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본문
추석을 맞아 여호와 하나님의 복이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시고 아름답고 행복한 집안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명절이 좋으려고 하면 서로가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명절날 꼴불견들이 있습니다.
명절날 꼴볼견 10가지를 들어보세요.
1. 가깝게 살면서도 늦게 오는 동서
2. 형편 어렵다며 빈손으로 와서 갈 때는 이것저것 싸가는 동서
3. 빨리 가서 쉬고 싶은데 눈치 없이 계속 고스톱만 치는 남편
4. 술 취했으면서도 안 취했다고 우기며 가는 손님 붙잡는 남편
5. 시댁은 바로 갔다 오면서 친정에 일찍 와서 참견하는 시누이
6. 잘 놀다가 꼭 부침개 부칠 때 와서 식용유 엎는 조카
7. 기름 냄새 맡으며 간신히 부쳐놓은 부침개를 날름 집어먹는 남편
8. 며느리는 친정 안 보내면서 시집간 딸은 빨리 오라고 하는 시어머니
9. 시댁에는 20만원, 친정에는 10만원으로 차별하는 남편
10. 늦게 와서는 아직도 일하고 있느냐며 큰소리치는 형님
오늘 말씀의 시작이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그러면서 하는 말씀이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앞의 내용의 삶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는데 그 부름의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살면 복을 이어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계속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8-9절 말씀을 하신 후에 이어서 10절에 보면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으로 시작합니다. 10-12절 말씀은 시편34편12-16절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12-14절에 보면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오늘 본문에서는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고 표현하고 있는데, 시편에서는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적인 복이라기보다는 영원한 나라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삶이란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며 그 날을 바라보며 영광된 날을 기다리는 삶을 사는 성도들의 삶을 총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도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도 세워지기를 소망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도 복이 되고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그 영광의 날을 맞이하기 위한 성도가 추구해야 할 삶의 가치를 본문에서 제기하고 있습니다.
첫째, 동정심을 가져야 합니다.
개역성경에는 ‘체휼’이라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가정에 참여하여 고난 받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동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마음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갖고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거나, 구좌번호로 얼마의 돈을 송금해준다는 것, 지난 번 이옥 집사의 가증을 듣고 북한 결핵 어린이를 돕기 위하여 매달 얼마씩이라고 후원하겠다고 약속한 것은 바로 동정심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이 마음을 갖고 백성들을 보았고 이 마음으로 군중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변도 고쳐주시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행하시고, 귀신도 쫓아내신 것입니다.
동정하는 마음이 없이 한다면 그것은 자기 의를 위해서 하는 행위가 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 동정하는 마음을 갖고 약한 자를 돕는 삶이어야 합니다. 추석을 맞아서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모습이 동정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 가난한 친구들을 왕따 시키거나 그 친구들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은 동정심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동정심을 가지고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들, 친구들, 이웃들, 가족들을 잘 돌보아야 복을 받고 좋은 날이 계속 이어집니다.
둘째,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사랑이란 것도 동정심이 발동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동정심이 발동하기 어렵습니다. 체면치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우선 육신의 형제, 즉 가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끼리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친구들끼리 사랑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4:9말씀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여호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말씀하시기를 형제사랑을 뛰어넘는 사랑을 부탁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이웃도 우리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면 형제는 두말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세상에는 열두 가지 강한 것이 있습니다. 그 첫째로 '돌'입니다. 그러나 돌은 '쇠'에 의해 잘려지고, 쇠는 '불'에 의해 녹아 버립니다. 그러나 불은 '물'을 이기지 못하고, '구름' 속으로 흡수되어 버립니다.
또한 구름은 '바람'에 의해 이리저리 이끌려 다닙니다. 그러나 바람은 '인간'을 불어 날리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공포'에 의해 비참하게 위축됩니다.
공포는 '술'에 의해 사라집니다. 술은 '잠'을 깨면 깹니다. 그러나 잠은 '죽음'만큼 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 조차도 '사랑' 앞에서는 무기력 합니다.
대전에 사는 이대용씨(52세)는 40년 만에 여동생을 만났습니다. 간경화 말기였습니다. 단 하나뿐인 여동생은 성이 최씨로 새아버지의 성으로 갈았고, 이대용씨는 할머니에게서 자랐습니다. 부모의 이혼으로 말미암아 결국 40년 동안 헤어져서 살아야했습니다.
