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한 뼘 길이만큼의 삶
본문
오늘은 이 해의 마지막 주일이며, 동시에 이 세기의 마지막이고 좀더 크게 보면 1천년대의 마지막 주일이기도 합니다. 이런 특별한 날이 있는 때에 나의 삶을 허락 받았다는 사실은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마지막 주일에 여러분은 안동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날들 내 신앙이 부실했다 할지라도 이 마지막 주일에 나와 예배를 드림으로 무엇인가 꽉 채우는 느낌을 가질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날이 그 날이지 무엇이 특별하냐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는 이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일에서 별 의미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일에서 별 의미를 못 느끼고 귀찮게만 느낀다면 그는 분명 염세주의자일 것이며, 결국은 살 의미를 느끼지 못하여 자살로 그의 삶을 끝내고 말 것입니다.
1천년의 마지막 주일 그것은 분명히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지구가 돌아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지만 그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사는 같지가 않은 것입니다. 특별한 날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작년에도 우리가 마지막 주일을 보냈지만, 작년과 달리 금년의 마지막 주일은 2000년이라는 새로운 수가 나열되는 해를 앞두고 보내는 주일이며, 1000년을 마감하는 주일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다른 것입니다. 내 생각부터가 다르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며, 다른 사람도 그 같은 생각을 가졌고, 그 생각들이 함께 모이면 특별한 일들이 이루어지기에 특별한 날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마지막 주일에 무엇을 생각하셨습니까 저는 오늘 한 뼘 길이 만큼밖에 되지 않는 우리 인생을 생각합니다. 이제 마지막 주일에 서서 지나온 천년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나의 삶을 생각할 때 정말 한 뼘 길이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 역사를 좀더 거슬러 2천년을 헤아린다면 한 뼘보다 더 짧은 나의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주님 앞에 우리가 서면 우리의 삶의 길이란 영(零, zero)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시편의 기자는 말하기를 ”주께서 나에게 한 뼘 길이밖에 안 되는 날을 주셨으니, 내 일생이 주님 앞에서는 없는 것이나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한 뼘 길이의 삶
구약성경에 보면, 우리의 삶을 아주 짧은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그 사는 날이 짧은데다가, 그 생애마저 괴로움으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피었다가 곧 시드는 꽃과 같이, 그림자 같이, 사라져서 멈추어 서지를 못합니다. ” 욥 14:1-2
”주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인생은 한 순간의 꿈일 뿐, 아침에 돋는 한 포기의 풀과 같을 따름입니다. 아침에는 돋아나서 꽃을 피우다가도, 저녁에는 시들어서 말라 버립니다. ” 시 90:5-6
”인생에게는, 그 날이 풀과도 같고, 피고 지는 들꽃 같아, 바람 한 번 지나가면 곧 시들어, 그 있던 자리조차 알 수 없다. ” 시 103:15-16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것이다. 주께서 그 위에 그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 있다. ” 사 40:6-8
구약시대 사람들은 보통 7, 80살은 살았고 좀더 오래 산 사람은 100살 넘게 살았는데도 그 삶은 한 뼘 길이밖에 안되고, 그 육체의 삶은 풀과 같아서 곧 시들어 버린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삶은 수고와 슬픔으로 채워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 시 90:10
야곱이 요셉의 초청을 받고 이집트에 내려가서 바로를 만났을 때 바로가 그 나이를 묻자 대답하기를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삶
이들의 이런 허무주의적 인간관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그들의 떠돌이 생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목민이었던 그들은 정처 없이 떠도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물론 가나안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많이 달라졌지만, 원래 유목민이었던 사람들은 한곳에 정착하는 것을 오히려 답답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이나 요르단에 가보면 아주 거친 광야에 천막을 치고 사는 베드윈족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요르단 정부가 이들을 위해서 집을 지어주었는데 도 이들은 집에는 양떼들을 몰아넣고 사람들은 천막을 치고 거기서 생활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옛 이스라엘 사람들도 오늘날의 베드윈족과 비슷하였을 것입니다. 천막에서 머물며 일생을 떠돌며 사는 이들의 삶에서 인생은 짧고 허무하다는 생각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바로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면서 그와 대조되는 인간의 삶은 정말 보잘 것 없고 짧은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깊은 신앙을 가진 사람일수록 인간의 보잘 것 없음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하심, 그의 전능하심을 알면 알수록 그와 대조되는 인간의 삶이란 정말 순간이며, 그 영광이란 풀의 꽃처럼 한 때 피어났다가 곧 사라져 버리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죽을 인생들아, 돌아가거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 주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인생은 한 순간의 꿈일 뿐, 아침에 돋는 한 포기의 풀과 같을 따름입니다. 시 90:3-5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인생은 한 순간의 꿈일 뿐”이라는 생각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동양에도 우리의 삶을 일장춘몽(1場春夢)이란 말로 표현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을 헛되게 낭비하지 말라는 도덕적인 경고를 담고 있을 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선 인간에 대한 통찰력 같은 것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소망
