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고향 가는 길
본문
언제든 가리 / 마지막엔 돌아가리 / 목화 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 조밥이 맛있는 내 고향으로. 아이들 하눌타리 따는 길머리엔 / 학림사 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 대낮에 여우가 우는 산골 / 등잔 밑에서 / 딸에게 편지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중 략 --
목사가 없는 교회당 / 회당지기 전도사가 강도상을 치며 / 설교하는 산골이 문득 그리워 아프리카서 온 반마처럼 / 향수에 잠기는 일이 있다.
노천명 시인의 ‘고향’이라는 싯귀절 중의 몇 구절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언제든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특히 마지막에는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어디로 갑니까 고향으로.
여러분! 지난 주간에는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았습니다. 도시가 고향인 사람들은 아마도 시골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보다는 명절이 되어도 설레이는 마음이 덜할 것입니다. 고향이 왜 좋은가
어려서 철모를 때 친구들과 뛰놀던 꿈을 가득 품고 살았던 마을 놀이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가면 헤어졌던 친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심이 푸근하여 누구집이든지 쉽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사랑을 주려고만 하시는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볼 수 없는 맑은 밤하늘과 아롱진 별빛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천명 시인은 고향을 말하기를 “언제든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마지막에 고향에 돌아가는 사람이 잘 없습니다. 고향에 가서 죽는 사람 있습니까. 어디에서 죽습니까 병원에서 죽습니다. 집에서 죽어도 병원으로 옮깁니다. 그렇게도 고향을 사모하지만 한 두 번 가보는 것은 몰라도 그곳에서 살아야 한다고 하면 기겁을 합니다. 그곳에서 살 수 없다고 말입니다.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평생 살고 싶어”
요즘도 이 노랫말이 귀에 들어옵니까
“저 넓은 도시 안에 아파트를 구입하여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평생을 살고 싶어”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옛날 속담에 “타향에 나가서는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고 여우도 제 죽을 때는 태어난 고향으로 머리를 두고 죽는다. ”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고향이 주는 편안함, 따뜻함, 마음의 안식처, 사라진 곳에 대한 그리움, 아름다움, 정겨움 등을 함축해 낸 말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구사할 수 있는 말 중에서 사랑과 행복 다음으로 고향만큼 가슴 뭉클하게 하는 단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고향은 우리에게 있어서 마음의 안식처이자 삶의 원천이기 때문에 명절 때만 되면 고향으로, 고향으로 다가갑니다. 고향은 아니라도 부모님이 계시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한국 사람은 유별나게 고향 의식이 강한데 서구사회가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한 산업화를 단 50년 만에 해치운 압축성장의 주요한 배경에도 한국인 특유의 “고향 의식"이 잠재해 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고 어느 사회학자가 지적한바 있습니다. 사실 한국 사람들에게 ‘고향’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각 고향에 대한 정의를 내려놓았지만 ‘이것이 고향이다’ 라며 딱 부러지게 정의를 내어놓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말하는 고향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답고 안락한 곳이며 꿈의 요람인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향을 주제로 한 시와 소설의 음악 속에 자주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동하가 지은 장편소설 “우울한 귀향”,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 이문열의 “그해 겨울”, 박경리의 “토지” 등이 고향을 소재로 해서 소설이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시인은 고향을 일컬어 마치 “어머니의 자궁 같다”고 비유했으며, 작가 전광식은 “고향”이란 소설에서 “이세상 모든 사람과 모든 길은 고향으로 통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고향을 품고 있습니다. 고향을 주제로 하는 시나 대중가요, 동요도 많습니다. 나훈아 가수는 “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 역 / 이쁜이 곱뿐이 모두 나와 반겨 주겠지” . 착각을 해가면서도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시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시인은 ‘그리운 고향’이란 시에서 “언제나 오려나! 내 아들아. 산너머 모퉁이 돌아서 오지는 않을까. ” 객지에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이 어머니 마음 애간장 찢어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오기택이란 가수도 ‘고향무정’이란 노래에서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건만... ” 두메산골 내 고향을 그리워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고향을 잘 다녀오셨습니까 그러나 고향을 못 가신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북에 고향을 둔 분들은 못 갔습니다. 바빠서 가지 못한 분, 몸이 아파서 가지 못한 분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가지 못한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수 한정무는 ‘꿈에 본 내 고향’이란 노래에서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 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리 / 꿈결에 거시기 맛 본 것처럼 고향이 마냥 그립고 아쉽다” 며 애간장이 녹아내리도록 슬프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은상님은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 바다” 같이 놀던 동무들이 엄청나게 보고 싶다고 시로서 향수를 달랬습니다.
