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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 하나님의 하시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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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명성황후)시해 사건(을미사건,1895)을 계기로하여 우리나라의 일본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고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나자 정국이 소란해졌습니다. 이틈을 타 러시아 공사 웨베르는 친러파인 이범진 등과 공모하여 국가의 상징인 왕을 남의 나라 공사관 밀실에 유폐시켰습니다(아관파천). 이리하여 하루아침에 정치는 친러파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일본의 침략 세력은 일단 견제되었지만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 지하실에서 눈치만 보고 있는 동안에 각종 이권을 챙겨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경인철도 부설권은 미국인 모어스에게, 경의선은 프랑스 사람 그릴르에게 넘겨주고, 함경도 광업권은 러시아 사람 니스첸스키에게, 압록강 유역의 벌채권은 역시 러시아 사람 푸리넬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또 평북 운산 금광은 미국 사람에게, 강원도 금성군 당현의 금광권은 독일 사람에게 넘겨주는 등 이권에 관여하여 막대한 소개료를 착복하였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갑신정변의 주동자로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이 12년만에 귀국하여 독립협 회(1896)를 창립하였습니다. 이 독립협회는 서재필을 비롯하여 윤치호, 이상재, 남궁 억 등 근대사상과 주체적 개혁 사상을 지닌 진보적 지식인들이 그 지도부를 형성하고 자본주의 열 강의 침탈과 수구적 지배층의 압제에 불만을 가진 도시 시민층이 주요 구성원이 되었습니 다. 그리하여 국권과 민권운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황국 협회를 이용한 무 력 탄압과 병력을 동원한 민중 활동 봉쇄로 말미암아 이 독립 협회는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아관파천 1년 만인(375일) 1897년 2월에 고종은 내외의 여론과 독립협회의 자주적 제국 건 설 열망에 힘입어 러시아 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하였습니다. 그리고 8월에 국호를 대 한 제국,연호를 광무라 고친 다음 왕을 황제라 칭하여 자주 국가임을 내외에 선포하고 10월 12일 정식으로 즉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대한 제국은 근대화 시책에 실패하고 진보적 정치 개혁 운동을 탄압하여 국민적 결속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외국의 침략을 적극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자체의 힘이 없었으므로 결국 일제에 강점 당하는 비운을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러시아의 남진 정책과 대륙 진출을 꾀하고 있는 일본과의 한국에서의 충돌은 아관파천을 계기로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한국을 39도선을 경계로 하여 서로 분활 점령하자는 이권쟁탈 에 타협이 결렬되자 마침내 광무8년(1904) 2월 6일 일본은 러시아에 최후 통첩을 보내고 10 일의 선전 포고에 앞서 8일 인천 근방에서 러시아 군함을 공격함으로서 전쟁이 벌어졌습니 다(일. 러전쟁). 전쟁은 예상을 뒤엎고 일본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러시아인 들이 공사와 함께 도망하고 13일에는 일본군 5만 명이 서울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1904년 2월 23일 한국과 일본은 전문 6조로 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습니다. 이 조약의 내용은 " 일본이 한국의 독립과 영토의 보증, 시설의 개선에 대한 권고 등을 비롯하여, 일본군에 적극 협력하고 전략상 필요한 지점은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다. "는 것으로 일본의 강압에 못 이 겨 체결된 것이었습니다. 8월 23일에는 제1차 한일협약이 맺어져 이로서 한국 정부의 재무. 외무. 문교 등의 주요 부문에 일본이 적극 간섭할 것을 승인하게되므로 사실상 일본의 고문 통치가 시작된 것입니다. 일본군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계속 승리하고 러시아 내부에서는 혁명(불세비키 공산당 혁명)이 일어나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굳어졌습니다. 그리하여 8월 10 일 미국대통령 루스벨트의 중재로 포츠머츠 강화조약이 체결되고 일. 러전쟁은 막을 내렸습 니다. 이 조약에 의하여 일본은 미국 영국으로부터 한국에서의 정치. 군사. 경제상의 특수이 익을 보장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할 수 있는 확고부동한 발판을 마련하고 만주를 침략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습니다. 러시아. 미국. 영국 등 강대국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승인 받은 일본은 친일단체, 일진회를 조직 포섭하여 황제와 대신들 을 위협, 을사조약에 조인할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 등 다섯 명의 대신이 조약체결에 찬성함으로서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1905. 11. 17). 이들 다섯 명을 을사오적(乙巳5賊)이라 합니다.

