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본문
성경에 “세월을 아끼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에베소서 5:16). 일년을 보내는 이 시간에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이 특별한 말씀으로 들려 옵니다. 이 말씀을 KJV에서는 “Redeeming the time, because the days are evil. ”이라고 했습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시간을 구원하라” 혹은 “시간을 다시 사 오라”는 뜻이 됩니다. 시간을 그냥 내 버려 두면, 때가 악하기 때문에 악한 일에 사용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시간을 최대한으로 살려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써야 합니다. 또 이 말씀을 NLT 성경에서는 “Make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 in these evil days”라고 했습니다. 이같이 악한 날에는 주어진 모든 기회를 살리라는 뜻입니다.
같은 말씀이 골로새서 4:5에는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 고 되어 있습니다. “외인(外人, outsiders)”이란 교회 밖에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세월을 아끼는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으로 살려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월을 아끼는 삶입니다. 여러분은 올 한 해 동안 세월을 아꼈습니까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충분히 살려서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사용했습니까
바울은 자기 자신의 직무(職務)를 “복음의 제사장 직무(the priestly duty of proclaiming the gospel, 로마서 15:16)”라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사람으로 세우는 것이 자신의 직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직무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받으실 사람으로 세우는 것이 우리의 직무입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누구에게나 후회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그런 마음이 듭니까 그 후회는 여러분이 계획한 일을 이루지 못한 데서 오는 후회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들을 살리지 못한 데서 오는 후회여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지 못한 데서 오는 후회여야 합니다.
사도들(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도 주님께 그렇게 믿음을 더해 달라고 부탁해야 하겠습니까 제자들의 말을 풀어서 말하면 이런 말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 사도들이 갑자기 왜 이런 부탁을 했겠습니까 오늘 말씀 앞에 보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용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누가복음 17:4). ” 이 말씀이 있자마자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아 제자들은 자기들은 도저히 그렇게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주님, 우리는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게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이렇게 예수님께 말씀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십시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하고 요청한 것은 매우 타당한 말 같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 들어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제자들은 믿음을 말하면서도 세상적인 사고 방식을 적용(適用)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많아야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이 배워야 큰 일을 할 수 있고, 돈이 많아야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는 믿음, 믿음 하면서 큰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반드시 믿음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으로도 충분 (充分)하다. ”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解釋)했습니다. 겨자 씨만한 믿음이란 작은 믿음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천국을 겨자씨에다 비유하셨습니다(마태복음 13:31). 겨자 씨는 아주 작은 것이지만 이것이 땅에 심겨져서 싹이 나고 자라서 큰 나무가 되는 것처럼 천국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시작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지만, 그 결과는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큰 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진정한 믿음(genuine faith)으로 시작하는 일을 말합니다.
비록 어설픈 일이라도 믿음으로 시작하는 일, 기도로 시작하는 일, 말씀을 붙들고 시작하는 일, 순종으로 시작하는 일, 그런 일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큰 믿음이 있어야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용서하라는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형제를 용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믿음의 양(量, quantity)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실천적인 믿음의 질(質, quality)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한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겨자 씨는 작지만 살아 있습니다. 그 속에 생명(生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겨자 씨를 땅에 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면 겨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겨자 씨만한 믿음이란 이론적이거나 관념적인, 머리 속에서만 맴도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기본으로 돌아가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하는 것 아닙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기쁨으로 이루어 나가는 것, 이것이 믿음 아닙니까 겨자 씨만한 작은 믿음이라도 그 믿음이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살아 있는 진실한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점(時點)에서 우리의 믿음을 한번 점검 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진실한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고 우리 자신들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말, 내가 하는 행동은 믿음에서 나온 것인가” 하고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잘 압니다.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내 감정(感情)에서 나오고, 내 이해(利害) 관계에서 나온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의식해서 한 일이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식해서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우리 신앙생활 속에 비(非) 신앙적인 요소가 너무 많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적어도 그 동기가 그렇게 순수(純粹)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 자신이 잘 압니다.
한 종이 밖에 나가서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세요. “그렇다고 그 종이 자리에 앉아서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느냐 그렇게 하루 종일 일하고서도 주인의 식탁을 준비하고 주인이 식사하는 것을 옆에서 거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 주인이 다 먹고 난 후에야 그 종이 먹을 수 있는 것 아니냐 그 종이 열심히 일했다고 누가 그 종에게 감사하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느냐”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다 행한 후에 ‘우리는 쓸모 없는 종들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 이렇게 말하라. ”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일은 거룩한 의무(duty)이고, 특권(privilege)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 일에 헌신한 대가를 기대합니다. 칭찬을 기대합니다. 누가 인정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이루는 일에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요, 특권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첫걸음입니다.
제임스 패커(J.
