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땅의 모든 끝까지 복을 주시는 하나님
본문
오늘의 본문인 시편 67편이 어떤 시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먼저 ”제사장이 축도 하기 전에, 또는 축도 한 후에 부르는 찬양이었을 것이다”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1절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는 축도문입니다.
성경에 축도문으로 쓰게 되어 있는 말씀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입니다.
또 하나가 민수기 6장 24절에서 26절까지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작년 신년 축복대심방 때 담임목사는 이 말씀을 가지고 각 가정을 심방했습니다. 올해는 각 가정에 합당한 말씀을 골라서 드리고 있습니다.
1절은 바로 민수기의 이 축도문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이 시를 제사장의 축도 앞이나 뒤에 부르는 노래였을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추수감사의 노래였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6절 ”땅이 그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라는 구절에 근거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에 우리의 추수감사절과 같은 수장절(守藏節)이라는 절기가 있습니다. 시편 67편은 수장절에 부른 찬양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이 시는 성전에서 예배 드릴 때 여호와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기도시였을 것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해석됩니다.
우리는 이 시에서 세 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관심을 갖고 복을 빌어야 할 대상을 확대시켜야 합니다.
이 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복을 받기 원하는 대상이 점점 확대되어간다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복을 주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2절에서는 ”땅 위에”, 더 나가서 ”모든 나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3절, 앞에서는 ”민족들”이라고 했는데 뒤에서는 ”모든 민족들”로 확대됩니다.
7절, 앞부분에서는 ”우리”가 뒷부분에 와서는 ”땅의 모든 끝”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요즘 세상의 강한 흐름 가운데 하나는 관심의 대상, 복 받기 원하는 대상이 점점 좁아진다는 것입니다.
각 지역은 지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유럽연합(EU)을 만들고 아세안(ASIAN) 같은 지역연합기구들을 만듭니다.
국가들도 그렇습니다. 미국은 국제적인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세계경찰국가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하는 일을 보면 자기 나라의 이익을 철저하게 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지역으로, 지역에서 나라로, 나라에서 민족으로, 민족에서 부족으로, 부족에서 집안으로, 집안에서 나로, 잘 되기를 바라는 대상이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서는 험한 일, 경우에 어긋나는 일을 사양하지 않고 마구 합니다.
어느 분이 정신병원을 방문했습니다. 원장이 앞장서서 안내를 합니다. 어느 병동에 가니까 수십 명의 건장한 남자 중증(重症) 정신병환자들이 수용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경비하는 사람은 하나 뿐입니다. 방문자는 원장에게 물었습니다. ”원장님, 경비원이 하나뿐인데 위험하지 않습니까 만일 이 환자들이 힘을 합해 폭동이라도 일으킨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원장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위험하지 않습니다. 정신병 환자들은 힘을 합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자기만 생각합니다”
방문자는 생각합니다. ”세계가 점점 자기 나라, 자기 마을, 자기만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정신병원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일리가 있는 생각입니다.
관심과 복을 비는 대상을 자꾸 좁혀가기 때문에 갈등과 분쟁이 일어납니다. 국가 간의 전쟁, 부족 간의 싸움이 일어납니다. 지역 감정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이 아파트 단지와 저 아파트 단지 사이에 담이 점점 높아가고 고소로 발전합니다. 집안도 편안해지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가 몇 해 전에 지방자치제를 택했습니다. 이것이 풀뿌리 민주주의, 좋은 제도라고 하면서 이 제도를 택했는데 택해 놓고 보니까 지역 이기주의라는 부작용이 의외로 심각해집니다.
우리가 여기서 저 위에 음식점들이 많은 고기리(古基里)에 자주 갑니다. 중간에 성남시 대장동을 통과해서 다시 용인시 수지읍 땅으로 들어갑니다. 용인 시장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중에 토끼꼬리 만큼 들어와 있는 성남시 땅 용인시로 옮겨서 좀 조정하면 안 되느냐고 말했더니 지방 자치제 안에서는 꿈도 꾸기 어려운 문제라고 합니다.
