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추석을 앞두고
본문
어떤 목사님이 목회자에게 가장 힘든 일이 무얼까를 두고 사모와 대화를 나눈 것을 글로 쓴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목사님의 사모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말했고, 목사님은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글을 쓴 목사님의 고백은 사소한 일로 꼬투리를 잡고 문젯거리를 만드는 교우를 사랑하기란 무척 힘들었고, 솔직히 말해 싫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변하고 좀 더 성숙한 성도가 되기를 기다리다 숨넘어갈 지경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과 사모님은 서로 다른 주장을 의견의 일치를 보았는데, 가장 힘든 일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바울도 ‘사랑은 오래 참고’로 시작해서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로 사랑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기에 기다립니다. 기다리지 않으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믿기에, 소망하기에, 사랑하기에 기다립니다. 진짜 사랑합니까 계속 기다리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오래 기다리시듯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역시 자식이 부모를 기다리는 것과 부모가 자식을 기다리는 것이 차이가 있음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결국 사랑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글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가장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나의 빈자리가 당신으로 채워지길 기도하는 것은"아름다움"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라일락의 향기와 같은 당신의 향을 찾는 것은 "그리움"입니다.
마음속 깊이 당신을 그리는 것은 "간절함"입니다.
바라 볼수록 당신이 더 생각나는 것은 "설레임"입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보다 말하지 않아 더 빛나는 것이"믿음"입니다.
아무런 말 하지 않아도 당신과 함께 있고 싶은 것이 "편안함"입니다.
자신보다 당신을 더 이해하고 싶은 것이 "배려"입니다.
차가운 겨울이 와도 춥지 않은 것은 당신의 "따뜻함"입니다.
카나리아 같은 목소리로 당신이름 부르고 싶은 것이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타인이 아닌 내가 당신 곁에 자리하고 싶은 것은 "바램"입니다.
파아란 하늘과 구름처럼 당신과 하나가 되고 싶음은 "존중"입니다.
하얀 종이 위에 쓰고 싶은 말은 "사랑"입니다.
일평생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며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당신이 가까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곧 “기다림”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 아름다운 사람, 사랑스런 사람을 늘 기다리며 살게 됩니다. 아니 지금 내가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 될 것을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그 기다림이 헛수고가 될 지경에 이르면 아쉬운 기다림이지만 그것 기다리다 결국 인생을 다 살아 온 것이 됩니다.
볼 일 보러 나간 엄마나 눈앞에 보이지 않자 어린 아이는 엉엉 울면서 ‘엄마~’하고 외치다가 잠들어 있는 아이를 발견했을 때 엄마의 마음은 찢어집니다. 자녀가 하는 일이 하도 마음에 들지 않아 ‘너 왜 사니 도대체 누굴 닮았니
왜 그렇게도 말썽을 피우는거야’하며 꾸중을 해놓고서도 엄마의 마음에는 혹시라도 얘가 집을 나가버리지 않을까를 걱정합니다. 그리고 집을 뛰쳐나간 자녀가 늦은 밤이 되어 돌아오지 않으면 집나간 것은 아닐까를 걱정하며 집앞 골목길에 나가 서성거립니다. 이것이 부모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탕자의 비유입니다. 한 아버지가 몇 명의 자녀를 두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맏아들은 아주 착합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맏아들과 전혀 딴 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친구 좋아하고 놀기를 좋아하였습니다. 농장의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자라던 둘 때 아들이 느닷없이 아버지를 찾아와서는 자기에게 돌아갈 상속 재산을 미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도 졸라서 결국 둘째 아들 말대로 재산을 맏아들과 같이 나눠 주었습니다. 맏아들은 재산을 잘 관리하는데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자신의 재산을 몸땅 팔아서 해외로 이민을 가버렸습니다.
