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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 끝이 아름다운 인생

본문

음식점에 들어갔을 때 누가 주인인지 알아보는 일은 아주 쉽다. 제일 먼저 반겨주는 사람이 주인이다.
주방이던 입구던 이리저리 주위를 두리 번 거릴 때 제일 먼저 달려오는 사람도 주인이다.
하지만 달력에 빨간 색으로 표시된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종업원이다.
주인은 일을 해야 생기가 돋지만 종업원이 쉬어야 힘이 난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 세상에는 이런 종업원 의식을 갖고 사는 사람과 주인 의식을 갖고 사는 사람이 있다. 주인 의식은 또 경영자 의식이라고도 한다. 이런 의식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 움직인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먼저 하는 것이 주인 의식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에 종업원 의식은 노예의식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어야, 일을 시켜야만 일을 하는 사람이 종업원 의식을 가진 자들이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며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언 23:7). 이 말씀은 상황이나 환경이 어떻든지 가지고 있는 의식과 생각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뜻이다. 주인이 되고 싶다면 주인 의식을 갖고 살아야 한다. 승리의 삶을 살고 싶다면 승리자의 의식이 있어야 한다.
신앙생활도 어떤 신앙 의식을 갖고 있느냐는 무척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조건이 똑같이 주어졌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날마다 그분 앞에 나아간다. 하지만 어떤 의식을 갖고 그분 앞에 나아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과 인생은 현격한 차이가 난다. 인생을 살면서 영적으로 반드시 가져야 할 여러 가지 의식 중에 중요한 하나는 종말 의식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 27). 우리 인생은 정해져 있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죽고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다. 이것이 종말 의식이다. 종말 의식은 신앙을 잘 하던 사람이던 잘 못하던 사람이던, 부자였던 빈자였던 이 세상 모든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요한 계시록의 핵심적인 사상 하나는 종말론적인 신앙(Eschatology Faith)이다. 창세기가 창조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면 요한 계시록은 종말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2절). 우리는 인의 재앙을 보았다. 일곱 가지 나팔의 재앙도 보았다. 짐승의 재앙과 바다에서 나온 짐승의 재앙도 보았다. 이런 재앙은 끝이 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요한 계시록이 마치 처음부터 끝까지 재앙에 관해서만 다루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본문은 이 일곱 가지의 재앙이 마지막 재앙이라고 선포한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줄 곧 일관되게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종말을 예비하라는 것이다.
성경의 시간 관은 직선적이다. 직선적인 시간 관은 시작한 시점이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끝나는 시점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끊임없이 종말을 준비하라고 말씀한다. 구원은 마지막이 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을 살아가면서 가장 어리석은 일은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사는 것이다.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살면 어리석은 일을 반복한다. 반면 가장 지혜로운 삶은 이 땅에 분명히 마지막이 있다는 것을 알고 종말의식으로 사는 것이다. 끝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사는 것이다. 끝이 아름다운 삶을 마치는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인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끝이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첫 째, 출발이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야 한다.
끝이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출발점이 어디인지 잘 알아야 한다. “Starting right and finishing well” 바르게 출발한 시작은 아름다운 끝을 맺기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출발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통해 인생 끝은 결정 난다. 현재의 모습은 지난 날 출발점에서 시작해 이르렀고 현재의 모습은 미래 모습을 결정하게 된다. 우리의 종말 의식은 어디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주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1: 8). 요한 계시록의 첫 부분부터 주님은 알파와 오메가 되심이 선포되었다. 이전에도 있으셨고 현재도 계신다. 세상 전부터 계셨고 장차 오실 분이다. 이 땅에 다시 오실 그 분의 전능자시다. 전능자의 의미는 ‘Omnipotent’ 즉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과 권능을 가진 자라는 뜻이다. 이분은 누구인가 “또 네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는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계21: 6). ‘나’ 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시다. 종말은 어린양 예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문학적으로 인생을 표현할 때 우리 인생의 출발점을 ‘어머니’로 생각하기 쉽다. 심리학적으로 깊이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출발점을 가로 8센티, 세로 4센티 그리고 무게는 50에서 70그램 정도 나가는 계란 크기만한 자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따듯한 양수로 덮여있는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자궁회귀’ 충동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심리적으로 그렇다 라는 것이다. 