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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 한 해를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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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년 한 해를 보내며 뒤를 돌아 볼 때 두 가지 감회에 잡히게 됩니다.
하나는 多事多難 했다는 것입니다. 금년 한 해가 가까이는 제 개인으로 多事多難 했습니다.
교회적으로 어느 해 보다도 多事多難 했습니다. 우리 나라도 정말 어느 해 보다도 多事多難한 한 해였습니다. 세계적으로 정말 多事多難 하였고, 큰 사고가 아주 많은 한 해였습니다.
그 다음 하나는 늘 아쉬움을 남기면서 한 해를 보냅니다. 그렇습니다. 해마다 느끼지만 ”금년은 제대로 되었다, 그런 대로 아쉼이 없다” 하기 보다는 늘 아쉬움을 남기고 새해를 맞이합니다.
좀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더라면, 좀 더 열심히 맡은 일을 했더라면, 좀 더 열심히 이웃과의 관계를 잘 했더라면, 좀 더 열심히 하는 아쉬움이 남지 않습니까
가정에서는 좀 더 아버지 노릇, 어머니 노릇, 자식 노릇을 잘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직장이나 사업에서도 그런 아쉬움이 많은 분이 아마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아쉬움의 생각이 들자 곧 금년의 종착에 왔습니다. 이제 우리의 일생에 영원히 다시 못 올 2001년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여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맘 때쯤 되면 주로 마25장의 달란트 비유의 설교를 통하여 마지막 주일을 지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누가복음10장의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를 통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을 상고해 보면 최악에서 최악으로 산 사람과, 최선에서 최선을 산 사람과, 최선에서 최악으로 살아간 사람과 최악에서 최선으로 살아간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금년을 보낸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1. 최악에서 최악으로 살아간 사람
오늘 성경의 여리고 골짜기는 곧 이 세상의 사람 사는 이야기의 현장입니다. 빼앗으려 하는 사람에 안 빼앗기려다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 구경꾼, 양심의 호소도 묻어 둔 채 멀쩡하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사는 사람, 그래도 사람같이 사람 노릇하며 산 사람, 가지가지의 사람이 다 있으므로 이 골짜기야 말로 사람 사는 이야기 골짜기 인 것입니다.
이 골짜기에서 최악에 최악으로 살아간 사람은 ’강도’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최악에서 최악으로 산 사람이 우리 주변에 나타나거나 매스컴에 오르내리면 우선 부모를 잘 못 만났느니, 가정에 좋지 않다느니, 환경이 어떠하다느니, 친구관계가 어떻다느니 라고 심리적,사회학적 분석을 합니다. 그리고는 연구해서 근사한 것이라도 발견되면, 그 사람이 그렇게 된 것은 그의 책임이 아니라는 둥 그럴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이라는 둥 하며 부모에게 책임을, 사회에 책임을 돌려 결국에는 동정으로 변하게 유도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여러분, 분명한 것은 그것은 결코 합리화 될 수 없고 책임을 전가 할 수 없는 엄연한 악의 존재입니다. 따라서 최악을 최악으로 산 것이 결단코 합리화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평가하고 책임전가 한 것이 그 날 그 여리고 골짜기에서 또 선량한 시민 한 사람이 치명상을 입은 것 아닙니까
오늘날도 살인강도들에게 무슨 어떤 내용으로 변호를 하겠다고 변호사들이 벌 떼 같이 달려 드는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금년의 아쉬움 속에 만에 하나 최악의 나의 환경을 최악 그대로 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으로 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기 어려운 최악의 조건이었다고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최악의 환경이었다고 지나 버린 나의 신앙생활의 아쉬움이 결코 여호와 하나님께는 합리화 할 수 없습니다. 어려워도 했어야, 힘들어도 했어야, 그래도, 그랬어도 했어야 했습니다. 신앙선배들은 그래서 순교의 영광을 받았습니다. 여기에는 신앙의 물질생활, 기도생활, 봉사생활, 전도생활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나의 가정생활, 나의 대인관계, 나의 직장생활을 다 최악의 환경이었기에 아쉬움이 남는결론입니까 역시 이 모든 것도 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실제로 인정 받지 못할 구차한 변명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들이 구차한 변명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자신을 위한 일은 최악의 환경에서 최선으로 산 것이 얼마나 많은가
네 가족을 위해서 네 위신과 체면을 위해서, 심지어 네 건강을 위해서는 최악의 경제 사정에서 최선으로 살았지 않았는가 최악의 시간 사정에서 최선의 시간을 보냈지 않았는가 하고 말씀하십니다. 환경이 나쁘기 때문에 나쁘게 살아간다는 것은 또 다른 최악을 만드는 결과입니다.
