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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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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람들이니까 농담 한마디하고 설교 시작해도 괜찮지 싶습니다. 미국 마이내니티 비취에서 세계 애처가 대회를 했다고 합니다. 세계 애처가 대회를 했는데 한국 사람이 1등을 하고, 미국 사람은 2등을 했답니다. 미국 사람이 어떻게 2등 했느냐 하면, 미국 사람이 나가서 자기 아내를 옆에 세워 놓고 하는 말이 "I love my wife, of my wife, by my wife, for my wife. " 그래서 2등을 했답니다. 한국 사람은 나가더니 자기 아내를 옆에 세워 놓고 하는 말이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할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고 했답니다. 그래서 1등을 했답니다. 바라기는 여러 젊은이들, 바로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역사적인 사명, World Vision을 가진 젊은이들로 자라길 바랍니다. 어느 작가가 말하기를 내가 말하는 것은 단어 하나마다 5달러의 가치가 있다고 큰 소리쳤습니다. 어느 사람이 도대체 저 사람이 무슨 귀중한 말을 하길래 자기가 말하는 단어마다 5달러의 가치가 있다고 허풍을 떠는가 싶어서 10달러를 보내 보았답니다. 그랬더니 정확하게 두 단어를 보내 왔는데 그 두 단어가 바로 Thank you라는 겁니다. 사실 "Thank you - 감사합니다. " 하는 두 단어는 10달러의 가치가 아니라 100달러 아니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아주 큰 가치가 있는 인생의 의미를 주는 단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일찍이 스위스 인문주의 철학자였던 칼 힐티(Carl Hilty)는 "받는 바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한 마디로 고귀한 심정을 가진 사람들 뿐이다. 기타의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대로 구실을 찾아 내어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이 무거운 기분에서 벗어나려 한다. "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하다고 하는 말을 할 수 있거나, 그것을 생각할 수 있거나,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아름다운 삶의 자세를 가진 사람이고, 그의 삶은 그의 말로 인해서 풍성해지리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가슴 속에 불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가지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이 아니라, 더 가지지 못한 데 대한 상대적인 불만인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없는 사람들이 없어서 불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더 가지지 못해서 불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에 주어진 조건들이 행복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더 행복한 조건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에 불평하는지 모릅니다. 내가 가진 건강이 못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건강을 가지지 못하게 때문에 우리는 불만을 가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삶의 상황이 나빠서가 아니라, 내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할 때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들의 불만입니다. 그러고 보면 현대인들의 불만은 상대적인 불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 우리로 하여금 감사의 생각을 잊어 버리게 합니다. 니버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고 무관심은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죄악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반대말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토인비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역사의 종말에 출현하는 제 4의 인간, 모래알과 같은, "우리"가 될 수 없는 "나"의 인간으로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의 가슴은 열려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슴 속이 열려지지 않기 때문에 들어 와야 할 많은 생의 아름다운 것들이 바깥을 맴돌고 있고,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살아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 문둥이를 고쳐 주신 이야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러분과 나의 문둥병을 고쳐 주신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오늘, 무감각해 지고 그리고 상대적인 불만에 사로 잡혀 살아 가는 현대인들의 삶과 심성은 바로 문둥병자와 같다고 해서 아무 지나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한다고 할 때 무엇을 생각합니까? 우리가 느낀다고 하면 무엇을 느낍니까? 깨닫는다고 하면 무엇을 깨닫습니까? 차리리 오늘의 젊은이들은 사색을 포기해 버린 세대가 아니냐 그 말입니다. 생각하는 것 그 자체를 귀찮고 괴로운 일로 여기고, 생각할 것이 없으니 생각할 거리가 없어집니다. 생각하기가 싫으니 더욱 생각할 여유조차 가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이웃에 대하여, 주어진 삶에 대하여, 넓게 하늘을 바라 보는 삶의 여유에 대하여, 생각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현대 젊은이들은 불행한 소크라테스의 길보다는 행복한 돼지의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게 훨씬 저들에게는 즐거울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저들에게 감사라는 말을 처음부터 부당한 이야기입니다. 하여간 열 명의 문둥이를 예수님은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저들이 문둥병을 고침 받았을 때에 참으로 그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와서 고침 받은데 대한 감사를 나타낸 사람은 단 한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성경에서는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들의 문둥병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날과 같은 문둥병은 결코 아닙니다. 그때 당시만 해도 문둥병은 여호와 하나님의 저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사람과 가까이 하지 못합니다. 길을 가다가 사람이 오면 '다메'를 외쳐야 합니다. 그 말은 불결하다는 말인데 내게 가까이 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다른 사람에게서 고립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와도 가까이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육체가 썩어감과 동시에 정신마저 함께 죽어 가는 그런 인간들이었습니다.
