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이제 후로는
본문
오늘은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른바 송년주일이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2000년도의 한해가 다 의미가 있는 시간인줄 알면서도 평상시에는 거저 지나가다가 이렇게 마지막이다 하면 무언가 의미를 되찾아보려고 시늉이라도 내는 것이 우리들의 연약한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일 낮 예배로서의 마지막 주일을 지키면서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가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정말 모세의 기도대로 2000년도가 눈 깜짝할 사이에 마지막 주일까지 달려왔습니다. 여기까지 달려오는 동안에 국가적으로 교회적으로 가정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때를 따라 도우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여기까지 도우시는 에벤에셀의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릴뿐입니다. 늘 그렇듯이 지난 온 날을 반성하여 볼 때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잘 한 일보다는 못한 일이 더 많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솔직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흔히들 연말만 되면 ”유종의 미”를 거두자라는 말을 잘 사용하고 있는데 이 말이야말로 시작한 일을 끝까지 잘 마무리하자는 말입니다. 모든 일이란 마지막을 어떻게 마무리하느냐에 따라 일의 성패가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인생의 종착역에 도달할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판 때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어떠한 판정을 받을 것인가를 이 시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해를 결산하는 마지막 뜻깊은 주일을 맞이하여 본문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삶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순교를 눈앞에 두고 믿음의 아들이요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편지한 내용을 살펴볼 때 사도 바울이야말로 유종의 미를 거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8절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믿음의 고백이며 자신만만한 승리자의 모습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떠한 고백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시간 유종의 미를 거둔 사도 바울의 삶을 찾아보면서 우리들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승리의 고백을 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I. 사도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는 생활로 유종의 미를 거두었습니다.
본문 7절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싸움이란 말은 경주를 의미하는 말인데 경주도 서로 앞을 다투는 일종의 싸움이며 바울의 생애는 일평생 싸우는 생애요 날마다 사선을 넘는 삶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선한 싸움은 영적인 싸움이었습니다. 에베소서 6: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 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멋있게 승리하였습니다.
이러한 승리가 있었기 때문에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을 하였습니다. 정말 앞장서 간 훌륭한 신앙의 사람들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신 분들이 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낭만이 아닙니다.
때로는 생명을 내걸고 싸우는 싸움입니다.
그야말로 사느냐 죽느냐의 처절한 문제인 것입니다.
이러한 피나는 싸움에서 기어이 승리하고 이제 후로는 나에게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믿음의 경주장에서 달려가는 우리들을 향하여 너희들도 이렇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승리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금년에 믿음의 선한 싸움을 얼마나 싸웠습니까 어떠한 자세로 싸움에 임하였습니까 교회는 전투적인 기능이 있다고 조직신학에서도 배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역시 전투적인 삶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원수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으며 그 싸움에서 진다면 우리의 인생은 끝장임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더욱이 우리의 원수 마귀는 영리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의 때가 얼마남지 않은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최후의 발악을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들을 무차별하게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마귀와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싸워 이기려고 하면 상식적으로 생각한다 하더라도 대충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생명을 걸고 싸우는 싸움입니다. 이 시간 한 해를 반성하면서 저와 여러분들이 이러한 자세로 싸웠습니까 우리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적으로 생각하여 보십시다. 처절한 생존경쟁에서는 살아남기 위하여 죽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싸워서 이만큼이라도 살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정말 먹느냐 먹히느냐의 생존의 싸움에서 일단 여기까지 살아남은 데 대하여서는 얼마나 감사한 일이며 대견한 일입니까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영적인 싸움에서 결사적으로 싸웠는가를 생각하여 보면 너무도 부끄러움을 금치 못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사업장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몸부림을 쳤던 그 싸움에 비하면 너무도 일찍 포기하지 않았나 생각할 정도입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고 말씀하였지만 우리가 대적하기는커녕 너무나 일찍 백기를 들고 항복하지나 않았습니까 일단은 항복을 하고 시키는대로 하면 그 속에서의 편안함은 있으니까 말입니다.