고향은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입니다. 한창 돈 벌고 아이들 공부시킬 때는 고향이 그리워도 그렇게 간절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 고향입니다. 변함없는 산천인 고향 마을, 아무리 그리워도, 아무리 고향마을에 산다 하더라도 우리는 언젠가는 고향 마을을 두고 떠나야 합니다. 그때 당신은 어디로 갑니까 정든 고향을 영영 떠날 때 당신은 어디로 갑니까 정말 그리워하고 달려가야 할 고향, 즉 본향이 어딘지 아십니까
잠시 이슬처럼 왔다가는 떠나야 하는 우리들이 진정 돌아 갈 곳이 어디입니까 그 곳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본향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3:20-21).
전도서12:1-2절에 보면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고 하셨습니다.
종말이 오기 전에, 죽기 전에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사람의 마지막에는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12:7)
여기서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영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며 믿어야 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7:33절에서,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고 하셨습니다.
고향 없는 분은 없습니다. 다 있습니다. 그런데 고향이 있기는 하나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체제가 완전히 달라 출입을 제한하고 있는 북한에 고향을 둔 사람들입니다. 세계 어느 곳이든 시간이 있고 돈이 있으면 다 갈 수 있으나 북한만은 내 마음대로 갈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찾아야 할 영원한 고향, 영원한 본향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출발했던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더 나은 본향이란 바로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천국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다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여호와 하나님 나라,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자, 그 길을 찾아 그 길로 들어선 자만이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번 추석에 고향을 찾으면서 무엇을 준비하셨습니까 물론 각자가 다를 수 있지만 그러나 대동소이합니다. 선물, 용돈, 등입니다. 그러나 길을 잘 알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의 본향은 천국입니다. 이곳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길을 알고 그 길을 확보한 사람만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더 나은 본향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다면, 본향을 향하여 걸어가는 길을 잘 가야 합니다. 바르게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다가 보면 여러 갈래 길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정표가 없는 길도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의 길이나 우리가 들어갈 본향의 길이나 길을 잘 알아야 합니다. 고향 가는 길을 잘 알듯이 본향 가는 길을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까
첫째, 본향을 가는 성도는 네비게이션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고향을 찾는 사람들, 특히 자주 찾는 사람들은 눈감고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고향길 가는 데는 네비게이션이 필요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길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영원한 본향, 나의 영을 보내주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까 인생길을 다 달리고 마지막에 갈 길이 본향인데 그 본향 길의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으면 쉽게 갈 수 있습니다.
본향가는 길을 잘 안내해주는 네비게이션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중보자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즉 천국가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 중의 첫 번째가 천국 가는 길의 안내자인 네비게이션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갈 수 있는 곳이 우리의 본향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어느 누구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어느 누구를 믿어도 영원한 본향으로 갈 수 없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본향 가는 네비게이션,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시고 끝까지 그분을 따라가야 합니다.