이 시는 반대입니다. ”나”는 아예 등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최소단위로 먼저 등장합니다. 그것이 민족으로, 모든 민족으로, 땅의 모든 끝으로 확대되어 나갑니다.
빛이 점점 더 넓게 퍼져나가는 것 같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의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장로님은 산부인과 의사입니다. 그 친척들이 저희 교회에 나오고 있습니다.
철야기도회에서 기도 시간에 10분만 기도하면 더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나와 아내 건강하게 해 주십시오””우리 아들 딸, 잘 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 병원 잘 되게 하여 주십시오” ”의료 사고 없게 해 주십시오” ”우리 교회, 부흥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끝입니다.
무료해져서 기도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립니다. 그 때는 밤 열두 시에서 새벽 네 시까지는 통행금지 시간이어서 철야기도회를 새벽 네 시까지 했습니다. 하품이 나오고 졸립니다.
그런데 철야기도 시간마다 자기 옆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기도하는 장애인 청년이 있었습니다. 땀 냄새를 풍기며 시간을 아껴가면서 열심히 기도합니다. ’무엇을 가지고 열심히 저렇게 열심히 기도하나’, 궁금했습니다. 하루는 자기는 기도하지 않고 그 청년의 기도를 들어보았습니다. 대단히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세계평화를 위해, 나라를 위해, 민족을 위해, 자기를 위한 기도가 별로 없습니다. 이웃을 위한 기도로 네 시간을 채웁니다.
이 장로님은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 장애인의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관심과 사랑의 대상을 넓혀 가는 훈련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이 자신의 신앙성숙에 너무나 큰 도움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관심과 복 받기 원하는 대상을 넓힐 때 평화가 찾아옵니다.
”죄”를 영어로 ”SIN”이라고 합니다. ”I”가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살면 죄를 짓습니다.
”JOY”클럽이라는 신앙모임이 있습니다. 이 신앙모임은 이름 때문에 오해를 종종 받습니다.
”JOY라니 그거 즐기자는 모임입니까” 하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것이 아니고 ”J”는 ”Jesus” , 예수님이고, ”O”는 ”Others” 다른 사람들, 이웃입니다.
먼저 예수님을 생각하며 이웃을 생각하기 때문에 이 신앙모임은 건전하게 발전하며 많은 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설교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아, 오늘 설교에는 ’아멘’ 소리가 얼마나 나오겠구나” 하는 것이 예측이 됩니다.
개인축복을 비는 설교를 하면 ’아멘’ 소리가 많이 나옵니다. 선교를 강조하고 회개를 강조하고 고난을 강조하면 ”노멘”입니다.
아마 오늘 설교에는 ’아멘’ 소리가 적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신보다 이웃을 먼저 생각하라는 설교에 ”아멘” 할 수 있는 사람이 성숙한 성도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관심의 대상은 얼마나 넓습니까
관심과 복을 비는 대상이 축소지향적입니까 확대지향적입니까
확대지향적이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관심과 복을 비는 대상이 점점 축소지향적이 되어갑니다만 기독교인들은 세상 풍조를 거스르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합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 있고 이런 제목의 베스트 셀러도 있습니다만 관심과 복을 비는 대상은 크고 넓을수록 아름답습니다.
사랑은 기독교의 기본이 되는 계명입니다. 관심은 사랑의 씨앗입니다. 신앙적 의미에서는 무관심이 사랑의 반대말입니다.
관심의 씨를 넓게 뿌리는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둘째, 관심의 대상을 넓게 가지면서 동시에 구체적으로, 강하게 가져야합니다.
시편 67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같은 말이 자꾸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5절은 아예 3절의 반복입니다.
이 것은 ”나는 땅의 모든 끝까지 복 받기를 구체적으로, 강하게 빌고 있습니다” ”집중적입니다” ”지속적입니다” ”간절하게 빌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관심과 사랑을 늘 말합니다. 그러나 막연하고 추상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방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가 복 받기를 원한다면 구체적으로, 집중적으로 기도해야합니다.