1998년도에 간경화 말기 진단을 받고 난 다음 동생을 죽기 전에 만나고 싶어 수소문해서 2003년에 만났던 것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40년 동안 각기 다른 姓(성)을 사용하면서 헤어져 살았던 형제지만 여동생은 모든 법적인 절차를 밟아서 간이식수술을 해서 수술이 잘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참사랑이 아닐까요.
셋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실 ‘불쌍히 여긴다’는 단어는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이나 동정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공동체에서 어려운 일을 당한 자들을 도와 주되 그리스도께서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하라는 의미입니다.
로마서12:20 말씀,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심지어 원수까지라도 그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것을 이용하거나 그것을 보고도 못본척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강원도 횡성지역에 백혈병과 골수암을 앓고 있는 어린이 3명을 살리기 위해 횡성군과 군종합사회복지관이 지난2005년 7월29일 군 실내체육관에서'1일 사랑의 헌혈' 행사를 가졌습니다. 당일에 헌혈만 한 것이 아니라 헌혈증서를 모으기도 하고 모금도 실시했는데 1천여장의 헌혈증서가 모아졌고, 성금도 5천800여만원이나 되었습니다.
이런 것은 동정심에서 나온 아름다운 모습이라 생각됩니다. 이런 동정 중에는 55장의 헌혈증서를 보내 온 서울 은평구에 산다는 한 주부는 “3년전 남편을 백혈병으로 떠나보냈다”며 “우연히 배달된 메일 한통으로 잊혀졌던 아픔과 함께 병상에 누워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라 작은 정성이지만 귀중한 생명을 살리는데 보탬이 되길 빌며 보내 드린다”고 밝혔습니다. 바로 이런 마음을 의미합니다.
넷째, 겸손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나 으뜸이 되어야 합니다.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위에 있고 아래에 있지 말아야 합니다. 중간 근처도 가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고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두각을 나타내고 번성 번영 번창해야 합니다.
안 믿는 사람만도 못하다느니, 별 차이가 없다느니 해서는 안 됩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성이 무너지듯 형통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비결이 있습니다. 크고자 하면 할수록, 으뜸이 되고자 하면 할수록 첫째, 남을 섬겨야 합니다. 둘째, 이웃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이 둘을 합치면 '겸손'입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이를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고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겸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높여 주십니다. 으뜸이 되게 하십니다.
겸손은 우리들의 긴 인생 여정 속에서, 삶을 윤택하게 하며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러나 겸손은 아주 피기 어려운 꽃이요, 힘들게 맺는 열매와 같습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우리들의 마음속에 교만이란 잡초가 자라게 되어 마음의 정원을 황무지로 만들어 버립니다.
겸손하면 바보 같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이 겸손한 사람에게는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자세를 낮춘 그에게는 헐뜯는 사람도 없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먼저 고개 숙이고 있는 그를 밀치려 하는 사람도 없고 넘어뜨리려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섯째, 되갚지 말고 복을 빌어주는 아량이 있어야 합니다.
9절 말씀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이런 삶의 모델은 예수님입니다. 누가복음23:33에 보면 자기를 향하여 못박는 사람들을 향하여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이와같은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산 사람이 스데반 집사입니다.
스데반 집사도 자기를 항하여 돌을 던지는 자들에게 죽어가면서 까지도 그들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사도행전7:59-60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고 하면 우리 또한 타인들에게 복을 빌어 주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하셨다(히10:30). 그리고 오히려 그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했다(롬12:20).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때 에드윈 스탠톤이라고 하는 사람은 바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정적이었습니다. 그는 링컨 대통령을 향해서 ‘고릴라 같은 사람’, ‘원숭이 같은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할 때에링컨 대통령의 정적이 많았지만 에드윈 스탠톤같이 험한 사람도 없었다 합니다. 그는 링컨이 무슨 정책을 내놓기만 하면 사사건건 물고 늘어졌을 뿐만 아니라 '저질광대'라고 공격하곤 했습니다.
스탠톤은 어느 날 탐험가 차일루에게 말하기를 “고릴라를 잡으러 아프리카로 가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진짜 고릴라는 바로 여기 스프링필드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링컨의 털보로 생긴 얼굴을 보고 '미련한 고릴라'로 별명을 붙이기로 했다고 할 정도입니다.
