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본문
새해가 시작되면 뭔가 큰 일을 계획하고 실천할 수 있을 것 같았었는데 돌이켜보면 언제나 그 자리입니다. 생각도 많고, 말도 많았지만 정작 실천이 우리가운데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한해의 마지막날을 보내는 우리들에게 너무도 귀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생각 많고, 말은 많았지만 실천이 없었던 지난 한해동안의 우리들 삶을 조명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두 아들에 대한 비유의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28절에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먼저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것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주님은 먼저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라고 물으십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가 누구를 겨냥해서 던진 질문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주님의 비유는 독립된 것이 아니라 앞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에게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아니면 사람에게로서냐‘라고 질문했던 것과 연결되어진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너희‘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기 전에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였는지 아니면 사람에게로서였는지 질문했을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대답을 회피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둘 중 어떤 대답을 하든지 그 대답에 대한 책임을 그들이 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대답을 했습니다. 그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모르겠다‘ 혹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말보다 더 편리한 대답은 없습니다.
술 취한 사람이 자신이 술을 마시고 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고자 할 때 하는 말이 어떤 말입니까 “어제는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필름이 완전히 끊겨 버렸어“라고 하는 말입니다. ‘필름이 끊어졌다가 다시 연결되어진 것이 아니라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청문회 때 증인으로 출석한 사람들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말합니까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 “도무지 기억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내가 정말 그랬단 말입니까“라면서 오히려 질문하는 사람에게 되묻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모르겠다‘는 대답만큼 편리한 대답은 없습니다. 그 대답은 책임을 지지 않고 책임추궁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의 대답이 ‘모르겠다‘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악한 의도를 파악하신 대답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실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비유를 통해 그들의 대답을 이끌어 내십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주님의 비유는 한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그 맏아들이 어떻게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까 29절에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그 맏아들은 가겠다고 분명히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답만 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30절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둘째 아들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싫다‘는 자신의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후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는 것입니다.
혹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분들 중에 맏아들이신 분들이 있다면 본문을 보면서 좀 못마땅한 생각이 드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문제의 중심에 맏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돌아온 탕자의 비유도 자세히 살펴보면 문제는 돌아온 탕자가 아니라 그 집안에 있던 맏아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방황하다가 돌아온 동생을 아버지가 반갑게 맞이하자 그 모습을 보면서 이 맏아들이 시기하여 화를 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긴 일이 없었는데 나에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서 벗들과 즐기게 한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동생을 위해서는 살찐 송아지를 잡느냐‘면서 화를 낸 사람이 맏아들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성경에 나타난 비유들 속에는 아버지의 속을 썩히는 둘째아들보다는 맏아들이 오히려 문제인 것으로 지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의도는 맏아들이냐 둘째 아들이냐 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순종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맏아들이신 분은 오늘 본문을 보면서 왜 항상 맏아들이 문제냐 하시면서 화를 낼 필요가 없고, 또 둘째 아들이라고 해서 좋아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순종여부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왜 맏아들이 가겠노라“고 대답을 하고서 가지 않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저를 포함해서 5남매를 두셨습니다. 제가 막내인고로 위로 형이 두분, 그리고 누나가 두분 계십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일 맏형이나 큰누나는 언제나 부모님께 순종적인 분들이셨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에 ‘싫어요‘, ‘안돼요‘, ‘못해요‘라고 대답하는 것을 저는 별로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나 제 바로 위의 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히 저는 막내라는 이점을 살려서 제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할 때가 많았습니다.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둘째 아들처럼 ‘싫어요‘라고 말한 적이 참 많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형제의 모습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맏아들은 ‘맏이‘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서 ‘예‘라고 대답은 했습니다. 그러나 둘째는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표시했습니다. 즉 포도원에 가서 일하는 것이 싫다고 말했습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농사짓는 일이 좋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요즘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이 너무 고되기 때문입니다. 또 농촌에 있으면 장가가기가 하늘에 별 따기 보다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오고 고향을 지키는 분들은 모두 나이 드신 분들입니다. 저는 농사를 지어본 일이 없기 때문에 농사짓는 일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농사짓는 일은 직장에 다니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압니다.