”나는 전 인류를 사랑합니다” 한 마디 하고 마는 것은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의 모든 문제를 다 아시지요 다 해결해 주세요”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해결해 주지 마세요”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의 이 문제, 이 문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해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문제들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나의 정성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여호와 하나님, 우리 교회 교인들의 문제 모두 해결해 주세요. 우리 교회 교인들의 가정 모두 축복해 주세요” 하는 교회는 부흥하지 못합니다.
”이 성도의 이런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이 가정에 이런 복을 주세요” 할 때 그 교회가 부흥합니다.
북한 동포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탈북자 문제를 소흘히 하는 것은 진실한 사랑이 아닙니다. 모순이 되는 사랑입니다.
13억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면서 우리 나라에 와 있는 조선족 근로자들에 대한 전도에 관심이 없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2000년을 맞이해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움직임이 세계의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2000년을 대희년(大禧年)으로 선포하고 인류의 대화합을 추구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교황이 전 세계 분쟁 지역을 순방하고 있습니다. 위험한 곳, 환영받지 못하는 곳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갑니다. 3월에는 이스라엘을 방문해서 ”유대인 대학살이 자행될 때 가톨릭 교회가 막지 못한 잘못을 뉘우칩니다”라고 사과할 예정입니다.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이해의 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계를 이루기 위해 구체적으로,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저희 개신교가 가톨릭과도 많이 협력합니다만 그래도 선의의 경쟁관계로 본다면 어떤 면에서는 가톨릭이 한 걸음 앞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거듭되는 말씀이지만 이 시는 반복해서 모든 민족들, 땅의 모든 끝이 복을 받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반복해서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같은 대상을 상대로 해서 같은 설교를 반복하는 것은 피해야합니다만 기도의 경우는 다릅니다. 같은 여호와 하나님을 상대로 같은 기도를 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여호와 하나님, 이 기도, 중요한 것입니다, 꼭 들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 하는 것을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이웃이 복을 받기 위해서, 우리 민족이 복을 받기 위해서 매번 기도해야 합니다.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반복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아시아에 복음의 빛이 비춰져 이 대륙이 복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기도해야합니다.
20세기가 서구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아시아의 세기입니다. 한국교회는 아시아 복음화의 분명한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가 복을 받기 위해 늘, 자주, 기도해야합니다.
이웃에 대한 관심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선교입니다. 시편 67편은 구약에서 선교를 가장 강하게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구약에서 선교를 강조하는 유일한 말씀이라고 하는 성경학자도 있습니다.
시편 67편이 ”축도의 앞이나 뒤에 부르는 찬양이다”, ”추수감사의 노래이다”, ”복을 구하는 노래이다”, 여러 가지 주장이 있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만 한 편으로는 시편 67편은 온 인류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도록 간구 하는 탄원시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구약은 신약의 일들을 미리 보여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시편 67편은 복음이 온 누리에 전파되어 모든 백성이 그리스도를 찬양할 것을 미리 보여주는 시입니다.
우리는 선교에 힘쓰는 성도들과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개인전도, 지역사회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특수전도에도 힘쓰고, 타문화권선교에도 앞장서는 성도들과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셋째, 우리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관심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대제사장적인 성도, 대제사장적인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어린이들은 누구나 부모의 관심을 받기 원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남들이 관심을 가져 주어야만 행복을 느끼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 가운데는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이상한 복장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탈선행위를 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관심을 베풀면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성숙한 사람들입니다.