잔소리하는 부모가 없으니 놀기가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가지고 간 재물로 허랑방탕하게 써다보니 금방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버는 것은 어렵지만 써는 것은 쉽습니다. 어지간히 많아 보여도 벌지 않고 써보면 금방 다 나갑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둘째 아들이 돈이 떨어졌을 때 이 나라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자연적으로 궁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배운 것은 아버지가 농사짓던 일인데 한 사람에 붙어사는데 이 청년을 돼지를 치게 하였습니다. 돼지를 치면서 일하지만 입에 근근히 풀칠할 정도고 맛있는 음식은 이미 먹어본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젊은이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를 때에 이제 이 둘 째 아들이 스스로 후회하면서 자신을 잘못을 반성하면서 말하기를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고난은 인생의 교훈을 가져다 줍니다. 환란이 사람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시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에 보면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고난을 당하니까 말씀이 생각나고 그 말씀을 순종하게 되었기 때문에 고난당한 것이 오히려 유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도 철이 들었습니다. 눈물의 빵을 먹어보기 전에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던가요. 이 둘째 아들이 눈을 밥을 먹어본 후에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18-19절)
낮아졌습니다. 겸손해졌습니다. 그리고 제 자리를 찾아 온 것입니다. 자기의 위치를 정확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멋진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그래서 용기를 내어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둘째 아들이 이렇게 될 때까지 아버지는 항상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날씨가 더우나 차가우나 상관없이 아버지는 삽적 밖에 나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서 있다가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면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에 돌아와 계시지만 문소리가 나면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 나갑니다. 아내는 핀잔을 줍니다.
‘아니 바람이 불어 문이 덜거덕 거리는데 무슨 아들이 온다고 웃기는 양반이구만. 이 양반 이러다가 병나가겠다.
당신 정신 차리소. 아버지의 말을 안 듣고 그 재산 가지고 해외에 갔는데 고생을 하더라도 실컷 하도록 내버려 두세요’라고 하는 아내의 말이 야속하게 들리지만 여전히 아버지를 오늘도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마을 동구 밖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고개를 푹 숙이고 터벅터벅 걸어오는 한 청년이 오는데 보니까 이것은 분명 자신의 둘 째 아들입니다.
그렇게도 기다리던 아들이 돈 떨어지고 맥이 떨어져서 터덕 터덕거리며 걸어오는 아들을 본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가 괜히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 성공해서 돌아오던 실패해서 돌아오던 상관하지 않습니다. 아들을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했습니다. 선물보따리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이미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가 가면 우리에게 줄 것을 미리 준비해놓고 기다리세요.
어제 오후에도 평소에 가끔 저를 찾아오는 분이 제방에 와서 무릎을 털썩 꿇으면서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 못난 놈 고향가야 합니까 아내도 없고 아들 있고 어머니 계시고 형제들이 있는데 내가 이런 모습을 가면 체면이 서지 않는데 가야 합니까’
그러면서 ‘나의 속 사정, 내 얘기를 좀 들어주세요. ’하면서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가야합니다’
‘아니 목사님, 내가 스스로 죽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을 해치고 나도 죽고 싶습니다. ’
‘옛날 잘 나가던 시절 잊어버리시고, 세상 원망하지 마시고 권사 눈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만나 살도록 하세요’ 그러면서 이분이 사회적 신분이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이어령 성도님이 쓴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제가 읽던 것이지만 드리면서 서울로 올라가면서 읽든지 추석기간 동안 읽으시라고 하면서 건네주었습니다.
방금 제가 말씀드린 분은 맏아들입니다. 그런데 본문 주인공 둘 째 아들이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의 체온을 느끼면서 흐느끼며 안겼다가 정신을 차리고서는 아들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아버지! 내가 여호와 하나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런 낮아짐의 자세로 온다면 재물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인데 재물 조금 잃어버리고 겸손해진 아들, 자기의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아들을 얻었다면 오히려 부모님으로서는 감사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라도 여러분 가운데 명절이 되어도 가고 싶지 않다고 해서 기다리는 부모님이 계시는데도 가는 것을 포기한 분 있습니까 만약에 그런 분 계시면 지금 이시간에 큰 마음 결단하셔서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적어도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혹시 부모님이 아닐지라도 그 어떤 분이라도 나를 기다리는 분이 있다면 그 분을 찾아가십시오. 당신의 상황을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라고 고백하면서 가십시오. 괜찮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어떻습니까 영영 잃을 뻔 했던 둘 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종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22-24절).