직장에 다니는 것은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면 됩니다. 그러나 농사는 정해진 시간이 없습니다. 오늘 일 마쳤다고 손을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못할 상황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다든지 아니면 몇 달째 가뭄이 계속되면 아예 논바닥에 자리 깔고 그곳에서 몇날 며칠을 보내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꼼짝없이 그 일에 매달려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에게 농사짓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남들은 따뜻한 봄날 어여쁜 아가씨와 산으로, 들로 나가서 데이트를 즐기는데 자신은 땅과 시름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장가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러니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농촌에 있는 사람이 아니면 농사짓는 일이 좋아서 하는 젊은이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맏아들을 불러서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했습니다. 산들산들 부는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은데 아버지는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십니다. 감히 아버지의 말씀이기에 맏아들은 그 면전에다 대고 ‘아니오‘라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겠노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둘째 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께서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좋은 날, 땅과 시름하며 보낼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둘째아들은 ‘형이 있으니 형이 포도원의 일은 책임지겠지‘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싫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맏아들이나 둘째 아들이나 포도원에 가서 일하기 싫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맏아들은 ‘가겠노라‘고 대답을 했고, 둘째아들은 ‘싫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대답을 한 후, 그들이 어떻게 행동을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맏아들은 자신의 대답과는 다르게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싫다고 대답을 한 뒤 뉘우치고 포도원에 갔습니다. 이것이 이 비유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이 비유에 담긴 실제적인 교훈을 파악하려면 여기서 왜 아버지가 그 아들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했는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단순히 품삯을 줄여 자신의 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아들들에게 일하러 가라고 한 것일까요 아니면 일꾼을 구하기가 어려우니까 아들들에게 일하러 가라고 한 것일까요 물론 농사를 짓는 분들에게는 이런 것이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그런 이유 때문에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맏아들이 불평할 때 아버지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어 내 것이 다 네 것이다“였습니다. 아버지의 것이 다 아들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들을 부려먹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아들들의 몫입니다. 그 포도원에서 일하면 그 이익은 모두 일한 아들들의 것이 됩니다. 결국 포도원에 가서 일하도록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들들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과연 인생을 누구의 뜻대로 사는 것이 좋은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들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큰아들은 대답은 했지만 자신의 뜻대로 행동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예 싫다고 말했습니다. 그도 뉘우치기 전까지는 맏아들과 다를 바 없이 행동을 했습니다. 즉 아버지의 말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과연 어떤 뜻을 따라, 어떻게 행하는 것이 옳고 좋은 것입니까
때때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하라고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살아오시면서, 또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그런 일들을 참 많이 만났을 것입니다. 오늘 구역을 새로 편성했습니다. 어떤 분은 새로 편성된 구역을 보시고 왜 나는 “이 구역에 들어갔지“라고 말씀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저 사람이 싫은데, 왜 같은 구역이 되었지“라고 말씀하실 분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단편적인 예에 불과하지만 얼마든지 내가 원하지 않았든 일, 혹은 내가 감당하기 어렵거나, 내가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만 하고, 그렇게 요구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합니까
금요 기도회때 사사기의 내용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겨야 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가나안의 거민을 모두 진멸시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나안의 거민을 모두 진멸하면 그들은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들은 유목민으로 살았기 때문에 농사와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농사짓는 방법을 아는 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사람들은 이미 농사짓는 일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농사짓는 방법을 배울 수 있고, 쉽게 곡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농사짓는 방법 다 전수받고 그 뒤에 쫓아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즉시 쫓아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그들에게는 ‘가나안 땅에서 죽어라‘는 소리로 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농사짓는 방법으로 모르니까요 그들은 쉽게 곡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어려운 길을 요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행동을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그들이 원하는 것과 달랐습니다. 그들이 감당하기 싫은 것이었습니다.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것을 요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대로 행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쉽게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쉽게 삽니까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적당하게 들어주고, 타협하면 쉽게 살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장기수들이 북으로 모두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남한 땅에 거주하면서도 사상적으로 전향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랜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습니다. 