I. Packer)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신분 상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높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가 할 일은 단지 그 사람의 말을 정중하게 경청하는 일뿐일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더라고 이것은 순전히 상대방이 결정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할 것이다…. 만일 그 상대방이 즉시 우리에게 자신의 속 마음을 털어 놓고 자신이 계획한 어떤 특별한 사업들을 같이 해 보자고 말했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엄청난 특권을 얻었다고 생각할 것이며, 이제 우리의 사고 방식은 예전과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질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인생이 하찮게 보였다고 할지라도, 이제 그 위대한 사람이 그의 개인적인 보좌역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나를 삼아 주었으니 더 이상 자신을 비하(卑下)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정말 대단하고 이 일에 우리의 삶을 바칠만한 일로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실례(實例)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이라(예레미야 9:24)”고 말씀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흥분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
제임스 패커의 말은 생각할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잘못 생각하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나 헌신을 대단한 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자신을 온전히 생각한 사람들을 칭찬합니다. 그 사람들도 가정도 있고, 사업도 있고, 직장 일도 있을텐데, 어떻게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헌신할 수 있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부름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헌신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은혜요, 특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깨닫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 자신을 드림으로써 우리의 삶은 차원(次元)이 달라집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바울이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말라(Set your minds on things above, not on earthly things. , 골로새서 3:2)”고 성도들에게 당부한 것은 그들의 삶의 차원을 바꿀 수 있는 길을 보여 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땅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말한대로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 이런 것들 아닙니까 위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와 사랑” 이런 것들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한번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 23:8). ” 서기관(書記官)들은 율법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사람들은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말로는 “선생” 혹은 “매스터(Master)”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랍비 힐렐(Hillel), 랍비 요한나 벤 자카이(Johanan ben Zakkai), 랍비 아키바(Akiva) 같은 전설적인 세 랍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혜가 필요할 때 랍비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랍비의 판단을 따랐습니다. 사람들은 랍비가 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랍비들의 교만과 거만함이 좋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자신을 높이려는 그들의 태도가 맘에 들이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랍비라고 사람들에게 불리는 것을 기뻐하지 말아라. 진정으로 너희들의 선생이 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밖에 계시지 않는다. 너희는 모두 같은 형제들이다. ”
오늘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요, 한 형제입니다. 우리는 모두 동일선(同1線) 상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많은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직분 맡은 분들이 있고, 목사가 있고, 전도사가 있습니다. 이 분들은 모두 이 교회를 섬기도록, 여러분을 섬기도록 세워 주신 “servants” 입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이런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부름을 받은 “servants”입니다. 주님은 이 “servants”의 입에서 나와야 할 고백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시키는 대로 했다고 해서 주인이 종에게 고맙다고 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하고 나서 ‘우리는 가치 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 NLT(The New Living Translation) 성경은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And the servant is not even thanked, because he is merely doing what he is supposed to do. In the same way, when you obey me you should say, 'We are not worthy of praise. We are servants who have simply done our duty. ' "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가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 믿음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들의 위치와 분수를 올바로 깨닫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진실한 믿음, 그리고 살아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이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진실한 믿음을 갖게 하여 주십시오. 머리 속에만 맴도는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을 갖게 하여 주십시오. 주여, 저들에게 이런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
같은 말씀이 골로새서 4:5에는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 고 되어 있습니다. “외인(外人, outsiders)”이란 교회 밖에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세월을 아끼는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으로 살려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월을 아끼는 삶입니다. 여러분은 올 한 해 동안 세월을 아꼈습니까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충분히 살려서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사용했습니까
바울은 자기 자신의 직무(職務)를 “복음의 제사장 직무(the priestly duty of proclaiming the gospel, 로마서 15:16)”라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사람으로 세우는 것이 자신의 직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직무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받으실 사람으로 세우는 것이 우리의 직무입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누구에게나 후회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그런 마음이 듭니까 그 후회는 여러분이 계획한 일을 이루지 못한 데서 오는 후회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들을 살리지 못한 데서 오는 후회여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지 못한 데서 오는 후회여야 합니다.
사도들(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도 주님께 그렇게 믿음을 더해 달라고 부탁해야 하겠습니까 제자들의 말을 풀어서 말하면 이런 말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 사도들이 갑자기 왜 이런 부탁을 했겠습니까 오늘 말씀 앞에 보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용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누가복음 17:4). ” 이 말씀이 있자마자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아 제자들은 자기들은 도저히 그렇게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주님, 우리는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게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이렇게 예수님께 말씀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십시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하고 요청한 것은 매우 타당한 말 같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 들어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제자들은 믿음을 말하면서도 세상적인 사고 방식을 적용(適用)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많아야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이 배워야 큰 일을 할 수 있고, 돈이 많아야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는 믿음, 믿음 하면서 큰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반드시 믿음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으로도 충분 (充分)하다. ”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解釋)했습니다. 겨자 씨만한 믿음이란 작은 믿음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천국을 겨자씨에다 비유하셨습니다(마태복음 13:31). 겨자 씨는 아주 작은 것이지만 이것이 땅에 심겨져서 싹이 나고 자라서 큰 나무가 되는 것처럼 천국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시작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지만, 그 결과는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큰 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진정한 믿음(genuine faith)으로 시작하는 일을 말합니다.
