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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본문

그러므로 이방인 여러분을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갇힌 몸이 된 나 바울이 말합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로 이 직분을 주신 것을, 여러분은 이미 들었을 줄 압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계시로 그 비밀을 나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미 간략하게 적은 바와 같습니다. 그것을 읽으면, 여러분은,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지나간 다른 세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비밀을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려 주지 않으셨는데, 지금은 그분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성령으로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 비밀이라는 것은, 이방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한 몸이 되고, 함께 약속을 받은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3:6~9
예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다가 무화과나무를 한 그루 심어 놓고, 그 나무에서 열메를 얻을까 해서 왔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포도원지기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내가 세 해나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해서 왔으나, 찾지 못하였다. 찍어 버려라. 무엇 때문에,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그러자 포도원지기가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올 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 ’”
오늘이 금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오랫동안 이 교회를 섬기신 한 전도사님도 송별하게 되고, 우리 각자도 살아온 1년을 결산하게 되는 때이고 보면, 오늘 주일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큰 것 같습니다.
오늘 이사야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을 보면 야웨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너는 내 종이다. 네가 내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 주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고난받은 그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셨다. ” 이것이 오늘 연말에 주시는 이사야의 복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두 가지 기본축을 중심으로 자기들의 역사를 만들었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실존적 역사도 규정했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 우리는 당신의 백성”이라는 이 대답을 얻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무한히 노력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답을 얻기까지 여호와 하나님께 던진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첫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당신의 이름은 도대체 뭡니까” 우리도 이름 석자를 알면 사람의 얼굴부터 시작해서 그의 인격과 역사와 그의 비전과 그 외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이름 석자가 모든 것은 아닙니다만, 이름 석자 속에 우리 인생의 철학이, 인생의 기초가 담겨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엘로힘 여호와 하나님” 이건 그분 이름이 아닙니다. 그냥 붙여진 이름이지, 여호와 하나님이 스스로 규정한 자기 이름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내 이름은 나다. 나는 나다. ” 이것이 모세를 통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나한테 이름을 대라고 하는데, 나는 나다. ” 영어 성서에서는 나는 나다라는 이 말을 “I am that I am.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나는 나다!
철학사상이나 다른 여러 가지 사상을 연구하면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는 여러 가지 언어들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는 “인간이 왜 존재합니까 존재이유는 무엇입니까” 하고 스스로 질문을 던져놓고 거기에 대한 답을 찾았습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근거는 인간은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만들어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생각만 가지고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보고서, “나는 행동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했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 명제를 바꾸어서 “나는 믿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합니다.
사는 것, 인간으로 사는 것, 존재라고 하는 것, 실존이라고 하는 것 그 모두에는 근거가 있어야 되고, 목적이 있어야 되고, 그것을 구성하는 틀이 있어야 됩니다. “왜 존재하십니까 여호와 하나님 당신이 있다고 하는데 당신 이름은 뭡니까” 하는 말은 “당신의 존재 방식은 뭡니까 왜 당신이 있는 겁니까 그 이유를 설명해주셔야 제가 믿겠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왜 존재하십니까 여러분의 답변은 뭡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의 존재 근거는 이것이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내가 있다. 나한테 무슨 목적을 묻지 말아라. 나는 존재한다. ” 그래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말할 때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 곧 “자존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자존하시는 분, 무슨 목적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계신 분, 그분을 가리켜서 우리는 창조주라고 합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 자존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분은 자존하는 자기 목적을 위해서 피조물들을 만드십니다. 이로써 창조주와 피조물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것이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피조물이 된 인간이 다시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야웨 여호와 하나님, 나는 나다. ”
창조주가 피조물을 창조함으로써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가 수립되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에서는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요한복음 1장 1절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합니다. 그 태초는 인간 역사의 태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태초는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시간,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인간적 존재, 이것들의 출발인 태초는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태초에서 시작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태초는 우리의 시간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자존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쓰는 이 태초라는 말은 천지창조 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간생활의 모든 것에 태초가 있습니다.
