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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 열린 문이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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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금년의 마지막 주일인 송년 주일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4주간의 대강절과 성탄절을 보내면서 설레임과 함께 기쁜 즐거운 성탄절을 보냈습니다. 해마다 그렇지만 그 설레임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한해를 보내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의 순간을 맞이해야 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에는 더욱 크고 작은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 어떤 것들은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고 또 계속되어 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과거 속에 빨리 묻어 버리고 싶고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도 있습니다. 이제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지난해 동안의 일들을 잘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새해를 가벼운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니까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보내는 말씀인데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열쇠(the key of David)를 가지신 분이 그 열쇠로 “한 번 닫으면 열 사람이 없고 열면 닫을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다윗의 열쇠란 무엇이며 그 열쇠를 가지신 분은 누구입니까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인 3:7-13에서 사도 요한은 세 가지 호칭을 씁니다.
7절에 보면 ① 거룩하고(Holy)
② 진실하사(true)
③다윗의 열쇠(the Key of David)를 가진 분 등 세 가지 호칭을 쓰고 있습니다.
여기 거룩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에게만 붙일 수 있는 이름입니다.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을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는 칭호를 썼습니다. (사 6:3) 그리고 사 43:15에서 다시 이사야는 “나는 여호와는 너희의 거룩한 자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의 王이니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는 칭호를 붙였고 그 이름이 아기 예수로 이 땅에 탄생하신 그리스도에게 붙여진 것입니다. 진실하신 분이라는 칭호도 예수님께 속한 이름이요, 진실이란 어떤 그림자나 영상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그림자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그 자신이요, 여호와 하나님 그 본체이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때문에 David의 열쇠를 가지신 분은 곧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칭호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그리스도를 David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라고 표현했을까 그것은 이사야 22:22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히스기야王은 엘리야김이라는 충실한 청지기가 있었는데 그는 그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높았고 그만이 王앞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 충성된 종 엘리야김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 요한의 머릿속에 이 말씀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David의 새 성읍인 새 Jerusalem으로 들여보낼 완전한 권위를 가지고 계신 분이며, 예수님만이 여호와 하나님에게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다윗의 새 성읍으로 특징 되는 새 예루살렘 성문을 열 자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는 것을 여기서 분명히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야만 여호와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문이 열리며 천국의 열쇠는 예수그리스도만이 갖고 있다는 진리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성경 말씀의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열린 문이 놓여 있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첫째로, “열린 문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틀림없이 닫힌 문이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눅 13:22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각 성 각 촌으로 다니시며 가르치실 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질문하기를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말씀하시고는 곧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 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이것은 곧 “닫힌 문”이 놓일 때가 있음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즉 천국의 문은 언젠가는 닫힐 때가 있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닫힐 문에 대한 개념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마7:13에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르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을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넓은 문으로 들어가면 끝내는 닫힌 문이 우리를 가로막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끝내는 열린 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넓은 문이란 남을 위한 희생 없이 내가 하고픈 일을 하면서 아무렇게나 산 생애를 말함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예수님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나를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가끔 “헛살았다”는 말을 합니다. 무엇인가 바쁘게 열심히 살기는 했는데 지내 놓고 나면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헛살았음을 느끼게 됩니다. 헛산 인생은 물질의 궁핍에서 나오는 후회의 감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물질의 풍요를 누린 사람들이 늦게 “헛살았다”고 후회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남을 위해 아무 것도 한일이 없을 때 헛산 생애에 대해 부끄럼을 갖게 됩니다.
성경은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성경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가르침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받는 것은 결코 참된 행복을 느끼게 하지 못합니다. 주는 기쁨, 자신을 희생하였을 때 얻어지는 환희가 내게 행복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연필의 예를 들었습니다. 자기 몸을 깎아서 연필심이 드러나야 자기 책임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몽당연필의 숭고함이 있습니다. 희생과 아픔을 통해서 자기 책임을 다한 숭고한 개선 장군의 모습이 거기에 있음을 본다고 했습니다. 마치 나뭇잎이 한 여름 동안 위세를 떨다가 결국엔 낙엽이 되므로 거름이 되고, 다음 세대를 돕는 희생의 제물이 되는 과정 앞에서 머리를 숙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열린 문으로 들어가려는 모든 유혹을 십자가에 다 못박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罪까지도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1996년을 보내면서 언젠가는 닫히고야 말 넓은 문을 완전히 닫아 버려야 하겠습니다. 욕심, 미움, 시기, 질투, 이기심 등을 과거의 문안에 완전히 닫아 버려야 합니다. 또 실패, 실의, 좌절, 실망도 다 넣고 닫아 버리십시오.