우리의 본질적인 출발점은 어머니가 아니다. 우리의 본질적인 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로다. 본문 3절과 4절을 통해 ‘모세의 노래’ 와 ‘어린양의 노래’를 같이 다루었다. 모세의 노래는 출애굽기 15장 1절에 전반적인 내용이 나와있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 모세 노래의 핵심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홍해 바다에서 인도해 내신 사건이다. 말을 탄 군사들을 모두 홍해 바다에 침몰하여 죽게 하신 것을 보고 너무 기뻐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여 드렸다. 그런데 이 모세의 노래는 어린양의 노래와 함께한다. 구약은 보통 신약의 ‘그림자’ 라고 한다. 신약의 본질적인 내용이 구약에 나와있기 때문이다. 모세의 노래는 신약에 나오는 어린양의 노래 즉 십자가의 사건과 같음을 말한다.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를 통해 공통점을 한가지 발견할 수 있다. 우리들의 태도다. 홍해 바다가 갈라질 때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와 십자가 밑에 있던 사람들의 태도가 바로 우리들의 태도다. 홍해 바다 앞에 있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했다. 여호와 하나님을 능멸했다. 그들을 인도했던 모세를 불신했다. 그를 잡아죽이려고까지 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들의 태도일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태도이기도 하다. 우리는 인생에 어려움을 만나면 여호와 하나님을 쉽게 원망한다. 차라리 예수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이 모습은 십자가의 사건 앞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선포하셨고 사람들을 치유하셨지만 사람들은 이득이 되고 이해가 될 때만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에게 손해가 다가오고 정치적인 여러 가지 현실 앞에서 더 이상 예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그를 원망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출 14:31).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다 건너고 따라오던 군사들이 물에 빠져 다 죽고 시체가 둥둥 떴을 때 여호와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이 말씀이 전달해주는 중요한 교훈은 우리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이 있어야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현실이다. 자신을 의지하면 망한다. 사람을 의지하면 더욱 망한다. 요한 계시록을 통해 분명히 말씀 하신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어린양 예수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신 놀라운 능력자 되는 어린양을 붙잡는 것만이 삶을 승리하는 길이다. 요한 계시록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무섭고 힘든 사건들이 많다. 무섭고 힘든 사건들을 만날 때 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아야 한다.
 둘째, 과정을 끝까지 극복해야 한다.
본문 2절을 통해 장차 벌어질 세계의 목격자와 증언자들에 관해 말씀한다.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벗어난 자들”을 말씀한다. ‘이기고 벗어났다’ 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헬라어로 ‘니카오’ 라고 한다. 영어로는 ‘Overcome’, 극복하다 의미다. 마지막까지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이기고 극복할 일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강대국과 짐승들이 있었다. 수 없이 많은 우상들이 있었다. 이들을 피한 것이 아니라 싸우고 극복하고 이기는 많은 과정들을 극복했음을 보여준다. 인생의 마지막 아름다움을 맞기 위해서는 과정에 대한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고 사는 것이다. 이 과정을 잘 극복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방향감각이 필요하다. 사무엘상 19잘 1절에서 9절에 다윗이 제일 먼저 도망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으로부터 그의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윗은 한 순간에 사울 왕으로부터 도망해야 하는 사실을 직면하게 된다. 그가 왕궁을 빠져 나와 도망하기 위해 제일 먼저 갈 수 있었던 곳은 남쪽을 향하는 것이었다. 남쪽에는 그의 고향인 유다 땅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유다 땅으로 가던 다윗이 북쪽 이스라엘, 예루살렘 위쪽에 위치한 ‘놉’ 이라는 곳으로 방향을 바꾸는 모습을 보여준다.
놉에는 제사장, 아히멜렉이 있었고 성소가 있었다. 성서학자들은 말한다. 다윗은 처음에 인간적인 본능으로 그의 고향인 유다 땅으로 도망을 했다. 하지만 그는 도망하며 안전한 유다 땅에 평안함을 더 이상 추구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영적인 본능이 임했고 그가 가야 할 곳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민자의 고향은 어디인가 우리의 고향은 한국도 아니고 미국도 아니다. 다윗에 깨달았던 것처럼 우리의 고향은 교회, 여호와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계신 곳이다.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배가 고프다고 말한다. 그때 아히멜렉은 보통 사람들이 먹을 수 없었던 성소 안에 있던 진설병을 그에게 주었다. 추측하건대 다윗은 그것을 먹으면서 많은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도망자 신분이었던 그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떡을 예비해 두셨다. 아히멜렉은 골리앗에게 주었던 칼을 다윗에게 주었다. 다윗은 이곳에서 완전무장을 하고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점은 쫓기는 도망자의 신분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영적 본능의 방향감각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민자의 삶에는 많은 도전이 있다. 하지만 끝이 아름다운 인생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날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영적 방향감각이다. 이렇게 할 때 영적으로 반드시 승리하는 존귀한 인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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