제가 경동교회에 부임한 태초를 생각해봅니다. 제가 여기 온 지 이제 1년이 넘어섰습니다. 1년 넘어서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합니다만, 다른 이야기는 그만두고 오늘 연말주일이기 때문에 예배에 관한 것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언제 할까, 신년주일에 할까 하다가 연말주일에 하는 게 낫겠다 싶어 말씀드립니다. 몇 번 얘기를 하려고 하다가 오늘 처음 말씀드립니다. 이런 말씀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오르간 전주가 시작되어서 단에 서면, 오늘은 그렇지 않습니다만, 상당한 기간 동안 “좀 춥다”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빈자리가 너무 많아서 큰일났구나! 두 번째 찬송을 부르면 따뜻해집니다. 자리가 많이 찹니다. 세 번째 찬송을 부를 때면 꽉 찹니다. 그때는 뜨겁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축도를 하고 나면, “오늘 뜨겁게 예배를 마쳤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예배 시간은 정확히 지켜져야 합니다. 그런데 경동 예배의 태초는 시쳇말로 칼 같지가 않습니다. 시간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리 와서 준비하고 정성껏 드리는 예배, 이것을 회복하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제가 지난 크리스마스 예배 때 해법 한 가지를 찾았습니다. 성탄 예배를 1부, 2부로 나누지 않고 전교인이 함께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이기도 하겠지만, 예배를 시작하려고 단에 딱 서서 보니 입추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2층도 가득 찼고 뒤에도 가득 찼고 그래도 자리가 모자라서 많은 분들이 서셨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아하, 이게 해법이구나 싶어서 제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탄의 복을 주실 때 1년에 한 번만 주지 마시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쉰 두 번만 주십시오. ” 제가 오늘 이렇게만 말씀드리고 이 얘기는 끝내겠습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정한 것은 1년에 한 번, 그것도 12월 25일 그 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12월 25일은 상징적인 날짜입니다. 어느 날짜를 택하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한테 예수께서 오신 날, 여호와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신 날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날이 왜 쉰 두 번이기를 바라는가 하면,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교회가 가득 차서 좋고, 차고 넘치니 좋고, 기뻐서 좋고, 그래서 1년 내내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저도 1년 내내 뜻과 정성과 몸과 마음을 다 기울이겠습니다. 우리 한번 그렇게 같이 하십시다. 그래서 2001년은 가득 차는 교회, 아주 튼튼한 교회, 충만함이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두 번째는 신앙적인, 신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야웨 여호와 하나님께 당신은 누구시냐고 물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답은 “나는 나다“였습니다. 그것은 ”나는 나고 그대들은 그대들이요, 나는 그대들의 여호와 하나님 창조주고 그대들은 나의 피조물“이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피조물과 창조물이라는 관계는 있으나, 그 둘 사이에는 넘나들 수 없는 깊은 간격이 있습니다. 둘을 혼돈하면 안 됩니다. 섞을 수도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 인간은 인간! 둘 사이에는 거리가 있습니다. 둘 사이의 거리를 메꾸는 역할을 제사장들이 했고, 선지자들이 했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당신은 누굽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단수로 대답했습니다. ”나는 나다. “ 그 말은 ”나하고 그대들을 섞지 마시오.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함이지,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거룩함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을 실현한양 스스로를 미화시키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우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는 것은 구약성서 말씀의 철저한 명령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존하십니다. 누구의 뜻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계십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방식에 일대 혁명이 생겼습니다. 그 혁명이 뭐냐 성탄이라 이름하는 크리스마스입니다. 크리스마스란, 혼자만 계시던 여호와 하나님이, 피조물을 별도로 두고 관리하시던 여호와 하나님이 도무지 그렇게 해서는 구원을 이룰 수 없어서, 여호와 하나님 스스로 인간 속으로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성탄은, 화육은, 성육신이란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방식의 변화, 자존의 방식에서 이제는 인간과 함께 운명도, 생각도, 뜻도 같이 하는 공존의 존재방식으로의 변화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혁명적 사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존재 방식을 바꾸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름도 바꾸셨습니다. 야웨 여호와 하나님만 알았던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구유에 태어나심으로 존재방식이 바뀌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의 여호와 하나님인 것을 그제야 알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성부로서의 여호와 하나님, 성자로서의 여호와 하나님, 성령으로서의 여호와 하나님으로서, 삼위는 서로 공존적 방식으로 존재하십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통해서 알았습니다.