링컨은 이런저런 비난과 중상을 다 당하고 있으면서도 단 한마디도 대꾸한 적이 없었습니다. 링컨이 대통령이 되고 남북전쟁이 발발했을 때 링컨은 오히려 이 골치 덩어리인 정적을 국방장관으로 기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링컨에게 의아해하며 취소할 것을 종용하였지만, 링컨은 “내 판단으로는 이 시대에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사람은 그 사람이라고 확신한다”며 그를 임명하고 이 위대한 노예해방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얼마후 워싱톤에 있는 워너극장에서 괴한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을 때 동석했던 스탠톤은 모두가 총성에 피하는 가운데도 맨먼저, 쓰러진 링컨에게로 뛰어 갔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면서 끝까지 링컨의 시신을 지켰습니다. 그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조용히 읊조리기를 "이 세계 역사 위에 가장 위대한 정치가가 여기에 누워 있다"고 했다고 합니다.
여섯째, 좋은 말을 해야 합니다.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 복을 받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악한 말을 그치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뒤집으면 선한 말, 좋은 말을 하고 진실한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말을 할 것인가에 대한 가장 영향력을 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생각도 중요하지만 감정입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갖고 좋은 말을 하기 원했더라도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감정이 나쁜 감정이면 나쁜 말로 바꿔서 나갑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항상 좋은 말을 해야 합니다. 덕스러운 말을 해야 합니다.
힘이 되는 말, 용기를 주는 말, 인간미가 넘치는 말, 들어서 기분 좋은 말을 해야 합니다. 말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말이 생각만큼 잘 되지 않습니다. 말은 습관이 필요합니다. 서울 온누리교회 고등부에서 실시한 ‘부모자녀 의사소통에 관한 앙케이트’를 실시한 자료를 보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자녀된 여러분들이여, 부모님들이 자녀로부터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좋은 말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빠(엄마) 때문에 행복해요(60%)’ 신앙생활을 하는 아빠의 경우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어요(29. 2%)’, 그 다음으로는 ‘사랑해요(4. 6%)’, ‘열심히 할께요(4. 6%)’, ‘아빠가 자랑스러워요(4. 6%)’ 등입니다.
오늘 옆에 계시는 부모님들께 이렇게 한마디 합시다. “아빠(엄마) 때문에 행복해요(60%)” 엄마, 아빠, “나, 주님을 만났어요”
부모가 자녀들로부터 가장 듣기 싫은 말은 무엇인지 아세요. ‘짜증나(57. 4%)’가 가장 많았습니다. 다음이 ‘잔소리 그만해요(23. 5%)’, 가 다음은 ‘귀찮아요(14. 7%)’ ‘엄마 때문이야(2. 9%)’ ‘됐어요(1. 5%)’ 등입니다.
부모님들 잘 들으세요.
자녀들이 부모님으로부터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하면, ‘힘내(30%)’ 다음은 ‘이 돈으로 갖고 싶은거 해(23%)’ ‘사랑해(23%)’ ‘고맙다(12%)’ ‘쉬었다 하렴(10%)’ 으로 나타났습니다.
오늘 예배 참석한 학생들과 청년들은 어떤 말을 가장 듣고 싶습니까 오늘 한번 부모님에게 알려주세요. 오늘 자녀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해봅시다. ‘힘내라’ ‘나는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한단다’
자녀들이 부모님으로부터 가장 듣기 싫은 말은, ‘다른집 애들은(49%)’하고 비교하는 말입니다. 다음으로는 ‘너는 왜그러니(19%)’ ‘공부해라(19%)’ ‘일어났니(5%)’ 등도 있습니다. 오늘 예배 참석한 어린이들과 학생들과 청년 여러분들은 어떤 말이 가장 듣기 싫습니까
에베소서4:29말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일곱째,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해야 합니다.
11절에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악을 저지르지 않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선을 일을 행해야 합니다.