세상의 명예와 재물을 위하여서는 그렇게 처절한 싸움을 하였으면서도 정작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할 영적인 싸움에 있어서는 너무나 쉽게 손을 들어버린 것 같습니다.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로다”고 말씀하여 주었지만 내 자존심과 명예의 유지를 위하여서는 지나치게 반응을 보였지만 주님의 자존심과 명예의 손상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님의 날을 지키는 것이 신앙인들에게는 생명과 같은 중요한 일인 것을 알면서도, 우리 가운데는 ’이것이(주일성수)가 무너지면 나의 영적인 생명은 끝장이다’는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싸운 자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길은 여호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길뿐임을 알면서도 우리가 얼마나 기도의 무릎을 꿇었으며 얼마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을 하였습니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적인 나와의 싸움에서 얼마나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켰습 니까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 단언하였지만 저부터도 날마다 죽기는커녕 날마다 혈기나 부리고 날마다 육신의 편안함만을 위하여 살아온 것 같습니다. 이래가지고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시간 겸손한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리십시다. 그리고 우리의 힘은 약하나 여호와 하나님의 힘의 능력으로 악의 영들과의 싸움에서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우리의 삶이 끝나는 날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나가기를 우리의 대장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사도 바울은 달려갈 길을 마치므로 유종의 미를 거두었습니다.
7절에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는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려가는 경주자의 생애였습니다. 마치 마라톤 경주자가 정하여진 코스를 다 달려서 결승테이프를 끊은 것처럼 바울은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 중에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처럼 위대한 말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통쾌한 승리의 선언을 통하여 우리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믿음의 경주장에서 달려가는 경주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경주도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경주입니다. 단판 승부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끝까지 달려가는 인내의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칠전팔기”라는 말이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금년 한해도 믿음의 경주장에서 달려오면서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잘 달려 오셨습니까 아니면 도중에 하차하였습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성도들이 경주하는 경기는 장애물 경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장거리 경주하는 것만도 피곤한 일인데 거기에 장애물까지 겹쳤으니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러기에 우리들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 기자는 믿음의 경주장에서 달음박질 하는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베드로가 바다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걸어갔을 때에는 물위로 걸어갔습니다만 파도가 이는 바다물결을 바라보았을 때에는 물에서 빠져갔습니다. 금년 한해도 여러분들의 직장이나 가정이나 교회에서 사회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정하여 주신 달려갈 길을 얼마나 잘 달려왔습니까 사도 바울처럼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도중에 하차하였습니까 우리는 곧잘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각자에게 정하여 주신 인생의 코스에 대하여 말들이 많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힘든 난코스를 정하여 주었습니까 하고 불평을 터뜨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정하여주신 이 코스를 믿음으로 잘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3. 사도 바울은 믿음을 지키므로 유종의 미를 거두었습니다.
7절에서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은 어떠한 장소나 환경에 구애를 받지 않고 그가 받은 사명을 감당하고 믿음을 지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온갖 누명을 쓰고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심지어는 아무 죄도 없이 감옥에 갇혔지만 거기에서도 찬송하고 기도하면서 끝까지 믿음을 지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차디찬 감옥속에서 내가 육체적으로는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지만 나는 믿음을 지키므로 이제 후로는 나에게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자신있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애를 쓰고 있습니까 자기의 명예와 재산을 지키느라고 얼마나 머리를 쓰고 있습니까 그러나 정작 지켜야 할 신앙의 양심은 지키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을 얼마나 지켰습니까
오늘도 새해에 새롭게 일할 일꾼들을 임명하였습니다만 여호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귀한 사명을 믿음으로 끝까지 감당하여야 하겠습니다. 저는 어제 밤늦은 시간까지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약 대통령이 나에게 일할 수 있는 어떠한 좋은 자리에 임명하였다고 하면 나 못하겠습니다 하고 사양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대통령보다 더 높으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자리를 주었다면 감사함으로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신 일자리가 목사가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정말 목사가 임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임명권자인 저 자신부터 자존심 상하고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임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자존심 상하다가도 기꺼이 주의 일에 수종 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어지는 자리가 어떤 개인이 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임을 믿는다면 그 자리가 무슨 자리든 사양을 할 수 있겠습니까 거저 감사하고 황공무지로소이다는 심정으로 지사충성할 뿐입니다.