을사조약의 내용은 1. 일본 외무성이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통리 지휘한다. 2. 차후로는 한국정부가 일본정부를 거치지 않고는 어떠한 국제적 조약이나 약속도 할 수 없다. 3. 한국 황제 밑에 1명의 통감을 두어 한국의 외교에 관한 사무를 관리한다. 등이었습니다. 이로써 대한 제국은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잃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역사의 치욕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가장 앞장서 망국을 통곡한 것은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리 고 여호와 하나님께 절실히 기도했습니다. 서울에서는 전덕기와 정도만의 인도로 상동교회에서 수 천 명이 모여 며칠간이나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그 당시의 일본 기록에 의하면 전국 교회들은 서로 밀접한 연락을 취하면서 구국기도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을사조약 이후 기독교인들의 애국운동은 기도에서 점차 행동적인 항일 운동으로 방향이 바뀌어져 갔습니 다. 기독교인들은 무력으로 일제에 대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덕기목사는 상동교회 내에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군사훈련을 시키며 구국독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친일파 미국인 스티 븐스를 상항에서 저격 살해한 장인환, 이완용을 살해하려한 이재명 등은 모두 독실한 기독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항일 독립운동에 매우 비우호 적이며 게일목사같은 사람은 다음과 같이 노골적으로 반대하며 한국 교회를 극도로 모욕하 고 비난하는 발언을 일삼았습니다. "사이비 애국의 미친 듯한 광란이 휩쓸어 자결, 신체절단, 허황한 맹서, 게릴라 의거, 냉혹 무정의 저항이 들끓고 있다. "존스같은 선교사는 "한국인에 게 지금 필요한 것은 잘 정리된 법의식과 합법적으로 확립된 권위에의 존경이다. "라고 했으 며, 고종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던 헐버트조차도 한국인의 민족적 이념은 정치적인 것 이 될 수 없다고 정의를 내리고 "순수한 기독교국이 됨으로서 압제에 대해 도덕적으로 항거 하여 인종(忍從)하며 생활의 청결로 뭉칠 것"을 역설하고 모든 압제의 세력은 꾹 참고 고요 한 힘에 의해서 정복된다고 설교하였습니다. 국권의 상실에 목메어 울분에 불타는 한국 교 회에 대해서 사랑과 인종을 설교한 것이 미국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이에 일부 기독청년들은 미국 선교사들이 거만하고 독선에 차 있는데 반감을 품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도산 안창호 도 선교사들이 한국인을 마치 노예처럼 대한다고 선교사들을 구타한 적도 있었습니다. 선교 사들이 1907년 대부흥 운동을 시도하게 된 것은 한국 교회를 비정치화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부흥운동은 얼마가지 않아서 시들어지고 말았습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시작된 의병들의 활동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강력한 항일투 쟁의식으로 전국적인 의병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초대 통감 이토가 융희 3년(1909)에 하얼빈 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일본은 더욱 강력한 식민 지화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고 한국 정부는 황제가 친히 통감관저에 나가 통감에게 조의를 표했으며,3일 동안 노래와 춤을 금한다는 명령과 3일간 철시하라는 조치까지 내렸습니다. 이 는 이토를 조상하는 뜻이 아니라 뒤에 닥칠 보복이 두려워 취한 조치였습니다. 그해 12월 4 일 이토의 장례가 일본에서 거행되자 한국정부에서는 조문사절을 파견했으나 이들 조문사절 은 일본일들의 보복이 두려워 외부 출입도 못하였다고 합니다. 동족상잔의 비극,6. 25 한국전 쟁의 원흉 김일성의 사망을 놓고 조문 시비를 벌이고 있는 정객들과 일부 모리배들의 모습 과 유사한 것입니다. 1910년 8월 22일 일본은 이완용과 한국 강점의 조약을 맺고 그 다음날 외국에 통고하였으 나 국내의 눈치를 살피다가 무장군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8월 29일에 정식으로 발표하였습니 다(한일합방조약). 