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자기 십자가를 지라
본문
유대인의 역사가인 유세비스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 갈릴리에서 로마를 대항하여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는데 나중에 로마군에 의해 진압되어 수천 명의 사람들이 십자가에 매달아 끔찍하게 처형당했다고 합니다. 갈릴리 사람이라면 그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주님은 절반이상이 갈릴리 출신인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와 내가 져야할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신앙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나의 간절한 사랑은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제자가 되는 것인데, 십자가의 삶이 없이는 결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37절에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부모나 자식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입니다. 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의 어떤 존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부모와 나, 나와 자식의 관계는 나무와 가지의 관계입니다. 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버지나 어머니, 그리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와 자식, 자식과 부모의 관계는 육신적인 관계입니다. 육적인 관계에서는 최고 가까운 사이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영적인 관계로 떨어져서는 안되는 절대적인 관계입니다. 주님이 누구십니까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새생명을 얻고, 구원의 감격을 누릴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마 10장은 12명의 제자들에게 전도파송을 하면서 이들에게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복음을 전하는데 물질적인 염려를 버리고 담대하게 나아가라고 합니다. 때로는 핍박과 위협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말고 뱀같이 지혜롭게, 비둘기 같이 순결하게 처신하라고 합니다. 세상의 환란이나 핍박을 두려워하기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더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고 두려워합니다. 물질과 명예와 권력을 사랑합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소외당하고 세상의 뜻을 거스리면 왕따 당합니다. 세상과 하나 되지 못하여 분리되는 것을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 갈릴리에서 고기 잡는 베드로를 찾아갔습니다.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많은 고기를 잡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음식을 먹이고 그에게 세 번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의 소극적인 대답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베드로의 과장되지 않는 진실된 사랑의 고백을 통해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물었던 ‘사랑’은 아가페로 수준 높은 사랑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대답은 ‘필레오’였습니다. 필레오는 친구간의 우정으로 아가페에 비하면 격이 낮은 사랑입니다. 그래도 주님은 베드로의 진실된 사랑을 인정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대단한 사랑을 주님께 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생명력이 있습니다. 자라고 자라는 것이 사랑입니다. 필레오의 사랑을 고백 했던 베드로가 나중에 어떻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순교의 당합니다. 그것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죽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은 필레오가 아니라 아가페급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갈등을 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기준이 때로는 주님의 뜻을 위배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이 우리나라의 고유 명절인 추석인데 많은 크리스챤들이 제사문제로 갈등을 합니다. 가족의 화합이냐 신앙의 양심이냐로 고민을 합니다.
사실 가족은 보이는 존재들이고, 주님은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기쁨이 되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10:16에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기로 작정하면 어떤 장애물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주님으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여인은 종가 집에 시집을 가서 20여년만이 가족과 친척들을 다 구원시키는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 하느냐 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어떤 환경도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도 진실된 사랑과 거짓된 사랑이 있습니다. 거짓된 사랑은 머리에서만 머무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진실된 사랑은 가슴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랑은 신앙의 동력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모든 문제를 풀어가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그 크신 사역을 사랑으로 실천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고난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환란과 핍박의 고난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슬람권이나 북한 중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는 지금도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크리스찬들을 핍박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는 것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기독교의 가정에서 믿음의 부모를 만나게 됨을 감사합니다. 물질의 유산이나 다른 어떤 것의 혜택을 입은 것보다도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어릴 때에 주변의 친구들이나 성도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에는 부모나 주변의 핍박과 고난을 통해 신앙을 포기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극복하여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목회자나 신실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고난은 결코 두려움의 존재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직접적인 고난이 육체적인 압박이라면, 간접적인 고난은 정신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가야할 것인가, 아니면 가족이나 친구들과 야외를 가야할 것인가 자신이 결단해야할 문제입니다. 신앙 양심에 꺼림칙한 주초문제는 자신이 풀어야할 간접적인 고난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직접적인 고난보다 간접적인 고난이 더욱 우리의 신앙을 힘들게 합니다. 34절에서 주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주님 때문에 가족과 이웃 간에 불화가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 집안에서 시집 온 며느리가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그들로부터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평소에는 잘 모르다가 명절이 되고 제사를 드리는 문제에 부딪히면 서로가 난감합니다. 