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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 그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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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이 / 히브리서 10:25


 


오늘은 올 해 마지막 주일 즉 송년 주일로 예배드린다. 새해라고, 맞이한 그 날이 엊그제 같은데 어언 이 한 해가 다 지나가 이제 금년의 절정에 섰다. 서고 보니 지나온 한 해가 만감이 교차된다.


이 때 오늘 택한 본문은 우리 인생을 살아 나아가는데 지표가 되면 지혜로 주는 말씀이기에 이 본문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져 한다.


 


인생은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사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지혜로 산다는 것이 어떻게 산다는 것인가? 이것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인 것을 살펴보자.


 


① 어리석은 사람은 남의 이야기를 많이 하고 지나치게 남한테 신경을 쓴다.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하면 나도 좋아하고 싫다고 하면 싫어한다. 누가 나를 칭찬하면 천하를 얻은 듯이 기뻐하고 조금만 섭섭하게 대해주면 자기비하에 빠진다.


현대적인 용어로 이런 사람을 종속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를 먼저 생각한다. 다른 사람을 평할 때도 자기를 먼저 반성한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았을 때 그것을 오래 생각지 않고 나에게 그런 실수가 없는가를 묻는다. 그래서 늘 자기 충실을 기하고 자기 진실을 먼저 생각한다. 이런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한다.


 


② 어리석은 사람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일에 지나치게 마음을 쓴다.


세상엔 반반의 가능성을 지닌 일이 많다. 꼭 이러리 라고도 못하고 저러리 라고도 못한다. 만에 하나 있을까 말까한 일들도 있다. 그런데 이런 일에 얽매어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만일”때문에 항상 고민이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사람들이 걱정 근심하는 일의 태반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 한다. 그런 일들을 가지고 마음을 쓰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반드시 일어날 일, 예언자가 아니더라도 내다볼 수 있는, 반드시 내 앞에 다가올 일을 위해 늘 준비하고 대비하는 생을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우리는 지금 한 해의 절정에 와 있다. 겨울이 벌써 문턱을 넘어섰다. 머잖아 매서운 겨울 추위가 닥칠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섣달은 아니다. 연말이 되고, 새해가 되고 그러다보면 다시 봄도 올 것이다.


 


例: 이솝 우화다. 하루는 사자와 나귀와 여우 이 세 마리의 짐승들이 협력해 사냥을 했다. 그리고 사냥한 것을 공정하게 나누어 가지기로 했다. 사자가 나귀에게 말한다“네가 한 번 공평하게 나누어 보라”고. 그러자 나귀는 사자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사냥한 것을 똑같이 삼등분했다. 사자 曰“내가 제일 많이 수고했는데 이건 공평치 못하다”하고 화를 내더니 그만 나귀를 잡아먹어 버렸다. 그러고 나서 이번엔 여우에게 네가 공정하게 분배해 보라고 했다. 그런데 여우가 분배했을 때 사자는 무척 만족해했다. 여우는 사자 몫을 자기 몫보다 훨씬 많이 나눴다. 이 때 사자 曰“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여우 曰“나귀 죽는 것을 보고 생각해 냈지”


 


여러분! 여기에 지혜가 있다. 남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자신에게 닥칠 재난을 미리 막는 것, 이것이 지혜로운 삶이다. 남 죽는 것을 보았으면 내 죽음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죽음이 어디 남의 일인가? 다 나 자신의 문제다. 죽음은 현실적이고 결정적 사건이다. 언제 일어나도 일어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것을 예사로 잊고 지낸다.


히브리서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고 했듯이 우리는 죽음과 같이 반드시 일어날 일, 그 결정적인 사건 앞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본문에“그날”이란 말이 나온다. 이 그날이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어떤 사람들은 시간이란 것을 원과 같은 개념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시간을 다시 되돌아오는 것, 빙빙 도는 것이라고 윤회적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성경은 시간을 직선적인 것으로 말하고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했다.


창조가 있고 말세가 있는 것이다.


 


“그날”의 개념은 히브리 신학의 핵을 이루는 매우 의미심장한 사상이다.