이 약은 전문 8개조로 되어 있는데 한국에 대한 일체 통치권을 일본에 영 원히 양도할 것과 한국의 황제및 황족과 정부 요인에게는 상당한 대우와 세비를 지급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로써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은 이성계가 나라를 세운 이래,27대 519년만에 종말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이 공포됨과 동시에 일제는 서울 남산에 조선 총독부를 설치 하고 그들의 헌병 경찰권을 통하여 헌병경찰통치를 실시하였습니다. 국권회복을 위한 구국 계몽운동, 의병투쟁 등 각종 민족운동을 일으켰으나 결국 일제에 강점 당하고 무수한 민족 지도자들이 체포, 투옥, 고문당하였고 민족의 생존권마저 철저히 침해당하였습니다. 이같은 민족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하여 각 방면을 통해서 다양하게 국내외에서 민족 독립운동을 전 개하였습니다. 무장독립투쟁,민족실력양성운동,신문화 창달운동, 외교활동 등 여러가지 방략을 세워 줄기차게 불법적인 일제침략에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이러한 민족적 대항이 마침내 3. 1운동을 가능케 하였던 것입니다. 이의 최대 성과가 이동 녕, 김구 등이 주동이 되어 중국에서 수립 선포된 대한 민국 임시정부(1919-1945)였습니다. 일본에 대한 민족적 대항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만주(동삼성)와 연해주에서의 독립 전쟁, 민 족협동전선운동, 항일무력투쟁 등으로 확대였습니다. 2차 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의 탄압은 더욱 잔악해졌으나 우리 민족은 강인하게 저항했습니 다. 결국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민족의 광복이 이루어졌습니다. 3. 1운동은 국내 뿐 아니라 만주 하와이 등지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3. 1운동 당시 만세 시위 에 참가한 인원은 총 2,023,098명이며 일본 군경에게 피살당한 사람은 7,509명, 부상자는 15,961명, 체포된 사람은 46,948명, 헐리고 불탄 가옥은 715호, 교회47개소, 학교 2개교였습니 다. 이러한 3. 1운동은 일본군의 무력 앞에 눌리어 금방 독립을 달성하지는 못하였으나 상해 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또한 우리 민족의 자주의식과 독립 의식을 세계 만방에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고 국내적으로는 민족의 결속을 한층 강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1운동은 근대 한국 민족운동으로서 2천 5백만 전 민족이 궐기한 문자 그 대로 거시적 운동이었으며 이 운동에 조직적인 면에서나 의식면에서 주도적 구실을 한 것은 단연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전국에 교회 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 다.

3. 1운동 후 일본의 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는 대표, 핵심 기관이 필요하다고 느낀 애 국지사들은 각처에서 상해로 모여들어 1919년 4월 10일 임시정부를 세우기로 합의하여, 프 랑스 조계(租界) 보창로에 임시사무소를 두고 김신부로 22호(현재 서금2로 22호 갑)에서 먼 저 임시 의정원을 구성하였습니다.

1920년대에는 학생 운동의 시대라 할만큼 조직적인 학생들의 민족운동이 창궐하였습니다. 1930년대에 이르러 전세계에 경제공황이 닥치자 일본도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일본 군 부는 국내적 불만을 몰아내기 위해 1931년9월 만주철도 폭파사건의 조작극을 연출하여, 이 를 구실 삼아 만주 일대를 점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932년 일본은 청조의 마지막 황제 부 의를 내세워 만주국이란 허수아비 정권을 세우고 앞으로 침략정책의 발판이 될 병참기지로 만들려 했습니다. 이에 국제연맹은 일본의 침략정책을 비난하고 조사단을 파견하고 협상하 려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절하고 국제연맹에서 탈퇴해 버렸습니다. 이때부터 일본의 대륙 침 략정책은 노골화되어갔습니다. 1932년 1월 28일 상해사변을 일으켜 상해를 점령하였습니다. 다음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은 북경 근처 노구교에서 중국군을 습격하여 중. 일전쟁을 도발 하였습니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제는 염치없게도 전시 동원체제의 실시로 우리 나 라 장정들에게도 지원병 징병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일본은 중일전쟁을 벌이고 있으면서도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할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1941년 12월 8일 마침내 일본은 선전포 고도 없이 하와이의 미국 해군기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였습니다. 