또 감옥에서 나와서도 항상 감시의 대상이 되고, 생활에 불편함을 겪은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편하게 사는 방법은 전향을 하는 것입니다. 즉 사상적으로 타협을 해버리면 그렇게 고생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정부에서 그들이 살집도 마련해주고, 안정된 생활 지원금도 정부로부터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 오랜 시간동안 고생을 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이 요구하는 것 적당하게 들어주고, 타협하면 정말 편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봉사하는 것 보다 봉사하지 않는 것이 편합니다. 각종 예배와 모임에 참석하는 것보다 주일예배 한번만 참석하고 나머지는 개인시간을 갖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십일조 하는 것보다 그 돈으로 아이들 학원 한군데 더 보내는 것이 어려모로 가정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따르는 것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나를 위한 길이 아닙니다.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포도원으로 가지 않은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본문 30절에 보면 둘째아들은 그 후에 ‘뉘우치고 갔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뉘우쳤다는 것입니까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던 것,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한 것이 결코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두 아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맏아들은 자신이 말 한대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둘째 아들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해 뉘우치고 돌이켰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을 살펴본 일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 잎이라도 무성하면 됐지, 오고가며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하면 될 것이지 뭐 그런 것을 가지고 따지냐“고 말입니다.
물론 잎을 내고 관상용으로 있는 나무는 그렇게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는 관상용이 아닙니다. 열매를 얻게하는 것이 나무의 본분입니다. 그런데 잎사귀만 무성하다면 나무의 본문을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말만하고 행동을 하지 않는 즉 잎사귀만 무성한 나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구제와 선교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열변을 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가 구제하는 일에 앞장을 서야 한다 왜 일년 예산에 구제비와 선교비가 이렇게 적게 책정되었느냐 열변을 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자신의 생활비 중에 얼마를 떼어서 구제하고 선교하는 일을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런가하면 또 예수 믿는 사람이 천만이상이 된다고 하면서 왜 우리 사회가 이렇게 부패한지 모르겠다고 열변을 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교통신호조차도 지키지 않고 차를 몰고 다닙니다.
그렇습니다. 맏아들은 말만하고 그 말에 대해 실천적인 삶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둘째아들은 뉘우치고 포도원으로 갔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주님은 이렇게 묻습니다.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저도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누가 아비의 뜻대로 행한 사람입니까 그렇습니다. 둘째 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난 일년동안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같이 살지는 않았습니까 말만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 그런 삶을 살지는 않았습니까 그런데 주님의 이 비유 속에 나타난 맏아들과 둘째아들은 각각 누구를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까 맏아들은 요한의 세례에 대해 대답을 회피했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을 두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반면에 둘째 아들은 이들에 의해 철저하게 무시 당해왔던 세리와 창기들을 두고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하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도 여호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는 있는데 세리와 창기보다는 순서상 늦게 들어가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보면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은 세리뿐이었음을 우리는 상기해야 합니다. 즉 여기서 ‘-보다‘라는 비교급의 단어가 그들을 포함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세리와 창기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결국 어떤 사람이란 말입니까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란 말입니다. 말만하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요한의 세례에 대해 대답을 회피함으로서 자신들의 말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들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 온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를 인정하면 자신들 앞에 있는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2절에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세리와 창기들은 요한의 의의 도로 왔다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알면서도 이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자신들의 현실문제가 그 속에 깊숙히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지금 현실에서 누리고 있는 많은 것을 잃어 버려야 합니다.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싫어서 그들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 현실문제 때문에 맏아들과 같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에게 있는 것을 놓아야 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혹은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 때문에, 아직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처럼 대답하기를 꺼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르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한번 묻습니다. 여러분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분이십니까 아니면 내 뜻대로 행동하는 분이십니까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말에 대한 실천이 있어야겠습니다.
