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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 나무 뿌리 곁에 놓인 도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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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무얼 쫓느라 그리 바쁜지,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무엇에 쫓기느라 정신이 없는지 분주하게 살다보면 시간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됩니다. 하루는 고사하고 달력을 넘기면서야 시간의 흐름을 짐작할 뿐 대개의 경우 무감각하게 많은 시간이 흘러가곤 합니다.
어느새 봄 시작했다 싶은데 이내 여름이 되고, 여름인가 싶게 가을이 가고, 그리고 겨울이 오면 또 한 해가 가고, 언젠가부터 세월은 아예 우리를 비껴가듯 아무런 느낌도 없이 저만의 속도로 지나가 버리곤 합니다. 잠을 자다 머리맡에 떨어진 사과에 놀라 토끼가 뛸 때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고 덩달아 뛰던 숲 속 동물들이 우리들 모습일 때가 많습니다.
가을 추수 때가 되면 어렵지 않게 들었던 말 중에 ’미발이’와 ’빈대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발이와 빈대콩이라는 말이 사전에 나와 있는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이가 지긋한 마을 어른들은 추수 때가 되면 미발이와 빈대콩 이야기를 흔하게 하곤 했습니다. 제가 짐작하는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빈대콩’은 이름 그대로 빈대처럼 생긴 콩을 의미할 것입니다. 깍지 속에 빈대처럼 자리 잡은 납작한 콩, 익다가 만 콩 말입니다. 제대로 익어야 야무진 콩이 되는데, 익다가 만 콩은 겨우 콩의 모양을 갖춘 채 납작하게 자리를 잡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더 두면 더 자랄 형편도 아닙니다. 서리가 내리면 추수를 미룰 수가 없어 서둘러 모든 것을 거둬들여야 하기에 더 이상은 시간의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미발이’는 미발(未發)에서 온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충분히 익지 않은 곡식들을 이르는 말이겠지요. 제 짐작이 틀리지 않는 것이라면 미발이와 빈대콩은 익다가 만 곡식, 익다가 만 콩을 이르는 말일 터인데 미발이와 빈대콩은 그런 이유로 소용이 애매합니다. 버리자니 아깝고, 먹자니 먹을 수가 없어 천상 짐승의 먹이가 될 뿐입니다.
익다가 만 애매한 상태, 미발이와 빈대콩 이야기가 재미있고 편하게만 들리지 않는 것은 우리의 삶이 그러기가 얼마나 쉬울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서도 철없이 살다가 애매한 상태로 마감하는 생이 적지 않겠다 싶기 때문입니다. ’철들자 망령’이라는 속담은 그런 가능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허전하기 그지없는 삶, 미발이와 빈대콩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 부주하게 살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미발이와 빈대콩처럼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의 신자들을 두고 세례 요한을 통해 주신 말씀이 오늘 읽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고 꾸짖었습니다. 꾸중을 들은 사람들이 누군가 하면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이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했을까요 왜 이런 모진 소리를 했을까요 상식적으로는 세례를 받으러 나온 사람들에게 칭찬을 해주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사실 독사의 자식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사단, 마귀의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사단과 마귀의 자식이라면 아직도 온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식이 아니라면 결국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독사의 자식이라고 일컫는 이유를 알 수 있는 내용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호와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회개하지 않고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한 말입니다. 스스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면서 선민의식이 가득 차 있는 교만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인가 오늘 본문 말씀이 마태복음3장 7-10절에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내용보다 마태복음의 내용이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본문의 말씀을 하기 전의 상황을 마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3장4-6절 말씀입니다.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여기에 보면 여러 지방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자기들의 죄를 자복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세례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한 것을 보면 회개하지 않고 오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구군지 누가복음에서는 모르지만, 마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일부가 회개도 없이 다른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니까 따라 온 것입니다. 아직도 이들에게는 형식적인 율법준수와 세속적인 명예심 등으로 부패한 마음이 된 상태에서 달라진 것이 없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습니다.
열매를 맺으라고 한 것은 회개했으면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을 통해서 크리스천이라는 무늬만 만들어 놓고 모양은 나타나지 않는다면 물세례를 받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믿는다는 증표는 회개의 증표가 있어야 합니다. 이 증표는 결국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 생활은 버리고 새 사람이 된 모습이 보여야 합니다.
사도행전26:20 “회개하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고 하였습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는 것은 잘라버릴 때가 다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나무를 잘라버립니까 좋은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어떤 나무라도 잘라버리겠다고 했습니다. 나무의 종류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다만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 나무마다 찍어버린다고 했습니다. 목사 나무냐, 장로 나무냐, 집사 나무냐, 권사 나무냐, 서리집사 나무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나무라도 열매가 충실하지 않으면 찍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잘라내어서 불에 던져 버린다고 했습니다. 결국 ‘열매 없는 회개’는 없고, ‘회개 없는 구원’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존재 이유와 목적은 열매를 맺어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열매 맺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필수과목을 놓치면 안 됩니다. 필수과목은 한 과목이라도 낙제하면 졸업을 할 수 없습니다. 성도가 회개의 합당한 열매가 없는 삶이라면 그것은 온전한 믿음이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믿음이라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는 말을 속으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믿음 좋은 아버지, 어머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이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독사의 자식들이라 칭함을 받았던 무리들이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독사의 자식이 안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솔직한 물음입니다. 요한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11-14절 말씀입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요한의 대답 속에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무슨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오늘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졌다 하면서도 혹시라도 회개의 열매가 없는 삶이 있다면 이런 유형의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좋은 열매의 삶은 어떤 삶인가
 첫째,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11절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자신에게 여유가 있다면 없는 자들에게 반드시 나누어 주라고 하였습니다. 이웃이 헐벗었을 때에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이기도 합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레위기19:18말씀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우리가 두 벌 옷이 있을 때 한 벌 남겨놓고 나머지 한 벌을 내어놓는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많은 것 가운데 일부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둘 있는데 하나를 내어놓는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먹을 것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먹을 것이 있거든 먹을 것이 없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에게 준 율법, 가나안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율법에서는 더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15장 7에 보면,
“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그러면서 9절 하반절에 보면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의 요구를 아무런 이유없이 거절하면 죄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10절에 보면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심어놓으면 언젠가는 거두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한 경제인이 있었습니다만 여기서 할 일이라고 할 때 경제적인 일도 중요하지만 사랑의 손길을 펼 수 있는 일들도 많습니다.