여러분이 찾아가시면 기다리던 부모님들은 그래도 자식자랑하며 동네 사람들에게 이렇게 자랑 할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왔다. 첫째도 오고 둘째도 오고, 손자도 오고 손녀도 왔다’명절이란 바로 우리의 기다림을 갖게 만들 뿐 아니라 기다리던 만남을 갖게 만듭니다. 그래서 명절이 좋은 듯합니다. 며느리들은 명절이 반갑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명절을 통해서 우리는 떨어져 살던 가족들이 만나도 친척들이 만나고 친구를 만나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기다리는 부모님도 계시지 않고 오히려 여러분이 기다려야 할 경우가 있습니까 그러면 기왕 기다리는 것, 오늘 본문의 아버지처럼 기다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자녀가 어떤 모습으로 오더라고 반갑고 좋은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기다리게 하소서
사랑하며 기도하며 기다리게 하소서
의심하지 않고 가르치려고도 하지 않으며
오직 믿고 울먹이며 기다리게 하소서
그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나타나 기다려주어 고맙다고 말할 때까지 기다리게 하소서
나무가 자라고 키가 자라듯이 참으로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게 자라는 법
나의 아픔이 그의 희망이 되게 하소서
나의 눈물이 그의 꽃이 되게 하소서
나의 기도가 그의 꿈이 되게 하소서
세상의 모든 사랑은 저마다 기적을 낳는 법
사랑은 오래참고 모든 것을 덮어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아무리 나의 속을 썩인 자식이라도 나의 썩은 속 마음을 퇴비로 하여
언젠가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인생으로 자랄 것을 기다리면서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부모가 되십시오.
그런데 오늘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떤 자식이든 자식들이 내 앞에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도 더욱 기다리는 마음을 갖고 우리 인생을 기다리는 분이 계십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 말씀인 이사야30:18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여호와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린다고 하셨습니다. 왜 기다리십니까 꾸중하려고 아닙니다. 벌주시려고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에서 방황하며 죄인 된 모습을 살던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려고,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를 자녀 삼으려고, 안아주시려고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이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가 바로 누가복음15장에서의 탕자의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이 탕자의 아버지를 바로 이 여호와 하나님을 비유해서 하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직도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이 계시는 자녀들은 감사하십시오. 왜 감사해야 합니까 이미 몇 달 전부터 아들 손자, 며느리 딸 사위가 오면 주려고 준비하면서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탕자의 아버지는 이미 아들에게 입힐 옷도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동안 아들이 입었던 옷을 하나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패물도 준비해 놓았습니다. 신발도 준비해놓았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 동네잔치를 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부모님의 마음이요, 여호와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거부했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긍휼을 베푸시기 위하여 우리를 기다린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좋으신 분입니까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아들도 아버지를 만나기를 기다라고 우리 또한 여호와 하나님 만나기를 기다려야 그 만남의 기쁨이 몇 갑절이나 더 크게 다가옵니다. 한 사람은 기다렸는데 나는 시무룩하거나 별로 기다리지 않았다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 만나 기뻐하시던 분도 서먹해집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에 보면,
“...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여호와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편130:5-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은혜와 긍휼하심을 베풀기 위해 기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가 기다릴 때 우리는 복을 받습니다. 여호와는 인자하시고 속량이 풍성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기다릴텐데 아들로서가 아니라 머슴으로라도 아버지 밑에서 있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갔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베푸실 은혜와 긍휼하심을 품고 기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다시 우리가 기다린다면 여호와 하나님이 주실 모든 복, 구원의 복과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을 다 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릴 때에 어떻게 기다려야 합니까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던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세주를 기다릴 때에 오셨던 예수님은 성탄의 예수님이이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즉 종말을 기다려야 합니다.