이렇게 볼 때 구약성경의 허무주의적인 인생관은 허무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깊은 신앙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오히려 ”인생은 한 순간의 꿈일 뿐”이라는 생각을 더 철저하게 갖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 시 90:12
주여, 나의 종말과 내 날들의 수치가 어떠한지 나로 알게 하시어 내가 얼마나 연약한지 알게 하소서. 시 39:4
이렇게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들이 기도하는 것은 그 허무한 삶에 매이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의 영원하신 세계에 연결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내 희망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시 39:7
여호와 하나님, 사슴이 타도록 목말라 시냇물을 찾듯,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애태웁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 하나님, 곧 생명의 여호와 하나님을 갈망하니, 언제 내가 나아가서 여호와 하나님을 뵈올 수 있을까 시 42:1-2
이들이 이런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것은 곤경에 처하였기 때문입니다. 죽음 직전까지 이르는 병에 걸렸을 때에, 혹은 적의 침략을 받아 포위되었을 때에, 아니면 오해를 받아 사람들로 비방과 모함을 받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는 인간의 죄악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주께서 내리신 재난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주의 손이 나를 치시면, 내 목숨은 끊어지고 맙니다. 주께서 인간의 잘못을 벌하시고, 그 욕망을 좀이 먹은 옷같이 삭게 하시니, 인생이란 참으로 허무할 뿐입니다. 시 39:10-11
주께서 우리 죄를 주님 앞에 내놓으시니, 우리의 숨은 죄가 주님 앞에 환히 드러납니다. 주께서 노하시면, 우리의 일생은 사그라지고, 우리의 한평생은 한숨처럼 스러지고 맙니다. 시 90:8-9
이들도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좀더 멋진 인생,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돈도 벌고 권력의 자리에도 올라보려고 무척 노력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결과로 돈도 벌고 권력의 자리에도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자리에 올라보니 거기에도 여전히 부족함과 문제가 많았던 것입니다. 끊임없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 메어지고, 비난과 원성이 들려오며, 적군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수시로 전쟁터에 나가 죽음을 무릅 써야하는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정적으로 자식들이 말썽을 부리고, 혹은 사랑하는 자식들이 죽음을 당하기도 하여 큰 슬픔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몸에 병이 걸려 죽음의 골짜기로 떨어지게 되면서 결국 인생이 추구하는 부귀영화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대체로 시편이 다윗왕의 것이라고 볼 때 파란만장한 다윗의 생애와 연결 시켜 이 시편들을 이해하면 보다 그 뜻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저작이라고 볼 수 있는 전도서는 이런 인생의 허무함을 더욱 깊이 있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보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헛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솔로몬도결론지어 말하기를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처럼 인생의 쓴 맛, 단맛을 다 본 후에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 아니라 청년의 때에 창조를 기억하라고 충고를 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이런 구약성경의 인간관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솔로몬의 모든 영광이 들의 백합화 하나만도 못하였다고 하심으로 인간이 이 땅에서 누리는 영광이란 들의 꽃처럼 시들어버리는 것이라는 구약의 말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염려하기 전에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의 이 땅의 삶을 질그릇에 비유하면서 그것은 곧 깨어지고 말 것이나 그 속에 담긴 보배 즉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명은 깨어지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도 하였습니다. 골로새서에서는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과 달리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 드려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주님 앞에 기도할 수 있으며, 주님의 돌보심과 사랑 안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문명에 빼앗긴 삶에서 돌이켜
문제는 상대적으로 이 땅의 삶이 물질적으로 더 풍요로워짐으로 거기에 매혹되어 인생의 짧음을 잊어버리고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도시 문명은 사람들을 옛날의 왕처럼 먹고 마시며 화려한 집에 살게 만들었습니다. 매일 새로운 문명을 쏟아내는 TV가 우리의 정신을 이 땅에 붙잡아 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의 것을 바라볼 시간이 없게 되었습니다. 너무 신기하고 너무 화려하며 너무 흥미롭고 너무 재미가 있는 것들이 많아서 그것들을 좇아가기에 바빠서 우리는 조용히 생각할 시간을 빼앗기고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할 시간을 잃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훌쩍 1년이 지나간 것입니다. 