오늘날 생명 걸고 자기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것을 보면서 잠언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4:24)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아름답고 선한 마음을 잘 지켜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보배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사33:6). 마지막 결산의 날이 가까워오고 있는데 우리의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자들이 되십시다. 믿음만 있다면 우리들에게 어떠한 일이 다가오더라도 문제가 없습니다. ”믿음이 이기네”
이른바 송년주일이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2000년도의 한해가 다 의미가 있는 시간인줄 알면서도 평상시에는 거저 지나가다가 이렇게 마지막이다 하면 무언가 의미를 되찾아보려고 시늉이라도 내는 것이 우리들의 연약한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일 낮 예배로서의 마지막 주일을 지키면서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가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정말 모세의 기도대로 2000년도가 눈 깜짝할 사이에 마지막 주일까지 달려왔습니다. 여기까지 달려오는 동안에 국가적으로 교회적으로 가정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때를 따라 도우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여기까지 도우시는 에벤에셀의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릴뿐입니다. 늘 그렇듯이 지난 온 날을 반성하여 볼 때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잘 한 일보다는 못한 일이 더 많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솔직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흔히들 연말만 되면 ”유종의 미”를 거두자라는 말을 잘 사용하고 있는데 이 말이야말로 시작한 일을 끝까지 잘 마무리하자는 말입니다. 모든 일이란 마지막을 어떻게 마무리하느냐에 따라 일의 성패가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인생의 종착역에 도달할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판 때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어떠한 판정을 받을 것인가를 이 시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해를 결산하는 마지막 뜻깊은 주일을 맞이하여 본문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삶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순교를 눈앞에 두고 믿음의 아들이요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편지한 내용을 살펴볼 때 사도 바울이야말로 유종의 미를 거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8절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믿음의 고백이며 자신만만한 승리자의 모습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떠한 고백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시간 유종의 미를 거둔 사도 바울의 삶을 찾아보면서 우리들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승리의 고백을 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I. 사도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는 생활로 유종의 미를 거두었습니다.
본문 7절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싸움이란 말은 경주를 의미하는 말인데 경주도 서로 앞을 다투는 일종의 싸움이며 바울의 생애는 일평생 싸우는 생애요 날마다 사선을 넘는 삶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선한 싸움은 영적인 싸움이었습니다. 에베소서 6: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 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멋있게 승리하였습니다.
이러한 승리가 있었기 때문에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을 하였습니다. 정말 앞장서 간 훌륭한 신앙의 사람들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신 분들이 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낭만이 아닙니다.
때로는 생명을 내걸고 싸우는 싸움입니다.
그야말로 사느냐 죽느냐의 처절한 문제인 것입니다.
이러한 피나는 싸움에서 기어이 승리하고 이제 후로는 나에게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믿음의 경주장에서 달려가는 우리들을 향하여 너희들도 이렇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승리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금년에 믿음의 선한 싸움을 얼마나 싸웠습니까 어떠한 자세로 싸움에 임하였습니까 교회는 전투적인 기능이 있다고 조직신학에서도 배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역시 전투적인 삶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원수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으며 그 싸움에서 진다면 우리의 인생은 끝장임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더욱이 우리의 원수 마귀는 영리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의 때가 얼마남지 않은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최후의 발악을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들을 무차별하게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마귀와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싸워 이기려고 하면 상식적으로 생각한다 하더라도 대충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생명을 걸고 싸우는 싸움입니다. 이 시간 한 해를 반성하면서 저와 여러분들이 이러한 자세로 싸웠습니까 우리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적으로 생각하여 보십시다. 처절한 생존경쟁에서는 살아남기 위하여 죽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싸워서 이만큼이라도 살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정말 먹느냐 먹히느냐의 생존의 싸움에서 일단 여기까지 살아남은 데 대하여서는 얼마나 감사한 일이며 대견한 일입니까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영적인 싸움에서 결사적으로 싸웠는가를 생각하여 보면 너무도 부끄러움을 금치 못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사업장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몸부림을 쳤던 그 싸움에 비하면 너무도 일찍 포기하지 않았나 생각할 정도입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고 말씀하였지만 우리가 대적하기는커녕 너무나 일찍 백기를 들고 항복하지나 않았습니까 일단은 항복을 하고 시키는대로 하면 그 속에서의 편안함은 있으니까 말입니다.
