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한 해를 마감하며
본문
올해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올한해도 나라 안팎으로 많은 변화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변화는 우리가 생각지도 않았던 IMF시대를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내년에는 실업자가 150여만명에 이르게 된다고 하니 참으로 암담합니다. 그러나 이럴때일수록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절약하고, 절제해서 어려운 국난을 헤쳐나가야 할줄 압니다.
우리교회도 올해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제일 큰 변화는 새로운 성전에 입당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하 작은 공간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이곳에 와보니 그렇게 커보이더니 성탄예배를 드릴때도 그렇고, 오늘 97년을 마감하는 마지막 주일예배를 드리는데 벌써 이곳도 그리 커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축복을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우리모두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는 어떤 변화들이 있으셨는지요 자녀들이 상급학교에 진학을 한 가정도 있을것이고, 이사를 해서 새로운 집에서 사시게 된 분도 계실 것입니다. 혹 직장을 옮겼거나, 직업을 바꾸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아뭏튼 우리모두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한가지 더, 여러분의 신앙에는 어떤 변화가 있으셨는지요 작년보다는 좀더 성숙되고, 좀더 헌신적인 그런 신앙생활이셨는지요 아니면 신앙이 더 퇴보한 한해였는지요 마지막 주일을 보내는 이 시점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다시한번 깊이 돌아보아야 할 줄압니다.
지난 수개월동안 우리는 주일 낮시간에 디모데후서를 함께 생각해보았습니다. 97년 마지막 주일에 디모데후서도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를 쓰고있는 사도바울의 생애도 마감을 합니다.
그래서 생애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사도바울은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자신과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그들에게 문안하는 인사도 잊지 않았습니다. 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네가 올때에 네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가족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
지난주에도 이부분을 통해 잠시 말씀을 드렸지만 바울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기를 열망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해동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대하고자 얼마나 노력을 하셨는지요
우리는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자신의 경험으로 문제를 헤쳐나가려 합니다. 물론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경험하는 일들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책은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속에 있습니다.
믿음에 관한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혹 여러분이 지난 한해동안 믿음없는 행동을 하셨다면 그것은 말씀을 늘 가까이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로마서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외국어를 공부하는 분들을 보면 귀에 늘 이어폰을 꽂고 다닙니다. 심한 경우에는 잠잘때도 꽂고 잡니다. 그런데 자꾸 들으면 귀가 뚫린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자꾸 듣다보면 무슨 말인지 알게 되고 깨달음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항상 듣고자 노력한다면 믿음도 생기고, 그 가운데 깨달음도 생기고, 또 믿음대로 살고자 하는 용기도 생기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여러분 가운데 올 97년이 믿음으로 사는 해가 되지 못하셨다면 그 원인중에 하나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한해를 마감하는 12월, 그것도 마지막 주일에 이런 결단이 필요할 것입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심입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을 가까이 대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죽는 이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도 디모데에게 부탁을 해서 성경책을 가져다 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아울러서 바울은 14절 이하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구리장색 알렉산더에 대해 언급을 합니다.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구리장색 알렉산더는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정확한 증거를 찾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중에 하나는 이 사람이 바울에게 해(害)를 끼친것과, 그 해가 좀더 구체적으로는 바울의 말에 사사건건 반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에 대해 바울이 취한 행동은 두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한 판단을 여호와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허물을 용서해 주기를 바랐다는 것입니다.
14절 ”구리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16절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해동안 여러분들을 괴롭게 한 사람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심적으로 혹은 육체적으로 여러분에게 부담이 되고, 여러분을 괴롭게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행동을 하셨습니까 혹 내가 그 사람에게, 그가 내게 한 것만큼 되갚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습니까 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없습니까
이 부분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언제나 바울이 취한 것과 같아야합니다. 먼저는 이 모든 일에 진정한 판단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우리는 그들을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뿐 아니라 믿음으로 살고자 했던 사람들은 언제나 그러했습니다.