일본은 하와이를 공격하 면서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일본은 각 전선에서 공격을 감행 하여 홍콩을 함락하고 말레이시아, 필리핀을 점령하고,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진 싱가포르 를 함락시키는 등 전쟁은 완전히 전세계적으로 확대되어갔습니다. 2차 대전이 일어나자 조선 총독부의 탄압은 한층 더 심해졌습니다. 경제적, 사상적 탄압정책은 일본에 대한 민족의 원 한을 더욱 부채질하였습니다. 민족말살정책의 실현을 위해 우리말, 우리 역사 교육을 금지시 키고, 민족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을 폐간시키는 한편 신사참배, 궁성요배, 창씨개 명 등을 강제로 실시하였습니다. 부족한 인적, 물적 자원을 보충하기 위해 지원병. 징병. 징용. 학병. 근로보국대. 여자정신대 등의 강제적 징발과 식량. 유기(鍮器) 등을 공출이란 명목으로 강제 징발하였습니다. 미국과의 싸움은 다음해 6월로 들어서자 일본측에 불리하게 전개되었 습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결정적인 치명타를 입은 일본은 만회할 기력조차 없었습니다. 1943년에 이르러 일본과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11월 22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국. 영국. 중국의 세 거두가 모여 카이로 회담을 열었습니다. 여기서 중국의 장개석이 처음으로 일본 패망 후 조선을 적당한 시기에 독립국으로 인정한다는 의제를 제기하여 문서로 보장되었습 니다. 1945년 4월에 독일의 히틀러가 패배하여 수도 베를린이 연합군의 수중에 들어갔습니 다. 5월에 독일이 무조건 항복하니 유럽 천지를 휩쓸던 전쟁은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이제부 터는 일본이 홀로 고군분투를 해야 했습니다. 8월 6일에는 일본 히로시마에, 그리고 3일 후에 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습니다. 8일에는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동삼 성)와 북한 일대를 공격 점령하였습니다. 마침내 8월15일 정오 일본왕 히로히토는 떨리는 목소리로 전쟁에 진 것을 공포하며 무조건 항복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조선 총독부도 해체 됨과 동시에 조선 통치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 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됨으로써, 우리 나라는 35년간의 일본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 광복이 되었습니다.

해방 3년 이후 남과 북에는 전혀 다른 체제의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8. 15 광복에 대하여 역 사인식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남한에서는 8. 15 해방의 주체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 으로, 북한에서는 "사회주의 국가인 적위군(소련 군대)의 힘과 자본주의 국가인 영. 미의 힘 으로 해방되었다. "고 하여 남북이 그 해방 주체를 미국과 소련으로 각기 달리 보았던 것입 니다. 말하자면 해방 초기까지는 일제의 식민지배의 속박으로부터 우리 민족을 풀어준 주체 가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라 외세의 힘이었다는 것입니다.

1949년 9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설립한 후 북한에서는 8. 15를 '전적으로 외세에 의한 해방'이라고 보았던 입장에서 이를 '소련의 결정적인 역할'로 수정하기 시작하였습니 다. 즉 영. 미를 비롯한 연합군으로서의 외세의 개념을 소련으로 국한시켰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김일성의 항일 무장투쟁을 강조하면서 8. 15해방의 주체가 전적으로 외세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민족의 내재적인 투쟁력에 기인했음을 강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1960-70년대에 들어와 큰 변화를 보이면서 해방의 주체를 소련군이 아니라 '조선 혁명군'이 었다고 하며 소련군의 역할을 축소시키더니 결국에는 해방의 주체를 소련군에서 '조선혁명 군'으로 치환해버렸습니다. 이러한 북한의 의도는 말할 것도 없이 1960년대 말부터 대두하 기 시작한 이른바 '김일성 주체사상'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 것입니다. 김일성 우상화의 작 업의 일환으로 역사의 사실조차도 얼마든지 왜곡할 수 있고 변조시킬 수 있는 것이 김일성 주체사상인 것입니다.