야고보 5:7-8절 말씀,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빌립보3:20절 말씀,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우리는 종말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종말의 때가 더디더라도 기다려야 합니다.
하박국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다 보면 지칠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합니다. 항상 기다리던 주님을 맞을 준비해놓고 기다려야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노아가 방주를 짓고 있을 때 일반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노아가 방주를 준비할 동안 여호와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은 다 죽었습니다. 겨우 열덟명 외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고 홍수의 심판이 없다고 생각하고 먹고 마시며 즐기던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던 노아 가족은 다 구원받았습니다.
누가복음12:35절 이하에 보면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일러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35-38절).
사도행전1:4에도 보면, 예수님이 사도들과 함께 모인 후에 그들에게 분탁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버지께서 약속한 것이란 성령을 말합니다. 보혜사 성령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라는 것입니다. 언제 임할는지 모르지만 성령이 임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세상을 살 때 기다림 속에서 살아갑니다. 자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십시오. 은혜와 긍휼을 베푸실 여호와 하나님을 항상 기다리십시오. 그러면서도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특히 명절이 되면 어른들, 즉 부모님들이 기다립니다. 누굴 기다릴까요 자녀손들을 만날 것을 기다립니다.
명절은 만남을 가져다줍니다. 명절이 되면 만납니다. 특히 가족의 만남이요, 집안 식구들의 만남이요, 친구들의 만남입니다. 그래서 명절이 되었을 때 효도하는 가장 좋은 것은 무슨 음식이나 선물이 아니라 얼굴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선물만 달랑 보내드린다든지, 명절에 필요한 것을 구입하시라고 돈만 통장으로 넣어드리고 자기들은 해외로 여행을 떠나버리면 정말 서운해 하십니다. 연세가 많을수록 사람이 보고 싶어집니다. 외로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주 뵙는 것이 효도입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자주 찾아뵈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명절에라도 뵙지 못하면 그것은 곧 불효입니다.
이 글을 쓴 목사님의 고백은 사소한 일로 꼬투리를 잡고 문젯거리를 만드는 교우를 사랑하기란 무척 힘들었고, 솔직히 말해 싫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변하고 좀 더 성숙한 성도가 되기를 기다리다 숨넘어갈 지경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과 사모님은 서로 다른 주장을 의견의 일치를 보았는데, 가장 힘든 일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바울도 ‘사랑은 오래 참고’로 시작해서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로 사랑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기에 기다립니다. 기다리지 않으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믿기에, 소망하기에, 사랑하기에 기다립니다. 진짜 사랑합니까 계속 기다리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오래 기다리시듯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역시 자식이 부모를 기다리는 것과 부모가 자식을 기다리는 것이 차이가 있음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결국 사랑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글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가장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나의 빈자리가 당신으로 채워지길 기도하는 것은"아름다움"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라일락의 향기와 같은 당신의 향을 찾는 것은 "그리움"입니다.
마음속 깊이 당신을 그리는 것은 "간절함"입니다.
바라 볼수록 당신이 더 생각나는 것은 "설레임"입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보다 말하지 않아 더 빛나는 것이"믿음"입니다.
아무런 말 하지 않아도 당신과 함께 있고 싶은 것이 "편안함"입니다.
자신보다 당신을 더 이해하고 싶은 것이 "배려"입니다.
차가운 겨울이 와도 춥지 않은 것은 당신의 "따뜻함"입니다.
카나리아 같은 목소리로 당신이름 부르고 싶은 것이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타인이 아닌 내가 당신 곁에 자리하고 싶은 것은 "바램"입니다.
파아란 하늘과 구름처럼 당신과 하나가 되고 싶음은 "존중"입니다.
하얀 종이 위에 쓰고 싶은 말은 "사랑"입니다.
