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끝이 좋을 자신 있습니까?
본문
얼마 전 현각 스님이 한신대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기회에 선물로 받은 그의 책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관심은 어떻게 하버드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다가 스님이 되었을까 부분이었습니다.
그는 카토릭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다 숭산스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를 알게 된 것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안타까운 것은 고민을 많이 한 사람인데 생명이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안에 부처님, 예수님이 다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자기 눈으로 보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는 초월적인 주님! 자신이 피조물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끝이 다른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저는 금주동안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 믿는 것은 쉬우나 끝으로 갈수록 더욱 어렵구나!” ”끝을 잘해야 하구나! ””나이 먹을수록 정말 조심해야겠고 더욱 자기 개발과 자기개혁이 필요하구나!” 그런 마음이 자꾸 들게됩니다.
사실 영적인 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끝을 보는 것이지요.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는다. 그리고 하늘 나라에 가서 심판을 받는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아야 한다.
그런 논리가 기독교 논리 아닙니까
예전에 왜 성경에는 족보이야기가 많을까 궁금해하였습니다. 제 주변에서 누가 누구를 낳고 이런 말로 은혜 받았다는 소리를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성경의 의미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사람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태어나면 죽는다. 너무나 당연한 진리! 이 진리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태어나고 죽는 이야기가 써 있습니다.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끝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끝이 나쁜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신약에서는 가룻 유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끝이 나빠 자살로 삶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제일 끝이 나쁜 사람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울 왕입니다.
최초의 왕! 그러나 그의 죽음은 처참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끝이 좋을까요
사울의 죽음을 통해서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을 의식하라
사울이 인생을 왜 이렇게 실패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왜 사울이 여호와 하나님 눈밖에 나기 시작합니까 아마 잘 아실 것입니다. 삼상 13장에 보면 사울이 전쟁을 하게 됩니다. 제사장 사무엘을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직접 제사를 진행하게 됩니다. 이일로 사울의 끝이 나빠지게 됩니다. 왜 자기가 직접 제사를 드린 지 아십니까
성경을 보면 ”백성이 흩어질 까봐 빨리 자기가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보았더니 막 집에 갈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기다리다 제사를 지낸 겁니다.
기억나십니까 사울 왕이 왜 사위인 다윗을 미워했습니까
간단합니다. 처음에는 관계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이상한 노래가 들립니다. 요사이로 말하자면 고무줄 놀이 일겁니다.
”무찌르자 공산 몇 천만이냐” 뭐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당시에 시대상을 반영하는 아이들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그 노래의 중심은 무엇입니까”사울은 천천 다윗은 만만” 이것 때문에 다윗을 죽이려고 일생을 보내게 됩니다. 왜요 사람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겠지만 저는 이곳 교회에서 ”목사님 설교에 은혜 받았어요!” 그런 소리를 많이 듣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정말 설교를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여러분께서 접대용으로 잘 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안하는 겁니다.
금주 수요일에 다른 교인이 왔다가 은혜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기분이요 좋겠습니까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정말요 여러분! 교인들이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고 기뻐하면 어떻게 목회를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어요. 그래서 확실하게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 마음입니다. 정말 어렵게 교회 나오시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저는 어떻게 맛있는 밥을 지어줄까 하는 마음만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홈페이지에 우리교회 교인이 다른 교회 강의를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걱정이 되었나보더군요. 목사님이 다른 분을 소개하는 것을 싫어하면 어떻게 하지 제가 즉각적으로 리풀을 달았습니다. 좋다구요. 제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달란트가 따로 있습니다. 이단이 아니면 마음껏 은혜 받아야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주의 심장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이 사람 저 사람 보다가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사울왕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세상을 흔들었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을 보십시오. 4절을 보세요. ’그가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지가 무슨 이순신 장군입니까 그는 이제 죽게되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사람들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관심이 없어요.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렇게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기쁨인지 관심이 없습니다. 매일 자기문제에 빠져 살아가다가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저요. 대학 다닐 때 졸업하면 정말 뭐 되는 것 같았어요. 신학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담임목사가 되고 목회 성공을 하면 뭐 될 줄 알았습니다. 아니예요. 우리는 끝이 있습니다.
분명히 그 다음을 이야기하십니다. 히 9:27절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입니다.