에베소서4:28말씀,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악에서 떠나 선한 일을 도모한 사람이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많은 변화를 가져온 사람, 가장 악날한 사람이 가장 사랑스런 인간이 된 사람을 꼽으라 한다면 바울을 추천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의 괴수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주님의 부름을 받아 주님을 영접한 다음에는 복음의 선한 사역만 감당하였습니다. 사울이 처음에 변화되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믿지 못했습니다. 사도행전2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자기의 과거를 소상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여호와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이런 사람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28장 마지막에 바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우리는 악한 자리에서 떠나야 할 뿐만 아니라 항상 선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여덟째, 화평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참된 평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참된 평화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이 인사말로 평화, 즉 ‘살롬’이라고 외치지만 그들 땅에는 아직도 긴장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평화를 깨트리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평화를 심어야 합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마음의 평화라고 했습니다. 명예와 권력으로 참 평화는 얻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가졌다 해도 마음에 평화가 없다면 그 모두는 짐이 될 뿐입니다. 양들이 거니는 목장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예금통장 하나 없어도 양들은 평화롭기만 합니다. 우리는 오늘 고유의 명절인 추석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명절이 마냥 즐겁고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평화가 깨어지고 평안이 산산조각이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정이든 교회든, 사회든 어떤 일이 있더라도 평화를 깨트리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평화를 심기 위해 노력하고 평화를 위해 일한 사람들에게 상도 주고 하면서도 평화를 깨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사랑도 내안에 사랑이 있어야 할 수 있듯이 평화도 내 안에 평화가 있어야 평화를 심을 수 있습니다. 왜 현대인들일수록 평화가 없을까. 현대 심리학자들은 사람의 마음속에 평화가 없는 이유를 다섯 가지로 분석하여 말합니다.
첫째는 원심, 복수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마음이 있는 한 절대로 평안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지나친 욕망(ambition)때문이며,
셋째는 질투심 때문이라 합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재질은 생각하지 않고 다만 다른 사람의 성공이나 형편만을 보고 질투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평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넷째는 마음에 분노가 있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교만 때문이라고 합니다. 참된 평화가 있기 위해서는 먼저 내안에 주님이 자리 잡고 계셔야 합니다. 주님 없이는 평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좋은 날 보기를 원하십니까 영광된 주님의 날에 소망하고 계십니까 세상에 살면서도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동정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형제를 사랑하십시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마시고 도리어 복을 비는 넓은 마음을 가지십시오. 좋은 말을 많이 하십시오. 악에서 떠나 선한 일에 부한 삶이 되십시오. 화평의 삶을 사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이 땅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며 영원히 좋은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명절날 꼴볼견 10가지를 들어보세요.
1. 가깝게 살면서도 늦게 오는 동서
2. 형편 어렵다며 빈손으로 와서 갈 때는 이것저것 싸가는 동서
3. 빨리 가서 쉬고 싶은데 눈치 없이 계속 고스톱만 치는 남편
4. 술 취했으면서도 안 취했다고 우기며 가는 손님 붙잡는 남편
5. 시댁은 바로 갔다 오면서 친정에 일찍 와서 참견하는 시누이
6. 잘 놀다가 꼭 부침개 부칠 때 와서 식용유 엎는 조카
7. 기름 냄새 맡으며 간신히 부쳐놓은 부침개를 날름 집어먹는 남편
8. 며느리는 친정 안 보내면서 시집간 딸은 빨리 오라고 하는 시어머니
9. 시댁에는 20만원, 친정에는 10만원으로 차별하는 남편
10. 늦게 와서는 아직도 일하고 있느냐며 큰소리치는 형님
오늘 말씀의 시작이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그러면서 하는 말씀이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앞의 내용의 삶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는데 그 부름의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살면 복을 이어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계속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8-9절 말씀을 하신 후에 이어서 10절에 보면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으로 시작합니다. 10-12절 말씀은 시편34편12-16절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12-14절에 보면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오늘 본문에서는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고 표현하고 있는데, 시편에서는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적인 복이라기보다는 영원한 나라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삶이란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며 그 날을 바라보며 영광된 날을 기다리는 삶을 사는 성도들의 삶을 총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도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도 세워지기를 소망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도 복이 되고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그 영광의 날을 맞이하기 위한 성도가 추구해야 할 삶의 가치를 본문에서 제기하고 있습니다.
첫째, 동정심을 가져야 합니다.
개역성경에는 ‘체휼’이라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가정에 참여하여 고난 받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동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마음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갖고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거나, 구좌번호로 얼마의 돈을 송금해준다는 것, 지난 번 이옥 집사의 가증을 듣고 북한 결핵 어린이를 돕기 위하여 매달 얼마씩이라고 후원하겠다고 약속한 것은 바로 동정심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이 마음을 갖고 백성들을 보았고 이 마음으로 군중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변도 고쳐주시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행하시고, 귀신도 쫓아내신 것입니다.