신앙만 아니면 전혀 불편함이 없는데 신앙 때문에 문제를 야기하고 급기야는 인간관계가 험악해집니다. 제가 아는 어떤 형제는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바로 이런 문제입니다. 타협할 수 없는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그랬습니다. 그들에게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문제에 정면돌파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목숨을 포기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들어갔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뜨거운 풀무불에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목숨을 담보로 신앙, 즉 자기 십자가를 졌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주님만이 가야할 사명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대신 십자가를 지고 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만이 져야할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처럼 오늘 우리도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고난입니다. 직접적인 핍박과 환란의 고난입니다. 때로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기득권과 유익을 포기해야 하고, 심지어 목숨을 내놓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간접적인 고난입니다.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간에 불화를 줄 수 있는 신앙으로 말미암은 고난입니다. 이런 고난 앞에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던 심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밤하늘을 밝히는 수많은 네온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주님이 실천하셨던 십자가의 삶을 우리는 어떻게 실천하고 있습니까 내게 주어진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세상과 타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유익과 편리함 때문에 내가 져야할 십자가를 포기하지는 않습니까
주님 때문에 당하는 모든 고난과 불이익은 주님께서 갚아주십니다. 지금 당장은 불신가족이나 친구나 이웃들간의 관계가 원수같이 될 것 같아도 주님은 더 좋은 방법으로 그들을 감동시켜주십니다. 군에 있을 때 저는 술,담배를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고참들이 협박을 합니다. 어떤 고참은 폭력으로 나를 괴롭혔습니다.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으니까 고참들이 더 이상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주일이면 의례히 교회에 가라고 합니다. 별명을 강목사라고 했습니다. 같은 소대에 신학교를 다니다 입대한 후임병은 고참들이 무서워 술 담배를 하다가 사이비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져야할 고난의 십자가는 무겁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순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스데반이 유대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어가는 순교의 순간에도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보좌에 서서 스데반을 응원했습니다. 스데반의 십자가는 복음을 증거하다 순교를 당하는 것입니다. 내가 져야할 십자가를 통해 주님은 나와 함께하시며 주님의 관심과 인도하심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주님과 함께 승리하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주님은 절반이상이 갈릴리 출신인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와 내가 져야할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신앙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나의 간절한 사랑은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제자가 되는 것인데, 십자가의 삶이 없이는 결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37절에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부모나 자식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입니다. 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의 어떤 존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부모와 나, 나와 자식의 관계는 나무와 가지의 관계입니다. 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버지나 어머니, 그리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와 자식, 자식과 부모의 관계는 육신적인 관계입니다. 육적인 관계에서는 최고 가까운 사이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영적인 관계로 떨어져서는 안되는 절대적인 관계입니다. 주님이 누구십니까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새생명을 얻고, 구원의 감격을 누릴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마 10장은 12명의 제자들에게 전도파송을 하면서 이들에게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복음을 전하는데 물질적인 염려를 버리고 담대하게 나아가라고 합니다. 때로는 핍박과 위협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말고 뱀같이 지혜롭게, 비둘기 같이 순결하게 처신하라고 합니다. 세상의 환란이나 핍박을 두려워하기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더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고 두려워합니다. 물질과 명예와 권력을 사랑합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소외당하고 세상의 뜻을 거스리면 왕따 당합니다. 세상과 하나 되지 못하여 분리되는 것을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 갈릴리에서 고기 잡는 베드로를 찾아갔습니다.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많은 고기를 잡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음식을 먹이고 그에게 세 번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의 소극적인 대답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베드로의 과장되지 않는 진실된 사랑의 고백을 통해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물었던 ‘사랑’은 아가페로 수준 높은 사랑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대답은 ‘필레오’였습니다. 필레오는 친구간의 우정으로 아가페에 비하면 격이 낮은 사랑입니다. 그래도 주님은 베드로의 진실된 사랑을 인정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대단한 사랑을 주님께 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생명력이 있습니다. 자라고 자라는 것이 사랑입니다. 필레오의 사랑을 고백 했던 베드로가 나중에 어떻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순교의 당합니다. 그것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죽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은 필레오가 아니라 아가페급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갈등을 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기준이 때로는 주님의 뜻을 위배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이 우리나라의 고유 명절인 추석인데 많은 크리스챤들이 제사문제로 갈등을 합니다. 가족의 화합이냐 신앙의 양심이냐로 고민을 합니다.
