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하나님이 감동시키는 대로 믿음을 끝까지 지키자
본문
느헤미야 7장의 말씀은 6장까지 성벽 공사를 마무리한 후에 자기 동생인 하나니와 충성된 사람이라 일컬은 하나냐를 세워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고 이 성벽과 성을 지키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감동하시는 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인 예수살렘성을 지키고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해 나가기 위한 준비작업을 하게 되는데 5절부터 끝절 말씀까지 나오는 스룹바벨과 함께 돌아온 인구를 파악하는 일을 시작함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벽이 재건되고 회복된 것은 느헤미야가 한 일이 아니라 이사야서 44:26절의 ‘내 종의 말을 응하게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거기 사람이 살리라 하며 유다 성읍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될 것이라 내가 그 황폐한 곳들을 복구시키리라 하며’의 말씀에서처럼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그를 통하여 성취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가 하루하루를 계획하고 우리 힘으로 믿음생활을 영위해 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여호와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우리의 살 길을 섭리 가운데 예정하시고 준비하신 길을 갈 따름입니다.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에 부딪힌다 할지라도 그것조차도 나를 연단키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임을 인정한다면 그 어려움들을 극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저는 이 말씀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섭리가운데 인도하심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을 ‘여호와 하나님이 감동시키는 대로 믿음을 끝까지 지키자’라고 붙여 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으로 믿음의성벽을 지키기 위해서는 나의 인생이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으로 믿음의 성벽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 인생의 주관자가 내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이끌어 가신다는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회복시켰습니다. 이것 또한 느헤미야 속에 역사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되고 여호와 하나님이 이끌어 주실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겠다는 믿음의 고백이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인생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이 간섭하시지 않는 일은 없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고 여호와 하나님이 이끌어가시지 않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것이 선한 일이든 기쁜일이든 힘든 고난이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개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알고 계시고 구체적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믿음의 고백이 있을 때에 우리는 이 믿음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 인생을 스스로가 경영해 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 인생을 자신의 머리로 경영해 갑니다. 그러나 믿음의 성도들의 인생경영은 자신의 머리와 학식으로가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이끄신다는 믿음의 경영원리를 택하게 됩니다. 이번 한주간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이끌어 가신다는 믿음의 고백이 있을 때에 믿음의 성벽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이 한 주간도 그 고백으로 믿음의 벽을 지켜나가시기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5절 말씀에 ‘내 여호와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 귀인들과 민장과 백성을 모아 그 보계대로 계수하게 하신 고로 내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보계를 얻었는데 거기 기록한 것을 보면’하고 6절부터 42,360명에 달하는 명단을 보게 됩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한 후에 진정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았다고 5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내 마음을 감동하사’… 제가 1년 전 토요 새벽예배때에 제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목회의 3가지 모토를 말씀드린 기억이 납니다. 첫째는 감사가 없으면 죽어라. 감사를 모르면 목회를 그만두라. 둘째는 은혜가 없으면 죽어라. 은혜를 모르면 목회를 그만두라. 셋째는 감동이 없으면 죽어라. 목회를 그만두라. 제가 체험으로 이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게을러질 수가 없습니다. 게으르면 여호와 하나님이 치시니까요. 느헤미야의 삶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감동하신 삶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감동하사라는 고백이 날마다 넘쳐야 될 줄로 믿습니다.
