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배움에는 끝이 없다
본문
노인 한분이 도토리 나무 묘목을 심고 있었습니다. 도토리나무가 자라서 그 열매를 맺기에는 너무 어린 묘목이었고 노인은 너무 늙었습니다. 지나가던 청년이 물었습니다.
”어르신은 도토리 한 알 따먹지 못할텐데 헛수고가 아닌가요”
”지금 내가 따먹고 있는 도토리도 우리 조상들이 심어준 것이오. 그분들의 덕을 내가 보는 것처럼 내 후손도 내 덕 보아야 할 것 아니오”
오늘은 교사주일이요 교육주일입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다음 세대를 위해 묘목을 심는 일이요 씨앗을 뿌리는 일입니다. 오늘 교육이라는 씨앗을 심으면 다음 세대가 풍성해질 것입니다. 오늘 씨앗을 심지 않으면 다음 세대 우리는 아무 것도 거둘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 4대 사명이 있습니다. 예배하는 일, 선교하는 일, 구제하는 일, 교육하는 일입니다. 모두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일임에도 교회는 교육을 가장 등한시하는 것 같습니다. 교육은 다음 세대에 거두는 것이고 지금 당장 교회의 성장에 효과가 없기에 교회의 우선 순위에서 자꾸 밀려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는 교육하는 교회만이 살아남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교회 건물도 퇴락하고 교회의 부동산도 재산 이상의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21세기에는 사람들이 재산이 됩니다. 사람을 바르게 카워놓아야 세속화의 거대한 물결에서도 교회를 지켜낼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선생님이십니다.
교육은 무엇입니까
교육의 목적에 대한 여러 의견들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은 ”홍익인간”입니다.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 유익을 주는 사람, 그것이 교육의 목표 중의 하나입니다. 인간 세상에 유익을 주는 일은 그냥 되는 게 아닙니다. 교육을 통해서 가르치고 습득하고 배워나가면서 남을 이롭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참 인간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기독교교육은 이와는 약간 개념이 다릅니다.
기독교교육은,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 대로 창조되었다는 데서 시작합니다.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 대로 창조되었지만 죄가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지워버렸고 그래서 인생은 나면서부터 악한 존재로 태어나기에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게 죄입니다. 기독교교육은 바로 죄로 어지러워진 인간의 심성을 교회라는 교육 기간에서 성경을 교과서로 한 교육을 통해 가꾸고 닦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빛나기 위해서 세 분의 아버지를 세우십니다.
생부(生父)와 사부(師父), 교부(敎父)입니다.
이분들은 우리의 육신을 낳으시고 키워주시고 가르쳐주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해주시는 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 어떤 선생을 만났느냐에 따라 그의 운명은 달라집니다. ”스승은 운명이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훌륭하신 선생님, 오고가는 세대에 계속 선한 영향력 도덕적 감화력을 끼치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선생이라 하셨습니다(요13:13). 예수님은 구세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구세주는 단번의 역할로 끝납니다.
예수님은 선생으로 존재하십니다. 교회의 선생, 즉 교부는 우리의 영혼을 갈고 닦아주는 분들입니다. 설교와 기도와 본된 행동과 양육을 통해 우리의 더러워졌던 영혼이 눈을 뜨게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참 지도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구원받고 복받고 능력을 얻기위해서만 예수님을 따를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배우려고, 예수님을 통해 인격을 가다듬고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을 교육받는 학생으로 늘 대해야 합니다. 그럴려면 항상 가르침 받는자로 자처해야 합니다.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거기에서 교만이 나오고 구정물이 나옵니다.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구정물이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2.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세상은 수고와 무거운 짐으로 억누릅니다. 무지, 오해, 부당한 대우… 이런 등등의 것들이 우리를 억누르고 우리의 마음을 편치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곧잘 작은 일에도 분노하며 화를 냅니다. 배움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분노를 삭히는 법, 대인관계에서 어른스런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은 지식적인 배움에서 되어지는 게 아닙니다. 성경을 잘 안다고 해서 분노를 삭히고 대인관계가 원만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무수한 인물들이 분을 삭히지 못했고 대인관계의 무거운 짐 때문에 고통당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잠못 이루는 밤과 고생하기만 하는 낮”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배우라고 하십니다.
29절, 예수님의 온유를 배우라 하십니다.
온유는 타이어와 같은 것이어서 부딪치나 상처받지 않도록 하는 마음입니다. 온유는 타인도 상처받지 않도록 하면서 자신도 상처를 받지 않는 마음입니다.
어떤 이들은 수없이 남을 상처줍니다.