비록 어설픈 일이라도 믿음으로 시작하는 일, 기도로 시작하는 일, 말씀을 붙들고 시작하는 일, 순종으로 시작하는 일, 그런 일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큰 믿음이 있어야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용서하라는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형제를 용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믿음의 양(量, quantity)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실천적인 믿음의 질(質, quality)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한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겨자 씨는 작지만 살아 있습니다. 그 속에 생명(生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겨자 씨를 땅에 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면 겨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겨자 씨만한 믿음이란 이론적이거나 관념적인, 머리 속에서만 맴도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기본으로 돌아가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하는 것 아닙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기쁨으로 이루어 나가는 것, 이것이 믿음 아닙니까 겨자 씨만한 작은 믿음이라도 그 믿음이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살아 있는 진실한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점(時點)에서 우리의 믿음을 한번 점검 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진실한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고 우리 자신들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말, 내가 하는 행동은 믿음에서 나온 것인가” 하고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잘 압니다.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내 감정(感情)에서 나오고, 내 이해(利害) 관계에서 나온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의식해서 한 일이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식해서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우리 신앙생활 속에 비(非) 신앙적인 요소가 너무 많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적어도 그 동기가 그렇게 순수(純粹)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 자신이 잘 압니다.
한 종이 밖에 나가서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세요. “그렇다고 그 종이 자리에 앉아서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느냐 그렇게 하루 종일 일하고서도 주인의 식탁을 준비하고 주인이 식사하는 것을 옆에서 거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 주인이 다 먹고 난 후에야 그 종이 먹을 수 있는 것 아니냐 그 종이 열심히 일했다고 누가 그 종에게 감사하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느냐”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다 행한 후에 ‘우리는 쓸모 없는 종들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 이렇게 말하라. ”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일은 거룩한 의무(duty)이고, 특권(privilege)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 일에 헌신한 대가를 기대합니다. 칭찬을 기대합니다. 누가 인정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이루는 일에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요, 특권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첫걸음입니다.
제임스 패커(J.
I. Packer)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신분 상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높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가 할 일은 단지 그 사람의 말을 정중하게 경청하는 일뿐일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더라고 이것은 순전히 상대방이 결정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할 것이다…. 만일 그 상대방이 즉시 우리에게 자신의 속 마음을 털어 놓고 자신이 계획한 어떤 특별한 사업들을 같이 해 보자고 말했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엄청난 특권을 얻었다고 생각할 것이며, 이제 우리의 사고 방식은 예전과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질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인생이 하찮게 보였다고 할지라도, 이제 그 위대한 사람이 그의 개인적인 보좌역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나를 삼아 주었으니 더 이상 자신을 비하(卑下)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정말 대단하고 이 일에 우리의 삶을 바칠만한 일로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실례(實例)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이라(예레미야 9:24)”고 말씀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흥분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
제임스 패커의 말은 생각할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잘못 생각하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나 헌신을 대단한 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자신을 온전히 생각한 사람들을 칭찬합니다. 그 사람들도 가정도 있고, 사업도 있고, 직장 일도 있을텐데, 어떻게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헌신할 수 있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부름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헌신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은혜요, 특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깨닫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 자신을 드림으로써 우리의 삶은 차원(次元)이 달라집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바울이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말라(Set your minds on things above, not on earthly things. , 골로새서 3:2)”고 성도들에게 당부한 것은 그들의 삶의 차원을 바꿀 수 있는 길을 보여 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땅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말한대로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 이런 것들 아닙니까 위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와 사랑” 이런 것들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한번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 23:8). ” 서기관(書記官)들은 율법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사람들은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말로는 “선생” 혹은 “매스터(Master)”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랍비 힐렐(Hillel), 랍비 요한나 벤 자카이(Johanan ben Zakkai), 랍비 아키바(Akiva) 같은 전설적인 세 랍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혜가 필요할 때 랍비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랍비의 판단을 따랐습니다. 사람들은 랍비가 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랍비들의 교만과 거만함이 좋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자신을 높이려는 그들의 태도가 맘에 들이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랍비라고 사람들에게 불리는 것을 기뻐하지 말아라. 진정으로 너희들의 선생이 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밖에 계시지 않는다. 너희는 모두 같은 형제들이다. ”
오늘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요, 한 형제입니다. 우리는 모두 동일선(同1線) 상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많은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직분 맡은 분들이 있고, 목사가 있고, 전도사가 있습니다. 이 분들은 모두 이 교회를 섬기도록, 여러분을 섬기도록 세워 주신 “servants” 입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이런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부름을 받은 “servants”입니다. 주님은 이 “servants”의 입에서 나와야 할 고백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시키는 대로 했다고 해서 주인이 종에게 고맙다고 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하고 나서 ‘우리는 가치 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 NLT(The New Living Translation) 성경은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And the servant is not even thanked, because he is merely doing what he is supposed to do. In the same way, when you obey me you should say, 'We are not worthy of praise. We are servants who have simply done our duty. ' "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가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 믿음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들의 위치와 분수를 올바로 깨닫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진실한 믿음, 그리고 살아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이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진실한 믿음을 갖게 하여 주십시오. 머리 속에만 맴도는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을 갖게 하여 주십시오. 주여, 저들에게 이런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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