시편 67편은 관심 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관심과 사랑과 축복을 베풀기 원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시편 67편에 나타난 이스라엘은 대제사장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시편 67편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근거 삼아 온 세계에 구원을 베풀기 위해 중보기도 드리는 제사장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제사장의 바통이 여러 나라를 거쳐 이제는 한국으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시편 67편을 누가 썼는지는 모릅니다. 다윗의 신앙시라고 주장하는 분이 있습니다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여하튼 퍽 의외의 인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편협한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민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만”의 사상입니다. ”우리만 선택받았다, 다른 민족들은 모두 이방인이다” ”우리만 구원받는다, 다른 민족들은 하나도 구원받지 못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67편은 ”우리만”을 넘어섭니다. 우리를 넘어서 땅 위, 우리를 넘어서 모든 나라, 우리를 넘어서 민족들, 우리를 넘어서 모든 민족, 우리를 넘어서 땅 위의 나라들, 우리를 넘어서 땅의 모든 끝, 우리를 출발점으로 하고 우리를 넘어서 은혜와 빛과 복이 무한히 퍼져 가는 것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편 67편을 지은 신앙시인을 의외의 인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이후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게 되었습니다. 시편 67편은 이와 같은 복음전파의 확장을 점층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인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생각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이 되었더라면 이스라엘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축복 받는 나라, 영적 운동이 핵심이 되는 나라, 계속해서 대제사장의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한국은 샤머니즘의 나라입니다. 샤머니즘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이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굿을 하는 경우를 보셨습니까 샤머니즘에는 ”우리”의 개념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의 심성 깊은 곳에 있는 샤머니즘의 뿌리를 뽑고 ”나”가 아닌 ”우리”가 최소단위가 되고 그 우리가 땅의 모든 끝까지 확대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달은 해의 빛을 받아 어둔 밤을 환하게 비칩니다.
거울은 햇볕을 반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 한국은 달이 되고 거울이 되어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빛을 세계 여러 나라에 비춰야합니다.
시편 67편 신앙시인의 기도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은 구약의 끝 성경인 말라기서 1장 11절에서 이렇게 응답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라”
이 말씀은 말라기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실감을 가질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귀환시대의이스라엘은 이방 민족에게 영향을 미치기는커녕 이방 민족들부터 영향받아 동화되는 것을 막기에도 급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영광스러운 이름이 아니었고 조롱 받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십자가와 성령강림과 해외선교운동을 통해 그대로 이뤄지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관심의 폭을 넓혀 나가며 기도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성취하여 나랄 것입니다.
작년에는 목회를 하면서 각종 주일, 예를 들면 신학교 주일, 군 선교 주일, 이런 것들과 기념일을 비교적 충실하게 반영했습니다. 올해는 교회력상의 절기들을 반영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보에 싣는 가정예배도 ”교회력 중심의 가정예배”로 꾸미고 있습니다.
오늘은 주현절(主顯節)후 둘째 주일입니다. 주현절은 이름 그대로 주님이 나타나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인데 특별히 주님의 사랑이 이 시의 기원과 같이 이방 세계에 나타난 것을 기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이 이방 세계에 전해지는 일을 위해 힘써야합니다.
우리는 지금 성전신축에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성전 신축을 위해, 선교를 비롯해서 다른 많은 부분들이 조금 줄어들고 있는 것도 안타깝지만 사실입니다.
성전을 왜 짓습니까
편한 환경 속에서 예배 드리고 각종 활동을 하기 위한 것이 성전건축의 목적입니까
아닙니다.
시편 67편에 나타난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짓습니다.
저는 성전신축에 매달려서 성도들의 시야가 좁아지지 않을까 그것을 종종 염려하게 됩니다.
시편 67편은 저희 교회의 위치, 저희 교회가 해야 할 일을 너무나 선명하게 가르쳐줍니다.
저희 교회는 수지에 있습니다. 그러나 수지만의 목양교회가 아닙니다.
저희 교회는 수도권에 있습니다. 그러나 수도권만의 목양교회가 아닙니다.
저희 교회는 한국에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만을 위한 목양교회가 아닙니다.
저희 교회는 세계의 목양교회입니다.
모든 민족들을 위한 목양교회입니다.
땅 위의 모든 나라들이 복 받게 하기 위한 목양교회입니다.
온 백성이 기쁘고 즐겁게 노래하기 위한 목양교회입니다.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기 위한 목양교회입니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기 위한 목양교회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관심을 갖고 복 받기 원하는 대상을 확대시키기 바랍니다. 확대시키는데 막연하고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강한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관심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관심을 베푸는 대제사장적인 성도, 대제사장적인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어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이 노래가 이와 같은 사명을 가진 목양교회의 노래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제사장이 축도 하기 전에, 또는 축도 한 후에 부르는 찬양이었을 것이다”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1절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는 축도문입니다.
