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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 갈등과 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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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 쉽지 않다. 2008년을 마무리 하는 오늘 한해를 돌아볼 때 세상과의 얼마나 긴장 관계가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사업하시는 분이면 2중 장부의 문제가 자신의 마음을 두드렸을 것이고, 교육을 하시는 분이면 세상의 가치관으로 가르치느냐 참된 예수님의 정신으로 교육을 했느냐의 문제가 힘들었들 것이다.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라면 세상의 기준으로 가르치느냐, 말씀의 기준으로 가르치느냐 갈등이 공존했다. 오늘 진급을 하는 학생들 학교에서 기독학생으로 살아간다는 것 싶지 않다. 주일날 학원에 오라고 한다. 혼자 가지 않으면 도퇴되는 느낌을 받는다. 주일날 학교로 오라고 한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권위를 세우려고 용서를 하지 않는다. 주일날 앞날을 위하여 시험을 치러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문제. 주일날 시험을 치러가면 신앙이 없는 사람처럼 취급한다. 그런데 주일을 지키다가 회사에 취직을 못한 사람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가 세상을 선택할 것인가 정답은 나와 있다 그런데 막상 나의 현실이 되면 힘들어 진다. 이것이 요즘만의 문제인가 그렇지 않다.
진리가 세상에 들어오니 세상이 그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주님은 21장과 22장에 걸쳐서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신다. 그 비유에 반기를 들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따진다. 오늘 본문은 화가 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잡고자, 자신의 제자들과 헤롯 당원들을 예수님께 보낸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갈등이 시작된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좀 더 첨예하게 대립된다.
1.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공격: 갈등
바리새인들은 최고의 정통주의 자들이다. 이방 왕에게 세금을 납부하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의 신권을 침해한다고 분개했다. 한편 헤롯 당원은 로마의 힘을 빌려서 권력을 장악하려고 한다. 갈릴리의 왕 한편 헤롯의 일파로서 로마에 적극 협력하는 자들이다. 서로 정치적인 입장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주님을 어려움에 빠드리려 한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참으로 우리의 정치판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지고 있지만, 이익을 위해서 공조한다. ) 이들은 함께 주님을 공격하고 있다. 이들은 사상적 논쟁점은 차이가 있다. 그런데 연합전선을 구축한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하여 반대세력과 연합한다. 이러한 의기투합하는 것은 기득권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려고 한다. 악을 도모하는 이유는 세상적인 관심이다. 높아지려는 본성이다. 세상적인 가치관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의 권위, 절대적인 권위의 상승을 싫어한다. 자신들의 세상적인 권위가 위축되니 그들은 반론의 제기할 수 밖에 없다. 기존 질서에 새로운 질서가 들어오니 기존 질서 속에서 주도권을 갖고 있는 자들이 긴장한다. 갈등이 야기된다.
놀라운 것은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이 서로 다르면서도 함께 악을 모의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한 것은 참으로 교묘하다. 원하는 질문을 던지기 전에 빠져나갈 수 없는 말로 선수를 친다. 악의 교묘함이다.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여호와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 하심이니이다” 참으로 간사하고 교묘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양자택일을 권한다.
가이사이게 바치면 신성모독이다. 세금을 내는 것이 옳다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잃을 것이다. 사람들이 세금을 내는 것을 싫어했고, 특히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싫어했다. 여호와 하나님께만 바치면 법을 무시하는 사람이다. 세금을 지불하는 것이 합당하지 못하다고 한다면 선동자로 잡히게 될 것이다. 진퇴양난에 빠뜨려 예수님을 매장하기 위함이다. 진퇴양난의 질문이다. 추구하는 바가 다른 이들이 모인 이유는 한 사람을 매장하기 위해서이다.
오늘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 우리 공동체에 질문을 던져 본다.
나는 무엇을 위하여 모이고, 우리는 모여서 어떠한 뜻을 추구하고 있는가 신앙의 성숙인가 신앙을 갉아먹고, 한 사람을 매장하기 위함인가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다. 비판하지 말라고 했다. 일 년을 돌아보면서 그러했다면 이 시간 회개할 수 있길 바랍니다.
나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고, 나의 부서가 드러나지 않고, 나와 관계된 공동체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혹 불만을 가지고 책잡기를 원했다면 그것은 주님이 싫어하시는 바리새인들의 가식적인 모습과 동일하다. 그러한 모습이 나에게 있지는 않는지 진지하게 나에게,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주님께서 우리를 함께 모이라고 하신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다. 제자를 부르신 이유는 주의 뜻을 선포하기 위함이다.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모습이라면 그 자리에서 떠나는 용기가 있길 바란다. 내가 남을 비방하기 위하여 모였다면 그 자리가 바로 바리새인의 자리요 헤롯당원의 자리이다. 그 자리는 그리스도인의 자리가 아니라, 음모를 모색하는 권력에 눈이 먼 자리이다.
