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인생 결산
본문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아니 한 세기의 마지막 주일이고, 더 나아가 며칠 후면 천년이 뒤바뀔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 해가 저물면 회사마다 손익 결산을 합니다. 이 뜻깊은 시간에 주님의 ‘달란트 비유‘를 통하여 ‘인생 결산‘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먼저 14절 말씀을 봅니다. ‘또 어떤 사람이 갈 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여기서 중요한 말은 ‘맡김‘이라는 단어입니다. 주인은 자기의 소유를 종들에게 맡겼습니다. 소유권이 이전된 게 아닙니다. 아직도 명의는 주인 앞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모든 ‘소유‘는 사실 우리의 것이 아님을 가르쳐 좁니다. 여기의 ‘종‘이라는 것도 ‘고용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소유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도 ‘내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크게 착각을 합니다. 내게 속한 모든 것을 내 것인 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합니다. 인생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주인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주인이 아닙니다.
종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본래부터 소유한 것이 없었고, 가질 수도 없는 신분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맡김으로 주인의 소유를 맡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주인 되신 주님으로부터 맡은 것이 있습니다. 나의 건강도 맡은 것입니다. 나의 생명도 임시로 맡은 잠간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셨고, 여호와 하나님이 거두시면 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 자녀도 맡은 것일 뿐, 나의 것이 결코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재산, 나의 재능, 나의 명예, 나의 지식, 나의 직장, 이 모두가 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통해서 볼 때에, 종으로서 맡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신분을 잘 나타내 주는 말이 ‘청지기‘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인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청지기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소유를 맡길 때 ‘각각 그 재능대로‘ 주었다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according to his ability, ‘그의 능력에 따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인은 나중에 종들과 결산할 때 ‘맡긴 대로‘ 하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모든 사람은 공평하게 심판 받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절대평가가 아니라, 상대 평가라는 의미입니다. 과학 고등 학교나 외국어 고등 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어머니들이 단체로 자퇴서를 제출한 적이 있습니다. 내 자식은 똑똑하고 잘나서 우수한 학교에 다니는데, 왜 내 자식을 절대평가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상대 평가를 해 달라는 말입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끼리만 모여 내신을 산출하니, 상대적으로 일반 학교나 농어촌 학교의 학생들보다 불리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만약 우리가 남긴 결과의 양으로만 심판을 하신다면, 우리에게도 이런 불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주님의 심판은 절대로 공정합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지혜있는 사람들은 더 많이 소유하는 데만 관심을 두지 아니하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남긴 결산 보고를 주님께 드릴 것인가에 깊은 관심을 갖고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기고 타국으로 ‘떠났다‘고 했습니다. 여기 ‘떠났다‘는 말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소유를 맡기고 떠난 주인은 반드시 되돌아 올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이 믿어지는 성도는 정말 복있는 성도인 것입니다. 주인이 되돌아온다는 것은 맡긴 것에 대한 심판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날이 반드시 우리에게도 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심판대에서 웃을 수 있는 성도, 주님의 심판대에서 칭찬 받을 수 있는 신자가 진정 복이 있는 신자인 것입니다.
본문의 두 종은 주인이 다시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기다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맡겨진 일을 열심히 잘하여 주인에게 보고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각기 자신의 심령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정말 기다려지십니까 혹시 다시 오신다는 것조차 잊고 지내는 건 아니신지요 교회사를 보면 시대가 악할수록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방종하여 자신의 배만 위하여 살았습니다. 1999년이 다 저물어 가도록 주님이 오시지 않으니까, 아예 주님의 재림이 없을 것처럼 방심하며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맡은 종 역시 장사하여 두 달란트를 남겼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왜 주인이 그 소유를 맡겼는지를 알았기에, 즉시 가서 장사를 하여 利를 남겼고, 그 맡기신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임을 알았기에 남긴 것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았으며, 주인이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을 알았기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결과 주인이 되돌아 올 때에 그들은 조금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엄청난 칭찬과 어마어마한 복을 받게 됩니다. 주인은 굉장히 부자였습니다. 그는 다섯 달란트(10억)를 주고도 그것을 작은 일이라고 한 것을 보아 알 수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종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더욱더 많은 것으로 맡겨 주셨습니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장차 성도가 받을 하늘 나라의 기업의 부요함과 영광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떠나셨고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 때 모든 사람에게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그 때에 우리의 喜悲가 엇갈릴 것입니다. 한 사람의 눈에서는 기쁨의 눈물이, 한 사람의 눈에서는 슬픔의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본문의 악한 종은 이를 갈며 슬피 울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한달란트를 그냥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결코 탕자와 같이 낭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불의하게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땅에 묻어 두었다가 꺼내어 가지고 왔을 뿐입니다. 그는 본전 그대로인데 책망이야 하겠나 하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악하고 게으른 종아‘ 라고 하면서 심히 책망을 했습니다. 달란트를 묻어 둔 그 자체가 악한 것이요 게으른 죄악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달란트 맡은 종에 대하여 그가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그는 맡은 달란트를 소중히 여기지 못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과소 평가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가정, 자기에게 주어진 자식, 자기에게 주어진 아내, 남편, 직장 등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은, 한 달란트 받았던 종과 같이 실패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불평과 원망과 구실만을 찾습니다. 우리 나라가, 우리 사회가,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내가 못산다고 하면서, 모든 책임을 회피하고, 또한 자기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여 실패하는 것입니다.