작년엔가 어느 가정이 암으로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중소기업을 운영했던 아버지가 평소 근검절약, 정직, 성실로 살아서 남긴 유산이 꽤 많아서 5남매가 나누어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례식을 치르면서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많은 장학금을 내어서 다른 사람들을 공부시키셨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남겨진 유산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각자 3-4억원씩 배당된 유산을 아버지의 호를 따서 효암장학금으로 한동대학교에 기증하여 20억원의 효암장학금이 한동대학에 생긴 이야기입니다. (1995. 10. 31 조선일보)
그런가 하면 한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들이 5000억-7000억씩 불의하게 긁어모아 쌓아 놓고 있었습니다. 5000억은 5년간 하루에 2억7400만원씩 거두어야 되며 1만원 권으로 쌓으면 54Km가되는 길이입니다. 백두산 2744m보다 더 높고 63빌딩 249m의 20배가 되고도 넘습니다. 연봉 2000만원을 받는 도시 근로자가 한푼도 쓰지 않고 25. 000년 동안 모아야 하는 돈입니다. 이 추하고 천박하기 그지없는 돈을 가지고 파렴치하게 살려고 했던 그들이 아직도 그 돈에 대해 참회하지 않습니다. 정권 찬탈 과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잡았으면 국민을 잘 사는 길로 인도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미련과 아쉬움이 그들을 바라보는 눈을 곱지 않게 만듭니다.
 둘째로, 이런 참담한 가슴을 안고 있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네 앞에 열린 문을 놓겠다. (I have set before you an open door)”고 하십니다. 답답하고 그늘진 마음으로 한 해를 보내는 사람들에게도 내가 너를 위해 열린 문을 놓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어떤 열린 문일까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열린 문”은 어떤 문일까 빌라델비아는 포도 생산지로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주후 17년에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 주변 사데 등 10개의 도시를 파괴시켰는데 다른 도시는 한번만 지진이 일어났으나 빌라델비아는 수년 동안 이 지진이 계속되어서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습니다. 스트라조는 “지진 투성이의 도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장기간 동안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과 공포가 계속 되었던 도시 였습니다. 스트라보는 “·····이 몸서리쳐지는 지진이 계속되어 아직 완전히 그들의 뇌리에서 지진의 공포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열린 문”은 다음과 같은 문을 말합니다.
(1) 실패와 두려움과 공포를 벗어나는 안전한 문이 열려져 있는 것입니다. 엄청난 시련과 재해의 공포를 경험하며 아직도 그 감정을 뇌리 속에서 지우지 않고 있는 필라델피아 교인들에게 “열려진 문”은 곧 평안의 문이요, 안전의 문이요, 승리의 문이요, 축복의 문입니다. 세상을 바라볼 때는 두려움과 공포뿐이나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볼 때는 새로운 용기와 힘과 세계가 펼쳐집니다.
(2) 기도의 문입니다. 누구에게나 기도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누구든지 기도의 문에 들어가면 자기가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앞에 놓여진 기도의 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열어 놓은 것이기에 아무도 닫을 자가 없습니다. 이 기도의 문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형통할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앞에 이 기도의 문을 열어 놓고 계십니다.
(3) 열려진 문은 메시야 즉 통치의 주님 안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와 더불어 새 세계가 왔습니다. 새로운 다윗 왕국이 건설되었습니다. 옛날에 엘리야김이 열쇠를 들고서만 이 전에 들어갈 수 있듯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에게 인도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문이 되시기도 하셨습니다. 요 10:9 “내가 문이요”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문으로 와야 구원받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언(American indian)을 위해 복음을 전했던 다윗 브레인나드(David Brainard)씨는 예수님의 희생의 피가 우리 죄를 씻겨 준다는 사실을 인디언들에게 열심히 전파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의 피로 인디언을 설득했고 인디언들도 희생의 제물을 드리는 종교의식이 있어서 브레인나드씨의 설교를 이해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었답니다. 그가 죽을 때 찰스 스펄전이 곁에 있었습니다. 그가 미소지으며 “나의 신학은 네 마디면 족하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Jesus died for me). ”라고 유언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덴마크 국기는 붉은 배경에 흰 십자가입니다. 13세기에 제정하여 한 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1219년 월드머 황제(King Waldmar)가 군대를 이끌어 돌격전을 결행하는데 갑자기 노을진 붉은 하늘에 흰 십자가가 나타나 승리를 확신했습니다. 그 때의 환상을 가지고 국기를 만들었습니다. 붉은 노을은 예수님의 피, 그리고 십자가는 승리의 환상입니다.
(4) 선교의 문입니다.
모든 우리에게 선교의 기회가 주어져 있는데 멀리 보다 가까이 에서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장 큰 일은 선교를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 문을 열고 나가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상급이 크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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