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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 영생으로 들어가라

본문

보름이 지나면 한 해를 마치게 됩니다. 그리고 새해가 옵니다. 이와 같이 세월이 가면 누구에게나 자신의 인생을 마칠 때가 옵니다. 연말을 의식하였든지 아니 의식하였든지 연말은 다가왔듯이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을 느끼며 살든지 못 느끼며 살든지 언젠가는 우리의 인생의 말년이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의 고난을 알고 계셨으며 부활을 예고하셨고 재림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천군천사와 함께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예수님이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주님이 오실 때를 알고 사는 삶의 지혜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인자가 영광으로 천사와 함께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신 이는 반드시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그 분을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마지막을 준비하는 성도들의 삶이 어떠하여야 하는가를 깨닫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사람은 언제나 인생의 마지막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우리의 인생이 마지막이 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히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인생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죽음은 누구라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추운 나라에 있으나 더운 나라에 있으나 2001년이 끝나는 세월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마감하여야 합니다. 지난 토요일 딸아이가 나이가 들고 싶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중학교 시절이 가장 행복한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누구든지 한 번 태어났으면 정한 인생을 살다가 죽어야 합니다. 그 연수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하셨습니다.
사람은 정한 연수는 70이며 강건하면 80이라고 하였습니다.
언제라도 자신의 마지막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진정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달리기를 하면서 어디까지 뛰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열심히 놀던 아이들이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야 하듯이 언제가 우리 인생의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날이 갑자기 오게 되며 그 날이 오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포기하여야 합니다. 죽음이 오면 인간의 탐욕도 사라집니다. 의욕도 사라집니다. 모든 것이 헛된 것이 됩니다.
돈을 모으던 재벌도, 정치를 꿈꾸던 정치가도 학문의 열정을 가졌던 학자도 죽음과 함께 사라집니다. 사람이 죽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을 알고 사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누가 12:13-21) 어느날 예수님께서 재산 싸움으로 찾아온 사람에게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그 비유는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나름대로 열심히 농사를 지어 풍성한 결실을 거둔 성실한 사람입니다. 거둔 것을 잘 보관하고 인생의 계획을 가지는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삶의 즐거움도 생각하는 여유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왜 주님께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불렀을까요
자신의 영혼이 그날 밤 마지막이 될 것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다른 것은 알고 있어도 죽음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 진정한 어리석음입니다. 우리는 알고 살아야 합니다. 죽음이 나와 상관이 없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고 언제든지 나에게 올지라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지혜로운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그의 태도입니다. 왕으로 살았습니다. 죽는 것이 싫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왕상 2:2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3 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다윗은 자신의 죽음의 때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마지막은 단순한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심으로 인한 세상의 마지막입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끝나고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지는데 그 날을 알고 사는 것이 참된 지혜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오심은 다윗의 죽음처럼 순순히 찾아오지 않습니다. 불시에 임합니다.
벧후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에서 마지막의 불시성에 대하여 두 사람이 함께 잠을 자다가 두 사람이 함께 밭을 갈거나 맷돌을 갈다가 한 사람은 가고 한 사람은 남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마 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 날과 그 시를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를 알고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 24: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그 날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며 그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지난 주 제주를 비행기를 타고 갔습니다. 뜨자마자 내렸습니다. 이륙 후 35분만에 착륙하였습니다. 지난 8월 독일을 가는데는 16시간을 비행기를 탔습니다.
짧게 걸리든지 오래 걸리든지 이륙하면 착륙합니다. 인생도 언젠가는 내려야 할 때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단순한 마침이 아니라 심판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의 끝은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분명한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심판하시기 위하여 오신다는 것입니다. 32절에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은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분별하신다고 하십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눈다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도 주님의 심판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나눔이 아닙니다. 운동회의 백군 청군이 아닙니다. 줄다리기를 하기 위한 편나누기가 아닙니다. (34절, 41절)
복받을 자들(34절)과 저주받을 자들(41절)을 나누는 것입니다.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을 자들과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갈 자들에 대한 구별입니다.
마지막 절에서 말하는 영생과 영벌을 받을 자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히 9:27에서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그날에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에는 냉정하고 엄정한 심판이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 심판은 단 한번이며 영원한 것입니다. 지금은 모두가 함께 하지만 나누어집니다. 시험에 떨어지면 재수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지금은 서로 다른 학교나 직장에 갔다가도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마지막 때에는 절대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하여 심판이 있은 이후에는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나뉨을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 상속” ”영영한 불”이라는 말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상속은 한 번 주면 영원히 주는 것을 말합니다. 상속은 꾸어주거나 잠시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소유권을 이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 한 번의 기회에 영원한 생명의 나라 축복의 나라로 들어가야 합니다. 반드시 영생의 나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열방의 모든 족속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딤전 2:4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아들을 주셨습니다.