이 마지막 주일에 정신을 빼앗긴 채 살아온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삶의 자세를 가다듬어 이제는 위의 것을 찾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매혹시키는 물질문명은 필요 이상의 것을 만들어 내고 마구 소비하게 만들면서 결국은 우리의 자원을 바닥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어느 날 갑자기 이 문명이 무너지는 날이 이를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한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집을 떠난 탕자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써버린 다음 돼지우리 속에서 그 허기진 배를 채우고자 했으나 그마저도 얻지 못하였을 때 비로소 아버지 집을 떠올렸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삶도 이 땅의 자원이 바닥이 드러나면서 굶주림과 오염으로 죽어갈 때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갈 마음을 먹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위기 의식을 먼저 깨닫고 멸망이 이르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자원이 바닥이 나기 전에 우리는 절약하며 검소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새 천년을 맞는다고 하면서 더 쓰고 더 먹고 더 화려한 삶을 위해 정신 없을 때 우리는 깨어 새 천년에는 더 아끼고 더 검소하게 살기를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한 뼘 길이밖에 안 되는 짧은 삶을 이 땅의 썩을 것을 위하여 낭비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에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난 한 세기 동안 산업 발전을 통하여 우리 인류는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은 것을 만들어 소비하여 왔습니다. 우리의 삶은 너무 편안해졌고, 너무 풍요로워졌습니다. 가난한 나라들이 모두다 부자 나라들처럼 살기 위해 경제 개발을 서둘러서 마침내 이 지구 자원이 바닥이 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부자 나라들은 이런 위험을 깨닫고 가난한 나라들이 좇아오지 못하게 여러 모양으로 훼방(毁謗)을 놓고 있습니다. 결국 이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게 될 것이고, 이 지구 공동체는 결국 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바로 이 때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그 인생의 허무함을 깨달아야 할 때이며, 그래서 이 땅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대신에 우리의 영적인 삶을 살찌게 하여야 할 때임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이 땅의 종말적인 문명을 따라 갈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위의 것을 바라보며 그 영원을 추구하고 그 세계에 들어가기를 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한 순간의 꿈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시편의 기자처럼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지구의 종말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 늦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삶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20세기의 마지막, 아니 한 천년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우리 속에 담아야할 다짐이며 결단이어야 합니다.
이제 한 뼘 길이밖에 되지 않는 짧은 삶 속에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 영생을 누리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날이 그 날이지 무엇이 특별하냐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는 이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일에서 별 의미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일에서 별 의미를 못 느끼고 귀찮게만 느낀다면 그는 분명 염세주의자일 것이며, 결국은 살 의미를 느끼지 못하여 자살로 그의 삶을 끝내고 말 것입니다.
1천년의 마지막 주일 그것은 분명히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지구가 돌아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지만 그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사는 같지가 않은 것입니다. 특별한 날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작년에도 우리가 마지막 주일을 보냈지만, 작년과 달리 금년의 마지막 주일은 2000년이라는 새로운 수가 나열되는 해를 앞두고 보내는 주일이며, 1000년을 마감하는 주일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다른 것입니다. 내 생각부터가 다르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며, 다른 사람도 그 같은 생각을 가졌고, 그 생각들이 함께 모이면 특별한 일들이 이루어지기에 특별한 날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마지막 주일에 무엇을 생각하셨습니까 저는 오늘 한 뼘 길이 만큼밖에 되지 않는 우리 인생을 생각합니다. 이제 마지막 주일에 서서 지나온 천년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나의 삶을 생각할 때 정말 한 뼘 길이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 역사를 좀더 거슬러 2천년을 헤아린다면 한 뼘보다 더 짧은 나의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주님 앞에 우리가 서면 우리의 삶의 길이란 영(零, zero)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시편의 기자는 말하기를 ”주께서 나에게 한 뼘 길이밖에 안 되는 날을 주셨으니, 내 일생이 주님 앞에서는 없는 것이나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한 뼘 길이의 삶
구약성경에 보면, 우리의 삶을 아주 짧은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그 사는 날이 짧은데다가, 그 생애마저 괴로움으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피었다가 곧 시드는 꽃과 같이, 그림자 같이, 사라져서 멈추어 서지를 못합니다. ” 욥 14:1-2
”주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인생은 한 순간의 꿈일 뿐, 아침에 돋는 한 포기의 풀과 같을 따름입니다. 아침에는 돋아나서 꽃을 피우다가도, 저녁에는 시들어서 말라 버립니다. ” 시 90:5-6
”인생에게는, 그 날이 풀과도 같고, 피고 지는 들꽃 같아, 바람 한 번 지나가면 곧 시들어, 그 있던 자리조차 알 수 없다. ” 시 103:15-16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것이다. 주께서 그 위에 그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 있다. ” 사 40:6-8