둘째, 네비게이션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요즘 유행어 중에 남자는 세 여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세 여자가 누굽니까 어머님과 아내와 네비게이션 안내양이라고 합니다. 어떤 자료에는 아내 대신 골프를 치는 사람들은 캐디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본향을 향하여 달려가는 성도는 누구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우리의 네비게이션인 예수 그리스도가 하시는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길을 가는데도 규칙이 있습니다. 명절이 되어 귀성길에 오르내리는 연휴기간동안 기분 좋은 마음으로, 가족을 만나고 고향에 간다는 들뜬 마음으로 가는데 교통사고를 당하면 어떻게 됩니까 명절은 고사하고 고향에 가지도 못하고 병원에 입원해야 하거나 장례를 치러야 합니다. 추석에 발생하는 교통사고가 1년 평균 교통사고의
1. 8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교통사고의 원인도 보면 음주운전이 많습니다.
그리고 교통체증이 풀릴 때 과속운전, 장시간 운전으로 오는 피로를 통한 졸음, 주위산만, 그리고 안전거리 미확보 등이라고 합니다. 길은 바른 길로 가지만 법규와 일반적인 규칙을 지키지 않음으로 인해 사고가 발생하여 명절이 오히려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신호위반, 음주운전, 중앙선침범 등 전체 중대법규 위반 사고 중의 79. 5%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실 부모님이나 가족들에게 드리는 최고의 선물은 ‘안전운전’입니다. 그 어떤 선물보다도 안전운전이 가장 중요한 선물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본향을 달려갈 때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네비게이션인 주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들은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살면 결국 죽음의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교통사고 나면 고향에 가지도 못하고 영원한 고향으로 가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듯이, 우리도 말씀을 불순종하다가는 영영 본향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하게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서 영원한 본향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주님께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언제 도착하느냐 보다는 고향에 온전히 안전하게 도착하느냐는 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에는 들어섰지만 그분의 말씀대로, 뜻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7:21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절). ”
여호와 하나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믿음이 보다 분명한 믿음이 되려면 우선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즉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행함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본향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빌려 아무리 위대한 이적을 행하였다 할지라도 믿음이 아닌 말씀대로가 아닌 자기 멋대로 살면 본향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본향을 소망하며 사시는 성도 여러분! 천국 가는 자동차에 올라탔습니다.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요. 네비게이션의 말,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본향에 온전히 들어가십니다.
셋째, 가난한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5: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천국은 우리의 본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야 본향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자신의 영적파탄을 시인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무가치 하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자백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하여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겸손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부정하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옳다고 우기는 교만한 마음이 가난한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중생해야 합니다. 요한복음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여기서 여호와 하나님 나라는 본향입니다. 그렇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방법입니다. 물로 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삶속에서 항상 죄인 됨을 고백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상하게도 설이나 추석 명절을 보내고 돌아온 후에 이혼하는 사례가 급증한다고 합니다. 지난해 10월 서울가정법원이 밝힌 지난 1년간 가사사건 월별 접수 현황을 보면, 1위가 3월로서 1,301건, 2위가 10월로 1,245건, 3위는 2월로서 1,157건,4위가 9월로서 1,125건으로 나타났습니다. 1위~4위가 모두 명절 후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추석 전인 8월은 1,106건, 설 전인 1월은 953건입니다. 결국 설 이후인 2월과 3월에 2,458건, 추석 이후인 9월과 10월에 2,370건이 집중되어 배우자와의 해 묵은 갈등, '명절 스트레스'로 인한 사소한 다툼 등이 이혼을 결심하는 계기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런 것은 결국 마음이 가난해지지 못해서 발생하는 경우입니다.
믿음을 갖고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는 마음이 가난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툼도 막을 수 있습니다. 갈등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성도를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나의 것이 됩니다.
넷째, 어린 아이같이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18장1절 이하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말하기를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워놓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3절). 그러면 여기서 어린아이같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낮아짐을 말합니다. 겸손함을 의미합니다. 3절에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천국에서 높임을 받을 사람은 어린 아이처럼 낮아져야 하고 겸손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 같은 믿음의 사람을 실족시키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증표가 겸손과 온유함이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 ”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는 온유합니다. 어른처럼 완악하지 않습니다.