저는 정말 사람을 의식하기 싫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식해도 바쁘잖아요.
어떻게 해야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기쁨이 될까 이 부분만 신경써도 바쁘다 말입니다.
어떤 분은 ” 죽기 전에 회개하면 됩니다. 그리고 천국에 가면 되지요. ”
이렇게 말하는 분이 계시지요. 그것은 교만입니다. 내가 어떻게 나의 죽음을 알 수 있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보혈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이게 쉽게 될 수 있습니까 놀라운 것은 부부 상담을 해보면 알 수 있어요,
아내는 남편에게 ”사랑해 용서해 줘” 이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남편이 절대 안 합니다. 아니오. 못합니다. 해봤어야죠, 정말 어렵습니다. 하도 못해서 제가 중간에 서서 사랑한다고 이야기를 보세요, 다그칩니다. 그러면 ”응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목사님이 사랑하라고 해서…”우물쭈물합니다.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끝에 가서 멋대로 살다간 사람은 멋대로 죽게됩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평상시에 기도하지 않은 사람이 죽음을 앞에 두고 기도할까요
아니오! 할 수 없습니다. 늘 기도하던 분이 죽음을 앞에 두고 기도한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자기가 했던 방식으로 합니다. ”갑자기 여호와 하나님 사랑합니다. ” 되지 않아요!
찬송하면서 죽고 싶습니까 그러면 지금 찬송하십시오, 말씀을 듣고 죽겠다면 지금부터 말씀을 듣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을 의식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영적인 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시길 바랍니다.
둘째로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여라
사울 왕의 죽음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합니까
사울 왕의 주위에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가룻 유다도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배반했습니다. 은혜 받을 자리에서 은혜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매번 기적을 일으키시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거기에 있었지만 병 고침을 받은 자는 너다. 그 이유는 네 믿음 때문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을까요
이 부분을 히브리서 기자는 2장 4절에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 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에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듣는 자가 믿음으로 화합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여기에 사울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망하게 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같은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듣게 되는 가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을 나타나려면 두 가지 조건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는 설교자가 책임입니다. 신실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말씀을 듣는 자입니다. 듣는 자의 책임도 큽니다.
인터넷 기독교 신문에 아주 개혁지향적인 신문인 뉴스엔조이라는 신문이 있습니다.
즐겨보고 있습니다. 참 좋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목사님의 강단의 소리를 자꾸 사람의 소리로 들으라고 논조를 피는 것입니다. 맞아요. 사람의 소리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소리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신약에서 가장 성공한 교회가 어디인 가요 예!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부흥이 되었던 이유는 말씀을 사람의 소리로 받아들이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교회도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겠죠. 죽을병에서 살아나는 사람들이 우리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물론 제가 잘 준비하고 영적인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또 하나는 여러분이 믿음으로 비빔밥을 잘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마귀라면 어디를 공격하면 되겠습니까 강단입니다. 강단을 죽이는 겁니다. 사람의 소리다.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가 아니다. 그렇게 우리를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갑니다. 사람들끼리 비판하게 하고 싸우게 합니다.
사울이 되게 하는 겁니다. 우리는 비빔밥을 잘 만들어야 합니다. 믿음의 비빔밥을 잘 만드시길 바랍니다.
얼마 전에 우리교회 집사님 오라버니 장례식에 갔다왔습니다. 오빠 장례식까지 가게된 이유는 제가 세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그 분을 뵈었을 때 죽음을 앞에 두고 그 분은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말씀을 빨아들이는 겁니다. 아멘 하는 거예요. 세례 잔이 없어서 뚜껑에 물을 가지고 세례를 주었는데 고인의 눈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눈물로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곧 여호와 하나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는 믿음을 섞은 것입니다. 그분은 죽었으나 산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에 대한 애착을 갖아야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셋째. 고난이 오면 기도의 기회로 삼으라
오늘 1절을 보세요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런 구절이 나오지요.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어떤 모습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반면 다윗도 비슷한 상황이 본문 30장 1절에서 나타납니다.
’아말렉이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30장과 31장을 비교됩니다.
30장은 다윗, 31장은 사울 이야기입니다.