"너희들은 아침마다 대문 앞에 배달된 우유를 마시며 자라났지만 우리 식민지 시대의 아이 들은 아침마다 신사(神社) 앞에서 황국 신민(皇國臣民)의 선서(宣誓)를 외치며, 그리고 , 천황(天皇)이 살고 있다는 동쪽을 향해 허리를 굽혀 큰절을 하는 규죠요하이를 하며 자 랐습니다. 동요를 부를 아이들에게 군가를 가르쳤으며 왕자의 옷을 입고 싶은 아이들에게 전투모와 군복과 각반(케이터)을 두르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사람은 무엇이든지 선택할 수 가 있고, 어떤 사상이든 신봉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판단력과 의지와 그리고 선택 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아이들에게 의식화(세뇌)작업을 하는 것은 반인도적인 범죄 행위 입니다. 천황을 김일성으로, 국방색을 붉은 색으로, 벚꽃을 김정일화(花)로, 그리고 놀이를 미제(美製)를 부수는 것으로 바꾸어 놓으면 바로 50열전 식민지 아이들의 모습이 지금 우리 가 목격하고 있는 북녘의 우리 아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어령, 조선일보 1994. 8. 16. "또 하나의 식민시대- 북한"에서)

우리의 선배 '식민지의 아들들'은 일제의 의식화 작업을 받고 자라났으며, 아침마다 대문이 나 아파트 현관에서 우유나 요구르트를 받아 마시며 자라난 '신세대'그룹의 아이들은 북한 에서 쏘아대는 고주파 전파를 타고 배달되는 김일성 교시를 받아 마시면서 김일성 주체사상 으로 의식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저것은 6. 25 세대들은 아침마다 "새벽종이 울렸네"라는 건 설의 역군 노래를 들으면서,국민 교육 헌장을 암송하고, 목총가지고 교련을 받으며 "싸우 면서 건설하자"는 정부 주도의 의식화(새 마을 운동 의식화) 작업 속에 자라났습니다. 식민 시대의 아이들이나,6. 25 세대의 아이들이나, 신세대 그룹의 아이들 모두가 다 그 시대의 '사 상의 노예'가 되어 자라왔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과 우리 민족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의 의식화 작업입니다. 100여 년전 이 땅에 전파된 예수가 이 민족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듯이 예 수 신앙의 의식화만이 바른 역사 의식 확립으로 민족사의 새 장을 열어갈 수 있는 것입니 다.

출애굽 사건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킨, 그 민족의 해방사건이자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적 사건이었듯이 기독교인은 8. 15해방을 민족해방의 사건임과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으로 인식해왔습니다. 해방을 가리켜 흔히 '도둑같이 왔다. "하늘이 준 떡이었다. '라고 말하는 것도 이같은 인식의 일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절망적인 조건에서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어 해방을 맞이하게 되 었다는 것이 과거 기독교인의 8. 15해방에 대한 대체적인 인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나라 민족의 8. 15해방의 주체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두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의 죄입니까"예수께서 대답 하십니다. "그 사람의 죄도, 그 부모의 죄도 아니다. 다만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다. "한 사람의 소경된 사건을 두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 의식은 역사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를 찾으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과 거의 한 사건을 단순히 과거의 사건으로만 알고 현재적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수집된 지식일 뿐이지 역사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고자 일을 알 수 없게 됩니다. "(마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 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마10: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

참새 한 마리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는데, 하물며 그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는 한 인간의 소경된 사건이 어찌 여호와 하나님의 뜻하시는 바가 없겠습니까 더나가 한 나라의 사건 속에 어찌 여호와 하나님의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뜻과 목적이 없겠습니까 이 달은 8. 15 광복 제49주년을 맞이하는 광복의 달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1995년을 '통일 희년'(희년은 안식년이 7회 반복된 그 이듬해 곧 50년째 되는 해의 속죄일 에 시작되어 그 다음 해 속죄일까지 만 1년 동안 지키는 규례로서, 이때 1). 이스라엘 백성 중 종되었던 자들 이 해방되어 자기 가족에게 돌아갔습니다. 2). 채무자의 빚이 모두 탕감되었습니다. 3). 타인에 게 팔렸던 토지나 가옥 등이 본래 주인에게로 되돌려졌습니다. 이는 레이기 25:23,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는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주는 의미는 첫째, 땅은 온전히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또는 영구히 소유하거나 처분할 수 없으며, 인간은 하나 님께서 대여해주신 땅에서 잠시 살다가는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희년은 하나 님의 긍휼과 정의의 정신이 극명하게 나타난 것으로 타인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없이 모든 사람이 사회, 경제적으로 평등한 삶을 누리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임을 잘 보여 주 는 것입니다. 셋째, 희년의 주제는 '안식'과 '자유의 선포'인데 이것은 신약의 성도들이 예 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자유와 기쁨, 영생을 누리 게 될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으로 정하고 대중의 참여를 통한 민족의 평화 통일, 북한의 해방과 자유를 염원하며 여러 가지 행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남북 통일을 위한 인간 띠잇기 등)

이 8. 15 해방을 일반 역사가가 국제 정치의 역학 관계, 군사적인 관계 등을 통해서 그 인과 관계를 분석하여 해석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의 장소요, 하나 님은 역사 속에서 인간을 만나시며, 역사를 이루어나 가시면서도 역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여 역사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를(여호와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일)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8. 15 해방을 "하늘이 준 떡" 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8. 15 해방은 인간들에 의해서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 님의 섭리에 의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도 일본 천황의 항 복을 받는 자리에서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사건)가 아니라 신학적인 문제(사건). "라고 말했 습니다.