동정하는 마음이 없이 한다면 그것은 자기 의를 위해서 하는 행위가 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 동정하는 마음을 갖고 약한 자를 돕는 삶이어야 합니다. 추석을 맞아서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모습이 동정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 가난한 친구들을 왕따 시키거나 그 친구들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은 동정심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동정심을 가지고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들, 친구들, 이웃들, 가족들을 잘 돌보아야 복을 받고 좋은 날이 계속 이어집니다.
둘째,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사랑이란 것도 동정심이 발동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동정심이 발동하기 어렵습니다. 체면치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우선 육신의 형제, 즉 가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끼리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친구들끼리 사랑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4:9말씀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여호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말씀하시기를 형제사랑을 뛰어넘는 사랑을 부탁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이웃도 우리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면 형제는 두말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세상에는 열두 가지 강한 것이 있습니다. 그 첫째로 '돌'입니다. 그러나 돌은 '쇠'에 의해 잘려지고, 쇠는 '불'에 의해 녹아 버립니다. 그러나 불은 '물'을 이기지 못하고, '구름' 속으로 흡수되어 버립니다.
또한 구름은 '바람'에 의해 이리저리 이끌려 다닙니다. 그러나 바람은 '인간'을 불어 날리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공포'에 의해 비참하게 위축됩니다.
공포는 '술'에 의해 사라집니다. 술은 '잠'을 깨면 깹니다. 그러나 잠은 '죽음'만큼 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 조차도 '사랑' 앞에서는 무기력 합니다.
대전에 사는 이대용씨(52세)는 40년 만에 여동생을 만났습니다. 간경화 말기였습니다. 단 하나뿐인 여동생은 성이 최씨로 새아버지의 성으로 갈았고, 이대용씨는 할머니에게서 자랐습니다. 부모의 이혼으로 말미암아 결국 40년 동안 헤어져서 살아야했습니다.
1998년도에 간경화 말기 진단을 받고 난 다음 동생을 죽기 전에 만나고 싶어 수소문해서 2003년에 만났던 것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40년 동안 각기 다른 姓(성)을 사용하면서 헤어져 살았던 형제지만 여동생은 모든 법적인 절차를 밟아서 간이식수술을 해서 수술이 잘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참사랑이 아닐까요.
셋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실 ‘불쌍히 여긴다’는 단어는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이나 동정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공동체에서 어려운 일을 당한 자들을 도와 주되 그리스도께서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하라는 의미입니다.
로마서12:20 말씀,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심지어 원수까지라도 그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것을 이용하거나 그것을 보고도 못본척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강원도 횡성지역에 백혈병과 골수암을 앓고 있는 어린이 3명을 살리기 위해 횡성군과 군종합사회복지관이 지난2005년 7월29일 군 실내체육관에서'1일 사랑의 헌혈' 행사를 가졌습니다. 당일에 헌혈만 한 것이 아니라 헌혈증서를 모으기도 하고 모금도 실시했는데 1천여장의 헌혈증서가 모아졌고, 성금도 5천800여만원이나 되었습니다.
이런 것은 동정심에서 나온 아름다운 모습이라 생각됩니다. 이런 동정 중에는 55장의 헌혈증서를 보내 온 서울 은평구에 산다는 한 주부는 “3년전 남편을 백혈병으로 떠나보냈다”며 “우연히 배달된 메일 한통으로 잊혀졌던 아픔과 함께 병상에 누워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라 작은 정성이지만 귀중한 생명을 살리는데 보탬이 되길 빌며 보내 드린다”고 밝혔습니다. 바로 이런 마음을 의미합니다.
넷째, 겸손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나 으뜸이 되어야 합니다.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위에 있고 아래에 있지 말아야 합니다. 중간 근처도 가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고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두각을 나타내고 번성 번영 번창해야 합니다.
안 믿는 사람만도 못하다느니, 별 차이가 없다느니 해서는 안 됩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성이 무너지듯 형통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비결이 있습니다. 크고자 하면 할수록, 으뜸이 되고자 하면 할수록 첫째, 남을 섬겨야 합니다. 둘째, 이웃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이 둘을 합치면 '겸손'입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이를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고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겸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높여 주십니다. 으뜸이 되게 하십니다.