어떤 농부가 오랫동안 좋은 농장을 가꾸면서 행복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갑자기 자기의 농장이 싫증이 나서 이것을 팔고 다른 환경의 새 농장을 사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부동산 중개소에 자기의 농장을 내놓았습니다. 부동산 중개소에서는 여러 곳에 광고를 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넓고 기름진 땅, 좋은 농가, 큰 곡식 창고, 이상적인 위치, 최신식 농기구를 갖춘 농장을 팝니다‘
신문 광고를 보다가 이 농부는 ‘아, 이 농장이 바로 내가 원하는 농장이구나‘ 하면서 위치를 자세히 보니까, 바로 자기 농장을 광고한 것이었습니다. 그때야 농부는 자기 농장이 가장 이상적인 농장임을 깨닫고, 매물로 내놓았던 것을 취소하고 그 농장을 잘 가꾸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남의 떡이 커 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천부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한 달란트도 소중합니다. 비록 가진 것 없고 못났다 하더라도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내 자식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은사를 고맙게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소중히 여길 때, 그는 성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만일 내가 저 사람과 같은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만일 저 사람과 같은 머리를 가졌다면‘ ‘만일 내가 저 사람과 같은 학교를 나왔다
면‘ 하면서 ‘만일에‘나 연발하는 사람은, 일생 동안을 허송세월할 뿐만 아니라, 실패를 거듭할 것이 분명합니다.
2.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그는 주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4절을 보면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주인을 구두쇠 노랭이 수전노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불행한 편견이었습니다. 그러기에 26절을 보면 주인이 그의 편견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지적하고 꾸짖었습니다. 편견은 일을 망칩니다.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은 무슨 일던지 부정적으로 이해하고, 그래서 여러 사람과 불화케 합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일들이 결정되고 집행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수의 의사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면, 승복하고 따르는 것이 올바른 신자의 자세입니다. ‘당신들이 별 짓 다해도 나는 반대다‘ 하면서 고집을 피운다든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된다‘ 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독선이며 아집인 것입니다. 서울 시내 번화가에 위치한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허름한 대문 옆에 게시판이 있었습니다. 30여년 전에 어느 권사님이 권사 취임 기념으로 만든 것인데, 재료가 나무인지라 비바람에 썩고 망가져 보기가 흉했습니다. 어느 해 그 교회 집회를 인도하던 목사님이 담임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돈이 들면 몇푼이나 든다고 게시판을 저 모양으로 놔 두셨습니
까. 수많은 사람이 오고가는 길거리인데 그럴싸하게 다시 만들어 세우도록 하십시오‘ 라고 했더니, 목사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느 집사님이 게시판이 보기 흉하다며 50만원 헌금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면 칼라 스텐레스로 틀을 짜고 전기까지 가설해서 잘 만들 수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당장 착수를 하려다가 30년 전에 그것을 헌납하신 권사님이 생각나서 전화를 걸었답니다. 전화를 받고 난 권사님의 대답은 ‘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됩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껏 게시판을 바꾸지 못하고 있노라며 ‘무슨 좋은 해결 방법이 없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한참 생각 끝에 강사 목사님이 ‘방법이 있긴 있습니다만‘이라고 하니까, 담임 목사는 알려 달라고 보챘습 니다. ‘딱 한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오늘부터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무슨 기도를 시작하라는 겁니까‘ ‘주여 그 권사님 눈에 빨리 흙이 들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정 생활이나, 사회생활, 직장 생활이나, 교회 생활을 제고집대로만 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자기 주관이나 주장만을 관철시키려고 해도 안됩니다. 교회 생활의 경우는 자기 주장과 고집이 교회에 유익한가를 생각해야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3. 핑계가 많았습니다.
