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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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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년말이면 10대 뉴스 등을 발표하며 올 한 해의 사건을 정리하거나 한 해의 문화 경향이나 사람들의 유행 등을 정리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습니다. 올 한 해 사람들의 중요 관심사는 무엇이었을까요 올 한 해도 다사다난이라는 말로 규정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사람들의 영원한 관심사는 아마도 물질일 것입니다. 전국민의 관심을 1년 내내 끌어왔던 대통령 선거도 결국 핵심 주제는 ‘경제’였습니다.
우리는 분명 6, 70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살고 있는데 여전히 경제 문제를 걱정해야 하는 형편입니다. 70년대 유일했던 구호가 국민소득 1천 달러 수출 100억불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 경제는 국민소득 2만 달러에 수출총액 근 4천억에 이르는 세계 10대 교역국가에 들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국민소득 20배, 수출액은 근 40배에 달합니다. 물질의 규모는 커졌는데 여전히 우리는 불안합니다.
전에는 하루 벌어 먹고 살아도 감사했는데 이제는 노후까지 대비해야 합니다. 미래의 근심을 오늘로 끌어당겨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성장의 이면에는 비정규직 8백만과 고용불안, 청년 실업, 경기침체라는 불안의 그림자를 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3D 업종에는 인력이 부족해 해외에서 인력을 수입하는 실정입니다. 잦은 해외 여행과 해마다 늘어나는 유학생들, 상상을 초월하는 수억대의 집값, 자녀교육에 쏟아지는 사교육비 등 분명 돈이 없다는 핑계로만 설명할 수 없는 현상도 있습니다. 우리 경제가 조금 나아지면 괜찮아질까요 양극화 문제가 해결되면 괜찮아질까요
물질도 종교입니다. ‘나를 믿으면 행복하다. ’ ‘지금 문제는 적게 소유해서 그렇다. ’ ‘믿음이 적은 자여, 나를 많이 가지면 영생을 소유할 것이라’는 신화를 유포하고 있습니다. 물질과 욕망 지향적인 우리 삶에 브레이크가 필요합니다. 물질이 없으면 불편하지만 그렇다고 물질을 많이 소유한다고 해서 행복해 지지는 않습니다. 부자집보다는 가난한 집에 오히려 웃음꽃이 피듯 물질 없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더 위험한 것은 자신의 현재의 불안이 물질로 채우면 없어질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온 국민이 이 신화에서 깨어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마음이나 물질에 대한 우리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스스로 자족하는 마음이 없으면 물질에 대한 욕구는 우리를 욕망의 사슬에 매어 끊임없이 불안하게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6-8) 스스로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어느 형편에나 천국입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 어디나 지옥일 것입니다. 오늘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 말씀을 통해 우리의 부에 대한 태도를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거지 나사로
거지 나사로는 오늘 비유의 주인공중 하나입니다. 나사로는 참으로 비참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나사로는 거지였습니다. 온 몸에는 피부병이 났습니다. 그는 부자 집 대문 앞에 누워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 비추어 볼 때 그는 불구자인 것이 확실합니다. 그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이 빵 부스러기는 부자가 먹고 남은 것을 일부러 던져 준 것이 아닙니다. 이 빵은 손을 닦을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도무지 먹을 수 없는 것을 먹고 살았습니다. 이 빵 부스러기를 먹으려고 달려드는 것은 개들밖에 없었습니다. 개들이 나사로의 헌 데를 핥았다는 것은 개들만이 나사로를 위로하는 듯이 보여 더욱 불쌍하게 만듭니다. 나사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가운데 쓸쓸히 죽음을 맞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인생 역전이 시작됩니다. 나사로가 죽자마자 천사가 달려옵니다. 나사로는 천사의 손에 의해 받들려져 아브라함의 품속에 안깁니다. 아브라함의 품은 따뜻합니다. 그곳에는 온갖 먹을 것이 풍성합니다.