요 3:16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멸망을 길로 가지 말고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욜 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14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끼치사 너희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지금 우리는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의 가는 길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삶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창세로부터 복을 예비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예비된 것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오른편과 왼편, 양과 염소로 나눌 때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오른편에 서야 합니다. 익산의 시민이 모두 오른 편에 서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오른편에 서고 누가 왼편에 서는 것입니까
 셋째로, 분명한 구분의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지신 판단의 기준이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대학에 입학하려면 그 학교에 걸맞는 성적이 있어야 합니다. 회사에 들어가려면 그 회사가 원하는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어제 기독교 신문에 군종장교에 대한 모집광고가 나왔습니다. 3-4가지의 조건이 있었습니다. 나이가 너무 들면 안됩니다. 너무 적어도 안됩니다. 안수를 받았어야 합니다. 다양한 기준에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은 무엇입니까
성경 곳곳에는 구원의 자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작고 가난한 자에게 선한 일을 베푼 사람이 마지막때에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일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리고 가난한 자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이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된다고 하십니다. 구원의 기준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작은 자를 향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러시아의 이야기가운데 주님을 맞이하는 구두수선공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방문이 있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였습니다. 점심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나가보았습니다. 아이를 업은 가난한 여인이 서 있었습니다. 준비된 음식을 침을 흘리며 보고 있었습니다. 불쌍해서 먹으라고 하였더니 게걸스럽게 먹었습니다. 조금 후에 문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더니 거지가 서 있었습니다. 밖은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들어와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음식을 게눈 감추듯이 먹었습니다. 떠나자 마자 불쌍한 소녀가 찾아 왔습니다. 남은 음식을 그녀에게 먹였습니다. 준비한 모든 것이 동이 났습니다. 저녁이 되어서 누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주님은 잘 대접을 받았노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의 모습으로 왔었노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가끔 성도들에게 대접을 받습니다. 목사라고 귀한 것으로 대접해 주시려고 합니다. 양복을 입고 갈 때도 있지만 가볍게 입고 갈 때도 있습니다. 티셔츠바람으로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일하게 대해 줍니다. 목사라고 대접합니다. 주님이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는 어떻게 대접하여야 합니까 목사에게는 많은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약한 사람에게는 인색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사랑의 실천의 대상으로 온 주님의 분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약한 이웃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웃을 돌보아야 합니다.
나그네를 영접하여야 합니다. 벗은 자에게 입혀 주어야 합니다. 병든 자를 돌보아야 합니다.
목마른 자들에게 마실 물을 주어야 합니다.
진정한 경건한 신앙은 성경책을 옆에 끼고 근엄하게 걷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약하고 가난한 자를 향하여 사랑의 쌀을 들고 땀을 흘리면 나누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분명하게 지적하는 신앙은 행하는 신앙입니다. 껍데기 신앙을 경고합니다.
행함이 있는 신앙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약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참된 믿음은 교회안에서만의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모스시대를 향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원하시는 신앙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참된 여호와 하나님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그리하여야 산다는 것입니다. (암 5:4,6)
여호와 하나님의 원하시는 신앙은 예배의 장소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암 5:5)
암 5:5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 절기를 지켜야 한다. (암 5:18, 21)
암 5:18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암 5:21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절기를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가 소용이 없다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성전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세상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암 5:24)
암 5:24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아모스 시대의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믿음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 나름대로의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아닌 것이 문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무엇입니까 억눌린 자를 도와주며 가난한 자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오늘 한국교회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뜨거운 예배, 경건한 예배보다도 세상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믿음의 삶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구원을 받은 사람들과 심판을 받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한 옳고 그름을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왼편에 선 자들은 자신의 잘못된 삶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특히 약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나눔과 베품이 약합니다. 구제에 약한 우리 나라 사람들을 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할까 생각해 봅니다.
지난 주 제주도에 다녀왔습니다. 제주도에는 지금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귤이 넘치는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귤을 거져 먹으라고 줍니다. 밭마다 바닥에 떨어져 굴러다니는 귤이 넘칩니다.
처치 곤란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쌀이 넘칩니다. 귤이 썩어갑니다. 포도가 넘칩니다. 과일이 철마다 넘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풍성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먹지 못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북에는 귤을 맛도 못봅니다. 과일은 꿈도 못 꿉니다.
이 때가 나눔을 실천하라고 주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랑이 나누어지는 세상,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풍성할 때는 쌓아야 할 때입니다. 사랑을 실천하여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을 대접할 때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재물에 대한 분명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재물은 하늘에 쌓아야 합니다.
마 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주님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나누며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번 겨울이 가기 전에 여러분들도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가을 주변의 어려운 분들에게 과일을 나누었습니다. 기쁨을 나눈 것입니다. 지지난 주 탈북자들을 위한 사랑의 실천이 있었습니다. 이번 겨울에 주변의 어려운 이웃에게 쌀을 나누려고 합니다. 함께 나누기를 원하시는 분은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세상입니다. 우리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서로가 모든 이웃을 대할 때에 주님을 대하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 주님이 오실 때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에 반열에 서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 실천되는 그 나라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곳에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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