일을 잘하고 충성하는 사람은 핑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을 안하는 사람일수록 핑계가 많고 말이 많은 법입니다. 헌금 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헌금하는 일에 결코 투정부리지 않습니다. 안하는 사람이 말이 많습니다. 전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전도시킨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기도 생활 힘쓰는 사람도 기도하라는 일에 투정하지 않습니다. 한 달란트 맡은 종처럼 일은 하지 않고, 이것저것 핑계나 하는 사람들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4. 소극적이었습니다.
25절을 보면 ‘두려워하여‘ 땅에 감추어 두었다고 했습니다. 그 뜻은 실패할까 봐 두려웠다는 것이고, 실패한 후에 주인한테 문책 당할까 봐 두려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극적인 사람은 큰일을 못합니다. 풍랑 만나 쩔쩔 매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내니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겁내지 않고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사람이 성공하고 큰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만약의 경우,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최선을 다하다가 장사를 해서 손해를 보고 맨주먹이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래서 주인에게 ‘주인이여 죄송합니다. 주인께서 주신 한 달란트로 최선을 다해 장사를 했지만, 원체 미련하고 둔하고 재주가 없는지라, 그만 그 돈을 다 잃어버리고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라고 했다면 주인은 어떻게 했겠습니까 아마 주인은 그 종을 위로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새로운 기회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를 두려워하고 계산이나 하고 앉았다가, 그는 아무짝에 쓸모 없는 무익한 종이 되고 만 것입니다.
4. 악하고 게으른 종이었습니다.
이 한가지가 모든 것을 설명하고 남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사람이 무엇을 할 수있겠습니까 이태리의 영화 ‘로베레 장군‘이란 영화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유대인 청년들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저항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독립운동을 하던 젊은이들 틈에 그들과 전혀 다른 모리배꾼이 잡혀 왔습니다. 그 모리배꾼은 투덜대며 불평을 합니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유대인도 아니고 그들과 어울려 독립운동을 한 적도 없습니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유대 청년 하나가 이 불평객에게 말합니다. ‘정말 당신의 말대로라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당신의 죄입니다. 왜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까 오래 전부터 전쟁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수많은 도시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한 것입니까‘ 이제 한해가 저물어 가고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지금 이 시간 주님께서 ‘000야! 너는 나를 위해 한해 동안 무엇을 했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무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5. 주인의 뜻을 몰랐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주인이 왜 달란트를 자기에게 맡겼는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만약 주인이 그에게 맡긴 이유가 利를 남기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자 놀이하는 자들에게라도 두었다가 본전과 이자를 받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단지 주인이 주니까 받았지, 왜 맡겼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망하게 된 것입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결국은 심판 날에 책망 받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김을 당하였습니다. 그의 궁극적인 슬픔은 주인의 뜻을 몰랐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진리는‘앎‘이 생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영생은 유일하신 참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정말 중요한 일이 있다면 ‘주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안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을 이를 남긴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남긴다는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주인이 즐거워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알면, 利를 남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인이 즐거워하는 일이란, 곧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에는 그러한 주인의 즐거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이같은 주인의 기뻐하는 심정을 아시겠습니까 오늘 본문 마25:21과 비교해 보십시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주인의 기쁨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되찾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남기는 것은,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하셨던 일의 계속인 영혼 구원과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건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세상의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 계획대로 진행되어져 갑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궁극적으로 도달할 목표는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고 하신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회복입니다. 우리가 받은 재능은 가지가지이고, 우리 인생의 사는 방법도 각양각색이지만, 우리의 단 한가지의 목적은 주인이 맡기신 그 ‘일을‘ 위해 살며, 그 일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 날에 심판대에서 재판장이 되실 주인을 기억하지 못한 채, 인생을 주인이 맡기신 利를 남기는 일에 헌신해야 함을 까맣게 잊은 채, 자기 욕심만을 위하여 살고, 더 많은 부와 명예를 위하여 삽니다. 이런 사람은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지식‘을 가진 자라 보기 어렵습니다. 본문의 악한 종은 그래서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금년 한 해 동안 얼마나 이를 남겼습니까 아니 예수 믿은 후로 지금까지 몇 영혼이나 건졌습니까 우리 모두 언젠가 반드시 주님 앞에서 인생 결산 보고를 할 때가 있다는 것 한시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주신 모든 달란트를 열심히 활용하여, 그 날에 주님께로부터 큰 상급과 칭찬을 받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영원한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먼저 14절 말씀을 봅니다. ‘또 어떤 사람이 갈 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여기서 중요한 말은 ‘맡김‘이라는 단어입니다. 주인은 자기의 소유를 종들에게 맡겼습니다. 소유권이 이전된 게 아닙니다. 아직도 명의는 주인 앞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모든 ‘소유‘는 사실 우리의 것이 아님을 가르쳐 좁니다. 여기의 ‘종‘이라는 것도 ‘고용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소유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도 ‘내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크게 착각을 합니다. 내게 속한 모든 것을 내 것인 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합니다. 인생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주인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주인이 아닙니다.