겸손은 우리들의 긴 인생 여정 속에서, 삶을 윤택하게 하며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러나 겸손은 아주 피기 어려운 꽃이요, 힘들게 맺는 열매와 같습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우리들의 마음속에 교만이란 잡초가 자라게 되어 마음의 정원을 황무지로 만들어 버립니다.
겸손하면 바보 같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이 겸손한 사람에게는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자세를 낮춘 그에게는 헐뜯는 사람도 없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먼저 고개 숙이고 있는 그를 밀치려 하는 사람도 없고 넘어뜨리려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섯째, 되갚지 말고 복을 빌어주는 아량이 있어야 합니다.
9절 말씀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이런 삶의 모델은 예수님입니다. 누가복음23:33에 보면 자기를 향하여 못박는 사람들을 향하여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이와같은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산 사람이 스데반 집사입니다.
스데반 집사도 자기를 항하여 돌을 던지는 자들에게 죽어가면서 까지도 그들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사도행전7:59-60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고 하면 우리 또한 타인들에게 복을 빌어 주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하셨다(히10:30). 그리고 오히려 그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했다(롬12:20).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때 에드윈 스탠톤이라고 하는 사람은 바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정적이었습니다. 그는 링컨 대통령을 향해서 ‘고릴라 같은 사람’, ‘원숭이 같은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할 때에링컨 대통령의 정적이 많았지만 에드윈 스탠톤같이 험한 사람도 없었다 합니다. 그는 링컨이 무슨 정책을 내놓기만 하면 사사건건 물고 늘어졌을 뿐만 아니라 '저질광대'라고 공격하곤 했습니다.
스탠톤은 어느 날 탐험가 차일루에게 말하기를 “고릴라를 잡으러 아프리카로 가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진짜 고릴라는 바로 여기 스프링필드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링컨의 털보로 생긴 얼굴을 보고 '미련한 고릴라'로 별명을 붙이기로 했다고 할 정도입니다.
링컨은 이런저런 비난과 중상을 다 당하고 있으면서도 단 한마디도 대꾸한 적이 없었습니다. 링컨이 대통령이 되고 남북전쟁이 발발했을 때 링컨은 오히려 이 골치 덩어리인 정적을 국방장관으로 기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링컨에게 의아해하며 취소할 것을 종용하였지만, 링컨은 “내 판단으로는 이 시대에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사람은 그 사람이라고 확신한다”며 그를 임명하고 이 위대한 노예해방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얼마후 워싱톤에 있는 워너극장에서 괴한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을 때 동석했던 스탠톤은 모두가 총성에 피하는 가운데도 맨먼저, 쓰러진 링컨에게로 뛰어 갔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면서 끝까지 링컨의 시신을 지켰습니다. 그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조용히 읊조리기를 "이 세계 역사 위에 가장 위대한 정치가가 여기에 누워 있다"고 했다고 합니다.
여섯째, 좋은 말을 해야 합니다.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 복을 받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악한 말을 그치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뒤집으면 선한 말, 좋은 말을 하고 진실한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말을 할 것인가에 대한 가장 영향력을 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생각도 중요하지만 감정입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갖고 좋은 말을 하기 원했더라도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감정이 나쁜 감정이면 나쁜 말로 바꿔서 나갑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항상 좋은 말을 해야 합니다. 덕스러운 말을 해야 합니다.
힘이 되는 말, 용기를 주는 말, 인간미가 넘치는 말, 들어서 기분 좋은 말을 해야 합니다. 말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말이 생각만큼 잘 되지 않습니다. 말은 습관이 필요합니다. 서울 온누리교회 고등부에서 실시한 ‘부모자녀 의사소통에 관한 앙케이트’를 실시한 자료를 보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자녀된 여러분들이여, 부모님들이 자녀로부터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좋은 말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빠(엄마) 때문에 행복해요(60%)’ 신앙생활을 하는 아빠의 경우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어요(29. 2%)’, 그 다음으로는 ‘사랑해요(4. 6%)’, ‘열심히 할께요(4. 6%)’, ‘아빠가 자랑스러워요(4. 6%)’ 등입니다.