감동받은 사람은 무섭습니다. 감동없이 목소리만 큰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감동받은 사람이 입술을 벌려 이야기할 때는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을 열어 그를 통해 내가 기도하던 것까지 응답되게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영적인 분이시므로 우리는 영적인 사람입니다. 영적인 사람에게는 영적인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10년, 20년, 30년을 믿으면서도 감동이 없이 믿음생활을 한다는 것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그의 얼굴과 삶에 감동이 있고 은혜가 있어야 하는데 늘 얼음장같아서 가까이 갔다가는 내가 얼어버릴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 안 되겠지요. 느헤미야는 총독이라는 높은 자리에 있었지만 그 모든 명예와 지위에 의지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감동하사’라는 이 믿음의 고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시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감동하사,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감동하사’라는 믿음의 고백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사람은 여유가 있어서 목소리부터 다릅니다. 쩌렁쩌렁하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아 실수도 적습니다. 제가 한 번은 교회 다니는 성도들의 삶이 열매맺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실망하셔서 교회에 출석하지 않으시는 62세의 노인을 전도하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목사라 하면 경계하실 것 같아 캐주얼한 옷을 입고 그 분을 찾아 뵜을 때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예수를 믿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닌다면 내가 뭔가 감동을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라며 제게는 제대로 말해 볼 기회도 주시지 않고 일사천리로 하시는 말씀들 중에 몇 번이나 ‘감동이 있어야되지 않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감사합니다”했더니 내가 당신을 비판하는데 어찌 감사하다 하느냐시길래 “그것 또한 나에게 감동을 주시네요”했더니 그때부터 말씀이 부드러워지면서 제게 이야기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 예수 믿는 것은 선생님처럼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마음으로 교회에 나와야 감동을 받는 것이지 사람들을 보고 감동을 기대한다면 저보고도 역시 감동을 못 얻습니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결국 그분은 아직 교회를 안 다닌다고 하셨는데 그런 분께 저는 감동을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든지 기도하든지 예배를 드리든지, 한 사람 앞에 나와 믿음의 말씀을 선포하든지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이 충만해야될 줄로 믿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이 없이는 이 짧은 인생이 건조하게 됩니다. 예배를 드려도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이 없으면 건조해지고 기도를 하여도 그 감동이 없이는 허공을 떠도는 목소리만 나올 뿐입니다.
느헤미야가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하여 인구조사를 했던 것처럼,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권력으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받은 감동으로 스룹바벨과 함께 1차 귀환했던 사람들을 찾아 명단을 작성했던 것처럼, 여러분의 일 하나하나를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으로서 행하시는 복된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삶은 내가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으로 이끌려 갑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두가지의 첫째는 모든 인생은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고, 둘째는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그렇게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감동하시는 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인 예수살렘성을 지키고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해 나가기 위한 준비작업을 하게 되는데 5절부터 끝절 말씀까지 나오는 스룹바벨과 함께 돌아온 인구를 파악하는 일을 시작함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벽이 재건되고 회복된 것은 느헤미야가 한 일이 아니라 이사야서 44:26절의 ‘내 종의 말을 응하게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거기 사람이 살리라 하며 유다 성읍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될 것이라 내가 그 황폐한 곳들을 복구시키리라 하며’의 말씀에서처럼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그를 통하여 성취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가 하루하루를 계획하고 우리 힘으로 믿음생활을 영위해 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여호와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우리의 살 길을 섭리 가운데 예정하시고 준비하신 길을 갈 따름입니다.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에 부딪힌다 할지라도 그것조차도 나를 연단키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임을 인정한다면 그 어려움들을 극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저는 이 말씀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섭리가운데 인도하심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을 ‘여호와 하나님이 감동시키는 대로 믿음을 끝까지 지키자’라고 붙여 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으로 믿음의성벽을 지키기 위해서는 나의 인생이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으로 믿음의 성벽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 인생의 주관자가 내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이끌어 가신다는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회복시켰습니다. 