어떤 이들은 남에게는 무한정 잘해주면서 자신은 상처받습니다. 겉은 멀쩡한 데 속은 상함으로 멍들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 부글부글 속을 끓습니다. 부지런히 예수님의 온유를 배워야 합니다. 충격을 받으나 충격이 완화되는 법, 우리가 예수님의 온유를 배우면 배울 수록 쇼크도 그만큼 덜 받게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온유를 배우면 욕심이나 탐심이나 자존심이나 혈기가 사라질 것이며 여러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넓은 마음으로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의 제도를 배우기 전에, 목사의 권리, 교회 직분의 권리를 배우기 전에 먼저 바로 이런 삶-온유함을 배우라 하십니다. 그러면 교회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 고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울러 29절 겸손함을 배우라 하십니다.
겸손은 우리 자신에 대해 비천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종이라 말하면서도 종으로 취급하면 분노하며 화를 냅니다. 이런 때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젊은 혈기에서도 창조주의 능력을 자제하고 수모당하며 십자가에서 죽어갈 수 있는 그 겸손의 자제력, 그것을 배우기 위해 교회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가 자꾸 교육의 본질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 얼마나 많이 아는가, 얼마나 많이 읽었는가를 따집니다. 성경을 읽고 얼마나 변했는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얼마나 많이했는가, 기도를 얼마나 유창하게 조리있게 잘하는가를 생각만하지 기도하고 나서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많이 알면 알 수록 덜 갈급만이 있고 기도를 많이 하면 할 수록 아집과 독선으로 가득찹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아는 것이 짐이 되고 실패가 됩니다.
(예화)
세계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의 에러를 기록한 사람은 1900년도 시즌에서 120회 출전하여 91회의 에러를 낸 뉴욕 자이언츠팀의 찰스 히크멘 선수입니다. 그의 나쁜 버릇은 다리를 굽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땅볼을 번번히 놓쳤습니다. 그는 뻣뻣하게 서 있었기 때문에 `피아노 다리 허크맨’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도 에러를 적게내려면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조금 더 허리와 다리를 굽혀야 합니다. 그러면 쉼을 얻습니다. 그래서 탈무드는 ”몸을 굽히면 진리를 줍는다” 고 합니다.
교회는 겸손을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라 우쭐해지고 대접받으려는 바리새인들의 양성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 안에서 파울, 에러가 많이 나옵니다. 그 결과는 당해지 않아도 될 수고로움과 지지 않아도 될 무거운 짐에 허덕이게 됩니다. 교육은 받되 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참 교육은 쉼을 가져다 줍니다.
요즈음 교육현장은 참 교육을 하자는 소리로 가득차 있습니다.
참 교육은 무엇입니까
참 교육은 스승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스승의 권위를 세우자는 것입니다. 그 옛날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으려 했던 그 존경의 마음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교육에 대한 열심이 많은 민족이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최고의 지성인을 랍비, 즉 교사로 세웁니다. 여기의 지성인이라함은 바른 성품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인격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우수해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맡기지 않습니다. 교사로 세웠으면 최고의 대접으로 대접합니다. 물질적인 최고의 대접은 물론이고 최고의 존경을 표합니다. 총리도 교사 앞에서는 절절 맵니다. 그러니 학생들이 교사를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육은 존경이 있는 곳에서 이루어집니다.
참 교육은 지혜로운 처신을 뜻합니다. 지식적으로만 머리를 채우는 교육이 아니라 바른 분별력과 판단력을 길러주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과 악을 구별하고 거짓과 참을 가려낼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참 교육은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최고의 지혜라 합니다. 그까짓 영어 단어 몇 개 더 알고, 수학공식 몇 개 알았다고 해서 지혜로운 사람으로 처신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 여호와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가장 지식있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인정합니다.
참 교육의결론은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의 쉼입니다. 쉼이 없는 교육은 수단일 뿐입니다. 교육은 깨우침입니다. 바르게 깨우치면 쉼이 있지만 바르게 깨우치지 못하면 마치 선악과를 알았기에 세상이 더 복잡한 것처럼, 인간의 지식은 알면 알수록 더욱 번뇌케 한다는 솔로몬의 고백처럼 부질없는 지식은 많을 수록 골머리를 아프게 합니다. 그래서 참 교육을 하자고 나선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 일선 학교의 현장은 황폐화되고 있습니다. 참 교육이 사라지고 참 스승이 없어간다는 것입니다. 교육계에 공황이 불어닥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육현장을 ”판”자 돌림으로 희화화했습니다.