악을 꾸미지 못합니다. 그리고 순종합니다. 아직도 죄를 조직적으로 짓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 같아야 천국에 둘아 간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린 아이처럼 살지 못하고 어른들처럼 죄를 범하면 죄를 범하는 지체는 도끼로 찍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차라리 육체의 건강한 모습으로 지옥 들어가는 것보다는 장애로 천국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단순히 나은 것만 아닙니다. 이것은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자를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다섯째, 상 받을 준비해야 합니다.
명절에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을 찾아갈 때 부모님에게 드릴 것을 준비해 가면 돌아올 때는 더 많은 것들을 받아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본향 집에 가면 우리가 가지고 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드릴 것은 없습니다. 다만 그분으로부터 다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분명하게 면류관을 준비하시고 우리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자랑의 면류관입니다. 살전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영화의 면류관입니다. 잠 16:31“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3)영화로운 면류관입니다. 잠 4:9절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였느니라”
4)의의 면류관입니다.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5)영광의 면류관입니다. 벧전 5: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6)생명의 면류관입니다. 계 2:10 “...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끝으로 가는 길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끝까지 가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아니 영원한 본향을 위해 가는 길이 쉽지 않습니다. 길이 평탄할 것 같지만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길도 있습니다. 좁은 길도 있습니다. 가시밭길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어렵지만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영원한 낙원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 길을 가면서 핍박을 받을 때는 감사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마태복음5:10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을수록 더욱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향하는 길이 아무리 오래 걸려도 참고 갑니다. 1시간 반 걸리는 거리를 4시간 다섯 시간 걸려도 갑니다. 4시간 반 가는 거리를 배나 걸리고 심지어는 두 배가 소요되어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갑니다. 하물며 우리가 가는 본향 길은 그보다도 훨씬 더 멀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야 합니다. 영원한 나의 본향이 거기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안식처가 바로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1980년 3월 불란서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하던 존경받는 한 지성인이 패수종 때문에 입원했습니다. 그는 한 달 동안 이 병원에서 문자 그대로 발악을 했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고함을 치고 절규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가를 곁에 서 있는 자기 아내에게 묻지 못합니다. 아내조차도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자기 남편에게 그의 병명을 말하지도 못합니다. 소리치고 발악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남편의 곁에서 위로를 못하고 지켜보아야만 했던 이 불쌍한 여인과 그 사람!
그런데 이 사람처럼 글로써 현대인에게 깊은 감동을 남긴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자유라는 이름하에 수많은 수필을 썼고 글을 남겼습니다. 그는 이 한 세기에 가장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실존주의 철학자 싸르트르입니다. 이것이 그의 말로입니다. 1980년 4월 16일 입원한 지 한 달만에 그는 병원에서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 불란서의 신문들이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싸르트르가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각 언론이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어떤 독자가 신문사에 투고를 해서 이런 기사가 실렸다고 합니다. “싸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싸르트르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 아주 중요한 지적입니다. 무신론자가 예수 외에 다른 것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없습니다.
싸르트르와 함께 현대의 지식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던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독일 고백교회 신학자 본훼퍼입니다. 그는 싸르트르보다 훨씬 앞서서 세계대전 중에 독일의 수용소에서 나치에게 항거하다가 죽어갔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간수가 문을 드리고 들어옵니다. 직감적으로 본훼퍼는 이것이 자기의 마지막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감방에 있던 자기의 동지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합니다.
“동지 여러분! 이제 나에게는 죽음이 왔소. 그러나 기억하시오.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고 시작이오. 주께서 나를 위해서 예비하신 아버지의 집에서 만날 때까지 여러분 안녕히 계시오. ” 그리고 감방을 나서는 그에게서 그를 뒤덮고 있었던 놀라운 평안과 기쁨이 넘쳐 나와 감옥 속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으로서의 충격과 감동을 남겼습니다.