오늘 옆에 계시는 부모님들께 이렇게 한마디 합시다. “아빠(엄마) 때문에 행복해요(60%)” 엄마, 아빠, “나, 주님을 만났어요”
부모가 자녀들로부터 가장 듣기 싫은 말은 무엇인지 아세요. ‘짜증나(57. 4%)’가 가장 많았습니다. 다음이 ‘잔소리 그만해요(23. 5%)’, 가 다음은 ‘귀찮아요(14. 7%)’ ‘엄마 때문이야(2. 9%)’ ‘됐어요(1. 5%)’ 등입니다.
부모님들 잘 들으세요.
자녀들이 부모님으로부터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하면, ‘힘내(30%)’ 다음은 ‘이 돈으로 갖고 싶은거 해(23%)’ ‘사랑해(23%)’ ‘고맙다(12%)’ ‘쉬었다 하렴(10%)’ 으로 나타났습니다.
오늘 예배 참석한 학생들과 청년들은 어떤 말을 가장 듣고 싶습니까 오늘 한번 부모님에게 알려주세요. 오늘 자녀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해봅시다. ‘힘내라’ ‘나는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한단다’
자녀들이 부모님으로부터 가장 듣기 싫은 말은, ‘다른집 애들은(49%)’하고 비교하는 말입니다. 다음으로는 ‘너는 왜그러니(19%)’ ‘공부해라(19%)’ ‘일어났니(5%)’ 등도 있습니다. 오늘 예배 참석한 어린이들과 학생들과 청년 여러분들은 어떤 말이 가장 듣기 싫습니까
에베소서4:29말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일곱째,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해야 합니다.
11절에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악을 저지르지 않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선을 일을 행해야 합니다.
에베소서4:28말씀,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악에서 떠나 선한 일을 도모한 사람이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많은 변화를 가져온 사람, 가장 악날한 사람이 가장 사랑스런 인간이 된 사람을 꼽으라 한다면 바울을 추천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의 괴수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주님의 부름을 받아 주님을 영접한 다음에는 복음의 선한 사역만 감당하였습니다. 사울이 처음에 변화되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믿지 못했습니다. 사도행전2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자기의 과거를 소상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여호와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이런 사람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28장 마지막에 바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우리는 악한 자리에서 떠나야 할 뿐만 아니라 항상 선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여덟째, 화평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참된 평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참된 평화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이 인사말로 평화, 즉 ‘살롬’이라고 외치지만 그들 땅에는 아직도 긴장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평화를 깨트리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평화를 심어야 합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마음의 평화라고 했습니다. 명예와 권력으로 참 평화는 얻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가졌다 해도 마음에 평화가 없다면 그 모두는 짐이 될 뿐입니다. 양들이 거니는 목장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예금통장 하나 없어도 양들은 평화롭기만 합니다. 우리는 오늘 고유의 명절인 추석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명절이 마냥 즐겁고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평화가 깨어지고 평안이 산산조각이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정이든 교회든, 사회든 어떤 일이 있더라도 평화를 깨트리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평화를 심기 위해 노력하고 평화를 위해 일한 사람들에게 상도 주고 하면서도 평화를 깨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사랑도 내안에 사랑이 있어야 할 수 있듯이 평화도 내 안에 평화가 있어야 평화를 심을 수 있습니다. 왜 현대인들일수록 평화가 없을까. 현대 심리학자들은 사람의 마음속에 평화가 없는 이유를 다섯 가지로 분석하여 말합니다.
첫째는 원심, 복수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마음이 있는 한 절대로 평안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지나친 욕망(ambition)때문이며,
셋째는 질투심 때문이라 합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재질은 생각하지 않고 다만 다른 사람의 성공이나 형편만을 보고 질투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평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넷째는 마음에 분노가 있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교만 때문이라고 합니다. 참된 평화가 있기 위해서는 먼저 내안에 주님이 자리 잡고 계셔야 합니다. 주님 없이는 평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좋은 날 보기를 원하십니까 영광된 주님의 날에 소망하고 계십니까 세상에 살면서도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동정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형제를 사랑하십시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마시고 도리어 복을 비는 넓은 마음을 가지십시오. 좋은 말을 많이 하십시오. 악에서 떠나 선한 일에 부한 삶이 되십시오. 화평의 삶을 사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이 땅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며 영원히 좋은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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