최악에서 최악으로 살 수 밖에 없다고 부모를 탓하고 환경을 탓하고 사회를 탓할 때에 이해는 되지만 찬성은 할 수 없다는 것이 여기 여리고 골짜기의 강도란 사람의 삶입니다. 이는 그가 어떤 이유를 말해도 어느 누구도 동의 할 수 없는 삶인 것입니다. 금년의 내 삶에서 나의 신앙생활에서 또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이 해를 보내야 한다면 최악에서 최선으로 살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 드려서 새해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최악을 최선으로 살아가는 기대되는 한 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다음으로 이 여리고 골짜기에는 최선을 최선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주막 집 주인입니다. 참 고마운 사람입니다.
연말연시를 맞이하여 눈물 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금년에도 유난히 그런 따뜻한 사람들 이야기가 많이 전해졌습니다. 그들 중에는 자기 일생을 부모없는 사람들, 길거리의 자식들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었고, 어렵고 어렵게 모은 재산을 불우이웃을 위해 선뜻 내어 놓는 가슴, 뜨거운 사람들 이야기도 있습니다. 얼굴없는 큰 손 봉사자도, 없는 시간을 짬짬이 내어 불우한 사람들의 손과 발이 되어 주는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들도 있었지 않습니다.
언뜻 생각 할 때 최선에서 최선으로 살아가는 것이야 당연하지 않나, 무엇이 고마우냐고 라고 생각 할 수 있지만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시간이 있다고 다 어려운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는 시간으로 사용하며 살았느냐 묻는다면 오히려 나를 위해 쓴 시간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낭비한 시간은 얼마나 많았으며 그 시간에 대하여는 무어라 할 말이 있겠습니까
물질이 있다고 같이 나누어야 할 사람들에게 나눔의 물질이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결코 그런 것이 아님을 우리도 잘 압니다.
돈이 많으니 가정교사를 두고, 가정교사를 두니 성적이 올라가고, 성적이 올라가니 일류대학 진학도 하고, 유학도 한다. 그래서 행운아가 되고, 명사가 되기 때문이지 그게 뭐 그리 신기한 일인가
여러분,
조건이 좋다고 해서 다 좋게만 되어지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주막집 주인이 아무런 대가도 없이 강도 만난 사람에게 간호를 했겠느냐고 말하실 분이 있지만
여러분,
협잡과 사기가 판을 치는 세상에 받은 대가만큼 이라도 봉사해 준다면, 받은 월급만큼 이라도 일해 준다면 그는 너무나 고마운 사람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당연한데도 너무나 희귀한 현상이 오늘의 여리고 골짜기입니다.
최선에서 최선을 살아가는 그 당연한 삶이 오히려 아쉬운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최선에서 최선의 당연한 삶을 살아도 아쉬움의 삶은 되지 않았을 것이기에 또 아쉬움을 남기는 이 해를 보내야 합니다. 새해에는 당연한 것은 당연한 것이 되게 기도 드립시다.
3. 오늘 이 여리고 골짜기에는 최선에서 최악으로 산 사람이 있으니 두고 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제사장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은 불행한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이는 분명히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는 가끔 내가 모든 사람들이 나의 삶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는 지를 생각해 봐야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불행한 길로 가는지를 모르고 있을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여리고 골짜기의 이 제사장은 최선의 환경이요, 최선의 사명자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달려가야 할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본능적인 사명도 감당하지 않으면서 나의 가는 길이 탄탄대로처럼 여기는 것, 그 사람이 모든 사람이 볼 때 불행한 사람입니다.