전주에 ‘얼굴 없는 천사’가 8년째 선행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신문보도가 있었습니다. 2000년 4월에 전주 중노2동 사무소를 찾은 한 사람이 58만4천원이 든 돼지저금통을 놓고 사라졌습니다. 이듬해12월26일에는 74만원의 성금이 익명으로 전달되었습니다.
2002년 5월5일 어린이날과 12월에 두 번에 걸쳐서 저금통이 건너졌습니다. 금년에는 지난 27일 11시쯤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에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는데 ‘지하 주차장 입구 화단에 가보라’는 말만 남겼고, 직원이 화단에 갔을 때는 상자 안에 1만 원짜리 2000만원과 29만8100원이 든 돼지저금통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번까지 전체 아홉 차례인데 돈을 합하면 5천4백3만1천원이라고 합니다. 얼굴도 이름도 전화도 전혀 모른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다 압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삶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열매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당신은 금년에 사랑의 열매를 얼마나 맺었는지 당신의 삶의 나뭇가지를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열매가 없으면 도끼가 놓여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나무뿌리에 도끼가 놓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둘째, 공의의 열매를 맺으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세리들이 요한을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12절 말씀에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이때에 요한은 세리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정당한 방법으로 거두라고는 것입니다.
세금을 과도하게 거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법을 어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이 이렇게 말하게 된 것은 배경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로마에 지배를 받고 있어서 세금을 거두어서 로마로 보냅니다. 그런데 세리들은 정한 법보다도 더 많이 거두어서 로마에 일부 보내고 자신들이 착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위를 남용하거나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지나친 과세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평하게 정의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 힘을 가진 자들을 향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래위기19:35-36절에 보면 “너희는 재판할 때나 길이나 무게나 양을 잴 때 불의를 행하지 말고 /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
잠언11:1에도 보면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공의로운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공의로운 삶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오늘 한국 사회에 공의로움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안 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는 세상입니다.
 돈 줄을 대면 안 되는 것도 되고, 돈줄이 없으면 되는 일도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에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요즘 삼성 그룹의 비자금특검법이 발휘된 것이 이런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신은 공의의 열매를 맺었습니까 공의의 열매가 풍성하길 바랍니다. 공의의 나무뿌리에 도끼가 놓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셋째, 감사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요한 당시에 세례를 받으러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이제 세리들이 찾아왔습니다. 14절에 보면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결국 권세를 잡아서 권세를 행세하려고 하는 이유는 욕심 때문입니다. 왜 세금을 더 거두고 군인들이 힘으로 억압하여 빼앗고, 거짓으로 고발해서 서민들을 울리고 가진 것을 탈취하려는 것이 당시 군인들의 모습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군사정권 때 군인들의 힘은 막강했습니다. 군부의 독재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약소국가들은 대통령을 무서워합니다. 국군통수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힘을 가지고 강탈하면 안됩니다.
강탈을 왜하느냐 욕심때문입니다. 자기의 것으로 만족하면 절대로 더 가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더 가지지 않으려고 하면 횡포를 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은 항상 감사의 삶을 살게 됩니다. 감사가 있어야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감사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당신의 나무에 감사의 열매가 없어서, 아니 충실하지 못해서 도끼가 놓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내용 전체를 보면 결국 재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하는 것도, 공의를 행하는 것도, 만족하는 것도 물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질이 필요악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재물은 좋은 점도 많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열매로 나타나는 데는 역시 재물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열매 없는 나무는 심지를 말고, 의리 없는 친구는 사귀지 말라. ” 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든 식물이든 잠깐의 감탄이 지속적인 감동으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저마다의 향기와 생명이 있어야만 합니다. “향기와 생명이 깃들지 않은 화려함은 오히려 천박하고 경멸스럽다. ”고 했습니다.
좋은 열매는 향기도 좋습니다. 잘 영근 생명의 씨앗이 그 안에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사람에게서는 좋은 향기가 납니다. 한 순간에 머물지 않고 지속적으로 그만의 향기를 냅니다. 사람에게 향기가 없으면 생명력을 잃은, 열매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이제 2007년도 역사 속으로 사라져갑니다.
이틀 남았습니다. 적자인생이든 흑자인생이든 결산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도끼가 내곁에 놓여서야 되겠습니까 추수하는 손이 기다리고 있고 열매 담을 광주리가 곁에 있을지언정 도끼가 곁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 곁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도끼인가, 광주리인가 도끼인가,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의 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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