본훼퍼와 싸르트르의 차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본훼퍼에게는 돌아갈 고향, 본향이 있었습니다. 싸르트르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없었습니다. 당신에게는 돌아갈 본향 있습니까 본향을 사모하며 가고 싶어 안달이 나는 그런 애틋하게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중 략 --
목사가 없는 교회당 / 회당지기 전도사가 강도상을 치며 / 설교하는 산골이 문득 그리워 아프리카서 온 반마처럼 / 향수에 잠기는 일이 있다.
노천명 시인의 ‘고향’이라는 싯귀절 중의 몇 구절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언제든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특히 마지막에는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어디로 갑니까 고향으로.
여러분! 지난 주간에는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았습니다. 도시가 고향인 사람들은 아마도 시골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보다는 명절이 되어도 설레이는 마음이 덜할 것입니다. 고향이 왜 좋은가
어려서 철모를 때 친구들과 뛰놀던 꿈을 가득 품고 살았던 마을 놀이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가면 헤어졌던 친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심이 푸근하여 누구집이든지 쉽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사랑을 주려고만 하시는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볼 수 없는 맑은 밤하늘과 아롱진 별빛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천명 시인은 고향을 말하기를 “언제든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마지막에 고향에 돌아가는 사람이 잘 없습니다. 고향에 가서 죽는 사람 있습니까. 어디에서 죽습니까 병원에서 죽습니다. 집에서 죽어도 병원으로 옮깁니다. 그렇게도 고향을 사모하지만 한 두 번 가보는 것은 몰라도 그곳에서 살아야 한다고 하면 기겁을 합니다. 그곳에서 살 수 없다고 말입니다.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평생 살고 싶어”
요즘도 이 노랫말이 귀에 들어옵니까
“저 넓은 도시 안에 아파트를 구입하여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평생을 살고 싶어”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옛날 속담에 “타향에 나가서는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고 여우도 제 죽을 때는 태어난 고향으로 머리를 두고 죽는다. ”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고향이 주는 편안함, 따뜻함, 마음의 안식처, 사라진 곳에 대한 그리움, 아름다움, 정겨움 등을 함축해 낸 말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구사할 수 있는 말 중에서 사랑과 행복 다음으로 고향만큼 가슴 뭉클하게 하는 단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고향은 우리에게 있어서 마음의 안식처이자 삶의 원천이기 때문에 명절 때만 되면 고향으로, 고향으로 다가갑니다. 고향은 아니라도 부모님이 계시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한국 사람은 유별나게 고향 의식이 강한데 서구사회가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한 산업화를 단 50년 만에 해치운 압축성장의 주요한 배경에도 한국인 특유의 “고향 의식"이 잠재해 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고 어느 사회학자가 지적한바 있습니다. 사실 한국 사람들에게 ‘고향’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각 고향에 대한 정의를 내려놓았지만 ‘이것이 고향이다’ 라며 딱 부러지게 정의를 내어놓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말하는 고향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답고 안락한 곳이며 꿈의 요람인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향을 주제로 한 시와 소설의 음악 속에 자주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동하가 지은 장편소설 “우울한 귀향”,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 이문열의 “그해 겨울”, 박경리의 “토지” 등이 고향을 소재로 해서 소설이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시인은 고향을 일컬어 마치 “어머니의 자궁 같다”고 비유했으며, 작가 전광식은 “고향”이란 소설에서 “이세상 모든 사람과 모든 길은 고향으로 통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고향을 품고 있습니다. 고향을 주제로 하는 시나 대중가요, 동요도 많습니다. 나훈아 가수는 “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 역 / 이쁜이 곱뿐이 모두 나와 반겨 주겠지” . 착각을 해가면서도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시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시인은 ‘그리운 고향’이란 시에서 “언제나 오려나! 내 아들아. 산너머 모퉁이 돌아서 오지는 않을까. ” 객지에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이 어머니 마음 애간장 찢어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오기택이란 가수도 ‘고향무정’이란 노래에서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건만... ” 두메산골 내 고향을 그리워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고향을 잘 다녀오셨습니까 그러나 고향을 못 가신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북에 고향을 둔 분들은 못 갔습니다. 바빠서 가지 못한 분, 몸이 아파서 가지 못한 분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가지 못한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수 한정무는 ‘꿈에 본 내 고향’이란 노래에서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 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리 / 꿈결에 거시기 맛 본 것처럼 고향이 마냥 그립고 아쉽다” 며 애간장이 녹아내리도록 슬프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은상님은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 바다” 같이 놀던 동무들이 엄청나게 보고 싶다고 시로서 향수를 달랬습니다.