사실 다윗이 훨씬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는 시글락에서 가족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오합지졸 600명 뿐 이었습니다.
그래서 힘들어진 부하들이 다윗을 돌로 쳐죽이자고 하극상을 벌립니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어떻게 이겨나갑니까
사무엘상 30장 6절을 일어보십시오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 정말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했습니까 군급하였다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힘을 얻게 됩니까 여호와 하나님에게 용기를 얻게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사울도 어려움에 빠졌고 다윗도 어려움이 빠졌습니다. 동일한 어려움입니다. 어찌 보면 다윗이 더 큰 어려움이에요. 그런데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에게 의지하여 역경을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역경 속에 파묻혀 죽었다는 것이에요.
아마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너무나도 어려운 고난이 있을 것입니다. 고난을 이기기 쉽지 않습니다. 만만하지 않습니다. 세월이 약이 아닙니다. 잘못하면 사울처럼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살길은 하나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내려놓은 것입니다. 다윗이 군급하였을 때 ,힘들었을 때 눌렸을 때 한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한 것입니다. 머리쓰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다윗의 시편 내용이 무엇입니까 ”힘들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내가 고난의 수렁속에 빠졌습니다. ” 그리고 징징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들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116편 3절을 보면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다윗의 강점은 무엇입니까 고난이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이 자기를 눌렀어요, ”왜 나는 요 모양 요 꼴일까 ”하면서 힘들어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한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였습니다.
정말 여러분 위기입니까 한국교회가 위기입니까 교회가 썩어 있습니까 하는 일이 안됩니까 자녀들 때문에 힘듭니까 물질 때문에 힘들어요 그렇죠 그러나 마귀가 물으면 싸워야지요.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고난을 당하고 있으면 역전시키십시오, 어떻게요 기도밖에 없습니다.
왜 여러분들을 회사에 가정에 캠퍼스에 심어 놓은 줄 아십니까 기도하기 위함입니다. 기도하는 한사람이 기도 없는 한 민족보다 강하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저는 말씀에 붙잡히고 기도에 붙잡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희교회에 청년이 교회 홈페이지에 올린 것인데 얼마나 제가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미국에서 40만 명이 모여 예수님께 헌신하는 장면입니다.
이 부분에 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관심은 어떻게 하버드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다가 스님이 되었을까 부분이었습니다.
그는 카토릭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다 숭산스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를 알게 된 것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안타까운 것은 고민을 많이 한 사람인데 생명이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안에 부처님, 예수님이 다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자기 눈으로 보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는 초월적인 주님! 자신이 피조물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끝이 다른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저는 금주동안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 믿는 것은 쉬우나 끝으로 갈수록 더욱 어렵구나!” ”끝을 잘해야 하구나! ””나이 먹을수록 정말 조심해야겠고 더욱 자기 개발과 자기개혁이 필요하구나!” 그런 마음이 자꾸 들게됩니다.
사실 영적인 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끝을 보는 것이지요.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는다. 그리고 하늘 나라에 가서 심판을 받는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아야 한다.
그런 논리가 기독교 논리 아닙니까
예전에 왜 성경에는 족보이야기가 많을까 궁금해하였습니다. 제 주변에서 누가 누구를 낳고 이런 말로 은혜 받았다는 소리를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성경의 의미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사람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태어나면 죽는다. 너무나 당연한 진리! 이 진리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태어나고 죽는 이야기가 써 있습니다.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끝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끝이 나쁜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신약에서는 가룻 유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끝이 나빠 자살로 삶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제일 끝이 나쁜 사람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울 왕입니다.
최초의 왕! 그러나 그의 죽음은 처참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끝이 좋을까요
사울의 죽음을 통해서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을 의식하라
사울이 인생을 왜 이렇게 실패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왜 사울이 여호와 하나님 눈밖에 나기 시작합니까 아마 잘 아실 것입니다. 삼상 13장에 보면 사울이 전쟁을 하게 됩니다. 제사장 사무엘을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직접 제사를 진행하게 됩니다. 이일로 사울의 끝이 나빠지게 됩니다. 왜 자기가 직접 제사를 드린 지 아십니까
성경을 보면 ”백성이 흩어질 까봐 빨리 자기가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보았더니 막 집에 갈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기다리다 제사를 지낸 겁니다.