스데반도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우리주님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내가 심판하겠다고 하는 생각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장 11절 이하를 보면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우리가 형제를 판단하면 우리는 재판장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권리를 월권하는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여러분의 주변에 지난 한해동안 어려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여러분을 몹씨 괴롭혔던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바울과 같이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합니다”라는 기도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의 자세입니다.
물론 이러한 삶의 자세가 내가 가지고 싶다고 저절로 가져지는 것은 분명아닙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17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주께서 바울의 곁에 서서 바울을 강건케 하셨다고 말합니다. 참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치고 힘이들 때 주님은 우리의 곁에 서서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멀리서 물끄러미 지켜 보고만 계시지 않고 내 곁에서 나를 강건케 하실 것입니다. 특히 여러분 마음에 담아둔 미운 사람에 대해서도 여러분이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자 한다면 우리주님께서 여러분의 그 귀한 마음이 변하지 않도록 여러분의 곁에서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렇게 해야하는 이유를 복음전파와 연결을 시켜서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줄 아는 것은 복음전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복음전파와 관련된 교회를 말할 때 저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저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들은 달리 전도하러 먼곳으로 나간일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홍보물을 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모여서 의논한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로 인해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지방에 복음이 증거되었고, 기타 여러지역에도 복음이 전해졌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그들의 믿음의 소문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안에서 형제를 뜨겁게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 소문이 원근각처에 전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비록 여러분 주위에 구리장색 알렉산더와 같은 사람이 있다할지라도 허물을 그에게 돌리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께 모든 판단을 맡기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이 궁극적으로는 복음을 전파하는 놀라운 기회가 된다는 사실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이러한 모든 행동을 통해 한가지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복음전파는 곧 여호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이 돌리워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바울의 마지막 생애의 초점도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신. 구약성경전체가 성경 한구절에 모두 담겨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로마서 11장 36절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
여러분!
이” 세상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모든 세계가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는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욥도 말하기를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1:21)고 했습니다.
올 한해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살아오셨는지요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면서 사셨나요 아니면 ”그래도 내가 노력을 했으니까 이것은 내것이야!라고 생각하면서 지내지 않으셨는지요”
그런의미에서 어리석은 부자의 얘기는 우리들에게 다시한번 귀한 교훈을 줍니다. 부자도 그렇게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밭에서 일구어낸 소출이기에 당연히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출을 보관할 창고를 만들고 그곳에 곡식을 가득채웠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내 영혼아! 여러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했습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하셨습니다. 저뿐 아니라 여러분도 이 말씀을 요즘 실감하실 것입니다. 지난 20여년간 우리는 피땀 흘리며 경제를 일구어 내었습니다. 그래서 소득 1만불 시대를 맞이했다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환율이 오르니 하루 아침에 소득이 5천불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게 되어있습니다. 혹 지난 한해동안 여호와 하나님의 것을 웅켜쥐고는 내것이라고 고집을 부린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한해를 보내는 이 마지막 주일에 다시한번 97년을 깊이 반성을 해봅시다. 모든 영광이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도 하지만 또 우리들도 그 영광에 참여하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18절에서 읽었듯이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신다. ”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여호와 하나님은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은혜를 우리들에게 반드시 베푸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을 보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7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주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주님과 영원토록 거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디도데후서에서도 이미 이와같은 사실을 바울은 말해왔습니다. 2장 10절에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다” 12절에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은 우리들에게 다시 돌아옵니다. 문제는 우리 인간의 짧은 생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주저하기 때문에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모든 영광을 여호와 하나님께 돌리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바울은 디모데후서 대단원의 막을 문안인사로 끝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러명의 이름을 들어가면서 그들에게 문안인사하는 것을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9-22절)
여러분!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푼 분들이 여러분 주위에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크든 적든 상관없이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들에게 문안인사를 빠트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우리성도들의 은혜가 가장 크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와같이 허물이 많고, 부족한 사람을 언제나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시고, 실수가 있어서 실수로 생각지 않고, 허물을 믿음으로 다 받아 넘기시는 여러분의 은혜에 다시한번 감사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도 특별히 생각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한해가 다 가기 전에 그분들에게 문안을 드리시길 바랍니다. 바울이 꺼져가는 자신의 마지막 생애를 두고서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했듯이 여러분도 지난 한해동안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 찾아가지 못한다면 전화로라도 그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시길 바랍니다.