일평생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며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당신이 가까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곧 “기다림”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 아름다운 사람, 사랑스런 사람을 늘 기다리며 살게 됩니다. 아니 지금 내가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 될 것을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그 기다림이 헛수고가 될 지경에 이르면 아쉬운 기다림이지만 그것 기다리다 결국 인생을 다 살아 온 것이 됩니다.
볼 일 보러 나간 엄마나 눈앞에 보이지 않자 어린 아이는 엉엉 울면서 ‘엄마~’하고 외치다가 잠들어 있는 아이를 발견했을 때 엄마의 마음은 찢어집니다. 자녀가 하는 일이 하도 마음에 들지 않아 ‘너 왜 사니 도대체 누굴 닮았니
왜 그렇게도 말썽을 피우는거야’하며 꾸중을 해놓고서도 엄마의 마음에는 혹시라도 얘가 집을 나가버리지 않을까를 걱정합니다. 그리고 집을 뛰쳐나간 자녀가 늦은 밤이 되어 돌아오지 않으면 집나간 것은 아닐까를 걱정하며 집앞 골목길에 나가 서성거립니다. 이것이 부모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탕자의 비유입니다. 한 아버지가 몇 명의 자녀를 두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맏아들은 아주 착합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맏아들과 전혀 딴 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친구 좋아하고 놀기를 좋아하였습니다. 농장의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자라던 둘 때 아들이 느닷없이 아버지를 찾아와서는 자기에게 돌아갈 상속 재산을 미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도 졸라서 결국 둘째 아들 말대로 재산을 맏아들과 같이 나눠 주었습니다. 맏아들은 재산을 잘 관리하는데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자신의 재산을 몸땅 팔아서 해외로 이민을 가버렸습니다.
잔소리하는 부모가 없으니 놀기가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가지고 간 재물로 허랑방탕하게 써다보니 금방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버는 것은 어렵지만 써는 것은 쉽습니다. 어지간히 많아 보여도 벌지 않고 써보면 금방 다 나갑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둘째 아들이 돈이 떨어졌을 때 이 나라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자연적으로 궁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배운 것은 아버지가 농사짓던 일인데 한 사람에 붙어사는데 이 청년을 돼지를 치게 하였습니다. 돼지를 치면서 일하지만 입에 근근히 풀칠할 정도고 맛있는 음식은 이미 먹어본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젊은이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를 때에 이제 이 둘 째 아들이 스스로 후회하면서 자신을 잘못을 반성하면서 말하기를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고난은 인생의 교훈을 가져다 줍니다. 환란이 사람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시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에 보면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고난을 당하니까 말씀이 생각나고 그 말씀을 순종하게 되었기 때문에 고난당한 것이 오히려 유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도 철이 들었습니다. 눈물의 빵을 먹어보기 전에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던가요. 이 둘째 아들이 눈을 밥을 먹어본 후에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18-19절)
낮아졌습니다. 겸손해졌습니다. 그리고 제 자리를 찾아 온 것입니다. 자기의 위치를 정확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멋진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그래서 용기를 내어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둘째 아들이 이렇게 될 때까지 아버지는 항상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날씨가 더우나 차가우나 상관없이 아버지는 삽적 밖에 나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서 있다가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면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에 돌아와 계시지만 문소리가 나면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 나갑니다. 아내는 핀잔을 줍니다.
‘아니 바람이 불어 문이 덜거덕 거리는데 무슨 아들이 온다고 웃기는 양반이구만. 이 양반 이러다가 병나가겠다.
당신 정신 차리소. 아버지의 말을 안 듣고 그 재산 가지고 해외에 갔는데 고생을 하더라도 실컷 하도록 내버려 두세요’라고 하는 아내의 말이 야속하게 들리지만 여전히 아버지를 오늘도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마을 동구 밖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고개를 푹 숙이고 터벅터벅 걸어오는 한 청년이 오는데 보니까 이것은 분명 자신의 둘 째 아들입니다.