고향은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입니다. 한창 돈 벌고 아이들 공부시킬 때는 고향이 그리워도 그렇게 간절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 고향입니다. 변함없는 산천인 고향 마을, 아무리 그리워도, 아무리 고향마을에 산다 하더라도 우리는 언젠가는 고향 마을을 두고 떠나야 합니다. 그때 당신은 어디로 갑니까 정든 고향을 영영 떠날 때 당신은 어디로 갑니까 정말 그리워하고 달려가야 할 고향, 즉 본향이 어딘지 아십니까
잠시 이슬처럼 왔다가는 떠나야 하는 우리들이 진정 돌아 갈 곳이 어디입니까 그 곳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본향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3:20-21).
전도서12:1-2절에 보면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고 하셨습니다.
종말이 오기 전에, 죽기 전에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사람의 마지막에는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12:7)
여기서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영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며 믿어야 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7:33절에서,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고 하셨습니다.
고향 없는 분은 없습니다. 다 있습니다. 그런데 고향이 있기는 하나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체제가 완전히 달라 출입을 제한하고 있는 북한에 고향을 둔 사람들입니다. 세계 어느 곳이든 시간이 있고 돈이 있으면 다 갈 수 있으나 북한만은 내 마음대로 갈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찾아야 할 영원한 고향, 영원한 본향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출발했던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더 나은 본향이란 바로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천국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다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여호와 하나님 나라,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자, 그 길을 찾아 그 길로 들어선 자만이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번 추석에 고향을 찾으면서 무엇을 준비하셨습니까 물론 각자가 다를 수 있지만 그러나 대동소이합니다. 선물, 용돈, 등입니다. 그러나 길을 잘 알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의 본향은 천국입니다. 이곳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길을 알고 그 길을 확보한 사람만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더 나은 본향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다면, 본향을 향하여 걸어가는 길을 잘 가야 합니다. 바르게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다가 보면 여러 갈래 길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정표가 없는 길도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의 길이나 우리가 들어갈 본향의 길이나 길을 잘 알아야 합니다. 고향 가는 길을 잘 알듯이 본향 가는 길을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까
첫째, 본향을 가는 성도는 네비게이션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고향을 찾는 사람들, 특히 자주 찾는 사람들은 눈감고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고향길 가는 데는 네비게이션이 필요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길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영원한 본향, 나의 영을 보내주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까 인생길을 다 달리고 마지막에 갈 길이 본향인데 그 본향 길의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으면 쉽게 갈 수 있습니다.
본향가는 길을 잘 안내해주는 네비게이션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중보자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즉 천국가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 중의 첫 번째가 천국 가는 길의 안내자인 네비게이션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갈 수 있는 곳이 우리의 본향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어느 누구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어느 누구를 믿어도 영원한 본향으로 갈 수 없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본향 가는 네비게이션,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시고 끝까지 그분을 따라가야 합니다.
둘째, 네비게이션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요즘 유행어 중에 남자는 세 여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세 여자가 누굽니까 어머님과 아내와 네비게이션 안내양이라고 합니다. 어떤 자료에는 아내 대신 골프를 치는 사람들은 캐디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본향을 향하여 달려가는 성도는 누구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우리의 네비게이션인 예수 그리스도가 하시는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길을 가는데도 규칙이 있습니다. 명절이 되어 귀성길에 오르내리는 연휴기간동안 기분 좋은 마음으로, 가족을 만나고 고향에 간다는 들뜬 마음으로 가는데 교통사고를 당하면 어떻게 됩니까 명절은 고사하고 고향에 가지도 못하고 병원에 입원해야 하거나 장례를 치러야 합니다. 추석에 발생하는 교통사고가 1년 평균 교통사고의
1. 8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교통사고의 원인도 보면 음주운전이 많습니다.