세상의 명예와 재물을 위하여서는 그렇게 처절한 싸움을 하였으면서도 정작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할 영적인 싸움에 있어서는 너무나 쉽게 손을 들어버린 것 같습니다.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로다”고 말씀하여 주었지만 내 자존심과 명예의 유지를 위하여서는 지나치게 반응을 보였지만 주님의 자존심과 명예의 손상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님의 날을 지키는 것이 신앙인들에게는 생명과 같은 중요한 일인 것을 알면서도, 우리 가운데는 ’이것이(주일성수)가 무너지면 나의 영적인 생명은 끝장이다’는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싸운 자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길은 여호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길뿐임을 알면서도 우리가 얼마나 기도의 무릎을 꿇었으며 얼마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을 하였습니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적인 나와의 싸움에서 얼마나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켰습 니까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 단언하였지만 저부터도 날마다 죽기는커녕 날마다 혈기나 부리고 날마다 육신의 편안함만을 위하여 살아온 것 같습니다. 이래가지고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시간 겸손한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리십시다. 그리고 우리의 힘은 약하나 여호와 하나님의 힘의 능력으로 악의 영들과의 싸움에서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우리의 삶이 끝나는 날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나가기를 우리의 대장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사도 바울은 달려갈 길을 마치므로 유종의 미를 거두었습니다.
7절에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는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려가는 경주자의 생애였습니다. 마치 마라톤 경주자가 정하여진 코스를 다 달려서 결승테이프를 끊은 것처럼 바울은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 중에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처럼 위대한 말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통쾌한 승리의 선언을 통하여 우리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믿음의 경주장에서 달려가는 경주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경주도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경주입니다. 단판 승부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끝까지 달려가는 인내의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칠전팔기”라는 말이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금년 한해도 믿음의 경주장에서 달려오면서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잘 달려 오셨습니까 아니면 도중에 하차하였습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성도들이 경주하는 경기는 장애물 경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장거리 경주하는 것만도 피곤한 일인데 거기에 장애물까지 겹쳤으니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러기에 우리들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 기자는 믿음의 경주장에서 달음박질 하는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베드로가 바다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걸어갔을 때에는 물위로 걸어갔습니다만 파도가 이는 바다물결을 바라보았을 때에는 물에서 빠져갔습니다. 금년 한해도 여러분들의 직장이나 가정이나 교회에서 사회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정하여 주신 달려갈 길을 얼마나 잘 달려왔습니까 사도 바울처럼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도중에 하차하였습니까 우리는 곧잘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각자에게 정하여 주신 인생의 코스에 대하여 말들이 많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힘든 난코스를 정하여 주었습니까 하고 불평을 터뜨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정하여주신 이 코스를 믿음으로 잘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3. 사도 바울은 믿음을 지키므로 유종의 미를 거두었습니다.
7절에서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은 어떠한 장소나 환경에 구애를 받지 않고 그가 받은 사명을 감당하고 믿음을 지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온갖 누명을 쓰고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심지어는 아무 죄도 없이 감옥에 갇혔지만 거기에서도 찬송하고 기도하면서 끝까지 믿음을 지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차디찬 감옥속에서 내가 육체적으로는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지만 나는 믿음을 지키므로 이제 후로는 나에게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자신있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애를 쓰고 있습니까 자기의 명예와 재산을 지키느라고 얼마나 머리를 쓰고 있습니까 그러나 정작 지켜야 할 신앙의 양심은 지키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을 얼마나 지켰습니까
오늘도 새해에 새롭게 일할 일꾼들을 임명하였습니다만 여호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귀한 사명을 믿음으로 끝까지 감당하여야 하겠습니다. 저는 어제 밤늦은 시간까지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약 대통령이 나에게 일할 수 있는 어떠한 좋은 자리에 임명하였다고 하면 나 못하겠습니다 하고 사양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대통령보다 더 높으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자리를 주었다면 감사함으로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신 일자리가 목사가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정말 목사가 임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임명권자인 저 자신부터 자존심 상하고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임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자존심 상하다가도 기꺼이 주의 일에 수종 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어지는 자리가 어떤 개인이 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임을 믿는다면 그 자리가 무슨 자리든 사양을 할 수 있겠습니까 거저 감사하고 황공무지로소이다는 심정으로 지사충성할 뿐입니다.
오늘날 생명 걸고 자기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것을 보면서 잠언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4:24)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아름답고 선한 마음을 잘 지켜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보배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사33:6). 마지막 결산의 날이 가까워오고 있는데 우리의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자들이 되십시다. 믿음만 있다면 우리들에게 어떠한 일이 다가오더라도 문제가 없습니다. ”믿음이 이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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