기며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얽매어 시한부적인 조급한 삶 을 살아가는 자들의 비참한 실상을 깨달았으면 이제 주님만 바라보고 힘차 게 주의 뜻을 이루기에 매진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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