크리스마스를 통해 알게 된 또 하나의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으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이제는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함께 공존하는 코이노니아를 이루듯이, 피조물 된 여러분도 나와 함께 공동운명적 존재가 됩시다. 이제 나는 여러분과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막힌 담을 헐고, 막혀진 휘장도 찢고, 당신들과 나는, 창조주와 피조물은 이제는 하나입니다. 공존적 존재입니다. 공영적 존재입니다. ”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합니다. 공존적 존재방식으로의 전환, 이것이 성탄의 본질적 의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살고, 함께 뒹굴고 ,함께 운명을 나누는 이 깊은 신앙생활을 1년에 한 번이 아니라 최소한 쉰 두 번을 해야 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1년 365일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답변은, 구약의 답변은 “I am that I am. ”이었지요. 신약의 답변을 제가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대들과 나는 ‘우리’로 하나가 되었으니, ‘We are that we are. ’이다. ” 이게 크리스마스의 존재방식의 답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자신은 우리와 공존하시고,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공존하며, 우리끼리도 서로 공존해야 할 공동운명을 타고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와 똑같은 생사화복을, 꼭 같은 고난과 기쁨을 우리와 함께 겪고 우리와 함께 나누십니다. 이런 복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성서 본문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누가복음에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열렸는지 안 열렸는지 보러 세 번째 오셨다고 했습니다. 주인이 말합니다. “매년 한 번씩, 3년 동안 매번 왔는데 한 번도 열매가 열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이 무화과나무를 잘라서 버릴 수밖에 없다. ” 농부의 말입니다. “주인님, 금년 한 해만 참아 주십시오. 내년에도 열매가 없거든 그때에 찍어서 불에 던지십시오. 올해만 참고 그냥 두십시오. ” 예수의 말씀은 준엄합니다. 무화과나무를 세 번이나 찾아왔다는 말은 상징적으로,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 3일 동안 죽음의 세계에 있음으로써 부활의 영광으로 그대들에게 주었건만, 공존적 삶을 주었건만, 그대들은 나의 은혜를 받고도 나와 더불어 열매를 맺지 못하니, 내 죽음이 어디 갔느냐 그 뜻이 아닙니다.
“3일 동안 나도 누워 있었으니 십자가 이후를 공백으로 칩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살리셔서 부활의 새 생명을 주신 이 은총은 어디 갔습니까 부활의 희망은 어디 갔습니까 지금 이 어려운 시기에 왜 울고만 계십니까 부활의 희망을 가지고 한번 다시 일어섭시다. 그 희망이 왜 안 보입니까 무화과나무에 작지만 왜 열매가 없습니까” 무화과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게 아니라 직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준 각자의 인생살이, 우리 국가의 경영, 우리 교회의 실존, 이 모든 것 속에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가 공존합니다.
왜 열매가 없습니까 요즘의 우리 사회를 엄습하는 용어가 하나 있습니다. “민심이반”입니다. 너무 엉망이니까 민심이 떠났다 합니다. 실제로 이반입니다. 중요한 사실 하나는 민심의 이반 속에 천심도 이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이 공존의 방식 가운데 있다면, 인간이 사는 나라, 인간의 사회에는 민심이 있고 천심이 있습니다. 하늘의 마음도 있고 땅의 마음도 있습니다. 땅의 마음이 떠나면 하늘의 마음도 떠납니다. 그러면 무화과나무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민심을 다시 얻으십시오. 천심을 다시 끌어들이십시오. 그래서 민심과 천심이 합한 통전적 현실을 이루십시오.
우리는 하늘과 공존합니다. 북한과만 평화공존하자는 게 아닙니다. 인간과 인간도,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도 공존합니다. 어떻게 공존합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따라, 곧 평화적으로 공존합니다. “평화공존”이란 말은 정치용어일 수 없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만들어낸, 성탄이 만들어낸 인간 사회의, 인간 실존의 존재방식입니다.
12월 31일 오늘 우리는 결산해야 합니다. 뭘 결산해야 됩니까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 공존에 틈이 생겼는지, 다시 이스라엘에서처럼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다시 담이 세워졌는지, 휘장이 세워졌는지 다시 한번 검토해야 할 시점에 왔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는 함께합니다.
요즈음에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바꿔야죠.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우리와 우리의 공존이라는 시스템이 없으면 그 사회는 망합니다. 오만도 사회를 망하게 하고, 분란도 망하게 만듭니다. 시스템은 분명히 바뀌어야 합니다. 공존적 시스템으로 가야 합니다. 나라의 지도자와 백성 사이에, 그리고 정당과 시민 사이에, 남과 여 사이에, 지역과 지역 사이에 평화적 공존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공존 공영 공생해야 합니다. 이것을 회복하지 않으면 시스템이 붕괴됩니다. 다시 회복하십시다. 시스템만 바꾸면 됩니까 사람이 바꿔져야 합니다. 시스템을 움직이고 살게 하는 사람의 마인드도 바꿔져야 합니다.
오늘 두 가지를 같이 결산하십시다. 우리와 우리 사이를 살펴보고, 공존의 방식으로 시스템도 바꾸고, 마인드도 바꾸십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성실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경동교회는, 우리 각자는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하는 이 일에 성실하십시다.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는 지금 함께 살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책임을 집니다. 이 사실 하나가 2001년을 힘차게 살아갈 희망의 근거가 되리라 믿습니다.
여러분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임마누엘이 큰 은혜와 복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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