저들의 걸음걸이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저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살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저들 가운데 주님께 감사의 정을 나타낸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 젊은이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여러 가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주는 주님의 교훈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오늘 이 무관심과 상대적인 불만족에 살아 가는 우리의 가슴을 향하여, 잃어 버린 아홉 가지의 감격을 되찾을 것을 주님께서 요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참으로 많은 아름다운 기억들과 축복들과 감격들이 있지만 현대인을 그것을 잊어 버리고 살아 갑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우리가 참으로 가슴 속에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찾아야 될, 인생의 잃어버린 그 많은 감격들, 인생에 잃어 버린 그 많은 축복들, 인생에 잃어 버린 그 많은 감사들, 그것을 찾을 것을 요구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지 않습니까? 잃어 버린 인생의 아홉 가지의 감격이 어디 있느냐? 잃어 버린 인생의 아홉 가지 축복이 어디 있느냐? 참으로 네 인생의 감사해야 될 잃어 버린 아홉 가지 감사의 조건들이 어디 있느냐? 주님이 물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도리어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 젊은이들! 성경은 잃어 버린 아홉 가지 감사가 아니라 범사에 감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감사의 조건들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 갈 때에 참으로 주어진 것을 감사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알프스의 아름다운 계곡에 사는 농부들은 알프스의 아름다운 눈 덮인 장면들을 절대로 볼 줄을 모른다고 합니다. 바닷가에 사는 어부들은 바다가 들려 주는 태고적 음량을 듣지 못한다고 합니다. 저들은 바로 그 속에서 살아 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일찍이 하비 콕스(Harvey Cox)는 그의 책 바보제에서 `노동과 인간'과 `놀이의 인간'을 구분한 일이 있습니다. 오늘 현대인은 노동의 인간에 집착한 나머지 "일을 하라! 일을 하라! 일을 하라" 노동의 인간에 집착한 나머지 사는 것은 좋아졌을지 모르지만 바로 거기에서 인간이 여유를 가지고 감사하는 참된 인간성을 잃어 버렸다고 개탄한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그렇게도 가슴 아파하는 비인간화의 길을 재촉해 놓았습니다. 참으로 인간이 인간되는 것은, 삶의 감격과 기쁨을 되찾는 것은, 노동의 인간이 아니라 놀이의 인간이며, 축제의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함께 울고, 함께 고통을 경험하고, 함께 웃으며 살아 가는 삶의 공동체가 거기에서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열림입니다. 너를 받아 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다 함께 우리가 될 때에 거기에 삶을 함께 누리는 기쁨을 얻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 젊은이들! 우리가 1년에 한번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오늘과 같은 산업 사회에 사는 여러분과 나에게 도대체 이 추수감사절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까? 언제 우리가 볍씨를 뿌렸고, 언제 우리가 벼를 가꾸었고, 언제 우리가 벼를 거두어들였습니까? 우리는 쌀을 만드는 것조차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아 가는데, 그러한 우리들에게 사실 이 추수감사절이라고 하는 것은 별의미가 없을런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년 365일을 살아 가는 가운데 이 하루만이라도 우리가 삶의 여유를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생각해 보는, 삶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가진다고 하는 것은 우리 삶의 가장 고귀한 순간이 될 줄로 확실히 믿습니다.