그렇게도 기다리던 아들이 돈 떨어지고 맥이 떨어져서 터덕 터덕거리며 걸어오는 아들을 본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가 괜히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 성공해서 돌아오던 실패해서 돌아오던 상관하지 않습니다. 아들을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했습니다. 선물보따리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이미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가 가면 우리에게 줄 것을 미리 준비해놓고 기다리세요.
어제 오후에도 평소에 가끔 저를 찾아오는 분이 제방에 와서 무릎을 털썩 꿇으면서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 못난 놈 고향가야 합니까 아내도 없고 아들 있고 어머니 계시고 형제들이 있는데 내가 이런 모습을 가면 체면이 서지 않는데 가야 합니까’
그러면서 ‘나의 속 사정, 내 얘기를 좀 들어주세요. ’하면서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가야합니다’
‘아니 목사님, 내가 스스로 죽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을 해치고 나도 죽고 싶습니다. ’
‘옛날 잘 나가던 시절 잊어버리시고, 세상 원망하지 마시고 권사 눈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만나 살도록 하세요’ 그러면서 이분이 사회적 신분이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이어령 성도님이 쓴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제가 읽던 것이지만 드리면서 서울로 올라가면서 읽든지 추석기간 동안 읽으시라고 하면서 건네주었습니다.
방금 제가 말씀드린 분은 맏아들입니다. 그런데 본문 주인공 둘 째 아들이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의 체온을 느끼면서 흐느끼며 안겼다가 정신을 차리고서는 아들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아버지! 내가 여호와 하나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런 낮아짐의 자세로 온다면 재물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인데 재물 조금 잃어버리고 겸손해진 아들, 자기의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아들을 얻었다면 오히려 부모님으로서는 감사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라도 여러분 가운데 명절이 되어도 가고 싶지 않다고 해서 기다리는 부모님이 계시는데도 가는 것을 포기한 분 있습니까 만약에 그런 분 계시면 지금 이시간에 큰 마음 결단하셔서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적어도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혹시 부모님이 아닐지라도 그 어떤 분이라도 나를 기다리는 분이 있다면 그 분을 찾아가십시오. 당신의 상황을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라고 고백하면서 가십시오. 괜찮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어떻습니까 영영 잃을 뻔 했던 둘 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종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22-24절).
여러분이 찾아가시면 기다리던 부모님들은 그래도 자식자랑하며 동네 사람들에게 이렇게 자랑 할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왔다. 첫째도 오고 둘째도 오고, 손자도 오고 손녀도 왔다’명절이란 바로 우리의 기다림을 갖게 만들 뿐 아니라 기다리던 만남을 갖게 만듭니다. 그래서 명절이 좋은 듯합니다. 며느리들은 명절이 반갑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명절을 통해서 우리는 떨어져 살던 가족들이 만나도 친척들이 만나고 친구를 만나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기다리는 부모님도 계시지 않고 오히려 여러분이 기다려야 할 경우가 있습니까 그러면 기왕 기다리는 것, 오늘 본문의 아버지처럼 기다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자녀가 어떤 모습으로 오더라고 반갑고 좋은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기다리게 하소서
사랑하며 기도하며 기다리게 하소서
의심하지 않고 가르치려고도 하지 않으며
오직 믿고 울먹이며 기다리게 하소서
그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나타나 기다려주어 고맙다고 말할 때까지 기다리게 하소서
나무가 자라고 키가 자라듯이 참으로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게 자라는 법
나의 아픔이 그의 희망이 되게 하소서
나의 눈물이 그의 꽃이 되게 하소서
나의 기도가 그의 꿈이 되게 하소서
세상의 모든 사랑은 저마다 기적을 낳는 법
사랑은 오래참고 모든 것을 덮어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아무리 나의 속을 썩인 자식이라도 나의 썩은 속 마음을 퇴비로 하여
언젠가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인생으로 자랄 것을 기다리면서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부모가 되십시오.