구약시대 사람들은 보통 7, 80살은 살았고 좀더 오래 산 사람은 100살 넘게 살았는데도 그 삶은 한 뼘 길이밖에 안되고, 그 육체의 삶은 풀과 같아서 곧 시들어 버린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삶은 수고와 슬픔으로 채워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 시 90:10
야곱이 요셉의 초청을 받고 이집트에 내려가서 바로를 만났을 때 바로가 그 나이를 묻자 대답하기를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삶
이들의 이런 허무주의적 인간관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그들의 떠돌이 생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목민이었던 그들은 정처 없이 떠도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물론 가나안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많이 달라졌지만, 원래 유목민이었던 사람들은 한곳에 정착하는 것을 오히려 답답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이나 요르단에 가보면 아주 거친 광야에 천막을 치고 사는 베드윈족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요르단 정부가 이들을 위해서 집을 지어주었는데 도 이들은 집에는 양떼들을 몰아넣고 사람들은 천막을 치고 거기서 생활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옛 이스라엘 사람들도 오늘날의 베드윈족과 비슷하였을 것입니다. 천막에서 머물며 일생을 떠돌며 사는 이들의 삶에서 인생은 짧고 허무하다는 생각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바로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면서 그와 대조되는 인간의 삶은 정말 보잘 것 없고 짧은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깊은 신앙을 가진 사람일수록 인간의 보잘 것 없음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하심, 그의 전능하심을 알면 알수록 그와 대조되는 인간의 삶이란 정말 순간이며, 그 영광이란 풀의 꽃처럼 한 때 피어났다가 곧 사라져 버리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죽을 인생들아, 돌아가거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 주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인생은 한 순간의 꿈일 뿐, 아침에 돋는 한 포기의 풀과 같을 따름입니다. 시 90:3-5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인생은 한 순간의 꿈일 뿐”이라는 생각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동양에도 우리의 삶을 일장춘몽(1場春夢)이란 말로 표현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을 헛되게 낭비하지 말라는 도덕적인 경고를 담고 있을 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선 인간에 대한 통찰력 같은 것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소망
이렇게 볼 때 구약성경의 허무주의적인 인생관은 허무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깊은 신앙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오히려 ”인생은 한 순간의 꿈일 뿐”이라는 생각을 더 철저하게 갖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 시 90:12
주여, 나의 종말과 내 날들의 수치가 어떠한지 나로 알게 하시어 내가 얼마나 연약한지 알게 하소서. 시 39:4
이렇게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들이 기도하는 것은 그 허무한 삶에 매이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의 영원하신 세계에 연결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내 희망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시 39:7
여호와 하나님, 사슴이 타도록 목말라 시냇물을 찾듯,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애태웁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 하나님, 곧 생명의 여호와 하나님을 갈망하니, 언제 내가 나아가서 여호와 하나님을 뵈올 수 있을까 시 42:1-2
이들이 이런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것은 곤경에 처하였기 때문입니다. 죽음 직전까지 이르는 병에 걸렸을 때에, 혹은 적의 침략을 받아 포위되었을 때에, 아니면 오해를 받아 사람들로 비방과 모함을 받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는 인간의 죄악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주께서 내리신 재난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주의 손이 나를 치시면, 내 목숨은 끊어지고 맙니다. 주께서 인간의 잘못을 벌하시고, 그 욕망을 좀이 먹은 옷같이 삭게 하시니, 인생이란 참으로 허무할 뿐입니다. 시 39:10-11
주께서 우리 죄를 주님 앞에 내놓으시니, 우리의 숨은 죄가 주님 앞에 환히 드러납니다. 주께서 노하시면, 우리의 일생은 사그라지고, 우리의 한평생은 한숨처럼 스러지고 맙니다. 시 90:8-9
이들도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좀더 멋진 인생,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돈도 벌고 권력의 자리에도 올라보려고 무척 노력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결과로 돈도 벌고 권력의 자리에도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자리에 올라보니 거기에도 여전히 부족함과 문제가 많았던 것입니다. 