당시의 제사장은 국민의 십일조로 살아가는 사람이며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고귀한 직책을 위탁받은 자로서 만인의 흠모의 대상이 되는 최선의 조건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여리고의 골짜기에서 실제적인 불한당(不汗黨)이 된 것은 그 사람의 본능적 사명마저 감당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목사의 본능적 사명, 장로나 권사와 안수집사의 본능적 사명은 최소한 이행해야 여러 사람들이 안타까워 하는 사람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성도로서의 본능적인 삶, 가장으로서, 가정의 살림을 책임진 주부로서, 직장인으로서, 사회의 일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의 본능적인 직책을 최소한으로라도 감당할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보실 때나, 나를 아는 사람이 볼 때에 안타까움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은 사명감이 없는 사람은 최선의 조건 속에서도 최악을 저지르기 쉬운 것입니다.
금년 한 해를 돌아 볼 때에 이런 점에서 특히 우리 그리스도 교인들이 너무나 아쉬움을 남기는 삶이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 교인들은 먼저는 본능적인 사명을 받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께 받은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 편에서와 세상 사람들 편에서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향한 주문과 기대가 많기 때문에 더 더 그렇습니다.
물질과 시간을 요구하는 곳이 많고, 나의 재능과 힘을 요구하는 곳이 많았던 한 해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요구와 여호와 하나님의 기대에 너무나 미치지 못한, 즉 본능적 사명마저도 감당치 못했기 때문에 최선을 최악으로 산 결과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하며 새해에 이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4. 최악에서 최선을 살고 간 사마리아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런 인생, 이런 사람의 한 해는 돌아보면 볼수록 은혜요, 감사요, 축복인 줄 믿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사람의 행한 일만 들고 알아도 은혜가 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당시의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마치 사람이 짐승 대하듯 한 시대였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의 현장은 이런 최악의 경우는 없지 않습니까
그는 먼 길에 갈 길이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사람은 최악에서 최선을 살다 간 사람의 대표입니다. 그는 여리고 골짜기라는 최악의 장소에서, 지치고 피곤한 최악의 시간에, 그리고 시대적 배경으로 그는 천대받던 사마리아인 이라는 최악의 상태에서 최선의 봉사로 베풀었습니다. 상식과 본능적 사명을 초월한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삶에 이런 점이 있을 때 보람된 삶인 줄 믿습니다. 삶에 이런 점이 있을 때 한 해를 보내면서 아쉬움이 없게 됩니다. 이런 사람의 이야기는 전해지는 곳마다 듣는 사람마다 다 부러워 하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내년에는 이런 사람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여호와 하나님께 도움을 청합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기도에는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어떤 면으로든지 한 가지라도 남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면 참 잘 살은 삶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그런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 있는 분들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신앙에서 남의 본이 되는 신앙생활, 가정살림살이도 본이 되는 가정생활, 직장에서도 남의 본이 되는 직장생활. 그런 분들은 참 잘 사신 한 해가 된 것입니다.
저는 어느 정도는 압니다. 교회에서, 직장에서, 가정생활에서 상당한 사람들이 칭찬하거나 부러워하고 있음을 압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이 다 아실 줄 믿습니다.
이는 최선에서 최선으로 산 사람이 아니라 최악에서 최선으로 산 사람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 결코 환경이나 부모 잘 만나고 못 만나고 한 것이나 사회적 여건이, 최악을 최선으로 살 수 있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결국 최악에서 최악으로 사는 것은 불쌍한 삶이요, 최선에서 최악으로 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요, 최선에서 최선으로 살면 좋고, 최악에서 최선으로 살면 가장 좋은 삶입니다.
금년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는 이 시간 뒤를 돌아보면 흡족하지 못한 우리들의 삶이 상당히 아쉽게 느껴집니다. 최악의 조건을 최선으로 살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바라는 바인 줄 믿습니다.
우리 이렇게 살기를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십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분명히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저는 송구영신예배 시간에 이 능력을 구하려 생각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의 삶을 돌아볼 때에 안타까워하지 않고 그래도 괜찮다고, 더 나아가서는 좋은 본이 될 수 있게 사는 2002년이 되도록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 드립시다.
삭개오도 잘 된 사람이요, 수가성의 여인도 참 잘 된 인생입니다. 더구나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 최선에서 최악으로, 최악에서 다시 최선으로 산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합시다. 최악을 최악으로 살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최선에서 최악으로 살면, 즉 본능적 사명감이 낙제하는 삶은 부끄러운 일이요, 최선에서 최선으로 살면 그저 좋고, 최악에서 최선으로 살면 더욱 좋은 삶인 줄 믿습니다.
새해에는 더욱 좋은 삶이 되도록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십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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