나사로의 삶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비유에서 독특한 것은 거지인 나사로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부자는 이름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는 우리가 사는 현실과는 정반대입니다. 우리 사는 세계에서는 부자들이 자기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대통령 당선자와 재계 회장들이 모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이건희, 정몽구, 김승연 등 매년 대한민국 최고 부자들의 이름이 누구인지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 가장 비천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단지 거지라는 이름으로 불릴 뿐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눈은 반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부자를 알지 못합니다.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매일 호와로이 연락했던 부자는 단지 부자로 불릴 뿐 이름이 없습니다. 이 부자뿐만 아니라 주님의 또 다른 비유에 등장했던, 그 해의 소출이 많아 곡간을 크게 지었던 부자는 단지 어리석은 부자라 불릴 뿐입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19:16) 하고 물었던 청년은 단지 부자 청년으로 불릴 뿐입니다. 단지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재물을 내어놓았던 부자 세리 삭개오만 이름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부자들과는 반대로 거지 나사로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뜻은 ‘여호와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사로를 사랑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사로에게 어떤 경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결코 말씀을 지키다 가난하게 된 그런 의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여호와 하나님은 나사로를 사랑하십니까 이유는 단지 하나 그가 가난하고 힘없고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도울 자를 찾습니다. 건강하고 부요한 사람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필요 없습니다. 그는 홀로 충분히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여호와 하나님이 돕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사로라는 이름 곧 ‘여호와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지게 된 지도 모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하루는 목자가 양을 세듯 나사로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나사로가 오늘 밥은 굶지 않았나 나사로가 설마 죽지는 않았나’ 이렇게 점검하다보니 그의 이름이 외워지게 된 것입니다.
이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 마음이 또한 부모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마음에 가장 걸리는 자식이 누구인가 하면 잘난 자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못난 자식입니다. 이 아들이 밥은 제대로 먹고사는지 항상 걱정입니다. 자식 둘이 있는데 하나는 잘삽니다. 하나는 정신발달 지체장애자입니다. 부모님은 누구와 함께 살겠습니까 물어볼 것도 없이 장애자 자식입니다. 그는 부모 도움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는 열 다섯 명의 아이들을 낳고 길렀습니다. 어떤 사람이 수산나에게 물었습니다. “자녀들 중 누가 가장 사랑스럽습니까” 그때 수산나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 자식들 중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고요 아픈 자식이 나을 때까지는 그 자식을, 집나간 자식이 돌아올 때까지는 또 그 자식을 나는 더 사랑합니다. ”
유대의 왕 중에 아사 왕이 있습니다. 그가 왕으로 있을 때 구스의 백만 대군이 쳐들어왔습니다. 이 엄청난 적군들 앞에 도무지 속수무책이었던 아사가 여호와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대하14:11) 약한 자와 강한 자 사이에서 사람들은 강한 자의 편에 줄을 섭니다. 권력있는 자 물질을 가지고 있는 자의 편에 붙어야 먹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약한 자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를 왜 돕습니까 그가 불쌍하고 약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난한 자의 여호와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무슨 당파성이나 계급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편 35편 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요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혹시 우리 처지가 나사로와 같은 형편입니까 무기력하고 무시당하고 약하며 잊혀진 존재처럼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 어느 때보다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의 신음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신음 소리는 의롭고 불의한 것, 경건하고 무의미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신음소리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상달됩니다. 비록 내가 내 인생의 잘못된 선택으로 고통하고 있을 때조차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외로워할 그 때에 여호와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도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여호와 하나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부르짖을 때 우리는 압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가장 가까이에 함께 하고 계셨음을.