오늘이 2000년 마지막 날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이시간에 결단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말만이 아니라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 뜻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먼저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것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주님은 먼저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라고 물으십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가 누구를 겨냥해서 던진 질문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주님의 비유는 독립된 것이 아니라 앞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에게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아니면 사람에게로서냐‘라고 질문했던 것과 연결되어진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너희‘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기 전에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였는지 아니면 사람에게로서였는지 질문했을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대답을 회피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둘 중 어떤 대답을 하든지 그 대답에 대한 책임을 그들이 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대답을 했습니다. 그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모르겠다‘ 혹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말보다 더 편리한 대답은 없습니다.
술 취한 사람이 자신이 술을 마시고 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고자 할 때 하는 말이 어떤 말입니까 “어제는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필름이 완전히 끊겨 버렸어“라고 하는 말입니다. ‘필름이 끊어졌다가 다시 연결되어진 것이 아니라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청문회 때 증인으로 출석한 사람들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말합니까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 “도무지 기억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내가 정말 그랬단 말입니까“라면서 오히려 질문하는 사람에게 되묻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모르겠다‘는 대답만큼 편리한 대답은 없습니다. 그 대답은 책임을 지지 않고 책임추궁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의 대답이 ‘모르겠다‘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악한 의도를 파악하신 대답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실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비유를 통해 그들의 대답을 이끌어 내십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주님의 비유는 한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그 맏아들이 어떻게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까 29절에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그 맏아들은 가겠다고 분명히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답만 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30절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둘째 아들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싫다‘는 자신의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후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는 것입니다.
혹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분들 중에 맏아들이신 분들이 있다면 본문을 보면서 좀 못마땅한 생각이 드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문제의 중심에 맏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돌아온 탕자의 비유도 자세히 살펴보면 문제는 돌아온 탕자가 아니라 그 집안에 있던 맏아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방황하다가 돌아온 동생을 아버지가 반갑게 맞이하자 그 모습을 보면서 이 맏아들이 시기하여 화를 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긴 일이 없었는데 나에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서 벗들과 즐기게 한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동생을 위해서는 살찐 송아지를 잡느냐‘면서 화를 낸 사람이 맏아들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성경에 나타난 비유들 속에는 아버지의 속을 썩히는 둘째아들보다는 맏아들이 오히려 문제인 것으로 지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의도는 맏아들이냐 둘째 아들이냐 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순종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맏아들이신 분은 오늘 본문을 보면서 왜 항상 맏아들이 문제냐 하시면서 화를 낼 필요가 없고, 또 둘째 아들이라고 해서 좋아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순종여부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왜 맏아들이 가겠노라“고 대답을 하고서 가지 않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저를 포함해서 5남매를 두셨습니다. 제가 막내인고로 위로 형이 두분, 그리고 누나가 두분 계십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일 맏형이나 큰누나는 언제나 부모님께 순종적인 분들이셨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에 ‘싫어요‘, ‘안돼요‘, ‘못해요‘라고 대답하는 것을 저는 별로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나 제 바로 위의 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히 저는 막내라는 이점을 살려서 제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할 때가 많았습니다.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둘째 아들처럼 ‘싫어요‘라고 말한 적이 참 많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형제의 모습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맏아들은 ‘맏이‘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서 ‘예‘라고 대답은 했습니다. 그러나 둘째는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표시했습니다. 즉 포도원에 가서 일하는 것이 싫다고 말했습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농사짓는 일이 좋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요즘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이 너무 고되기 때문입니다. 또 농촌에 있으면 장가가기가 하늘에 별 따기 보다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오고 고향을 지키는 분들은 모두 나이 드신 분들입니다. 저는 농사를 지어본 일이 없기 때문에 농사짓는 일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농사짓는 일은 직장에 다니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압니다.