한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바울의 마지막 편지를 보면서 우리의 한해를 잘 마무리해야겠습니다.
독수리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 집을 떠나 높은 바위위에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 발로 바위를 굳게 딛고 서서 서쪽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슬며시 눈을 감는다고 합니다. 우리의 생애도 우리 나름대로는 열심히 산다고 하지만 막상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면 언제나 우리가 디디고 선 것은 허공이요, 낭떠러지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딛고 설 곳은 만세반석이신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 의의 태양이신 주님,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신 주님만 바라보면서 눈을 감을수 있는 것이 우리의 마지막 인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찬송가 188장 ’만세반석 열리니’란 곡은 1787년 어거스틴 도플레이디가 쓴 노래입니다. 이 사람이 하루는 밭에 나가 일하다가 갑자기 무시무시한 폭풍을 만났습니다. 너무나 센 바람이 불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옆에 바위가 하나 있어 기대어 섰는데 이상하게도 가운데가 쪼개어진 바윗돌이었습니다.
그는 바위속으로 들어가 발을 펴고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폭풍이 몰아치고, 나무는 뿌리째 날아가는데 자기는 너무도 안전했기에 그때 받은 영감으로 찢어진 종이위에 가사를 적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방이 올 때, 언제든지 붙들 수 있는 것, 내가 밟고 설수 있는 것, 나에게 고난이 다가와도 내가 딛고 설 자리는 깨어져 주신 만세반석입니다. 우리가 의지하던 그 모든 것들이, 그렇게도 아끼고 아끼던 것들이 사라질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해를 보내는, 그리고 새해를 기다리는 성도 여러분! 언제나 주님의 은혜만 바라보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교회도 올해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제일 큰 변화는 새로운 성전에 입당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하 작은 공간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이곳에 와보니 그렇게 커보이더니 성탄예배를 드릴때도 그렇고, 오늘 97년을 마감하는 마지막 주일예배를 드리는데 벌써 이곳도 그리 커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축복을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우리모두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는 어떤 변화들이 있으셨는지요 자녀들이 상급학교에 진학을 한 가정도 있을것이고, 이사를 해서 새로운 집에서 사시게 된 분도 계실 것입니다. 혹 직장을 옮겼거나, 직업을 바꾸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아뭏튼 우리모두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한가지 더, 여러분의 신앙에는 어떤 변화가 있으셨는지요 작년보다는 좀더 성숙되고, 좀더 헌신적인 그런 신앙생활이셨는지요 아니면 신앙이 더 퇴보한 한해였는지요 마지막 주일을 보내는 이 시점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다시한번 깊이 돌아보아야 할 줄압니다.
지난 수개월동안 우리는 주일 낮시간에 디모데후서를 함께 생각해보았습니다. 97년 마지막 주일에 디모데후서도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를 쓰고있는 사도바울의 생애도 마감을 합니다.
그래서 생애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사도바울은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자신과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그들에게 문안하는 인사도 잊지 않았습니다. 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네가 올때에 네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가족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
지난주에도 이부분을 통해 잠시 말씀을 드렸지만 바울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기를 열망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해동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대하고자 얼마나 노력을 하셨는지요
우리는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자신의 경험으로 문제를 헤쳐나가려 합니다. 물론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경험하는 일들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책은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속에 있습니다.