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을 참지 못하시고 삼일만에 다시 살리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손은 나사로가 죽자마자 그를 낚아채듯 하늘나라로 올리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 마음을 좀 더 사회적인 지평으로 확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중심에 놓고 바라보는 눈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눈입니다. 우리 교회도 그 시선을 항상 가난한 사람들을 향해야 합니다. 우리 중에서 가장 소외되고 연약한 자를 향하고 있다면 그 교회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교회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물질적으로 부요해지고 영향력 면에서 권력의 중심부에 위치했습니다. 그러기에 더더욱 그 시선은 가난한 자를 향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마음으로부터 떠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도 이처럼 가난한 자를 생각하고 중심에 두는 사회가 되면 정말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 가난하고 약한 자를 생각하는 것이 연말연시 불우이웃 돕기 하듯이 자기 양심의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으려는 요식행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눈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 중에 어떤 후보가 “사람중심”을 구호로 들고 왔는데 저는 그 구호가 정말 성서적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놓치고 물질과 권력과 능력과 성적을 중요시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효율성,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한 가정의 가장을 무방비 상대로 실업으로 비정규직으로 몰아내고 있습니다. 새로운 대통령 당선자가 이 약자와 가난한 자를 바라보는 눈을 끝까지 붙잡았으면 합니다. 이것이 정의이고 이것이 성서적 통치입니다. 기도 많이 하면서 오히려 강자의 논리를 대변하는 대통령보다 기도는 적게 할지라도 약자를 바라보는 정의의 대통령이 진정 여호와 하나님이 세우신 종의 모습입니다. 결국 기도는 기도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이것이 국가 단위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업을 하건, 우리가 어느 직장에서 동료와 관계를 맺고 어떤 일을 하건 이처럼 사람중심으로, 특히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했으면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마음이고, 이것이 바로 성경적 경영이 아니겠습니까
부자의 죄는 무엇이었나
자 이제는 시각을 옮겨 여기에 등장하는 부자의 모습을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사실 여기 등장하는 부자는 나사로보다 더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가 실제 이 비유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는 아무 대사가 없지만 부자의 대사는 상당히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대의 부자들을 향하여 하실 말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의 죄가 무엇입니까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구원교리가 강한 우리에게는 부자의 최후가 당혹스럽게 합니다. 그가 예수님이나 여호와 하나님을 믿거나 믿지 않았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옥에 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사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늘 나라에 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자의 죄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비유를 제대로 좇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비유는 19절 “한 부자가 있어”로 시작합니다. 이 사람의 불행은 바로 이 첫 문장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성경에 달리 의인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다, 사랑이 많은 사람이다, 율법에 충실한 자다 등 다른 많은 표현들이 있는데 이 사람을 규정하는 문장은 그는 부자였다는 말입니다. 다른 무엇은 없습니까 그는 부자 답게 자신을 위한 씀씀이가 아주 사치스러웠습니다. 19절에 보니 비싼 자색 옷과 고운 옷을 입고 날마다 잔치를 벌였습니다. 내 돈 내가 벌었으니 내 마음껏 쓴다는 삶의 자세입니다. 그 집 앞에 나사로라는 거지가 살았는데 그는 그 가난한 자의 삶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만을 위해 재산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에게도 어김없이 죽음은 찾아왔습니다. 죽음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가리지 않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는 같은 날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죽음 이후의 세계는 자기가 살았던 세계와는 전혀 딴 판입니다. 거지중의 거지였던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서 편안히 안식합니다. 그러나 부자는 음부에 떨어져 뜨거운 불꽃 가운데 고통을 겪습니다. 물 한 모금 없어 목은 바짝바짝 타들어갑니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렇게 우습게 여기던 나사로가 아브라함 품에 있는 것입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외칩니다. 24절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신세가 역전 되었습니다. 한 때는 나사로가 이 부자의 손끝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를 바라보는 운명이었다면 이제는 부자가 나사로의 손끝에서 떨어지는 물 한 방울을 바라보아야하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사실 이 부자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나사로를 여전히 자기가 부릴 수 있는 종 취급합니다. "나사로를 보내어"(24),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27)
그도 그럴 것이 부자는 돈 한 푼 없는 저 가난한 나사로를 사람 취급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사람이 순수한 그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진 무엇으로 사람을 평가하던 것이 버릇이 되었었으니까요.