직장에 다니는 것은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면 됩니다. 그러나 농사는 정해진 시간이 없습니다. 오늘 일 마쳤다고 손을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못할 상황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다든지 아니면 몇 달째 가뭄이 계속되면 아예 논바닥에 자리 깔고 그곳에서 몇날 며칠을 보내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꼼짝없이 그 일에 매달려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에게 농사짓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남들은 따뜻한 봄날 어여쁜 아가씨와 산으로, 들로 나가서 데이트를 즐기는데 자신은 땅과 시름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장가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러니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농촌에 있는 사람이 아니면 농사짓는 일이 좋아서 하는 젊은이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맏아들을 불러서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했습니다. 산들산들 부는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은데 아버지는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십니다. 감히 아버지의 말씀이기에 맏아들은 그 면전에다 대고 ‘아니오‘라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겠노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둘째 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께서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좋은 날, 땅과 시름하며 보낼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둘째아들은 ‘형이 있으니 형이 포도원의 일은 책임지겠지‘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싫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맏아들이나 둘째 아들이나 포도원에 가서 일하기 싫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맏아들은 ‘가겠노라‘고 대답을 했고, 둘째아들은 ‘싫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대답을 한 후, 그들이 어떻게 행동을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맏아들은 자신의 대답과는 다르게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싫다고 대답을 한 뒤 뉘우치고 포도원에 갔습니다. 이것이 이 비유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이 비유에 담긴 실제적인 교훈을 파악하려면 여기서 왜 아버지가 그 아들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했는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단순히 품삯을 줄여 자신의 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아들들에게 일하러 가라고 한 것일까요 아니면 일꾼을 구하기가 어려우니까 아들들에게 일하러 가라고 한 것일까요 물론 농사를 짓는 분들에게는 이런 것이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그런 이유 때문에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맏아들이 불평할 때 아버지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어 내 것이 다 네 것이다“였습니다. 아버지의 것이 다 아들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들을 부려먹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아들들의 몫입니다. 그 포도원에서 일하면 그 이익은 모두 일한 아들들의 것이 됩니다. 결국 포도원에 가서 일하도록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들들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과연 인생을 누구의 뜻대로 사는 것이 좋은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들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큰아들은 대답은 했지만 자신의 뜻대로 행동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예 싫다고 말했습니다. 그도 뉘우치기 전까지는 맏아들과 다를 바 없이 행동을 했습니다. 즉 아버지의 말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과연 어떤 뜻을 따라, 어떻게 행하는 것이 옳고 좋은 것입니까
때때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하라고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살아오시면서, 또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그런 일들을 참 많이 만났을 것입니다. 오늘 구역을 새로 편성했습니다. 어떤 분은 새로 편성된 구역을 보시고 왜 나는 “이 구역에 들어갔지“라고 말씀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저 사람이 싫은데, 왜 같은 구역이 되었지“라고 말씀하실 분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단편적인 예에 불과하지만 얼마든지 내가 원하지 않았든 일, 혹은 내가 감당하기 어렵거나, 내가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만 하고, 그렇게 요구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합니까
금요 기도회때 사사기의 내용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겨야 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가나안의 거민을 모두 진멸시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나안의 거민을 모두 진멸하면 그들은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들은 유목민으로 살았기 때문에 농사와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농사짓는 방법을 아는 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사람들은 이미 농사짓는 일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농사짓는 방법을 배울 수 있고, 쉽게 곡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농사짓는 방법 다 전수받고 그 뒤에 쫓아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즉시 쫓아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그들에게는 ‘가나안 땅에서 죽어라‘는 소리로 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농사짓는 방법으로 모르니까요 그들은 쉽게 곡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어려운 길을 요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행동을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그들이 원하는 것과 달랐습니다. 그들이 감당하기 싫은 것이었습니다.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것을 요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대로 행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쉽게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쉽게 삽니까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적당하게 들어주고, 타협하면 쉽게 살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장기수들이 북으로 모두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남한 땅에 거주하면서도 사상적으로 전향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랜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습니다. 