그리고 교통체증이 풀릴 때 과속운전, 장시간 운전으로 오는 피로를 통한 졸음, 주위산만, 그리고 안전거리 미확보 등이라고 합니다. 길은 바른 길로 가지만 법규와 일반적인 규칙을 지키지 않음으로 인해 사고가 발생하여 명절이 오히려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신호위반, 음주운전, 중앙선침범 등 전체 중대법규 위반 사고 중의 79. 5%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실 부모님이나 가족들에게 드리는 최고의 선물은 ‘안전운전’입니다. 그 어떤 선물보다도 안전운전이 가장 중요한 선물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본향을 달려갈 때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네비게이션인 주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들은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살면 결국 죽음의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교통사고 나면 고향에 가지도 못하고 영원한 고향으로 가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듯이, 우리도 말씀을 불순종하다가는 영영 본향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하게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서 영원한 본향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주님께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언제 도착하느냐 보다는 고향에 온전히 안전하게 도착하느냐는 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에는 들어섰지만 그분의 말씀대로, 뜻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7:21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절). ”
여호와 하나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믿음이 보다 분명한 믿음이 되려면 우선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즉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행함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본향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빌려 아무리 위대한 이적을 행하였다 할지라도 믿음이 아닌 말씀대로가 아닌 자기 멋대로 살면 본향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본향을 소망하며 사시는 성도 여러분! 천국 가는 자동차에 올라탔습니다.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요. 네비게이션의 말,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본향에 온전히 들어가십니다.
셋째, 가난한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5: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천국은 우리의 본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야 본향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자신의 영적파탄을 시인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무가치 하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자백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하여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겸손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부정하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옳다고 우기는 교만한 마음이 가난한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중생해야 합니다. 요한복음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여기서 여호와 하나님 나라는 본향입니다. 그렇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방법입니다. 물로 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삶속에서 항상 죄인 됨을 고백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상하게도 설이나 추석 명절을 보내고 돌아온 후에 이혼하는 사례가 급증한다고 합니다. 지난해 10월 서울가정법원이 밝힌 지난 1년간 가사사건 월별 접수 현황을 보면, 1위가 3월로서 1,301건, 2위가 10월로 1,245건, 3위는 2월로서 1,157건,4위가 9월로서 1,125건으로 나타났습니다. 1위~4위가 모두 명절 후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추석 전인 8월은 1,106건, 설 전인 1월은 953건입니다. 결국 설 이후인 2월과 3월에 2,458건, 추석 이후인 9월과 10월에 2,370건이 집중되어 배우자와의 해 묵은 갈등, '명절 스트레스'로 인한 사소한 다툼 등이 이혼을 결심하는 계기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런 것은 결국 마음이 가난해지지 못해서 발생하는 경우입니다.
믿음을 갖고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는 마음이 가난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툼도 막을 수 있습니다. 갈등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성도를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나의 것이 됩니다.
넷째, 어린 아이같이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18장1절 이하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말하기를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워놓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3절). 그러면 여기서 어린아이같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낮아짐을 말합니다. 겸손함을 의미합니다. 3절에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천국에서 높임을 받을 사람은 어린 아이처럼 낮아져야 하고 겸손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 같은 믿음의 사람을 실족시키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증표가 겸손과 온유함이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 ”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는 온유합니다. 어른처럼 완악하지 않습니다.