성경에 축도문으로 쓰게 되어 있는 말씀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입니다.
또 하나가 민수기 6장 24절에서 26절까지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작년 신년 축복대심방 때 담임목사는 이 말씀을 가지고 각 가정을 심방했습니다. 올해는 각 가정에 합당한 말씀을 골라서 드리고 있습니다.
1절은 바로 민수기의 이 축도문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이 시를 제사장의 축도 앞이나 뒤에 부르는 노래였을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추수감사의 노래였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6절 ”땅이 그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라는 구절에 근거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에 우리의 추수감사절과 같은 수장절(守藏節)이라는 절기가 있습니다. 시편 67편은 수장절에 부른 찬양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이 시는 성전에서 예배 드릴 때 여호와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기도시였을 것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해석됩니다.
우리는 이 시에서 세 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관심을 갖고 복을 빌어야 할 대상을 확대시켜야 합니다.
이 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복을 받기 원하는 대상이 점점 확대되어간다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복을 주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2절에서는 ”땅 위에”, 더 나가서 ”모든 나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3절, 앞에서는 ”민족들”이라고 했는데 뒤에서는 ”모든 민족들”로 확대됩니다.
7절, 앞부분에서는 ”우리”가 뒷부분에 와서는 ”땅의 모든 끝”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요즘 세상의 강한 흐름 가운데 하나는 관심의 대상, 복 받기 원하는 대상이 점점 좁아진다는 것입니다.
각 지역은 지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유럽연합(EU)을 만들고 아세안(ASIAN) 같은 지역연합기구들을 만듭니다.
국가들도 그렇습니다. 미국은 국제적인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세계경찰국가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하는 일을 보면 자기 나라의 이익을 철저하게 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지역으로, 지역에서 나라로, 나라에서 민족으로, 민족에서 부족으로, 부족에서 집안으로, 집안에서 나로, 잘 되기를 바라는 대상이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서는 험한 일, 경우에 어긋나는 일을 사양하지 않고 마구 합니다.
어느 분이 정신병원을 방문했습니다. 원장이 앞장서서 안내를 합니다. 어느 병동에 가니까 수십 명의 건장한 남자 중증(重症) 정신병환자들이 수용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경비하는 사람은 하나 뿐입니다. 방문자는 원장에게 물었습니다. ”원장님, 경비원이 하나뿐인데 위험하지 않습니까 만일 이 환자들이 힘을 합해 폭동이라도 일으킨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원장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위험하지 않습니다. 정신병 환자들은 힘을 합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자기만 생각합니다”
방문자는 생각합니다. ”세계가 점점 자기 나라, 자기 마을, 자기만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정신병원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일리가 있는 생각입니다.
관심과 복을 비는 대상을 자꾸 좁혀가기 때문에 갈등과 분쟁이 일어납니다. 국가 간의 전쟁, 부족 간의 싸움이 일어납니다. 지역 감정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이 아파트 단지와 저 아파트 단지 사이에 담이 점점 높아가고 고소로 발전합니다. 집안도 편안해지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가 몇 해 전에 지방자치제를 택했습니다. 이것이 풀뿌리 민주주의, 좋은 제도라고 하면서 이 제도를 택했는데 택해 놓고 보니까 지역 이기주의라는 부작용이 의외로 심각해집니다.
우리가 여기서 저 위에 음식점들이 많은 고기리(古基里)에 자주 갑니다. 중간에 성남시 대장동을 통과해서 다시 용인시 수지읍 땅으로 들어갑니다. 용인 시장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중에 토끼꼬리 만큼 들어와 있는 성남시 땅 용인시로 옮겨서 좀 조정하면 안 되느냐고 말했더니 지방 자치제 안에서는 꿈도 꾸기 어려운 문제라고 합니다.
