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TOP
DOWN

[송구영신] 주의 율법을 좇아

본문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 해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약속들을 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약속을 어기며 살았습니까 미국에 살면서 자동차를 lease해서 산 적이 있습니다. 자동차를 도둑 맞은 후 차 성능이 좋지 않아서 lease를 깨려고 dealer를 찾아갔습니다. 자동차를 산지 몇 개월 안 되는 시기였는데, lease를 깨려면 만여 불을 벌금으로 지불하고, 자동차를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약속을 깨는 가격이 자동차를 새로 한 대 사는 가격이었습니다. 약속을 어기면 그렇게 큰 벌금을 낸다는 것을 깨달도록 해주었던 경험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얼만큼 하님과의 약속을 심각하게 생각하는지요 자동차 lease한 것만큼이나 심각하게 생각을 하는지요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과 한 약속을 깨는 일을 자주 범하면서도 별 양심의 거리낌도 없고, 또 약속을 어기는 의식이 있으면서도 (실은 이런 자세가 더 심각한 것이지만) 금방 회개하면 된다는 안일한 자세를 취하는 적은 없지는 않습니까
율법을 좇다
오늘 본문은 베들레헴에서 나시고 “할례할 팔 일이 되매”(21절)로 시작합니다. 할례를 출생 후 팔 일째 하도록 율법에 명시하고 있습니다. (참고: 레 12:1-8) 22절에는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여자들은 출산하고 난 후 40일 후에 그들의 피가 정결케 하는 의식을 받았습니다.
가만히 예수님의 탄생 전후로 해서 성경 구절을 찾아보면 한결같이 율법을 좇아 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1절부터 보면 할례받는 것도 법대로 했으며, 22절의 정결식 역시 법대로 하였습니다. 또한 23절에는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라고 나와 있으며, 24절에는 “또 주의 율법이 말씀하신대로”, 그리고 27절에는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9절에는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예수님의 탄생 이후의 모든 기록들이 한결같이 율법에 따라 행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예수님의 유아 시절이 처음부터 끝까지 율법에 따라 행하고 있음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인물을 뽑으라고 한다면 예수님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의 유아기에 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12살 때 성전에 가신 얘기 외에는 예수님에 대한 대부분의 기록들이 모두 3년 공생애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외경에 보면 예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이 조금 나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단종파에 의해 쓰여졌기 때문에 신빙성이 없습니다. 거의 모든 복음서들이 예수님의 마지막 3년의 공생애 기간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심지어 요한복음은 책의 2/3이상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마지막 한 주간에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짤막한 예수님의 유아시절에 대한 모습은 우리에게 뭔가 의미심장한 내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유아시절의 핵심은 바로 “율법을 좇은” 삶이었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 계약/약속
성경에 나오는 율법은 한 마디로 여호와 하나님과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이요,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한 약속입니다. 이 율법을 어기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는 일, 계약위반, 파괴요,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계약이행, 약속을 지키는 행위입니다. 약속이라고 해서 단지 철없는 아이들이 손가락 걸고 하는 약속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생명을 걸어야 하는 심각한 계약, 혹은 언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근동지역 당시 히타이족속(the Hittite)들의 계약은 주로 주종계약이었습니다. 강대국과 소국의 계약 문서가 발견되어 보니까 그 계약서에는 1) 계약전문(契約前文)(주로 계약자의 이름을 밝힘), 2) 역사적 상황설명, 3) 계약조건명시, 4) 서약(oath), 5) 벌칙조항(sanction), 6) 승인예식(ratification), 7) 공포의 순서로 계약을 맺고 있습니다. 실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계약을 맺을 때 이러한 방법을 쓰는 것을 본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계약하시겠음을 알리는 것이다.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와 시내산에서 언약(계약)을 맺는 십계명을 보면 그 순서가 아주 흡사합니다.
먼저, 계약자의 이름을 밝히고(출 20:2 “나는 너를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로다”), 그 역사적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계명이 주어진 다음 벌과 복이 선포되어집니다. (신 11:26-28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며 저주를 받으리라").
이것 다음에 계약체결 예식을 행합니다. 출 24장에 이 부분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출 24:6-8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출 24:6-8)
언약을 맺을때는 피가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계약/언약의 뜻으로 berith입니다. Berith는 자르다라는 의미입니다. 짐승을 잘라 피를 내어 계약서에 싸인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할례의식이 중요성을 갖습니다. 자르면서 계약을 체결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할례의 기원은 아브라함입니다 (창 17: 9-10,14 "여호와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따라서 계약체결의식으로써 할례는 축복과 저주의 양면성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구별하여(잘라내어) 여호와 하나님께 성결하게 드린다는 의미임과 동시에, 불순종하였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잘라져 나간다는 저주, 죽음의 의미가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평이한 표현으로 바꾸어 본다면, 약속을 어기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잘라져 나가는(cut off) 것이요, 양피가 떨어져 나가듯,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모든 유익과 축복 또한 떨어져 나간다는 의미입니다.