세계 여성사나 인류역사에 있어서 전례를 볼 수 없는, 독일 나치의 잔학상보다 질적으로 더 잔학한 반인간적인 종군 위안부의 만행이 일제에 의해서 저질러졌습니다. 초등 학교의 어린 여학생까지 동원되고, 군경들이 총칼로 위협하여 10여세의 순진한 어린 딸들이 부모들 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끌려갔으며, 우물가에서, 길가에서 납치 당하거나 가난으로 인해 팔려 가기도 했음이 드러났습니다. 당시 동원된 어린 여성들은 그 수가 10만에서 20만에 이른다 고 합니다. 일본은 한반도와 일본은 물론이고 중국, 대만, 필리핀, 미얀마, 싱가포르, 남태평 양 섬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이 진주하고 점령한 지역마다 이러한 만행을 저질렀으며, 공출된 어린 여성들은 성적 노예로서 수송배치당하였습니다. 이들의 어린 몸뚱이는 일본군의 "공중 변소"로서 취급당하고 집단 강간당하였습니다. 총 칼에 찢기고 죽고 구두발에 짓밟히며 병 든 몸으로 죽어갔습니다. 패전 후 겨우 살아남아서 귀국할 수 있었던 소수 피해자들은 부모 형제와 이웃친지들 앞에 죽을 죄인으로 쓰라린 몸과 마음을 감추며 살아왔습니다. 이같은 민족사의 엄청난 비극 속에 어찌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뜻이 없겠습니까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일명'일틀보이'라는 원자 폭탄을 투하하여 2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몰살시킴으로서 인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인간 을 한꺼번에 죽인 사건으로 전쟁사에 길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 중 강제로 징용. 징병. 정신 대로 일본에 끌려간 우리 동포 5만 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피해자 2만 명이 일본 에 남고 2만 3000명이 귀국했으나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은 약 1만 여명이라고 원폭피해자협 회는 밝히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적어도 570만 명의 한국인이 대 동아 전쟁 수행을 위해 투입되었습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군인 20만 명, 군속 18만 명, 해외파견 노무자 72만 명, 국내 노무자 460만 명 등입니다. 이는 당시 한국 총 인구의 5 분의 1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1910년 '한일합방' 이래 35년 간 일본 제국주의의 가혹한 식민 지 수탈정책에 의해 강제로 일본에 끌려갔거나 혹은 농토를 빼앗기고 생활고로 인하여 부득 이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소외와 차별이라는 피지배 생활을 겪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같은 민족사의 엄청난 비극 속에 어찌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뜻이 없겠습니까

일제 36년의 식민지 통치 기간 중 그들의 기만적 탄압정책과 함께 자행된 학살, 파괴, 방화 등 만행의 사례는 수없이 많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관련되어 당한 대표적인 사례 몇 가지만 들더라도 평남 강서 사천의 학살사건(3월3일),정주의 학살 방화 사건(3월4일-4월2일),서울의 기독교인 십자가 학살사건(3월9일),의주의 교회당 방화, 파괴 사건(3월 하순경),천안 병천의 학살 사건(4월1일),수원 제암리교회 방화. 학살 사건(4월15일) 등이 있습니다. 강서의 학살 사건은 3월2일과 3일에 사천교회 교인들과 원장교회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일본군의 무차별 사격으로 43명이 즉사하고 20여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입니다. 서 울의 십자가 학살 사건도 외신 보도되었던 유명한 사건으로 3월 9일 서울에서 다수의 기독 교인들을 체포해 이들을 교회로 끌고가 십자가에 묶고는 '너희들은 기독교인들이니 십자가 에서 죽는 것이 소원일거다. '하면서 총검으로 찔러 죽인 사건입니다. 수원 제암리 교회 방 화, 학살 사건은 일본군이 마을의 기독교 신자 30여 명을 교회에 불러모은 다음 교회문을 폐쇄한 후 불을 지르고 사격을 가해 29명을 학살한 사건입니다. 일본군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 마을 민가 31호까지 방화한 사실이 외신에 보도되어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습니다. 또한 교회는 3. 1운동 참여로 인한 교역자들의 피체, 투옥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당 시 3,500여 명의 교역자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이같은 민족사의 엄청난 비극 속에 어찌 하나 님의 크신 뜻이 없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식민지 통치 36년 간 견딜 수 없는 고난의 역사를 겪어 온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사 '8. 