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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9:1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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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성숙은 ‘감사’의 깊이에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사람이 어릴 때는 ‘감사’를 모릅니다. 그러나 점점 나이가 들고 성숙해지면 ‘감사’를 깨달아 감사하게 됩니다. 사람이 아무리 나이가 먹고 덩치가 커져도 부모나 사회나 이웃에 대하여 감사를 깨닫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면 아직 그는 덜 성숙된 존재, 다시말하면 아직 인간다운 인간이 못된 것입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어릴 때는 이기적이기 때문에 거저 요구만 하고 발기만 합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그저 불만과 부족함만이 느껴지고 욕심만을 내 세웁니다.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조그만 어려움이 있으면 시험에 들고 신앙생활에서 멀어집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교회에서 중직을 맡았다고 하여도 그의 신앙의 삶에서 감사가 없으면 그는 아직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아직 신앙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입니다. 사실, 신앙인의 특징을 말하라면 그의 생활이 여러 어려움과 고난이 있어도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면서 ‘감사’할 수있는 삶일 것 입니다. 오늘은 한해의 꼭 절반을 보내는 주일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맥추감사절을 보내면서 절반의 시간 속에서 역사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바라며, 그리고 바쁜 일정 속에서 감사를 잊고 있었다면 잃었던 감사를 새롭게하여 남은 순간들을 더욱 뜨거운 감사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더욱 복된 승리의 삶읋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10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둥병이란 무서운 것입니다. 지금도 아직 문둥병은 두렵고 무서운 병인데, 당시는 이 병은 불치의 병이며, 저주받은 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든 식구와 떨어져 살아야 하며, 완전한 격리 속에서 절망과 고독의 생활을 살아야만 합니다. 예)나병환자 시인 ‘한하운’씨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 뿐이라. 낮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 끼리 반갑다. 천안삼거리를 지나고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 속에서 절룸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개의 발가락이 빠질 때까지 가도 가도 끝없는 붉은 황토길. “ 이러한 고통받던 이들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피맞힌 절규로 외칩니다. 이들의 외침을 들으시고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당신의 은혜를 보여 주십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들의 외침을 외면하시지 않으십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응답하겠고, 크고 비밀한 일들을 네게 보이리라. ”고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고통이 있을 때에 염려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히 울부짖으며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새로운 그 분의 축복의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갑니다. 가는 중에 그들은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순종의 믿음이 낳은 놀라운 축복의 일입니다. 예수님이 가라고 하셨을 때에 의심하지 않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나아갈 때에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들의 순종은 놀라운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갔을 때에 낳지 않으면 그들은 화를 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말씀에 의지하여 믿고 순종하고 나아갔을 때에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문제는 그 이후의 일입니다.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은혜를 받고 치료 받은 이후의 일입니다. 문제란 다른 것이 아니고 치료받은 그들이 치료해 주신 예수님에게 나아와 ‘감사’한 자가 한 사람 밖에는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고침을 받고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이 중요 한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감사’가 없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치료받은 사람은 열사람 이었는데 ‘감사’한 자는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9:1의 감사입니다. 지금도 보면 감사의 삶을 사는 자들을 보기가 힘듭니다. 은혜받으면 한 10명 중에 1,2명 정도가 감사의 삻을 삽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을 보시면서 슬퍼하셨습니다. 17절,18절 “열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지금도 우리는 ‘감사’를 잃어버린 신앙의 삶을 살므로 인하여 우리 사랑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안타까이 하고 답답하고 슬프게 하지는 않습니까? 더구나 감사한 자는 사마리아 사람, 이방인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택한 족속이요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였던 유대인들은 감사한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보면 교회 오래 다닌 신자들이 더 ‘감사’를 잃어버립니다. 감격의 눈물도 잃어버리고 감사할 줄을 모르고 오히려 불평하는 직분자들을 보게 됩니다. 예)심양섭선교사의 간증.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에 민감하며 감사하고 감격하는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감사를 통하여 늘 여호와 하나님께 더욱 큰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하여야 늘 감사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까? 오늘 사마리아 사람의 태도를 통하여 점검하여 봅시다.