악을 꾸미지 못합니다. 그리고 순종합니다. 아직도 죄를 조직적으로 짓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 같아야 천국에 둘아 간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린 아이처럼 살지 못하고 어른들처럼 죄를 범하면 죄를 범하는 지체는 도끼로 찍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차라리 육체의 건강한 모습으로 지옥 들어가는 것보다는 장애로 천국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단순히 나은 것만 아닙니다. 이것은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자를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다섯째, 상 받을 준비해야 합니다.
명절에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을 찾아갈 때 부모님에게 드릴 것을 준비해 가면 돌아올 때는 더 많은 것들을 받아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본향 집에 가면 우리가 가지고 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드릴 것은 없습니다. 다만 그분으로부터 다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분명하게 면류관을 준비하시고 우리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자랑의 면류관입니다. 살전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영화의 면류관입니다. 잠 16:31“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3)영화로운 면류관입니다. 잠 4:9절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였느니라”
4)의의 면류관입니다.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5)영광의 면류관입니다. 벧전 5: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6)생명의 면류관입니다. 계 2:10 “...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끝으로 가는 길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끝까지 가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아니 영원한 본향을 위해 가는 길이 쉽지 않습니다. 길이 평탄할 것 같지만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길도 있습니다. 좁은 길도 있습니다. 가시밭길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어렵지만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영원한 낙원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 길을 가면서 핍박을 받을 때는 감사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마태복음5:10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을수록 더욱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향하는 길이 아무리 오래 걸려도 참고 갑니다. 1시간 반 걸리는 거리를 4시간 다섯 시간 걸려도 갑니다. 4시간 반 가는 거리를 배나 걸리고 심지어는 두 배가 소요되어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갑니다. 하물며 우리가 가는 본향 길은 그보다도 훨씬 더 멀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야 합니다. 영원한 나의 본향이 거기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안식처가 바로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1980년 3월 불란서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하던 존경받는 한 지성인이 패수종 때문에 입원했습니다. 그는 한 달 동안 이 병원에서 문자 그대로 발악을 했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고함을 치고 절규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가를 곁에 서 있는 자기 아내에게 묻지 못합니다. 아내조차도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자기 남편에게 그의 병명을 말하지도 못합니다. 소리치고 발악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남편의 곁에서 위로를 못하고 지켜보아야만 했던 이 불쌍한 여인과 그 사람!
그런데 이 사람처럼 글로써 현대인에게 깊은 감동을 남긴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자유라는 이름하에 수많은 수필을 썼고 글을 남겼습니다. 그는 이 한 세기에 가장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실존주의 철학자 싸르트르입니다. 이것이 그의 말로입니다. 1980년 4월 16일 입원한 지 한 달만에 그는 병원에서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 불란서의 신문들이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싸르트르가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각 언론이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어떤 독자가 신문사에 투고를 해서 이런 기사가 실렸다고 합니다. “싸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싸르트르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 아주 중요한 지적입니다. 무신론자가 예수 외에 다른 것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없습니다.
싸르트르와 함께 현대의 지식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던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독일 고백교회 신학자 본훼퍼입니다. 그는 싸르트르보다 훨씬 앞서서 세계대전 중에 독일의 수용소에서 나치에게 항거하다가 죽어갔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간수가 문을 드리고 들어옵니다. 직감적으로 본훼퍼는 이것이 자기의 마지막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감방에 있던 자기의 동지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합니다.
“동지 여러분! 이제 나에게는 죽음이 왔소. 그러나 기억하시오.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고 시작이오. 주께서 나를 위해서 예비하신 아버지의 집에서 만날 때까지 여러분 안녕히 계시오. ” 그리고 감방을 나서는 그에게서 그를 뒤덮고 있었던 놀라운 평안과 기쁨이 넘쳐 나와 감옥 속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으로서의 충격과 감동을 남겼습니다.
본훼퍼와 싸르트르의 차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본훼퍼에게는 돌아갈 고향, 본향이 있었습니다. 싸르트르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없었습니다. 당신에게는 돌아갈 본향 있습니까 본향을 사모하며 가고 싶어 안달이 나는 그런 애틋하게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