그렇게 된다고 한다면 교회 속에도 갈등이 생긴다. 그것은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리만 있을 뿐이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은 자신들의 자리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위기를 느꼈다. 이처럼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의 자리가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하여 불안해한다면, 그것은 신앙을 오해하는 것이다. 나의 자리가 사라져도 주님의 권위가 드러나면 감사할 수 있는 자의 모습이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자꾸 세상적인 것을 요구한다면 갈등이 유발될 수 밖에 없고, 음모가 난무한다. 그러한 모습에서 벗어나야 진실된 공동체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성숙되어 간다. 참된 신앙의 성숙이 우리에게 풍성하길 소망합니다. 잘못된 갈등에서 벗어나는 은혜가 이 가운데 임하길 소망합니다.
서로 다른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함께 와서 주님께 자신들의 음모의 전모를 드러낸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2. 예수님의 대응: 포용
이러한 그들의 행동에 대하여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그들의 진의를 보신다.
로마제국에서 요구하는 세금에서는 3종류가 있다. 토지세 곡물의 10분의 1, 자기가 생산한 기름과 포도주의 5분의 1을 내야한다. 소득세이다. 수입에 대한 100분의 1이다. 그 다름이 인두세이다. 14~65세까지의 모든 남자들이 낸다. 12~65세까지의 모든 여자가 지불하는 세금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두세이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들에게 받고 있는 고통을 대변해준다.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세금 낼 돈을 보이라 하신다. ” 로마동전이다. 거기에는 황제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묘사하는 문구가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금을 내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 동전을 사용하는 것을 가급적 피했다. 그러데 동전을 보이라고 하자. 그들은 데나리온을 가지고 왔다. 그들이 동전을 가져왔다는 것은 동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장에서 가져올 수 있었다. 그들 스스로가 그들의 신념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를 알고 계신다. 그러나 주님은 흥분하지 않는다. 외모로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 그들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한다. 냉철함을 유지하신다. 주님은 냉철하게 그들의 진의를 파악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주님은 둘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양자택일의 입장에서 둘을 선택한다. 둘을 포기하지 않는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이 땅의 평화도 원하신다. 이웃사랑,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동일하게 보여주신다. 그 절정이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다. 그리고 주님은 마태복음 17장 27절에서는 주님은 성전세도 내셨다. 주님은 세상의 것을 포용하신다.
주님께서는 문제를 품으심으로 해결하신다. 어느 하나를 포기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품으신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계신다.
우리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용감한 자처럼 보인다. 그리스도인은 양쪽을 품는 자이다. 세상 반 이 땅 반 이렇게 물리적으로 반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이 땅을 사랑하신 사랑으로 품는 것이다. 모든 것에 이러한 품음이 나타나길 원하신다.
갈등의 원인은 품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의 배척이고, 자신의 잘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칼은 없지만 날카로운 모습으로 주님께 다가왔다. 그런데 주님은 품으셨다.
주님은 우리도 품어주셨다. 우리는 일 년을 보내며, 모여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우리의 욕심을 찾을 때도 많았다. 그러기에 갈등도 있었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은 송년주일을 허락하셔서 삶을 돌아보며 다시 한 번 주님 앞에서 다짐하게 하신다.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품어주시고 회복되기를 원하신다. 죄인의 무리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사랑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도 품어주셨고 용서해주셨다. 여호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따르지 않았지만, 사랑으로 보둠어 주셨다. 품어 주심의 은혜가 이 가운데 있다. 우리의 삶이 품어주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양자택일에서 품으시는 주님을 보면서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이중적인 시민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시민권을 가지고 삶을 살아간다. 내가 단지 대한민국 국민으로만 삶을 살아간다고 한다면 그는 이 땅의 사람이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기 국가에 참된 국민이며 또한 하늘나라의 좋은 시민임을 자각하고 살아가는 자이다. 주님은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셨다. 이러한 모든 품는 것은 사랑의 마음이다. 주님은 이 땅을 사랑의 마음으로 보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주님의 성육신은 곧 이 땅을 품으심이다.
우리는 이제 진급을 한다. 그것은 세상으로 한 발짝 더 내딛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과 가이사,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대한민국에서 어느 한편을 선택할 것인가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에서의 역사적 책임을 완수해 나가야 할 것이다. 주님도 그것을 원하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것은 여호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주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다면 그는 범법자요! 비 그리스도인일 뿐이다.
나는 예수를 따라가고 있는가 가이사를 따라가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권력하에 있지만 당당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지에 답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세상을 초월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가운데 살아가면서 세상의 변화의 주역이 되길 원하신다.
능력있는 크리스챤은 세상의 법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묵살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법을 준수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우리의 삶은 여호와 하나님과 가이사, 신앙과 권력, 여호와 하나님 나라와 세상, 신권과 인권 사이의 갈등이다. 예전에는 신권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의 과학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잃어버린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를 우리가 찾아드려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작은 결단과 노력에서 시작한다. 예수님의 답변은 사랑으로 모든 것을 포용한다. 주님의 사랑의 깊이가 우리의 삶이 되실 소망합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갈등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넉넉한 사랑이 넘침으로 언제나 주님의 편에서 이 땅을 이끄는 우리의 삶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가이사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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