또 감옥에서 나와서도 항상 감시의 대상이 되고, 생활에 불편함을 겪은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편하게 사는 방법은 전향을 하는 것입니다. 즉 사상적으로 타협을 해버리면 그렇게 고생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정부에서 그들이 살집도 마련해주고, 안정된 생활 지원금도 정부로부터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 오랜 시간동안 고생을 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이 요구하는 것 적당하게 들어주고, 타협하면 정말 편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봉사하는 것 보다 봉사하지 않는 것이 편합니다. 각종 예배와 모임에 참석하는 것보다 주일예배 한번만 참석하고 나머지는 개인시간을 갖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십일조 하는 것보다 그 돈으로 아이들 학원 한군데 더 보내는 것이 어려모로 가정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따르는 것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나를 위한 길이 아닙니다.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포도원으로 가지 않은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본문 30절에 보면 둘째아들은 그 후에 ‘뉘우치고 갔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뉘우쳤다는 것입니까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던 것,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한 것이 결코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두 아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맏아들은 자신이 말 한대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둘째 아들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해 뉘우치고 돌이켰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을 살펴본 일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 잎이라도 무성하면 됐지, 오고가며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하면 될 것이지 뭐 그런 것을 가지고 따지냐“고 말입니다.
물론 잎을 내고 관상용으로 있는 나무는 그렇게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는 관상용이 아닙니다. 열매를 얻게하는 것이 나무의 본분입니다. 그런데 잎사귀만 무성하다면 나무의 본문을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말만하고 행동을 하지 않는 즉 잎사귀만 무성한 나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구제와 선교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열변을 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가 구제하는 일에 앞장을 서야 한다 왜 일년 예산에 구제비와 선교비가 이렇게 적게 책정되었느냐 열변을 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자신의 생활비 중에 얼마를 떼어서 구제하고 선교하는 일을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런가하면 또 예수 믿는 사람이 천만이상이 된다고 하면서 왜 우리 사회가 이렇게 부패한지 모르겠다고 열변을 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교통신호조차도 지키지 않고 차를 몰고 다닙니다.
그렇습니다. 맏아들은 말만하고 그 말에 대해 실천적인 삶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둘째아들은 뉘우치고 포도원으로 갔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주님은 이렇게 묻습니다.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저도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누가 아비의 뜻대로 행한 사람입니까 그렇습니다. 둘째 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난 일년동안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같이 살지는 않았습니까 말만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 그런 삶을 살지는 않았습니까 그런데 주님의 이 비유 속에 나타난 맏아들과 둘째아들은 각각 누구를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까 맏아들은 요한의 세례에 대해 대답을 회피했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을 두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반면에 둘째 아들은 이들에 의해 철저하게 무시 당해왔던 세리와 창기들을 두고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하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도 여호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는 있는데 세리와 창기보다는 순서상 늦게 들어가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보면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은 세리뿐이었음을 우리는 상기해야 합니다. 즉 여기서 ‘-보다‘라는 비교급의 단어가 그들을 포함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세리와 창기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결국 어떤 사람이란 말입니까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란 말입니다. 말만하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요한의 세례에 대해 대답을 회피함으로서 자신들의 말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들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 온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를 인정하면 자신들 앞에 있는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2절에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세리와 창기들은 요한의 의의 도로 왔다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알면서도 이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자신들의 현실문제가 그 속에 깊숙히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지금 현실에서 누리고 있는 많은 것을 잃어 버려야 합니다.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싫어서 그들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 현실문제 때문에 맏아들과 같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에게 있는 것을 놓아야 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혹은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 때문에, 아직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처럼 대답하기를 꺼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르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한번 묻습니다. 여러분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분이십니까 아니면 내 뜻대로 행동하는 분이십니까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말에 대한 실천이 있어야겠습니다.
오늘이 2000년 마지막 날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이시간에 결단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말만이 아니라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 뜻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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