”학생은 개판, 학부모는 살판, 교사는 죽을 판, 학교는 난장판”
그러기에 수많은 교사들이 정든 학교를 떠나고 있습니다. 교사들의 긍지와 보람이 사라져버린 교육현장은 참다운 의미에서의 세대교체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존경하지 않는 교사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아무리 좋은 가르침을 전해도 좋은 가르침을 전수받아도 마음에 쉼이 없는 교육은 참 교육이 아닙니다. 서로 간의 긴장과 갈등과 경쟁을 부추키는 교육은 참된 교육이 아닙니다. 참된 교육은 쉼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많이 배우고 알아도 제자훈련을 해도, 기도의 가르침, 은사의 가르침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운다 해도 우리 마음에 쉼이 없다면 그것은 지식적으로만 습득하는 배움이지 예수님의 인격-그분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참된 교육은 아닙니다. 쉼은 온유와 겸손에서 나옵니다. 그럴 때 인생에 에러가 적습니다.
그래서 쉼이 있어야 하고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교사는 바로 그런 일들을 위해 세움받은 분들이기에 존귀하고 교회는 그런 분들을 알아주고 존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 론
어느 소년에게 누가 물었습니다.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누구를 닮고 싶니”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닮고 싶은 사람이 없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존경할만한 사람, 닮고 싶은 사람이 없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서 누가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까
교회 안에서 존경하는 사람, 닮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입니다. 정말 그 교회가 존경할만한 사람이 없는 게 아닙니다.
그 어떤 사람도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면에서 우리보다 훌륭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일성수, 넘치는 헌금생활, 수십년에 걸친 새벽기도회, 지치지 않은 열정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는 하나가 마음에 안들면 그 사람 자체를 다 부정해버리는 교만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 안에서 늘 마음은 수고로우며 지친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예수님의 초청에 응하십시오.
우리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을 학습합시다. 하루만 학습하는 게 아니라, 목사가 되고 안수를 받을 때까지만 학습하는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배웁시다.
바울은 너희는 내게 배우라는 당당한 말을 하면서도 나는 그 어는 것도 잡은 줄로 생각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하여 계속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달려간다는 것은 계속 배움의 길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 배움의 길에 있을 때 우리는 성장하며 온유와 겸손의 분량이 높아지게 되고 세상사에서 벗어나 쉼을 얻게될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일을 위해 교사들을 세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이 구역장님들과 교사 여러분들에게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어르신은 도토리 한 알 따먹지 못할텐데 헛수고가 아닌가요”
”지금 내가 따먹고 있는 도토리도 우리 조상들이 심어준 것이오. 그분들의 덕을 내가 보는 것처럼 내 후손도 내 덕 보아야 할 것 아니오”
오늘은 교사주일이요 교육주일입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다음 세대를 위해 묘목을 심는 일이요 씨앗을 뿌리는 일입니다. 오늘 교육이라는 씨앗을 심으면 다음 세대가 풍성해질 것입니다. 오늘 씨앗을 심지 않으면 다음 세대 우리는 아무 것도 거둘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 4대 사명이 있습니다. 예배하는 일, 선교하는 일, 구제하는 일, 교육하는 일입니다. 모두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일임에도 교회는 교육을 가장 등한시하는 것 같습니다. 교육은 다음 세대에 거두는 것이고 지금 당장 교회의 성장에 효과가 없기에 교회의 우선 순위에서 자꾸 밀려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는 교육하는 교회만이 살아남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교회 건물도 퇴락하고 교회의 부동산도 재산 이상의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21세기에는 사람들이 재산이 됩니다. 사람을 바르게 카워놓아야 세속화의 거대한 물결에서도 교회를 지켜낼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선생님이십니다.
교육은 무엇입니까
교육의 목적에 대한 여러 의견들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은 ”홍익인간”입니다.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 유익을 주는 사람, 그것이 교육의 목표 중의 하나입니다. 인간 세상에 유익을 주는 일은 그냥 되는 게 아닙니다. 교육을 통해서 가르치고 습득하고 배워나가면서 남을 이롭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참 인간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기독교교육은 이와는 약간 개념이 다릅니다.
기독교교육은,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 대로 창조되었다는 데서 시작합니다.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 대로 창조되었지만 죄가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지워버렸고 그래서 인생은 나면서부터 악한 존재로 태어나기에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게 죄입니다. 기독교교육은 바로 죄로 어지러워진 인간의 심성을 교회라는 교육 기간에서 성경을 교과서로 한 교육을 통해 가꾸고 닦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빛나기 위해서 세 분의 아버지를 세우십니다.
