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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탕자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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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들이 감사 특별예배를 드립니다만 오늘 우리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생각할 때에 정말 우리들이 무엇을 감사해야 할 지 알지를 못하겠습니다. 1년 동안 계속되는 학원가의 여러 가지 어려움과 그것이 바로 정치적인 문제로부터 비롯됐다는 사실과 그리고 여전히 해결이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참담한 현실 앞에서 우리가 진정 무엇을 감사해야 할 것인지.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평안하고 모든 것이 잘 되고 모든 것이 풍성한 때에만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고난의 역사 속에서 진정한 감사가 우러난다고 생각할 때에 오늘 우리의 감사절은 뜻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미국 대륙에서 이루어졌던
 첫번째 추수감사절은 그들이 행복한 생활 가운데서 드린 것이 아니고 그들이 그 땅에 건너 와서 반 수 이상이 죽고 겨우 살아 남은 사람들이 인디안 지역에서 씨를 얻어다 뿌려 걷은 아주 적은 수확 앞에서 드린 감사였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해 주신 신앙의 자유 때문에 드렸던 것을 생각하고 그런 의미에서 감사절은 항상 고난 속에서 보다 더 분명하게 그 의미를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오늘 우리가 무엇을 감사해야 할 지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둘째 아들이 집에 있을 때에는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둘째 아들이 감사해야 될 시기는 그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였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모든 것이 풍족했고, 여유가 있었고, 그 앞날이 보장되어 있었고, 그가 원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아들에게는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욕망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해 평소에 불만이 있었던 것입니다. 가장 감사해야 할 시기에 오히려 아버지 앞에 불만을 가지고 나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재산을 요구했고,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고자 그걸 가지고 곧 멀리 떠나가 버렸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감사해야 할 적에도 감사할 줄 모르는 까닭은, 그들에게 어떤 물질이 없어서나 또 혹은 원하는 어떤 생활의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감사를 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욕망 때문에 감사를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보다 많은 자유와 향락과 권력을 갖겠다는 줄기찬 욕망 때문에 인간들에게는 만족함이 없고 따라서 감사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이런 욕망이 있는 한, 감사라는 말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이 욕망에 눈이 어두울 적에는 보이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잃어 버리고, 사랑하는 형제도, 따뜻한 가정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그가 바라고 추구하는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만을 따라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그렇게 자기를 사랑해 주시는 아버지가 있는 데도 그 아버지를 버리고 형도, 집도 다 버리고 먼 지방으로 떠나 가는 것처럼 현대인들은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그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돈을 위해서 시동생도 죽이고 남편도 죽이는 그런 사건도 우리는 겪었던 것입니다. 정치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희생해서 자기가 원하는 그것을 움켜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욕망에 대한 추구란 얼마 나 무서운 것인가를 우리는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란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있다면 오늘날 정치도 경제도 이 사회도 모든 것이 다 잘 풀려 가리라고 봅니다.
오늘 우리들이 물질 문명을 발전시켜서 보다 더 살기 좋은 세계를 만들어 보려고 끝없이 이 문명을 추구해 왔지만은 결과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살기 좋은 세계 대신에 위기로 치닫고 있는 세계에 직면하고 있다는 경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생활은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는 생활이기에 그 결과는 너무나 비참한 것입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이번 호에 보면 솔제니친이 쓴 글이 있습니다. 그의 얘기는 간단합니다.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소련에서는 혁명이 일어난 것이며, 서부 세계에서도 그 내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이 문명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라고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탕자는 자유를 찾아서 아버지의 품을 떠났는데 결과적으로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얻으려고 하였지만 마지막 한 푼까지 다 써버린 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명예와 욕망을 얻기를 원했는데 그가 얻은 것은 수치와 욕됨 뿐이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자리에서 떨어져 이제는 돼지들과 함께 생활할 수밖에 없는 비천한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가 만약 돌이켜서 그 마지막 순간에 아버지를 생각 하지 못했다면 그의 최후는 아무 비극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비극적인 생애를 끝낸 사람들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많이 보는 것입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그랬고 우리의 역사 속에서 이승만 정권이나 유신 정권하에 박정희 씨가 그랬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상처와 아픔을 끼쳤던 것입니다. 탕자는 세상을 향한 끊임없는 욕망을 불태우다가 결국은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마침내 절망의 시련 속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이것은 감사없는 생활의 결과인 것입니다. 욕망만을 추구한 생활의 결과입니다.