기억나십니까 사울 왕이 왜 사위인 다윗을 미워했습니까
간단합니다. 처음에는 관계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이상한 노래가 들립니다. 요사이로 말하자면 고무줄 놀이 일겁니다.
”무찌르자 공산 몇 천만이냐” 뭐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당시에 시대상을 반영하는 아이들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그 노래의 중심은 무엇입니까”사울은 천천 다윗은 만만” 이것 때문에 다윗을 죽이려고 일생을 보내게 됩니다. 왜요 사람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겠지만 저는 이곳 교회에서 ”목사님 설교에 은혜 받았어요!” 그런 소리를 많이 듣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정말 설교를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여러분께서 접대용으로 잘 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안하는 겁니다.
금주 수요일에 다른 교인이 왔다가 은혜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기분이요 좋겠습니까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정말요 여러분! 교인들이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고 기뻐하면 어떻게 목회를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어요. 그래서 확실하게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 마음입니다. 정말 어렵게 교회 나오시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저는 어떻게 맛있는 밥을 지어줄까 하는 마음만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홈페이지에 우리교회 교인이 다른 교회 강의를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걱정이 되었나보더군요. 목사님이 다른 분을 소개하는 것을 싫어하면 어떻게 하지 제가 즉각적으로 리풀을 달았습니다. 좋다구요. 제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달란트가 따로 있습니다. 이단이 아니면 마음껏 은혜 받아야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주의 심장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이 사람 저 사람 보다가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사울왕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세상을 흔들었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을 보십시오. 4절을 보세요. ’그가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지가 무슨 이순신 장군입니까 그는 이제 죽게되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사람들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관심이 없어요.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렇게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기쁨인지 관심이 없습니다. 매일 자기문제에 빠져 살아가다가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저요. 대학 다닐 때 졸업하면 정말 뭐 되는 것 같았어요. 신학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담임목사가 되고 목회 성공을 하면 뭐 될 줄 알았습니다. 아니예요. 우리는 끝이 있습니다.
분명히 그 다음을 이야기하십니다. 히 9:27절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입니다.
저는 정말 사람을 의식하기 싫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식해도 바쁘잖아요.
어떻게 해야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기쁨이 될까 이 부분만 신경써도 바쁘다 말입니다.
어떤 분은 ” 죽기 전에 회개하면 됩니다. 그리고 천국에 가면 되지요. ”
이렇게 말하는 분이 계시지요. 그것은 교만입니다. 내가 어떻게 나의 죽음을 알 수 있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보혈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이게 쉽게 될 수 있습니까 놀라운 것은 부부 상담을 해보면 알 수 있어요,
아내는 남편에게 ”사랑해 용서해 줘” 이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남편이 절대 안 합니다. 아니오. 못합니다. 해봤어야죠, 정말 어렵습니다. 하도 못해서 제가 중간에 서서 사랑한다고 이야기를 보세요, 다그칩니다. 그러면 ”응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목사님이 사랑하라고 해서…”우물쭈물합니다.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끝에 가서 멋대로 살다간 사람은 멋대로 죽게됩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평상시에 기도하지 않은 사람이 죽음을 앞에 두고 기도할까요
아니오! 할 수 없습니다. 늘 기도하던 분이 죽음을 앞에 두고 기도한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자기가 했던 방식으로 합니다. ”갑자기 여호와 하나님 사랑합니다. ” 되지 않아요!
찬송하면서 죽고 싶습니까 그러면 지금 찬송하십시오, 말씀을 듣고 죽겠다면 지금부터 말씀을 듣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을 의식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영적인 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시길 바랍니다.
둘째로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여라
사울 왕의 죽음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합니까
사울 왕의 주위에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가룻 유다도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배반했습니다. 은혜 받을 자리에서 은혜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매번 기적을 일으키시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거기에 있었지만 병 고침을 받은 자는 너다. 그 이유는 네 믿음 때문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을까요
이 부분을 히브리서 기자는 2장 4절에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 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에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듣는 자가 믿음으로 화합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여기에 사울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망하게 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같은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듣게 되는 가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을 나타나려면 두 가지 조건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는 설교자가 책임입니다. 신실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말씀을 듣는 자입니다. 듣는 자의 책임도 큽니다.