그런데 오늘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떤 자식이든 자식들이 내 앞에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도 더욱 기다리는 마음을 갖고 우리 인생을 기다리는 분이 계십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 말씀인 이사야30:18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여호와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린다고 하셨습니다. 왜 기다리십니까 꾸중하려고 아닙니다. 벌주시려고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에서 방황하며 죄인 된 모습을 살던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려고,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를 자녀 삼으려고, 안아주시려고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이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가 바로 누가복음15장에서의 탕자의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이 탕자의 아버지를 바로 이 여호와 하나님을 비유해서 하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직도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이 계시는 자녀들은 감사하십시오. 왜 감사해야 합니까 이미 몇 달 전부터 아들 손자, 며느리 딸 사위가 오면 주려고 준비하면서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탕자의 아버지는 이미 아들에게 입힐 옷도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동안 아들이 입었던 옷을 하나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패물도 준비해 놓았습니다. 신발도 준비해놓았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 동네잔치를 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부모님의 마음이요, 여호와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거부했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긍휼을 베푸시기 위하여 우리를 기다린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좋으신 분입니까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아들도 아버지를 만나기를 기다라고 우리 또한 여호와 하나님 만나기를 기다려야 그 만남의 기쁨이 몇 갑절이나 더 크게 다가옵니다. 한 사람은 기다렸는데 나는 시무룩하거나 별로 기다리지 않았다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 만나 기뻐하시던 분도 서먹해집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에 보면,
“...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여호와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편130:5-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은혜와 긍휼하심을 베풀기 위해 기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가 기다릴 때 우리는 복을 받습니다. 여호와는 인자하시고 속량이 풍성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기다릴텐데 아들로서가 아니라 머슴으로라도 아버지 밑에서 있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갔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베푸실 은혜와 긍휼하심을 품고 기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다시 우리가 기다린다면 여호와 하나님이 주실 모든 복, 구원의 복과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을 다 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다릴 때에 어떻게 기다려야 합니까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던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세주를 기다릴 때에 오셨던 예수님은 성탄의 예수님이이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즉 종말을 기다려야 합니다.
야고보 5:7-8절 말씀,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빌립보3:20절 말씀,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우리는 종말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종말의 때가 더디더라도 기다려야 합니다.
하박국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다 보면 지칠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합니다. 항상 기다리던 주님을 맞을 준비해놓고 기다려야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노아가 방주를 짓고 있을 때 일반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노아가 방주를 준비할 동안 여호와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은 다 죽었습니다. 겨우 열덟명 외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고 홍수의 심판이 없다고 생각하고 먹고 마시며 즐기던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던 노아 가족은 다 구원받았습니다.
누가복음12:35절 이하에 보면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일러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35-38절).
사도행전1:4에도 보면, 예수님이 사도들과 함께 모인 후에 그들에게 분탁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버지께서 약속한 것이란 성령을 말합니다. 보혜사 성령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라는 것입니다. 언제 임할는지 모르지만 성령이 임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세상을 살 때 기다림 속에서 살아갑니다. 자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십시오. 은혜와 긍휼을 베푸실 여호와 하나님을 항상 기다리십시오. 그러면서도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특히 명절이 되면 어른들, 즉 부모님들이 기다립니다. 누굴 기다릴까요 자녀손들을 만날 것을 기다립니다.
명절은 만남을 가져다줍니다. 명절이 되면 만납니다. 특히 가족의 만남이요, 집안 식구들의 만남이요, 친구들의 만남입니다. 그래서 명절이 되었을 때 효도하는 가장 좋은 것은 무슨 음식이나 선물이 아니라 얼굴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선물만 달랑 보내드린다든지, 명절에 필요한 것을 구입하시라고 돈만 통장으로 넣어드리고 자기들은 해외로 여행을 떠나버리면 정말 서운해 하십니다. 연세가 많을수록 사람이 보고 싶어집니다. 외로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주 뵙는 것이 효도입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자주 찾아뵈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명절에라도 뵙지 못하면 그것은 곧 불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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