오늘 우리가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서 경제 성장을 재촉하면서 이제 욕망을 배워 왔지만은 지금 우리들이 처해 있는 형편이 어떠합니까? 경제적으로도 빚이 많고 또 오늘 정치 적으로 사회적으로 몹시 불안한 상황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이 바라고 원했던 민주화된 사회대신에 여기 절망의 강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한때 화려했던 욕망의 낮이 지나 가자 그와는 대조적으로 절망의 밤이 우리를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러나 탕자는 용케도 절망의 밤에 아버지의 집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아니, 이러한 때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신 것입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일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니라. " 이렇게 결단을 하고 그는 돼지우리에서 털고 일어나 아버지의 집을 향해 나갑니다. 오늘 우리는 탕자의 결단을 생각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도울 수 없는 이 절망의 시련 속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오직 한분, 그는 우리의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될 줄 모르고 욕망만을 좇아온 과거를 솔직히 고백하고 영혼은 완전히 제껴 놓고 육체의 향락만을 집착했던 어리석음을 회개하면 절망의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아버지의 집을 향해 나가야만 할 것입니다. 이 길만이 오늘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 다니면서 어려움에 처한 우리를 도와 달라고 요청한들 누가 우리를 도울 수가 있겠습니까. 탕자가 이곳저곳에서 구걸해 봤지만 때가 흉년이라 아무 것 도 얻지 못했던 것처럼 오늘 전세계가 경제 불황이기에 너도 나도 살기가 어려운 것은 마찬 가지인데 누가 우리를 도와 주겠습니까? 오늘 우리를 도와 주실 분은 풍성하신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이 강토는 반쪽이 나고 나라살림은 곤궁해서 그 몰골이 수치로 말이 아니지만은 이제라도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간다면 그가 우리를 치료해 주실 것이며, 우리를 새롭게 하시며, 우리에게 희망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탕자의 회개와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둘째 아들 탕자가 돼지우리에서 털고 일어나 아버지에게 향해 나왔을 때 아버지가 그를 영접해 주었습니다. 전에는 한 번도 깨닫지 못했던 아버지의 따뜻함과 사랑을 비로서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감사의 생 활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 조건들을 생각해 보면 첫째는,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린 순간에도 돌아 가야 할 아버지의 집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모두가 문전박대해서 이제는 돼지만이 그의 친구일 수 밖에 없는 마지막 순간에 떠오르는 아버지의 집. 그것은 꺼져 가는 그의 삶에 완전히 새로운 희망의 불을 붙여 주었던 것이다. 그의 생명이 그로부터 낳고 또 그의 품에서 그의 생명이 자라난 아버지에게 그것은 돈으로 맺어진 얄팍한 우정을 가진 친구와 도저히 비교할 수 없고 이해 관계로 맺어진 이웃과도 전혀 다른 진정 마지막 순간에 자기를 맞아 줄 수 있는 따뜻한 고향,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집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감사절을 맞이 하면서 제일 먼저 감사를 드려야 할 일은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돌보지 아니할 때 거기 뜻밖에 나타나시는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 그래서 내가 기도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나의 안타까운 심정을 이해해 주지 못할 때에 그래서 외로운 눈물이 한없이 쏟아질 때에 문득 나타나셔서 내 기도를 들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진정 우리들이 감사해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처한 이 고난의 현실을 생각할 때에 누가 우리를 돌볼것인가? 그러나 그래도 마지막으로 우리들이 바라 복 기도할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큰 희망이요. 감사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절망의 순간에서 손을 내미는 자에게 언제나 강한 손으로 붙 들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정말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렵고 불안할지라도 오늘 우리가 기쁨으로 감사절을 맞이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의지할 수 있고 바라 볼 수 있는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힘은 바로 절망의 순간에 더욱 큰 희망으로 다가 오기에 우리가 여기에서 진정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탕자가
 두번째로 감사한 일은 아버지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기쁨으로 영접해 주신 일인 것입니다. 갈기갈기 처참하게 찢긴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을 그 아버지는 무조건 안아주시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네가 이 모양이 되었느냐? 그 많은 재산을 어떻게 했느냐? 이러고도 네가 무슨 낮으로 내게 돌아 왔느냐? 이렇게 따져 묻지 않으셨습니다. 무조건 용서하셨습니다. 여기에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이 있습니다. 여기에 구원의 은총이 있습니다. 그에게 돌아 오는 자들을 그가 무슨 죄를 지었든지 상관하지 아니하고 무조건 용서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총이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상한 심령으로 주님 앞에 나오는 자는 주님 께서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영접해 주십니다. 우리의 잘잘못을 따지지 아니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감사는 언제나 우리를 영접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인 것입니다.
탕자가
 세번째로 드린 감사는 아버지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실 때 그가 원하는 것보다 넘치게 들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 와서 나를 아들로 받아 달라고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서, 단지 품꾼의 하나로라도 받아 줄 것을 바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아들 로 영접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 여기 놀라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고 바라고 기도하는 것보다 더 크고 더 넘치게 허락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탕자는 전에 있던 아버지의 사랑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기 속에 욕망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전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는 조금도 느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욕망들이 산산조각이 나버린 지금에 와서야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때는 바로 이와 같이 이 세상에 대해서 완전히 절망하면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 이외는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때인 것입니다. 이때의 기도는 응답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크게 더 넘치게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품꾼조차 자격이 없는 우리를 그의 자녀로 영접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오늘 우리는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려야 할 일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세상으로 향한 모든 욕망을 다 버리고 겸손함으로 주 앞에 나아갈 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할 수 있었던 때는 그 자신이 과거에 자랑스럽게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을 다 분토처럼 내어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십자가만을 바라 볼 때였습니다. 변화하는 이 세계 속에서 허무한 것에 관심을 가질 때에는 우리가 감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영원히 일어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 볼 때에는 거기에 늘 감사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1년 동안 여러 가지 일을 겪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고통스러운 일, 혹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 여러 가지 괴로운 일을 겪었기에 감사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더 앞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오늘 정치적인 현실을 생각할 때에 울고 싶은 심정뿐입니다. 그러나 그러기에 우리는 더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릴 수 있다는 이 역설적인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게 하박국 기자가 우리에게 이것을 얘기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 하며 나의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을 다니게 하시니라. " 이 하박국의 노래대로 오늘 우리들의 현실이 오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가 만족할 만큼 되어 있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고난의 역사라 할지라도, 여호와가 우리 여호와 하나님 되어 주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길 되심을 인하여서 우리는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감사절을 맞이 하면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소망이 되어 주시며, 우리들에게 낙심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그 나라를 향하여 노력하며 싸우며, 그 소망을 가지고 나아갈 것을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늘 감사하는 생활을 이룩해 가시기 바랍니다. 이 감사절에 여호와 하나님의 넘치는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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