1.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받은 것의 인정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병이 고쳐진 것이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쳐졌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였습니다. 이 확고한 믿음이 없으면 감사하기 어렵습니다. 우연히 나았다, 날 때가 되어서 나았다, 약이 좋았다 등의 인식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다 라고 깊이 있게 생각할 때에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에)두종류의 사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부모나 남편 아내의 모든 일들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감사는 물론 없고 불만만 있을 뿐이다. 은혜로 생각하는 사람. - 바울 같은 사람. 빚지고 산다고 생각하고,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 10사람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얻었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그 은혜를 깊이 깨달은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만이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2. 순서를 혼동하지 않은 최우선의 감사였습니다. 고침받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가했을 것입니다. 이 기쁨소식을 누구에게 제일 먼저 보일까? (제사장에게 가서 보여야한다. 가족을 만나야 겠다등. ) 그러나 감사한 그 사람은 그 누구를 찾기 전에 자신을 고쳐주신 분을 찾아뵙고 감사를 드리야 한다고 생가하고 예수님에게로 달려와 감사의 눈물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예)집장만한 사람들. -제일 먼저 목사님 모시고 감사예배드리고 다른 사람초청.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먼저 자랑하고 싶어서 집들이니 하면서 난리를 피우고, 어떤이는 그 주일을 결석까지 하면서 집들이한다. 정말로 가슴아픈 일이며, 너무나 신앙이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다. 그리고 너무나 세속적인 것이다.
예)최근 한국선교연구원에서 “왜 교회생활을 둥한히 하는가?라는 연구 논문발표.
1. 교회에세 가르치는 도덕적 가치관을 따를 수가 없다.
2. 교회에서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껴서.
3. 이사를 자주 다녀서 교회 정착 하지 못하기 때문에.
4. 개인생활이 침해받기 때문에. 5. 분주하고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너무나 이기적이고 인본주의적입니다. 이런 삶의 굴레 속에서는 감사의 삶이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더구나 감사는 최우선으로 하여야지 다른 것 먼저하고 나중에 한다는 것은 결국 감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감사는 즉각적으로 하셔야 합니다. 감사하지 못한 9명은 나중에 꼭 예수님을 찾아서 감사할 것이라고 깊이 장담했을 것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자체가 즉각적이어야 합니다. 기도, 봉사, 회개등 모두는 즉각적으로 시행할 때에 신앙의 성숙이 있고, 더욱 큰 축복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3. 그의 감사는 행동으로 보여준 감사였습니다. 9명도 모두 예수님에 대한 감사는 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행동으로 감사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입니다. 감사는 표현되어야 합니다. 감사는 행동되어야 합니다. 아마 그들은 자신을 고쳐만 주면 무엇이든지 다 할것이라고 마음 먹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고쳐주기만 하면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이나 하고, 그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친 후에 감사의 말한 마디 조차 할줄 몰랐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야고보 기자는 말하기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종이 울리기 까지는 종이 아니고 노래는 부를 때까지 노래가 아니고 사랑은 사랑 할 떄까지 사랑이 아니고 축복은 감사 랗 때까지 축복이 아니다. “
-예수님은 감사한 이 사람에게 더욱 놀라운 축복을 주십니다. 19절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 이 사람은 육신의 문둥병만 고친 것이 아니라 영혼이 구원 받은 놀라운 축복을 맏았습니다. 이 사람의 믿음은 “감사하는 믿음” 이었습니다. 이 감사하는 믿음으로 그 사람은 예수님께 더욱 크고 놀라운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감사하는 믿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조그만 은혜에도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 될 때에 그 사람의 삶은 더욱 크신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가는 놀라운 은혜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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