생부(生父)와 사부(師父), 교부(敎父)입니다.
이분들은 우리의 육신을 낳으시고 키워주시고 가르쳐주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해주시는 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 어떤 선생을 만났느냐에 따라 그의 운명은 달라집니다. ”스승은 운명이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훌륭하신 선생님, 오고가는 세대에 계속 선한 영향력 도덕적 감화력을 끼치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선생이라 하셨습니다(요13:13). 예수님은 구세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구세주는 단번의 역할로 끝납니다.
예수님은 선생으로 존재하십니다. 교회의 선생, 즉 교부는 우리의 영혼을 갈고 닦아주는 분들입니다. 설교와 기도와 본된 행동과 양육을 통해 우리의 더러워졌던 영혼이 눈을 뜨게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참 지도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구원받고 복받고 능력을 얻기위해서만 예수님을 따를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배우려고, 예수님을 통해 인격을 가다듬고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을 교육받는 학생으로 늘 대해야 합니다. 그럴려면 항상 가르침 받는자로 자처해야 합니다.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거기에서 교만이 나오고 구정물이 나옵니다.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구정물이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2.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세상은 수고와 무거운 짐으로 억누릅니다. 무지, 오해, 부당한 대우… 이런 등등의 것들이 우리를 억누르고 우리의 마음을 편치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곧잘 작은 일에도 분노하며 화를 냅니다. 배움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분노를 삭히는 법, 대인관계에서 어른스런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은 지식적인 배움에서 되어지는 게 아닙니다. 성경을 잘 안다고 해서 분노를 삭히고 대인관계가 원만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무수한 인물들이 분을 삭히지 못했고 대인관계의 무거운 짐 때문에 고통당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잠못 이루는 밤과 고생하기만 하는 낮”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배우라고 하십니다.
29절, 예수님의 온유를 배우라 하십니다.
온유는 타이어와 같은 것이어서 부딪치나 상처받지 않도록 하는 마음입니다. 온유는 타인도 상처받지 않도록 하면서 자신도 상처를 받지 않는 마음입니다.
어떤 이들은 수없이 남을 상처줍니다.
어떤 이들은 남에게는 무한정 잘해주면서 자신은 상처받습니다. 겉은 멀쩡한 데 속은 상함으로 멍들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 부글부글 속을 끓습니다. 부지런히 예수님의 온유를 배워야 합니다. 충격을 받으나 충격이 완화되는 법, 우리가 예수님의 온유를 배우면 배울 수록 쇼크도 그만큼 덜 받게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온유를 배우면 욕심이나 탐심이나 자존심이나 혈기가 사라질 것이며 여러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넓은 마음으로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의 제도를 배우기 전에, 목사의 권리, 교회 직분의 권리를 배우기 전에 먼저 바로 이런 삶-온유함을 배우라 하십니다. 그러면 교회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 고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울러 29절 겸손함을 배우라 하십니다.
겸손은 우리 자신에 대해 비천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종이라 말하면서도 종으로 취급하면 분노하며 화를 냅니다. 이런 때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젊은 혈기에서도 창조주의 능력을 자제하고 수모당하며 십자가에서 죽어갈 수 있는 그 겸손의 자제력, 그것을 배우기 위해 교회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가 자꾸 교육의 본질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 얼마나 많이 아는가, 얼마나 많이 읽었는가를 따집니다. 성경을 읽고 얼마나 변했는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얼마나 많이했는가, 기도를 얼마나 유창하게 조리있게 잘하는가를 생각만하지 기도하고 나서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많이 알면 알 수록 덜 갈급만이 있고 기도를 많이 하면 할 수록 아집과 독선으로 가득찹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아는 것이 짐이 되고 실패가 됩니다.
(예화)
세계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의 에러를 기록한 사람은 1900년도 시즌에서 120회 출전하여 91회의 에러를 낸 뉴욕 자이언츠팀의 찰스 히크멘 선수입니다. 그의 나쁜 버릇은 다리를 굽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땅볼을 번번히 놓쳤습니다. 그는 뻣뻣하게 서 있었기 때문에 `피아노 다리 허크맨’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도 에러를 적게내려면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조금 더 허리와 다리를 굽혀야 합니다. 그러면 쉼을 얻습니다. 그래서 탈무드는 ”몸을 굽히면 진리를 줍는다” 고 합니다.