15 해방의 떡'을 주셨건만 우리는 그 떡을 가지고 오히려 무엇을 했던가 그리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일제 말기의 한국교회는 여호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자랑할 것보다도 회개 할 것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당시 이건 목사는 한국교회에 겸손히 회개할 것을 요청하였습 니다. "오! 우리들은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써야겠다. 그 시기에 처하였던 조선교회는 두렵건 대 사탄의 연희장(演戱場)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마귀에게 밟힌 무리이며, 사탄의 권세 아 래 휘둘렸던 무리이다. " 김유연목사는 일제시대의 조선교회의 모습을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 로의 모습에 비유하면서 "조선의 교회여! 계명성(鷄鳴聲)을 듣는가 저 힘차게 들려오는 계 명성을 ! 우리는 몽둥이와 칼이 무서워서 예수를 멀리서 따르는 자들이 아니었으며, 악당과 동좌(同座)하였던 자들이 아니며, 예수를 몇 번이나 모른다고 하지 않았던고. 다만 베드로의 통회가 있을 찌어다. "라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8. 15 해방 후 이 땅의 기독교인들은 해방을 이 땅에 기독교에 입각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 서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1945년 11월18일 정동교회에서 열린 전선(全鮮)기 독교대회에서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새 국가의 기독교적 성격을 강하게 외쳤습니다. 김구는 새 나라의 방향은 나라를 세우는 건국과 교회를 세우는 건교(建敎)에 있다고 역설하며,"즉 건국과 건교를 동시에 함이다.... 경찰서 열을 세우지 말고, 교회 하나를 세우라"고 주장하였 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이승만은 "이제 우리는 신국가 건설을 할 터인데 '기초 없는 집을 세우지 말자. '곧 만세반석되는 그리스도 위에 이 나라를 세우자" 고 역설했습니다. 이 자리 에서 김규식도 새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한 손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는 우리가 서로 서로 붙잡고 나가자"며 신앙을 중심으로 단합을 호소하였습니다. 이것을 통 해서 해방되었을 때 한민족의 지도자들은 새 나라의 종교적인 기초는 기독교가 담당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1946년 4월16일 해방 이듬해에 김구는 "나를 위하여 여러 교회 들이 기도하여 준다니 참 감사한 일이다"며 "여러분이 눈물을 흘리면 나는 피를 흘리니 이 눈물과 피로 우리들이 갈망하는 조선을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로 세워보자"고 외쳤습니다. 또한 김 규식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우리 마음에는 다만 삼위 여호와 하나님만 계시게 하고, 오직 그만 경배하자. 우리는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야 한다. 우리는 이 깨끗한 그릇, 곧 새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자. 무엇을 구할까 곧 우리의 자유와 행복을 구하자. 그리하여 이 땅 위에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자. 만일 우리가 이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충성 하다 죽는 다면 하늘나라에 들어가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리라. " 엄항섭도 "곧 그리스도 의 정신 위에 이 나라를 세우자. 아! 눈물! 값있는 눈물! 우리 3천만은 서로 이 사랑의 눈물 을 흘려 우리들의 죄를 씻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라의 지도자들은 사분오열 분열되었고, 교계 역시 마찬가지로 신사참배여부를 놓 고 서로 물고 뜯고 하면서 수 십개의 교파로 찢겨져 나갔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로 주신 자 유는 지나쳐 방종에 치우쳐 사치와 음란과 허영으로 가득해져 갔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나 라 민족을 불쌍히 여기사 주신 "8. 15 해방의 떡"을 가지고 오히려 싸움질을 했던 것입니다. 이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찌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원망과 불평 속에 서로 물고 뜯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보내셔서 그들을 채찍하시며 징계하시며 심판하셨 던 것입니다. 6. 25 한국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떡"을 감사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 이 나 라 민족에 대한 징계와 심판의 사건입니다. 민족사의 비극 중의 비극인 6. 25 한국 전쟁,"전 투로 인한 인명 피해가 15만, 행방불명 20만, 부상자가 25만에 달했고, 공산군에 납치된 수 가 10만 이상, 그리고 전재민 수는 수백만에 달하는 것으로 추측되며, 공산군이 받은 피해는 실로 그 몇 배나 될 것이다. "(이기백)라는 한국 전쟁,여기 이같은 민족사의 엄청난 비극 속 에 어찌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뜻이 없겠습니까