종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본래부터 소유한 것이 없었고, 가질 수도 없는 신분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맡김으로 주인의 소유를 맡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주인 되신 주님으로부터 맡은 것이 있습니다. 나의 건강도 맡은 것입니다. 나의 생명도 임시로 맡은 잠간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셨고, 여호와 하나님이 거두시면 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 자녀도 맡은 것일 뿐, 나의 것이 결코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재산, 나의 재능, 나의 명예, 나의 지식, 나의 직장, 이 모두가 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통해서 볼 때에, 종으로서 맡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신분을 잘 나타내 주는 말이 ‘청지기‘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인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청지기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소유를 맡길 때 ‘각각 그 재능대로‘ 주었다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according to his ability, ‘그의 능력에 따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인은 나중에 종들과 결산할 때 ‘맡긴 대로‘ 하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모든 사람은 공평하게 심판 받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절대평가가 아니라, 상대 평가라는 의미입니다. 과학 고등 학교나 외국어 고등 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어머니들이 단체로 자퇴서를 제출한 적이 있습니다. 내 자식은 똑똑하고 잘나서 우수한 학교에 다니는데, 왜 내 자식을 절대평가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상대 평가를 해 달라는 말입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끼리만 모여 내신을 산출하니, 상대적으로 일반 학교나 농어촌 학교의 학생들보다 불리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만약 우리가 남긴 결과의 양으로만 심판을 하신다면, 우리에게도 이런 불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주님의 심판은 절대로 공정합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지혜있는 사람들은 더 많이 소유하는 데만 관심을 두지 아니하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남긴 결산 보고를 주님께 드릴 것인가에 깊은 관심을 갖고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기고 타국으로 ‘떠났다‘고 했습니다. 여기 ‘떠났다‘는 말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소유를 맡기고 떠난 주인은 반드시 되돌아 올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이 믿어지는 성도는 정말 복있는 성도인 것입니다. 주인이 되돌아온다는 것은 맡긴 것에 대한 심판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날이 반드시 우리에게도 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심판대에서 웃을 수 있는 성도, 주님의 심판대에서 칭찬 받을 수 있는 신자가 진정 복이 있는 신자인 것입니다.
본문의 두 종은 주인이 다시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기다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맡겨진 일을 열심히 잘하여 주인에게 보고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각기 자신의 심령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정말 기다려지십니까 혹시 다시 오신다는 것조차 잊고 지내는 건 아니신지요 교회사를 보면 시대가 악할수록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방종하여 자신의 배만 위하여 살았습니다. 1999년이 다 저물어 가도록 주님이 오시지 않으니까, 아예 주님의 재림이 없을 것처럼 방심하며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맡은 종 역시 장사하여 두 달란트를 남겼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왜 주인이 그 소유를 맡겼는지를 알았기에, 즉시 가서 장사를 하여 利를 남겼고, 그 맡기신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임을 알았기에 남긴 것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았으며, 주인이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을 알았기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결과 주인이 되돌아 올 때에 그들은 조금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엄청난 칭찬과 어마어마한 복을 받게 됩니다. 주인은 굉장히 부자였습니다. 그는 다섯 달란트(10억)를 주고도 그것을 작은 일이라고 한 것을 보아 알 수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종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더욱더 많은 것으로 맡겨 주셨습니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장차 성도가 받을 하늘 나라의 기업의 부요함과 영광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떠나셨고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 때 모든 사람에게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그 때에 우리의 喜悲가 엇갈릴 것입니다. 한 사람의 눈에서는 기쁨의 눈물이, 한 사람의 눈에서는 슬픔의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본문의 악한 종은 이를 갈며 슬피 울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한달란트를 그냥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결코 탕자와 같이 낭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불의하게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땅에 묻어 두었다가 꺼내어 가지고 왔을 뿐입니다. 그는 본전 그대로인데 책망이야 하겠나 하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악하고 게으른 종아‘ 라고 하면서 심히 책망을 했습니다. 달란트를 묻어 둔 그 자체가 악한 것이요 게으른 죄악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달란트 맡은 종에 대하여 그가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그는 맡은 달란트를 소중히 여기지 못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과소 평가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가정, 자기에게 주어진 자식, 자기에게 주어진 아내, 남편, 직장 등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은, 한 달란트 받았던 종과 같이 실패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불평과 원망과 구실만을 찾습니다. 우리 나라가, 우리 사회가,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내가 못산다고 하면서, 모든 책임을 회피하고, 또한 자기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여 실패하는 것입니다.