믿음에 관한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혹 여러분이 지난 한해동안 믿음없는 행동을 하셨다면 그것은 말씀을 늘 가까이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로마서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외국어를 공부하는 분들을 보면 귀에 늘 이어폰을 꽂고 다닙니다. 심한 경우에는 잠잘때도 꽂고 잡니다. 그런데 자꾸 들으면 귀가 뚫린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자꾸 듣다보면 무슨 말인지 알게 되고 깨달음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항상 듣고자 노력한다면 믿음도 생기고, 그 가운데 깨달음도 생기고, 또 믿음대로 살고자 하는 용기도 생기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여러분 가운데 올 97년이 믿음으로 사는 해가 되지 못하셨다면 그 원인중에 하나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한해를 마감하는 12월, 그것도 마지막 주일에 이런 결단이 필요할 것입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심입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을 가까이 대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죽는 이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도 디모데에게 부탁을 해서 성경책을 가져다 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아울러서 바울은 14절 이하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구리장색 알렉산더에 대해 언급을 합니다.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구리장색 알렉산더는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정확한 증거를 찾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중에 하나는 이 사람이 바울에게 해(害)를 끼친것과, 그 해가 좀더 구체적으로는 바울의 말에 사사건건 반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에 대해 바울이 취한 행동은 두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한 판단을 여호와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허물을 용서해 주기를 바랐다는 것입니다.
14절 ”구리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16절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해동안 여러분들을 괴롭게 한 사람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심적으로 혹은 육체적으로 여러분에게 부담이 되고, 여러분을 괴롭게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행동을 하셨습니까 혹 내가 그 사람에게, 그가 내게 한 것만큼 되갚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습니까 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없습니까
이 부분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언제나 바울이 취한 것과 같아야합니다. 먼저는 이 모든 일에 진정한 판단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우리는 그들을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뿐 아니라 믿음으로 살고자 했던 사람들은 언제나 그러했습니다.
스데반도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우리주님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내가 심판하겠다고 하는 생각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장 11절 이하를 보면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우리가 형제를 판단하면 우리는 재판장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권리를 월권하는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여러분의 주변에 지난 한해동안 어려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여러분을 몹씨 괴롭혔던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바울과 같이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합니다”라는 기도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의 자세입니다.
물론 이러한 삶의 자세가 내가 가지고 싶다고 저절로 가져지는 것은 분명아닙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17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주께서 바울의 곁에 서서 바울을 강건케 하셨다고 말합니다. 참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치고 힘이들 때 주님은 우리의 곁에 서서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멀리서 물끄러미 지켜 보고만 계시지 않고 내 곁에서 나를 강건케 하실 것입니다. 특히 여러분 마음에 담아둔 미운 사람에 대해서도 여러분이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자 한다면 우리주님께서 여러분의 그 귀한 마음이 변하지 않도록 여러분의 곁에서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렇게 해야하는 이유를 복음전파와 연결을 시켜서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줄 아는 것은 복음전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복음전파와 관련된 교회를 말할 때 저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저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들은 달리 전도하러 먼곳으로 나간일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홍보물을 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모여서 의논한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로 인해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지방에 복음이 증거되었고, 기타 여러지역에도 복음이 전해졌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그들의 믿음의 소문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안에서 형제를 뜨겁게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 소문이 원근각처에 전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비록 여러분 주위에 구리장색 알렉산더와 같은 사람이 있다할지라도 허물을 그에게 돌리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께 모든 판단을 맡기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이 궁극적으로는 복음을 전파하는 놀라운 기회가 된다는 사실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이러한 모든 행동을 통해 한가지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복음전파는 곧 여호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이 돌리워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바울의 마지막 생애의 초점도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신. 구약성경전체가 성경 한구절에 모두 담겨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로마서 11장 36절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
여러분!
이” 세상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모든 세계가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는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욥도 말하기를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1:21)고 했습니다.