이것 또한 느헤미야 속에 역사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되고 여호와 하나님이 이끌어 주실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겠다는 믿음의 고백이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인생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이 간섭하시지 않는 일은 없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고 여호와 하나님이 이끌어가시지 않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것이 선한 일이든 기쁜일이든 힘든 고난이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개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알고 계시고 구체적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믿음의 고백이 있을 때에 우리는 이 믿음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 인생을 스스로가 경영해 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 인생을 자신의 머리로 경영해 갑니다. 그러나 믿음의 성도들의 인생경영은 자신의 머리와 학식으로가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이끄신다는 믿음의 경영원리를 택하게 됩니다. 이번 한주간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이끌어 가신다는 믿음의 고백이 있을 때에 믿음의 성벽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이 한 주간도 그 고백으로 믿음의 벽을 지켜나가시기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5절 말씀에 ‘내 여호와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 귀인들과 민장과 백성을 모아 그 보계대로 계수하게 하신 고로 내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보계를 얻었는데 거기 기록한 것을 보면’하고 6절부터 42,360명에 달하는 명단을 보게 됩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한 후에 진정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았다고 5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내 마음을 감동하사’… 제가 1년 전 토요 새벽예배때에 제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목회의 3가지 모토를 말씀드린 기억이 납니다. 첫째는 감사가 없으면 죽어라. 감사를 모르면 목회를 그만두라. 둘째는 은혜가 없으면 죽어라. 은혜를 모르면 목회를 그만두라. 셋째는 감동이 없으면 죽어라. 목회를 그만두라. 제가 체험으로 이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게을러질 수가 없습니다. 게으르면 여호와 하나님이 치시니까요. 느헤미야의 삶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감동하신 삶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감동하사라는 고백이 날마다 넘쳐야 될 줄로 믿습니다.
감동받은 사람은 무섭습니다. 감동없이 목소리만 큰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감동받은 사람이 입술을 벌려 이야기할 때는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을 열어 그를 통해 내가 기도하던 것까지 응답되게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영적인 분이시므로 우리는 영적인 사람입니다. 영적인 사람에게는 영적인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10년, 20년, 30년을 믿으면서도 감동이 없이 믿음생활을 한다는 것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그의 얼굴과 삶에 감동이 있고 은혜가 있어야 하는데 늘 얼음장같아서 가까이 갔다가는 내가 얼어버릴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 안 되겠지요. 느헤미야는 총독이라는 높은 자리에 있었지만 그 모든 명예와 지위에 의지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감동하사’라는 이 믿음의 고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시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감동하사,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감동하사’라는 믿음의 고백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사람은 여유가 있어서 목소리부터 다릅니다. 쩌렁쩌렁하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아 실수도 적습니다. 제가 한 번은 교회 다니는 성도들의 삶이 열매맺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실망하셔서 교회에 출석하지 않으시는 62세의 노인을 전도하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목사라 하면 경계하실 것 같아 캐주얼한 옷을 입고 그 분을 찾아 뵜을 때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예수를 믿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닌다면 내가 뭔가 감동을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라며 제게는 제대로 말해 볼 기회도 주시지 않고 일사천리로 하시는 말씀들 중에 몇 번이나 ‘감동이 있어야되지 않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감사합니다”했더니 내가 당신을 비판하는데 어찌 감사하다 하느냐시길래 “그것 또한 나에게 감동을 주시네요”했더니 그때부터 말씀이 부드러워지면서 제게 이야기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 예수 믿는 것은 선생님처럼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마음으로 교회에 나와야 감동을 받는 것이지 사람들을 보고 감동을 기대한다면 저보고도 역시 감동을 못 얻습니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결국 그분은 아직 교회를 안 다닌다고 하셨는데 그런 분께 저는 감동을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든지 기도하든지 예배를 드리든지, 한 사람 앞에 나와 믿음의 말씀을 선포하든지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이 충만해야될 줄로 믿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이 없이는 이 짧은 인생이 건조하게 됩니다. 예배를 드려도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이 없으면 건조해지고 기도를 하여도 그 감동이 없이는 허공을 떠도는 목소리만 나올 뿐입니다.
느헤미야가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하여 인구조사를 했던 것처럼,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권력으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받은 감동으로 스룹바벨과 함께 1차 귀환했던 사람들을 찾아 명단을 작성했던 것처럼, 여러분의 일 하나하나를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으로서 행하시는 복된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삶은 내가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으로 이끌려 갑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두가지의 첫째는 모든 인생은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고, 둘째는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그렇게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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