“주의 날”곧“메시야의 날”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사상이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오늘이 있어서 그 날이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 날이 있어서 오늘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항해하는 배와 같다. 배가 항구를 떠날 때 이제부터 바람 부는 대로 떠다니다가 아무데나 가서 닿으면 거기가 내 목적지다라고 하며 떠나는 것인가? 아니다. 떠날 때부터 어디로 간다하는 목적지가 분명히 정해져 있다. 그 날이 있다. 그 날이 먼저 있어 그 날을 향해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성경에서의 "그 날은" 역사의 종말이다.


그 날을 위해 오늘이 있다는 것이다. 그 날은 하나님의 날이다. 주께서 정하신 날이다. 사람의 힘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그 날은 시작과 끝이며, 창조와 심판이다. 그런데 이 시작과 끝 사이에 시간이란 현재가 있다. 이것은 숨겨진 세대요, 감추어진 세대요, 신비의 계시적 시간이다. 이 시간엔 신비롭게 감추어진 바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비유들을 보아도 대부분 그 날에 집중됨을 볼 수 있다.


 


마태복음 13:24 이하의 가라지의 비유라든지,


누가복음 20:9 이하의 악한 농부의 비유라든지,


마태복음 25:14 이하의 달란트의비라든지,


마태복음 25:1 이하의 열 처녀의 비유,


누가복음 15:11 이하의 탕자의 비유 등등, 몇 가지만 보아도 그렇다.


이 비유들이 주는 교훈은 이 세대엔 잠시 잠깐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의와 불의가 뒤바뀔 때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잠언 23:17, 24:1, 19 등에 보면“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했다. 그 날이 반드시 오기 때문이라고“-- 여러분은 그 날이 있다고 믿으며 그 믿음대로 오늘을 살고 있는가?


 


미국의 흑인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나의 장례식에서 누군가가 나를 위해 조사를 해 주려면 이렇게 부탁하고 싶다 ”여기에 누워있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사랑한 사람이다“라고--:


여러분은 죽은 뒤에 어떤 말을 듣고 싶은가?


어떤 조사로 결론이 내려지겠는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겠는가?


“그 날”은 심판의 날이지만, 구원 받은 사람에겐 구원의 날이요, 은혜의 날이요, 영생의 날이다. 모든 거짓이 벗겨지는 날이다. 바벨탑의 교만이 용납되지 않고, 인간의 재주가 통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거짓 없이 노출되는 시간이다.


그리고 구원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영광스러운 시간이다. 지금은 종말론적인 새로운 가치, 새로운 윤리체제를 세워야 할 때다. 그러면 어떻게?


 


오늘 본문이 그것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다. 그 날이 가까워 올수록 모이기를 힘쓰고, 예배하기를 힘쓰라고 했다.


 


例: 70이 넘은 어떤 노인이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상적인 통계를 냈다.


“내가 살아온 70 년을 숫자로 계산해 볼 때 식사시간 7년, 일한 시간 11년, 오갈 시간 8년, 세수하고 옷 입는 시간 5년 떠든 시간 3년, 교회에서 예배드린 시간은 6개월 이었다”고.


이것을 경제적으로 풀이를 해보자. 자식을 위해 쓴 돈이 얼마, 나를 위해 쓴 돈이 얼마, 써서는 안 될 돈이 얼마,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쓴 돈은 몇 푼이나 되는가? 이것이 바로 그 날이 가까워 옴을 보는 사람이 한 번 쯤 생각해 볼 문제다.


 


우리는 예배의 자세를 분명히 해야겠다. 예배는 혈연관계로 모이는 친목회도 아니고, 이익 때문에 모이는 이익 공동체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 예배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왔다. 그리고 신령한 것을 생각한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다.


 


다시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


첫째 믿음을 점검하라는 권면을 발견하게 되고


둘째 소망을 확고히 하라고 했으며


셋째로 열매있는 사랑을 확증해야 한다.


내 사랑의 현주소는 어딘지? 진정 사랑한 것이 무엇이며, 내가 과연 사랑을 가졌는지 물어야 한다.


 


結論: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날을 기다리는 사람은 예배의 자세를 분명히 하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확증하여 궁극적 관심을 새롭게 하자.


계시록 22:20 의 말씀처럼“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이런 믿음으로 보내고 오는 새해도 이런 믿음으로 맞이하여 하나님의 크신 은총 속에 그 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 바란다.


 


찬송 492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항상 찬송 부르다가


     490 주여 지난 밤 내 꿈에 뵈었으니 그 꿈 이루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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