이 시는 반대입니다. ”나”는 아예 등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최소단위로 먼저 등장합니다. 그것이 민족으로, 모든 민족으로, 땅의 모든 끝으로 확대되어 나갑니다.
빛이 점점 더 넓게 퍼져나가는 것 같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의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장로님은 산부인과 의사입니다. 그 친척들이 저희 교회에 나오고 있습니다.
철야기도회에서 기도 시간에 10분만 기도하면 더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나와 아내 건강하게 해 주십시오””우리 아들 딸, 잘 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 병원 잘 되게 하여 주십시오” ”의료 사고 없게 해 주십시오” ”우리 교회, 부흥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끝입니다.
무료해져서 기도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립니다. 그 때는 밤 열두 시에서 새벽 네 시까지는 통행금지 시간이어서 철야기도회를 새벽 네 시까지 했습니다. 하품이 나오고 졸립니다.
그런데 철야기도 시간마다 자기 옆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기도하는 장애인 청년이 있었습니다. 땀 냄새를 풍기며 시간을 아껴가면서 열심히 기도합니다. ’무엇을 가지고 열심히 저렇게 열심히 기도하나’, 궁금했습니다. 하루는 자기는 기도하지 않고 그 청년의 기도를 들어보았습니다. 대단히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세계평화를 위해, 나라를 위해, 민족을 위해, 자기를 위한 기도가 별로 없습니다. 이웃을 위한 기도로 네 시간을 채웁니다.
이 장로님은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 장애인의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관심과 사랑의 대상을 넓혀 가는 훈련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이 자신의 신앙성숙에 너무나 큰 도움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관심과 복 받기 원하는 대상을 넓힐 때 평화가 찾아옵니다.
”죄”를 영어로 ”SIN”이라고 합니다. ”I”가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살면 죄를 짓습니다.
”JOY”클럽이라는 신앙모임이 있습니다. 이 신앙모임은 이름 때문에 오해를 종종 받습니다.
”JOY라니 그거 즐기자는 모임입니까” 하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것이 아니고 ”J”는 ”Jesus” , 예수님이고, ”O”는 ”Others” 다른 사람들, 이웃입니다.
먼저 예수님을 생각하며 이웃을 생각하기 때문에 이 신앙모임은 건전하게 발전하며 많은 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설교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아, 오늘 설교에는 ’아멘’ 소리가 얼마나 나오겠구나” 하는 것이 예측이 됩니다.
개인축복을 비는 설교를 하면 ’아멘’ 소리가 많이 나옵니다. 선교를 강조하고 회개를 강조하고 고난을 강조하면 ”노멘”입니다.
아마 오늘 설교에는 ’아멘’ 소리가 적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신보다 이웃을 먼저 생각하라는 설교에 ”아멘” 할 수 있는 사람이 성숙한 성도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관심의 대상은 얼마나 넓습니까
관심과 복을 비는 대상이 축소지향적입니까 확대지향적입니까
확대지향적이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관심과 복을 비는 대상이 점점 축소지향적이 되어갑니다만 기독교인들은 세상 풍조를 거스르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합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 있고 이런 제목의 베스트 셀러도 있습니다만 관심과 복을 비는 대상은 크고 넓을수록 아름답습니다.
사랑은 기독교의 기본이 되는 계명입니다. 관심은 사랑의 씨앗입니다. 신앙적 의미에서는 무관심이 사랑의 반대말입니다.
관심의 씨를 넓게 뿌리는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둘째, 관심의 대상을 넓게 가지면서 동시에 구체적으로, 강하게 가져야합니다.
시편 67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같은 말이 자꾸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5절은 아예 3절의 반복입니다.
이 것은 ”나는 땅의 모든 끝까지 복 받기를 구체적으로, 강하게 빌고 있습니다” ”집중적입니다” ”지속적입니다” ”간절하게 빌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관심과 사랑을 늘 말합니다. 그러나 막연하고 추상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방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가 복 받기를 원한다면 구체적으로, 집중적으로 기도해야합니다.