올 한해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살아오셨는지요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면서 사셨나요 아니면 ”그래도 내가 노력을 했으니까 이것은 내것이야!라고 생각하면서 지내지 않으셨는지요”
그런의미에서 어리석은 부자의 얘기는 우리들에게 다시한번 귀한 교훈을 줍니다. 부자도 그렇게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밭에서 일구어낸 소출이기에 당연히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출을 보관할 창고를 만들고 그곳에 곡식을 가득채웠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내 영혼아! 여러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했습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하셨습니다. 저뿐 아니라 여러분도 이 말씀을 요즘 실감하실 것입니다. 지난 20여년간 우리는 피땀 흘리며 경제를 일구어 내었습니다. 그래서 소득 1만불 시대를 맞이했다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환율이 오르니 하루 아침에 소득이 5천불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게 되어있습니다. 혹 지난 한해동안 여호와 하나님의 것을 웅켜쥐고는 내것이라고 고집을 부린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한해를 보내는 이 마지막 주일에 다시한번 97년을 깊이 반성을 해봅시다. 모든 영광이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도 하지만 또 우리들도 그 영광에 참여하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18절에서 읽었듯이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신다. ”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여호와 하나님은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은혜를 우리들에게 반드시 베푸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을 보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7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주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주님과 영원토록 거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디도데후서에서도 이미 이와같은 사실을 바울은 말해왔습니다. 2장 10절에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다” 12절에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은 우리들에게 다시 돌아옵니다. 문제는 우리 인간의 짧은 생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주저하기 때문에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모든 영광을 여호와 하나님께 돌리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바울은 디모데후서 대단원의 막을 문안인사로 끝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러명의 이름을 들어가면서 그들에게 문안인사하는 것을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9-22절)
여러분!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푼 분들이 여러분 주위에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크든 적든 상관없이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들에게 문안인사를 빠트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우리성도들의 은혜가 가장 크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와같이 허물이 많고, 부족한 사람을 언제나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시고, 실수가 있어서 실수로 생각지 않고, 허물을 믿음으로 다 받아 넘기시는 여러분의 은혜에 다시한번 감사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도 특별히 생각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한해가 다 가기 전에 그분들에게 문안을 드리시길 바랍니다. 바울이 꺼져가는 자신의 마지막 생애를 두고서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했듯이 여러분도 지난 한해동안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 찾아가지 못한다면 전화로라도 그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시길 바랍니다.
한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바울의 마지막 편지를 보면서 우리의 한해를 잘 마무리해야겠습니다.
독수리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 집을 떠나 높은 바위위에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 발로 바위를 굳게 딛고 서서 서쪽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슬며시 눈을 감는다고 합니다. 우리의 생애도 우리 나름대로는 열심히 산다고 하지만 막상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면 언제나 우리가 디디고 선 것은 허공이요, 낭떠러지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딛고 설 곳은 만세반석이신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 의의 태양이신 주님,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신 주님만 바라보면서 눈을 감을수 있는 것이 우리의 마지막 인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찬송가 188장 ’만세반석 열리니’란 곡은 1787년 어거스틴 도플레이디가 쓴 노래입니다. 이 사람이 하루는 밭에 나가 일하다가 갑자기 무시무시한 폭풍을 만났습니다. 너무나 센 바람이 불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옆에 바위가 하나 있어 기대어 섰는데 이상하게도 가운데가 쪼개어진 바윗돌이었습니다.
그는 바위속으로 들어가 발을 펴고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폭풍이 몰아치고, 나무는 뿌리째 날아가는데 자기는 너무도 안전했기에 그때 받은 영감으로 찢어진 종이위에 가사를 적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방이 올 때, 언제든지 붙들 수 있는 것, 내가 밟고 설수 있는 것, 나에게 고난이 다가와도 내가 딛고 설 자리는 깨어져 주신 만세반석입니다. 우리가 의지하던 그 모든 것들이, 그렇게도 아끼고 아끼던 것들이 사라질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해를 보내는, 그리고 새해를 기다리는 성도 여러분! 언제나 주님의 은혜만 바라보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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