인터넷 기독교 신문에 아주 개혁지향적인 신문인 뉴스엔조이라는 신문이 있습니다.
즐겨보고 있습니다. 참 좋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목사님의 강단의 소리를 자꾸 사람의 소리로 들으라고 논조를 피는 것입니다. 맞아요. 사람의 소리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소리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신약에서 가장 성공한 교회가 어디인 가요 예!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부흥이 되었던 이유는 말씀을 사람의 소리로 받아들이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교회도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겠죠. 죽을병에서 살아나는 사람들이 우리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물론 제가 잘 준비하고 영적인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또 하나는 여러분이 믿음으로 비빔밥을 잘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마귀라면 어디를 공격하면 되겠습니까 강단입니다. 강단을 죽이는 겁니다. 사람의 소리다.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가 아니다. 그렇게 우리를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갑니다. 사람들끼리 비판하게 하고 싸우게 합니다.
사울이 되게 하는 겁니다. 우리는 비빔밥을 잘 만들어야 합니다. 믿음의 비빔밥을 잘 만드시길 바랍니다.
얼마 전에 우리교회 집사님 오라버니 장례식에 갔다왔습니다. 오빠 장례식까지 가게된 이유는 제가 세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그 분을 뵈었을 때 죽음을 앞에 두고 그 분은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말씀을 빨아들이는 겁니다. 아멘 하는 거예요. 세례 잔이 없어서 뚜껑에 물을 가지고 세례를 주었는데 고인의 눈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눈물로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곧 여호와 하나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는 믿음을 섞은 것입니다. 그분은 죽었으나 산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에 대한 애착을 갖아야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셋째. 고난이 오면 기도의 기회로 삼으라
오늘 1절을 보세요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런 구절이 나오지요.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어떤 모습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반면 다윗도 비슷한 상황이 본문 30장 1절에서 나타납니다.
’아말렉이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30장과 31장을 비교됩니다.
30장은 다윗, 31장은 사울 이야기입니다.
사실 다윗이 훨씬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는 시글락에서 가족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오합지졸 600명 뿐 이었습니다.
그래서 힘들어진 부하들이 다윗을 돌로 쳐죽이자고 하극상을 벌립니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어떻게 이겨나갑니까
사무엘상 30장 6절을 일어보십시오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 정말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했습니까 군급하였다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힘을 얻게 됩니까 여호와 하나님에게 용기를 얻게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사울도 어려움에 빠졌고 다윗도 어려움이 빠졌습니다. 동일한 어려움입니다. 어찌 보면 다윗이 더 큰 어려움이에요. 그런데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에게 의지하여 역경을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역경 속에 파묻혀 죽었다는 것이에요.
아마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너무나도 어려운 고난이 있을 것입니다. 고난을 이기기 쉽지 않습니다. 만만하지 않습니다. 세월이 약이 아닙니다. 잘못하면 사울처럼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살길은 하나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내려놓은 것입니다. 다윗이 군급하였을 때 ,힘들었을 때 눌렸을 때 한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한 것입니다. 머리쓰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다윗의 시편 내용이 무엇입니까 ”힘들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내가 고난의 수렁속에 빠졌습니다. ” 그리고 징징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들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116편 3절을 보면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다윗의 강점은 무엇입니까 고난이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이 자기를 눌렀어요, ”왜 나는 요 모양 요 꼴일까 ”하면서 힘들어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한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였습니다.
정말 여러분 위기입니까 한국교회가 위기입니까 교회가 썩어 있습니까 하는 일이 안됩니까 자녀들 때문에 힘듭니까 물질 때문에 힘들어요 그렇죠 그러나 마귀가 물으면 싸워야지요.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고난을 당하고 있으면 역전시키십시오, 어떻게요 기도밖에 없습니다.
왜 여러분들을 회사에 가정에 캠퍼스에 심어 놓은 줄 아십니까 기도하기 위함입니다. 기도하는 한사람이 기도 없는 한 민족보다 강하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저는 말씀에 붙잡히고 기도에 붙잡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희교회에 청년이 교회 홈페이지에 올린 것인데 얼마나 제가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미국에서 40만 명이 모여 예수님께 헌신하는 장면입니다.
이 부분에 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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