끊임없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 메어지고, 비난과 원성이 들려오며, 적군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수시로 전쟁터에 나가 죽음을 무릅 써야하는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정적으로 자식들이 말썽을 부리고, 혹은 사랑하는 자식들이 죽음을 당하기도 하여 큰 슬픔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몸에 병이 걸려 죽음의 골짜기로 떨어지게 되면서 결국 인생이 추구하는 부귀영화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대체로 시편이 다윗왕의 것이라고 볼 때 파란만장한 다윗의 생애와 연결 시켜 이 시편들을 이해하면 보다 그 뜻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저작이라고 볼 수 있는 전도서는 이런 인생의 허무함을 더욱 깊이 있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보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헛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솔로몬도결론지어 말하기를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처럼 인생의 쓴 맛, 단맛을 다 본 후에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 아니라 청년의 때에 창조를 기억하라고 충고를 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이런 구약성경의 인간관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솔로몬의 모든 영광이 들의 백합화 하나만도 못하였다고 하심으로 인간이 이 땅에서 누리는 영광이란 들의 꽃처럼 시들어버리는 것이라는 구약의 말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염려하기 전에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의 이 땅의 삶을 질그릇에 비유하면서 그것은 곧 깨어지고 말 것이나 그 속에 담긴 보배 즉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명은 깨어지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도 하였습니다. 골로새서에서는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과 달리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 드려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주님 앞에 기도할 수 있으며, 주님의 돌보심과 사랑 안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문명에 빼앗긴 삶에서 돌이켜
문제는 상대적으로 이 땅의 삶이 물질적으로 더 풍요로워짐으로 거기에 매혹되어 인생의 짧음을 잊어버리고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도시 문명은 사람들을 옛날의 왕처럼 먹고 마시며 화려한 집에 살게 만들었습니다. 매일 새로운 문명을 쏟아내는 TV가 우리의 정신을 이 땅에 붙잡아 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의 것을 바라볼 시간이 없게 되었습니다. 너무 신기하고 너무 화려하며 너무 흥미롭고 너무 재미가 있는 것들이 많아서 그것들을 좇아가기에 바빠서 우리는 조용히 생각할 시간을 빼앗기고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할 시간을 잃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훌쩍 1년이 지나간 것입니다. 이 마지막 주일에 정신을 빼앗긴 채 살아온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삶의 자세를 가다듬어 이제는 위의 것을 찾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매혹시키는 물질문명은 필요 이상의 것을 만들어 내고 마구 소비하게 만들면서 결국은 우리의 자원을 바닥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어느 날 갑자기 이 문명이 무너지는 날이 이를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한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집을 떠난 탕자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써버린 다음 돼지우리 속에서 그 허기진 배를 채우고자 했으나 그마저도 얻지 못하였을 때 비로소 아버지 집을 떠올렸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삶도 이 땅의 자원이 바닥이 드러나면서 굶주림과 오염으로 죽어갈 때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갈 마음을 먹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위기 의식을 먼저 깨닫고 멸망이 이르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자원이 바닥이 나기 전에 우리는 절약하며 검소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새 천년을 맞는다고 하면서 더 쓰고 더 먹고 더 화려한 삶을 위해 정신 없을 때 우리는 깨어 새 천년에는 더 아끼고 더 검소하게 살기를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한 뼘 길이밖에 안 되는 짧은 삶을 이 땅의 썩을 것을 위하여 낭비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에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난 한 세기 동안 산업 발전을 통하여 우리 인류는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은 것을 만들어 소비하여 왔습니다. 우리의 삶은 너무 편안해졌고, 너무 풍요로워졌습니다. 가난한 나라들이 모두다 부자 나라들처럼 살기 위해 경제 개발을 서둘러서 마침내 이 지구 자원이 바닥이 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부자 나라들은 이런 위험을 깨닫고 가난한 나라들이 좇아오지 못하게 여러 모양으로 훼방(毁謗)을 놓고 있습니다. 결국 이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게 될 것이고, 이 지구 공동체는 결국 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바로 이 때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그 인생의 허무함을 깨달아야 할 때이며, 그래서 이 땅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대신에 우리의 영적인 삶을 살찌게 하여야 할 때임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이 땅의 종말적인 문명을 따라 갈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위의 것을 바라보며 그 영원을 추구하고 그 세계에 들어가기를 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한 순간의 꿈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시편의 기자처럼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지구의 종말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 늦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삶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20세기의 마지막, 아니 한 천년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우리 속에 담아야할 다짐이며 결단이어야 합니다.
이제 한 뼘 길이밖에 되지 않는 짧은 삶 속에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 영생을 누리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