교회는 겸손을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라 우쭐해지고 대접받으려는 바리새인들의 양성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 안에서 파울, 에러가 많이 나옵니다. 그 결과는 당해지 않아도 될 수고로움과 지지 않아도 될 무거운 짐에 허덕이게 됩니다. 교육은 받되 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참 교육은 쉼을 가져다 줍니다.
요즈음 교육현장은 참 교육을 하자는 소리로 가득차 있습니다.
참 교육은 무엇입니까
참 교육은 스승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스승의 권위를 세우자는 것입니다. 그 옛날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으려 했던 그 존경의 마음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교육에 대한 열심이 많은 민족이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최고의 지성인을 랍비, 즉 교사로 세웁니다. 여기의 지성인이라함은 바른 성품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인격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우수해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맡기지 않습니다. 교사로 세웠으면 최고의 대접으로 대접합니다. 물질적인 최고의 대접은 물론이고 최고의 존경을 표합니다. 총리도 교사 앞에서는 절절 맵니다. 그러니 학생들이 교사를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육은 존경이 있는 곳에서 이루어집니다.
참 교육은 지혜로운 처신을 뜻합니다. 지식적으로만 머리를 채우는 교육이 아니라 바른 분별력과 판단력을 길러주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과 악을 구별하고 거짓과 참을 가려낼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참 교육은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최고의 지혜라 합니다. 그까짓 영어 단어 몇 개 더 알고, 수학공식 몇 개 알았다고 해서 지혜로운 사람으로 처신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 여호와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가장 지식있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인정합니다.
참 교육의결론은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의 쉼입니다. 쉼이 없는 교육은 수단일 뿐입니다. 교육은 깨우침입니다. 바르게 깨우치면 쉼이 있지만 바르게 깨우치지 못하면 마치 선악과를 알았기에 세상이 더 복잡한 것처럼, 인간의 지식은 알면 알수록 더욱 번뇌케 한다는 솔로몬의 고백처럼 부질없는 지식은 많을 수록 골머리를 아프게 합니다. 그래서 참 교육을 하자고 나선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 일선 학교의 현장은 황폐화되고 있습니다. 참 교육이 사라지고 참 스승이 없어간다는 것입니다. 교육계에 공황이 불어닥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육현장을 ”판”자 돌림으로 희화화했습니다.
”학생은 개판, 학부모는 살판, 교사는 죽을 판, 학교는 난장판”
그러기에 수많은 교사들이 정든 학교를 떠나고 있습니다. 교사들의 긍지와 보람이 사라져버린 교육현장은 참다운 의미에서의 세대교체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존경하지 않는 교사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아무리 좋은 가르침을 전해도 좋은 가르침을 전수받아도 마음에 쉼이 없는 교육은 참 교육이 아닙니다. 서로 간의 긴장과 갈등과 경쟁을 부추키는 교육은 참된 교육이 아닙니다. 참된 교육은 쉼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많이 배우고 알아도 제자훈련을 해도, 기도의 가르침, 은사의 가르침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운다 해도 우리 마음에 쉼이 없다면 그것은 지식적으로만 습득하는 배움이지 예수님의 인격-그분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참된 교육은 아닙니다. 쉼은 온유와 겸손에서 나옵니다. 그럴 때 인생에 에러가 적습니다.
그래서 쉼이 있어야 하고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교사는 바로 그런 일들을 위해 세움받은 분들이기에 존귀하고 교회는 그런 분들을 알아주고 존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 론
어느 소년에게 누가 물었습니다.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누구를 닮고 싶니”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닮고 싶은 사람이 없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존경할만한 사람, 닮고 싶은 사람이 없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서 누가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까
교회 안에서 존경하는 사람, 닮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입니다. 정말 그 교회가 존경할만한 사람이 없는 게 아닙니다.
그 어떤 사람도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면에서 우리보다 훌륭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일성수, 넘치는 헌금생활, 수십년에 걸친 새벽기도회, 지치지 않은 열정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는 하나가 마음에 안들면 그 사람 자체를 다 부정해버리는 교만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 안에서 늘 마음은 수고로우며 지친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예수님의 초청에 응하십시오.
우리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을 학습합시다. 하루만 학습하는 게 아니라, 목사가 되고 안수를 받을 때까지만 학습하는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배웁시다.
바울은 너희는 내게 배우라는 당당한 말을 하면서도 나는 그 어는 것도 잡은 줄로 생각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하여 계속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달려간다는 것은 계속 배움의 길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 배움의 길에 있을 때 우리는 성장하며 온유와 겸손의 분량이 높아지게 되고 세상사에서 벗어나 쉼을 얻게될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일을 위해 교사들을 세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이 구역장님들과 교사 여러분들에게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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