사실 가족은 보이는 존재들이고, 주님은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기쁨이 되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10:16에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기로 작정하면 어떤 장애물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주님으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여인은 종가 집에 시집을 가서 20여년만이 가족과 친척들을 다 구원시키는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 하느냐 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어떤 환경도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도 진실된 사랑과 거짓된 사랑이 있습니다. 거짓된 사랑은 머리에서만 머무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진실된 사랑은 가슴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랑은 신앙의 동력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모든 문제를 풀어가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그 크신 사역을 사랑으로 실천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고난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환란과 핍박의 고난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슬람권이나 북한 중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는 지금도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크리스찬들을 핍박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는 것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기독교의 가정에서 믿음의 부모를 만나게 됨을 감사합니다. 물질의 유산이나 다른 어떤 것의 혜택을 입은 것보다도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어릴 때에 주변의 친구들이나 성도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에는 부모나 주변의 핍박과 고난을 통해 신앙을 포기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극복하여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목회자나 신실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고난은 결코 두려움의 존재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직접적인 고난이 육체적인 압박이라면, 간접적인 고난은 정신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가야할 것인가, 아니면 가족이나 친구들과 야외를 가야할 것인가 자신이 결단해야할 문제입니다. 신앙 양심에 꺼림칙한 주초문제는 자신이 풀어야할 간접적인 고난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직접적인 고난보다 간접적인 고난이 더욱 우리의 신앙을 힘들게 합니다. 34절에서 주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주님 때문에 가족과 이웃 간에 불화가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 집안에서 시집 온 며느리가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그들로부터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평소에는 잘 모르다가 명절이 되고 제사를 드리는 문제에 부딪히면 서로가 난감합니다. 신앙만 아니면 전혀 불편함이 없는데 신앙 때문에 문제를 야기하고 급기야는 인간관계가 험악해집니다. 제가 아는 어떤 형제는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바로 이런 문제입니다. 타협할 수 없는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그랬습니다. 그들에게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문제에 정면돌파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목숨을 포기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들어갔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뜨거운 풀무불에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목숨을 담보로 신앙, 즉 자기 십자가를 졌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주님만이 가야할 사명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대신 십자가를 지고 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만이 져야할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처럼 오늘 우리도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고난입니다. 직접적인 핍박과 환란의 고난입니다. 때로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기득권과 유익을 포기해야 하고, 심지어 목숨을 내놓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간접적인 고난입니다.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간에 불화를 줄 수 있는 신앙으로 말미암은 고난입니다. 이런 고난 앞에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던 심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밤하늘을 밝히는 수많은 네온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주님이 실천하셨던 십자가의 삶을 우리는 어떻게 실천하고 있습니까 내게 주어진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세상과 타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유익과 편리함 때문에 내가 져야할 십자가를 포기하지는 않습니까
주님 때문에 당하는 모든 고난과 불이익은 주님께서 갚아주십니다. 지금 당장은 불신가족이나 친구나 이웃들간의 관계가 원수같이 될 것 같아도 주님은 더 좋은 방법으로 그들을 감동시켜주십니다. 군에 있을 때 저는 술,담배를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고참들이 협박을 합니다. 어떤 고참은 폭력으로 나를 괴롭혔습니다.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으니까 고참들이 더 이상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주일이면 의례히 교회에 가라고 합니다. 별명을 강목사라고 했습니다. 같은 소대에 신학교를 다니다 입대한 후임병은 고참들이 무서워 술 담배를 하다가 사이비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져야할 고난의 십자가는 무겁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순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스데반이 유대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어가는 순교의 순간에도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보좌에 서서 스데반을 응원했습니다. 스데반의 십자가는 복음을 증거하다 순교를 당하는 것입니다. 내가 져야할 십자가를 통해 주님은 나와 함께하시며 주님의 관심과 인도하심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주님과 함께 승리하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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