어느 신앙인 은 6. 25의 잿더미 위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민족 회개의 기도를 다음과 같이 드렸습니다. "내가 불탄 정읍을 향해 우는 것이 아니라 이 백성의 죄악을 통곡하옵고, 무너진 예배당을 곡함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을 통곡하나이다. 죄악의 1951년은 우리의 피로 씻어 보내고 주님 장중에 기록된 1952년을 또한 눈물로 맞이하나이다.... 그러나 당신의 진노가 풀 리기까지 우리는 당신의 채찍 아래 공손히 엎드리나이다. 번화한 거리에서 범한 죄를 폐허 에 엎드려 회개하옵고, 벽돌 예배당에서 지은 죄를 재위에 앉아 회개하나이다. 죄악의 황금 거리보다 당신의 공의가 기록된 폐허가 정결하도소이다. "

태어날부터 소경된 것은 그 사람의 죄도, 그 부모의 죄도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 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그 소경의 고난을 과거 의 어떤 이유에 근거한 숙명론적인 해석을 내린 것이 아니라, 미래적인 입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하는 사명적인 입장에서 해석하셨던 것입니다. 인간의 견지(見地)보 다도 여호와 하나님의 견지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일, 여호와 하나님의 견지에서 인간의 고난을 보셨습니다. 과거의 어떤 원인을 찾는 운명적인 견지에서보다도 현재 무슨 일을 할 수 있느냐 하는 사명 적 견지에서 인간의 고난을 보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명 이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사명인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 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입니다. 자신의 고난이든 남의 고난이든, 아니 이 나 라 민족의 고난이든 사명 적인 견지에서 고난을 당하고 그 중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시 는 일을 나타내어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 나타내신 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책임을 다 할 때 자신과 교회, 나라 민족이 큰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 민족의 역사적 사건들 을 성서적 시각에서, 그리고 사명적 견지에서 해석하여 나라 민족의 앞길을 열어 가는 교회 와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미국에 어떤 돈 많은 부인이 딸 삼형제가 있었는데 이 딸 삼형제를 데리고 여름에 구라파와 성지를 구경하기 위해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가게 되었는데, 그 배가 가다가 파선을 당해서 많은 사람이 대서양에 빠져 생명을 희생당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배 로 얼마를 구원하느라고 했지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마지막에 보니까 이 부인은 구원을 받았는데 딸들은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 여인이 처음에는 어떻게 할 줄도 모르고 많은 고 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고통과 슬픔을 통해서 이 세상에는 자기 부모가 없어서 바로 자라나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은데 내 딸을 잃었다고 그저 있을 수 있나 대신 다른 사 람의 딸들과 아들을 기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성지에 가서,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 히던 예루살렘에 가서, 아메리칸 캐론이란 유명한 고아원과 탁아소를 세웠습니다. 자기 사재 전부를 다 드렸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을 위로해 주고 봉사한 것입니다. 슬픔을 통해서 하나 님의 하시는 일,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자신과 나라 민족의 모든 상황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찾아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 는 사명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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