어떤 농부가 오랫동안 좋은 농장을 가꾸면서 행복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갑자기 자기의 농장이 싫증이 나서 이것을 팔고 다른 환경의 새 농장을 사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부동산 중개소에 자기의 농장을 내놓았습니다. 부동산 중개소에서는 여러 곳에 광고를 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넓고 기름진 땅, 좋은 농가, 큰 곡식 창고, 이상적인 위치, 최신식 농기구를 갖춘 농장을 팝니다‘
신문 광고를 보다가 이 농부는 ‘아, 이 농장이 바로 내가 원하는 농장이구나‘ 하면서 위치를 자세히 보니까, 바로 자기 농장을 광고한 것이었습니다. 그때야 농부는 자기 농장이 가장 이상적인 농장임을 깨닫고, 매물로 내놓았던 것을 취소하고 그 농장을 잘 가꾸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남의 떡이 커 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천부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한 달란트도 소중합니다. 비록 가진 것 없고 못났다 하더라도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내 자식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은사를 고맙게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소중히 여길 때, 그는 성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만일 내가 저 사람과 같은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만일 저 사람과 같은 머리를 가졌다면‘ ‘만일 내가 저 사람과 같은 학교를 나왔다
면‘ 하면서 ‘만일에‘나 연발하는 사람은, 일생 동안을 허송세월할 뿐만 아니라, 실패를 거듭할 것이 분명합니다.
2.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그는 주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4절을 보면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주인을 구두쇠 노랭이 수전노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불행한 편견이었습니다. 그러기에 26절을 보면 주인이 그의 편견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지적하고 꾸짖었습니다. 편견은 일을 망칩니다.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은 무슨 일던지 부정적으로 이해하고, 그래서 여러 사람과 불화케 합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일들이 결정되고 집행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수의 의사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면, 승복하고 따르는 것이 올바른 신자의 자세입니다. ‘당신들이 별 짓 다해도 나는 반대다‘ 하면서 고집을 피운다든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된다‘ 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독선이며 아집인 것입니다. 서울 시내 번화가에 위치한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허름한 대문 옆에 게시판이 있었습니다. 30여년 전에 어느 권사님이 권사 취임 기념으로 만든 것인데, 재료가 나무인지라 비바람에 썩고 망가져 보기가 흉했습니다. 어느 해 그 교회 집회를 인도하던 목사님이 담임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돈이 들면 몇푼이나 든다고 게시판을 저 모양으로 놔 두셨습니
까. 수많은 사람이 오고가는 길거리인데 그럴싸하게 다시 만들어 세우도록 하십시오‘ 라고 했더니, 목사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느 집사님이 게시판이 보기 흉하다며 50만원 헌금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면 칼라 스텐레스로 틀을 짜고 전기까지 가설해서 잘 만들 수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당장 착수를 하려다가 30년 전에 그것을 헌납하신 권사님이 생각나서 전화를 걸었답니다. 전화를 받고 난 권사님의 대답은 ‘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됩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껏 게시판을 바꾸지 못하고 있노라며 ‘무슨 좋은 해결 방법이 없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한참 생각 끝에 강사 목사님이 ‘방법이 있긴 있습니다만‘이라고 하니까, 담임 목사는 알려 달라고 보챘습 니다. ‘딱 한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오늘부터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무슨 기도를 시작하라는 겁니까‘ ‘주여 그 권사님 눈에 빨리 흙이 들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정 생활이나, 사회생활, 직장 생활이나, 교회 생활을 제고집대로만 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자기 주관이나 주장만을 관철시키려고 해도 안됩니다. 교회 생활의 경우는 자기 주장과 고집이 교회에 유익한가를 생각해야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3. 핑계가 많았습니다.