”나는 전 인류를 사랑합니다” 한 마디 하고 마는 것은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의 모든 문제를 다 아시지요 다 해결해 주세요”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해결해 주지 마세요”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의 이 문제, 이 문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해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문제들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나의 정성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여호와 하나님, 우리 교회 교인들의 문제 모두 해결해 주세요. 우리 교회 교인들의 가정 모두 축복해 주세요” 하는 교회는 부흥하지 못합니다.
”이 성도의 이런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이 가정에 이런 복을 주세요” 할 때 그 교회가 부흥합니다.
북한 동포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탈북자 문제를 소흘히 하는 것은 진실한 사랑이 아닙니다. 모순이 되는 사랑입니다.
13억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면서 우리 나라에 와 있는 조선족 근로자들에 대한 전도에 관심이 없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2000년을 맞이해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움직임이 세계의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2000년을 대희년(大禧年)으로 선포하고 인류의 대화합을 추구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교황이 전 세계 분쟁 지역을 순방하고 있습니다. 위험한 곳, 환영받지 못하는 곳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갑니다. 3월에는 이스라엘을 방문해서 ”유대인 대학살이 자행될 때 가톨릭 교회가 막지 못한 잘못을 뉘우칩니다”라고 사과할 예정입니다.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이해의 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계를 이루기 위해 구체적으로,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저희 개신교가 가톨릭과도 많이 협력합니다만 그래도 선의의 경쟁관계로 본다면 어떤 면에서는 가톨릭이 한 걸음 앞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거듭되는 말씀이지만 이 시는 반복해서 모든 민족들, 땅의 모든 끝이 복을 받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반복해서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같은 대상을 상대로 해서 같은 설교를 반복하는 것은 피해야합니다만 기도의 경우는 다릅니다. 같은 여호와 하나님을 상대로 같은 기도를 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여호와 하나님, 이 기도, 중요한 것입니다, 꼭 들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 하는 것을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이웃이 복을 받기 위해서, 우리 민족이 복을 받기 위해서 매번 기도해야 합니다.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반복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아시아에 복음의 빛이 비춰져 이 대륙이 복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기도해야합니다.
20세기가 서구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아시아의 세기입니다. 한국교회는 아시아 복음화의 분명한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가 복을 받기 위해 늘, 자주, 기도해야합니다.
이웃에 대한 관심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선교입니다. 시편 67편은 구약에서 선교를 가장 강하게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구약에서 선교를 강조하는 유일한 말씀이라고 하는 성경학자도 있습니다.
시편 67편이 ”축도의 앞이나 뒤에 부르는 찬양이다”, ”추수감사의 노래이다”, ”복을 구하는 노래이다”, 여러 가지 주장이 있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만 한 편으로는 시편 67편은 온 인류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도록 간구 하는 탄원시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구약은 신약의 일들을 미리 보여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시편 67편은 복음이 온 누리에 전파되어 모든 백성이 그리스도를 찬양할 것을 미리 보여주는 시입니다.
우리는 선교에 힘쓰는 성도들과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개인전도, 지역사회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특수전도에도 힘쓰고, 타문화권선교에도 앞장서는 성도들과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셋째, 우리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관심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대제사장적인 성도, 대제사장적인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어린이들은 누구나 부모의 관심을 받기 원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남들이 관심을 가져 주어야만 행복을 느끼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 가운데는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이상한 복장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탈선행위를 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관심을 베풀면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성숙한 사람들입니다.