나의 남편은 목사였다라는 책에 보면 피터 목사는 자라서 백악관의 담임 목사가 된 분인데, 그가 어릴 때는 가난해서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고 다녔습니다. 한번은 그가 밤늦게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 오는데 돌아오는 중간쯤에 들판이 있었습니다. 들판을 가로 질러야 집으로 돌아 가는데 그날따라 밤은 몹시 어두웠습니다. 칠흑 같았습니다. 별 하나도 보이지 않는 밤이었습니다. 사나운 짐승들의 울부짖음 소리가 멀리서 들리고 바람소리가 이 어린 가슴 속에 굉장한 공포를 집어 넣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불끈 쥐고 한 발자국이라도 빨리 집에 가야 되겠다고 달리는 다리에 힘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피터야! 피터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무 놀라서 돌아 보아야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두움인데 그를 부르는 사람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그 순간에 피터 가슴에는 더 큰 공포가 밀려 왔습니다. "아, 내가 너무 겁에 질려서 헛소리를 들었구나, 이제 큰일났다. " 그렇게 생각하면서 더 빨리 달리겠다고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겨 놓는 순간에 또 다시 다급하게 "피터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무엇인가에 걸려 힘없이 넘어졌습니다. 정신이 아찔했지만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고 땅을 집고 일어나려고 하는 데 앞의 땅이 짚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팔이 쑥 내려가 버렸습니다. "이상하다. "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하니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들판 한가운데 금광으로 파 들어 간 깊은 함정이 폐광이 된 채 버려져 있다는 사실을 그때에 깨달았습니다. 한 발자국만 더 내디뎠더라면 수백 미터의 폐광 속으로 떨어져 그는 죽었을는지 모릅니다. 그 순간에 그가 무릎꿇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믿음으로 자라나서 후에 백악관의 담임 목사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 젊은이들! 사람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 시대는 기동성의 시대입니다. rush, rush의 시대입니다. 모빌리티를 자랑하며 사는 시대입니다. 현대의 특징으로 4가지 S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Speed입니다. Sex, Screen, Sport와 Speed를 일컬어 현대 4가지 S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삶에 부대끼고 밀려 가는 동안에 생각해 볼 여유가 없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얼마나 숨가쁘게 달려 왔는지 모릅니다. 역사와 주변들의 일이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며 살아 왔습니다. 정신없이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 다시 한번 이 숨가쁜 인생의 행진을 멈추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도와 주신 그 뜨거운 사람을 잠깐만이라도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의 가슴 속에는 놀라운 감격으로 넘치게 되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잃어 버린 아홉 가지 감격이 다시 우리 가슴 속에 살아 나며, 삶은 우리에게 너무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크신 은혜는 우리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놀랍고 감격스럽고 크고 엄청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 앞에 참으로 겸손해 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 젊은이들! 겨울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겨울을 지내기가 염려스러운 집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날씨가 추워 올 때에 연탄 한 장이 없어 방의 온기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아낙네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의 구멍난 양말을 기워주기 위해 이맛살을 찌푸리고 어두운 방안에 쭈그리고 앉아야 하는 가난한 부모들의 모습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비단 이런 것만이 아닙니다. 여러분들과 같이, 젊음을 누리지 못하고 오늘도 24시간 3부 교대로 먹고 살아야 한다는 그 하나의 집념을 위해서 젊음을 삭혀 가며 머리를 숙이고 살아 가는 여러분 또래의 젊은이들이 이 땅에는 수없이 있습니다. 그런 것만은 또 아닙니다. 여러분들처럼 모이고 싶을 대 모이고, 찬송하고 싶을 때 찬송하고 하늘을 우러러 자유롭게 생각해 볼 여유를 가지지 못하는 이 땅의 얽매인 자들, 억압받는 자들 또한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것만은 아닙니다.
바로 오늘 이 땅 위에 아직까지도 헤어진 가슴의 상처를 치료 받지 못하고 잃어 버린 가족을 찾아 헤매는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의 울음소리가 메아리 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북의 내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은 참으로 신앙과 양심의 자유도 가지지 못한 채 저들은 언제까지나 어두운 땅바닥을 내려다 보며 어둠의 길을 걸어 가고 있습니다. 세계는 소용돌이 치고 있습니다. 지구촌은 난리를 겪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불만입니까? 무엇이 모자랍니까? 우리에게 무엇을 불평할 기회가 있습니까? 우리는 늘상 오늘 이러한 자리를 주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겸손해 질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들려 주시기 원하시는 그 아름다운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니 그 사랑과 자비 앞에 겸손해 지고, 잃어 버린 아홉 개의 감격을 되찾아서 우리가 이제 우리 앞길을 어떻게 걸어 가야 할는지를 생각할 수 있다면 이 감사절은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고 뜨겁게 하는 놀라운 감격이 기회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사랑하는 여러 젊은이들! 우리의 바쁜 삶의 순간을 잠깐 멈추고 주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생각하며 오늘 오리에게 겸손과 사랑으로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잃어 버린 아홉 개의 감격을 되찾고, 우리의 젊음과 사랑과 정열을 이제는 올바른 삶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삶에,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 땅위에 이룩하는, 투자하는 삶으로 감격의 결단이 이루어 지는 복된 시간과 젊은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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