일을 잘하고 충성하는 사람은 핑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을 안하는 사람일수록 핑계가 많고 말이 많은 법입니다. 헌금 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헌금하는 일에 결코 투정부리지 않습니다. 안하는 사람이 말이 많습니다. 전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전도시킨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기도 생활 힘쓰는 사람도 기도하라는 일에 투정하지 않습니다. 한 달란트 맡은 종처럼 일은 하지 않고, 이것저것 핑계나 하는 사람들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4. 소극적이었습니다.
25절을 보면 ‘두려워하여‘ 땅에 감추어 두었다고 했습니다. 그 뜻은 실패할까 봐 두려웠다는 것이고, 실패한 후에 주인한테 문책 당할까 봐 두려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극적인 사람은 큰일을 못합니다. 풍랑 만나 쩔쩔 매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내니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겁내지 않고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사람이 성공하고 큰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만약의 경우,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최선을 다하다가 장사를 해서 손해를 보고 맨주먹이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래서 주인에게 ‘주인이여 죄송합니다. 주인께서 주신 한 달란트로 최선을 다해 장사를 했지만, 원체 미련하고 둔하고 재주가 없는지라, 그만 그 돈을 다 잃어버리고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라고 했다면 주인은 어떻게 했겠습니까 아마 주인은 그 종을 위로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새로운 기회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를 두려워하고 계산이나 하고 앉았다가, 그는 아무짝에 쓸모 없는 무익한 종이 되고 만 것입니다.
4. 악하고 게으른 종이었습니다.
이 한가지가 모든 것을 설명하고 남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사람이 무엇을 할 수있겠습니까 이태리의 영화 ‘로베레 장군‘이란 영화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유대인 청년들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저항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독립운동을 하던 젊은이들 틈에 그들과 전혀 다른 모리배꾼이 잡혀 왔습니다. 그 모리배꾼은 투덜대며 불평을 합니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유대인도 아니고 그들과 어울려 독립운동을 한 적도 없습니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유대 청년 하나가 이 불평객에게 말합니다. ‘정말 당신의 말대로라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당신의 죄입니다. 왜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까 오래 전부터 전쟁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수많은 도시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한 것입니까‘ 이제 한해가 저물어 가고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지금 이 시간 주님께서 ‘000야! 너는 나를 위해 한해 동안 무엇을 했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무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5. 주인의 뜻을 몰랐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주인이 왜 달란트를 자기에게 맡겼는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만약 주인이 그에게 맡긴 이유가 利를 남기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자 놀이하는 자들에게라도 두었다가 본전과 이자를 받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단지 주인이 주니까 받았지, 왜 맡겼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망하게 된 것입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결국은 심판 날에 책망 받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김을 당하였습니다. 그의 궁극적인 슬픔은 주인의 뜻을 몰랐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진리는‘앎‘이 생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영생은 유일하신 참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정말 중요한 일이 있다면 ‘주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안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을 이를 남긴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남긴다는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주인이 즐거워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알면, 利를 남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인이 즐거워하는 일이란, 곧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에는 그러한 주인의 즐거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이같은 주인의 기뻐하는 심정을 아시겠습니까 오늘 본문 마25:21과 비교해 보십시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주인의 기쁨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되찾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남기는 것은,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하셨던 일의 계속인 영혼 구원과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건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세상의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 계획대로 진행되어져 갑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궁극적으로 도달할 목표는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고 하신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회복입니다. 우리가 받은 재능은 가지가지이고, 우리 인생의 사는 방법도 각양각색이지만, 우리의 단 한가지의 목적은 주인이 맡기신 그 ‘일을‘ 위해 살며, 그 일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 날에 심판대에서 재판장이 되실 주인을 기억하지 못한 채, 인생을 주인이 맡기신 利를 남기는 일에 헌신해야 함을 까맣게 잊은 채, 자기 욕심만을 위하여 살고, 더 많은 부와 명예를 위하여 삽니다. 이런 사람은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지식‘을 가진 자라 보기 어렵습니다. 본문의 악한 종은 그래서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금년 한 해 동안 얼마나 이를 남겼습니까 아니 예수 믿은 후로 지금까지 몇 영혼이나 건졌습니까 우리 모두 언젠가 반드시 주님 앞에서 인생 결산 보고를 할 때가 있다는 것 한시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주신 모든 달란트를 열심히 활용하여, 그 날에 주님께로부터 큰 상급과 칭찬을 받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영원한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