이런 부자를 향하여 아브라함을 이렇게 말합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25) 나사로가 천국에 갈 수 있었던 이유는 앞에서 말한 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자신만을 위해 흥청망청 썼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는 서로 엮여 있습니다. 부자가 나사로에게 조그마한 선행이라도 베풀었다면 죽은 이후 그는 나사로의 도움을 받았을는지 모릅니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들이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가난한 학자와 세리 바르마얀의 이야기’입니다. 세리 바르마얀은 불의한 사람이었고 돈만 알던 사람이었는데 죽었을 때 아주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온 도시가 일손을 쉬었을 정도입니다. 이때 마침 경건한 한 서기관도 죽었는데 아무도 그의 장례식을 알지도 못한 채 그는 쓸쓸히 죽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를 물었을 때 한 랍비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다. 경건한 생활과는 거리가 먼 세리 바르마얀이 딱 한 번 선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바르마얀이 유력한 공회원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지만 그들이 오지 않았다. 그러자 세리는 음식이 썩을까 걱정 되어 주위에 있는 가난한 자들이 와서 먹도록 명령을 내렸다. 바로 이 한 가지 선행 덕분에 이처럼 화려한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 이처럼 선행의 가치가 대단함을 랍비는 이 예화를 통해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이야기의 끝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는 오늘 부자와 나사로의 경우처럼 이 두 사람의 신세가 완전히 역전이 되었습니다. 죽은 서기관의 친구중 하나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는 그는 자기의 그 가난한 친구 학자가 죽어서 낙원의 강가에서 평화롭게 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부자 세리의 모습은 너무 비참했습니다. 그는 강가에 서있기는 하지만 그 물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탄탈로스의 신화처럼 그가 물이 턱밑에까지 차서 그것을 먹으려는 순간 싹 달아나 버리고 맙니다. 머리 위에는 온갖 맛있는 과일들이 열려 있지만 그것을 따려는 순간 바람이 불어 싹 사라지고 맙니다. 세리는 살아 생전 많은 선행을 베풀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고통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는 물질에 대한 비유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공통적인 것은 예수님께서 물질을 많이 소유했다는 점에서 문제를 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물질은 분명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문제는 물질의 사용입니다. 이 물질을 선하게 사용하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부자는 거지 나사로를 돕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부를 사용했기에 주님으로부터 긍휼 없는 심판을 당합니다. 우리 자력으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많은 물질을 가지고도 가난한 자를 돕지 못한 자에게는 그들이 인색한만큼 여호와 하나님도 인색한 심판을 내리시겠다는 뜻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도 그렇습니다. 자기 곡간을 넓히고 그 안에 물건을 쌓을 줄만 알았지 하늘의 곡간에 쌓은 것이 없었습니다. 부자 청년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19:21)는 주님의 요청에 근심하다 결국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부자 삭개오는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눅19:8)하고 고백하며 예수를 따랐기에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의 태도는 분명합니다. 우리 손 안에 있는 물질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12:48) 부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 손으로 세상을 위하여 많은 좋은 일을 하라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물질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물질에 대한 이런 태도를 분명히 견지한다면 우리는 성공하고 또 행복한 부자가 될 것입니다.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이 비유에 나오는 주인공들 중에는 여러분도 있습니다. 한 번 찾아보십시오. 아마 부자의 대화 가운데 등장하는 ‘다섯 형제’가 바로 여러분의 몫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비유라는 고전적 작품을 썼던 예레미야스는 이 비유 제목을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라 하지 않고 ‘육형제의 비유’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한 형제는 이미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나머지 다섯 형제는 지금 그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한 번 죽은 후에는 더 이상 바꿀 수 없습니다. 살아 있을 때 결정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26절에서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그래서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죽은 이후의 천국과 지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세계입니다. 왜냐하면 현재 내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죽은 이후의 자기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요청합니다.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27,28) 그러자 아브라함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29) 부자가 다시 이렇게 간청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30) 여기서 회개가 무엇입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재산을 가난한 자와 옳은 일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최종적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31)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내가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믿겠다. ’ ‘내가 주님을 한 번 보기라도 한다면 주님의 뜻을 따르겠다. ’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기적이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불리 먹는 기적을 매일같이 체험했지만 끊임없이 불평하고 불순종했습니다. 기적도 일상화되면 기적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모세와 선지자로 대표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이미 계시되었습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결단하고 순종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물론 기적이 있으면 우리는 더 쉽게 그리고 더 확신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남겨진 다섯 형제입니다. 지금 우리 앞서 먼저 죽음을 맞았던 우리 형제와 가족들이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외치고 있을는지 모릅니다. “너희는 그렇게 살지 말아라. ” 여러분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보면서도 깨닫고 결단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가 당할 이 위기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기회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심판하시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삶을 살기를 원하고 우리가 진정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시는 분은 다름 아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희생하시고 참 삶의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충분히 우리를 도우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또 그 분 안에는 영원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 은혜에 힘입어 인생의 마지막 때를 슬기롭게 대비하는 저와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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