죄인과 동일화작업 및 대표성 작업
예수께서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율법 아래로 내려 가셨다는 것이다. 약속을 지키면 복을 받고, 약속을 어기면 저주를 받는 사인인 할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친히 죄인들과 똑같이 자신을 낮추시고, 율법의 저주 아래 자신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는 것과 같은 상징입니다. 죄용서를 받아야 할 필요성이 있는 죄인들이 받는 세례를 예수님께서 직접 ‘죄인’된 모습으로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으신 주님께서 죄인처럼 그 자리에 오신 것은 죄인과 동일화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에는 죄인들과 동일화(identified)되신 것 외에 더 큰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의 모습으로 직접 세례를 받으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들과의 계약에 참여하시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약속을 지키면 예수님 혼자 축복받고, 예수님이 약속을 어기면 예수님 혼자 저주를 받는 차원이 아니라 예수님이 잘하시면 우리 모두가 잘하는 것이 되고, 만약에 그가 실패하게 되면 우리 역시 실패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여호와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겨서 세상에 저주가 들어 왔다면, 새 아담 예수님에 의해 약속이 지켜지고 인간을 향한 저주가 다시 들리움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요, 예수님의 완성이 우리의 완성이요, 예수님의 업적이 바로 우리의 업적이라는 대표성의 의미였습니다. 죄인들과의 동일성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을 대표하는 대표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점을 로마서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7-9).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
한 가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이 할례를 받으신 것은 죄인과 동일화 작업이고, 우리를 위한 대표적인 행위이심과 동시에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 편에서 또한 보증으로 나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계약은 쌍방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쌍방 계약에서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증으로 내 놓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을 깨면 이 예수를 내놓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 6:17-20)
우리가 맺은 계약은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맺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보증인이 되신 예수께서 직접 우리를 대신해서 계약을 체결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과 맺였던 계약을 어길 때 그 모든 책임을 우리에게 묻지 않으시고 대신 보증인이신 예수님에게 그 모든 책임을 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우리가 계약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모든 책임을 지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바로 십자가의 할례라고 말합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여호와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11-15)
예수 그 이름
예수님의 이름은 이미 마리아 앞에 나타난 천사에 의해 선포되었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0-21)
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은 할례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불려졌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이름은 오직 할례를 당한 후에만 불리어 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떨어져 나간 그 순간에 그의 이름이 주어지며,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피를 흘리는 그 순간에 그의 이름이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의 반석되시며, 능력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시인하면 구원에 이릅니다. 예수의 이름이 우리의 구원이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뇌성마비 환자 송명희 시인은 그녀의 주옥같은 시 중에 이렇게 예수의 이름을 적어갑니다.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 내게 있는 비밀을, 그 이름 내게 있는 사랑을, 그 사랑을 말할 수 없어서, 그 풍부함 표현 못해서, 비밀이 되었네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
그 풍부함 표현 못해서 비밀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계약을 파기하는 자이고 예수님은 계약을 지키시는 자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구원은 풍부한 것입니다. 어디에서 탈출의 의미만 가진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떠내가는 물에서 건짐을 받은 것, 불타는 집에서 겨우 탈출하여 목숨을 건진 것만이 아닙니다. 표현을 못해 비밀이 될 정도의 풍부한 것입니다. 출애굽의 의미도 있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한 승리의 행진이 구원입니다. 거짓말 안하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참말을 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도둑질 안 하는 것이 구원의 전부가 아니라, 남을 부유하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우리의 몸을 죄의 병기로 드리던 것을 그만 하는 것이 구원의 전부가 아니라, 이제는 우리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만약 사랑하는 아들이 학교에서 구걸하며 감자칩이나 사먹는다면 부모된 자로서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부모님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닙니까 감자칩 하나 때문에 치사하게 친구에게 구걸이나 하고, 친구가 원하는대로 잔심부름만 한다면 그것은 부모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행동인 것입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가진 것을 모르고 행하는 치졸한 행위입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가진 것 모르고 치사하게 줄서서 잔심부름해서 먹고사는 인생은 사실 우리들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기껏하게 잔돈벌려고 치사하게 살아가는 인생이 우리들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물어봐도 답답하고 대답할 여유도 없고 뭣이 그리 바쁜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지 못하고 그냥 땅만 보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동서독이 통일되기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동독 사람들이 동독과 서독 국경지대에 동독에 있던 모든 쓰레기를 몽땅 갖다 놨어요. 서독사람이 얼마나 약이 오르겠어요. 장군멍군이다 그런 식으로 서독에 있는 모든 쓰레기를 국경에 있는 지대로 다 갖다 놓으려다가 생각을 바꿨습니다. 그리고는 국경지대에 과일 통조림을 잔뜩 실어다 갖다 놨습니다. 그리고는 작은 팻말에 이렇게 써 붙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준다”
맞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주는 것입니다. 왜 안나옵니까 없어서 안나오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 이것이 구원의 역사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는 마지막 선에 서서 여러분을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약속 이행자였습니까 아니면, 약속을 깨는 계약 위반자들이었습니까 한해 동안 있는 모든 쓰레기를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내 놓은 것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는 두 팔 벌린 십자가를 내놓고 계십니다. 우리의 보증인으로 오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기에 그 사랑으로 한해를 보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의 십자가입니다. 새 소망의 십자가입니다.
어디에서 한 해의 시름을 접고, 새 해를 향한 소망의 능력을 찾을 수 있습니까 어디에서 추운 겨울날 같은 우리 가정에 따뜻한 햇빛을 받음며 훈훈하고 행복이 깃드는 소망을 찾을 수 있습니까 어디에서 배신과 섭섭함과 상처와 따돌림과 인정 받지 못함의 상처에서 치료받고 당당함과 자유함으로 나아가 풍성함의 삶을 찾을 수 있습니까 근시안 적인 세계관에서 어떻게 하면 미래지향적이고 진취적이고 내어주는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예수! 예수! 우리를 위하여 약속을 온전히 지키시사, 구원을 온전히 이루신 바로 그 이름 예수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