시편 67편은 관심 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관심과 사랑과 축복을 베풀기 원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시편 67편에 나타난 이스라엘은 대제사장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시편 67편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근거 삼아 온 세계에 구원을 베풀기 위해 중보기도 드리는 제사장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제사장의 바통이 여러 나라를 거쳐 이제는 한국으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시편 67편을 누가 썼는지는 모릅니다. 다윗의 신앙시라고 주장하는 분이 있습니다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여하튼 퍽 의외의 인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편협한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민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만”의 사상입니다. ”우리만 선택받았다, 다른 민족들은 모두 이방인이다” ”우리만 구원받는다, 다른 민족들은 하나도 구원받지 못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67편은 ”우리만”을 넘어섭니다. 우리를 넘어서 땅 위, 우리를 넘어서 모든 나라, 우리를 넘어서 민족들, 우리를 넘어서 모든 민족, 우리를 넘어서 땅 위의 나라들, 우리를 넘어서 땅의 모든 끝, 우리를 출발점으로 하고 우리를 넘어서 은혜와 빛과 복이 무한히 퍼져 가는 것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편 67편을 지은 신앙시인을 의외의 인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이후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게 되었습니다. 시편 67편은 이와 같은 복음전파의 확장을 점층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인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생각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이 되었더라면 이스라엘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축복 받는 나라, 영적 운동이 핵심이 되는 나라, 계속해서 대제사장의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한국은 샤머니즘의 나라입니다. 샤머니즘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이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굿을 하는 경우를 보셨습니까 샤머니즘에는 ”우리”의 개념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의 심성 깊은 곳에 있는 샤머니즘의 뿌리를 뽑고 ”나”가 아닌 ”우리”가 최소단위가 되고 그 우리가 땅의 모든 끝까지 확대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달은 해의 빛을 받아 어둔 밤을 환하게 비칩니다.
거울은 햇볕을 반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 한국은 달이 되고 거울이 되어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빛을 세계 여러 나라에 비춰야합니다.
시편 67편 신앙시인의 기도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은 구약의 끝 성경인 말라기서 1장 11절에서 이렇게 응답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라”
이 말씀은 말라기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실감을 가질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귀환시대의이스라엘은 이방 민족에게 영향을 미치기는커녕 이방 민족들부터 영향받아 동화되는 것을 막기에도 급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영광스러운 이름이 아니었고 조롱 받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십자가와 성령강림과 해외선교운동을 통해 그대로 이뤄지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관심의 폭을 넓혀 나가며 기도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성취하여 나랄 것입니다.
작년에는 목회를 하면서 각종 주일, 예를 들면 신학교 주일, 군 선교 주일, 이런 것들과 기념일을 비교적 충실하게 반영했습니다. 올해는 교회력상의 절기들을 반영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보에 싣는 가정예배도 ”교회력 중심의 가정예배”로 꾸미고 있습니다.
오늘은 주현절(主顯節)후 둘째 주일입니다. 주현절은 이름 그대로 주님이 나타나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인데 특별히 주님의 사랑이 이 시의 기원과 같이 이방 세계에 나타난 것을 기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이 이방 세계에 전해지는 일을 위해 힘써야합니다.
우리는 지금 성전신축에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성전 신축을 위해, 선교를 비롯해서 다른 많은 부분들이 조금 줄어들고 있는 것도 안타깝지만 사실입니다.
성전을 왜 짓습니까
편한 환경 속에서 예배 드리고 각종 활동을 하기 위한 것이 성전건축의 목적입니까
아닙니다.
시편 67편에 나타난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짓습니다.
저는 성전신축에 매달려서 성도들의 시야가 좁아지지 않을까 그것을 종종 염려하게 됩니다.
시편 67편은 저희 교회의 위치, 저희 교회가 해야 할 일을 너무나 선명하게 가르쳐줍니다.
저희 교회는 수지에 있습니다. 그러나 수지만의 목양교회가 아닙니다.
저희 교회는 수도권에 있습니다. 그러나 수도권만의 목양교회가 아닙니다.
저희 교회는 한국에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만을 위한 목양교회가 아닙니다.
저희 교회는 세계의 목양교회입니다.
모든 민족들을 위한 목양교회입니다.
땅 위의 모든 나라들이 복 받게 하기 위한 목양교회입니다.
온 백성이 기쁘고 즐겁게 노래하기 위한 목양교회입니다.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기 위한 목양교회입니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기 위한 목양교회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관심을 갖고 복 받기 원하는 대상을 확대시키기 바랍니다. 확대시키는데 막연하고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강한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관심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관심을 베푸는 대제사장적인 성도, 대제사장적인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어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이 노래가 이와 같은 사명을 가진 목양교회의 노래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