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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 시작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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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마지막 주일입니다. 엊그제 시작한 것 같은데 벌써 송년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렇듯 매사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이 평범한 진리가 내일 밤 송구영신예배를 드릴 때면 더욱 실감이 날 것입니다. 물론 12월 31일 밤과 새해 첫 시간을 실용적으로 생각하면 다른 날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시간을 특별한 날로 생각하는 것은 한 해의 끝과 새해의 시작이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말씀합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멜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1-8). ”
모든 일에 기한이 있다는 것, 때가 있다는 것은 우연이란 없다는 말씀입니다. 모두 일정한 궤적과 목적을 따라 인생과 만물이 움직입니다. 그런데 누가 범사에 기한과 목적을 정하고 그 목적한 바대로 이끕니까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시사철의 변화와 연한을 정하셨다고 합니다. 겨울이 끝나면 봄이 시작되는 것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하셨습니다.
한 해의 끝과 새로운 시작을 주시는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루에도 끝이 있고 시작이 있게 하시는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시간의 흐름을 보면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시간과 역사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2007년 송년주일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전도서에 정말 아름다운 구절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루실 마지막 날의 아름다운 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이 가져야 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1. 끝이 아름다운 사람
여러분에게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시작이 중요합니까 끝이 중요합니까” 대부분은 “시작도 중요하고 끝도 중요하다. ”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지혜로운 대답입니다. 시작의 중요성에 대한 격언이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시작이 반이다!”입니다. “용기를 내어 시작하라! 시작도 하지 않고 머뭇거리면 끝은 있을 수 없다!”는 뜻이겠지요.
시작보다는 끝이 중요하다는 격언도 많습니다. 그 중에 부정적으로 쓰이는 말이긴 하지만, “작심삼일”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학창시절을 회상해보세요. “야 방학이다. 이제 열심히 공부해야지. 부진한 과목을 만회해야지!” 그러면서 책상정리부터 합니다. 그리고는 시간계획을 세웁니다. ‘잠은 얼마 공부는 놀기도 해야지!’ 하루 이틀은 계획대로 잘 진행됩니다. 그런데 삼일 째 되는 날, 친구와 신나게 놀다가 그만 오바합니다. “오늘 하루만 예외로 하지 뭐. ” 다시 옛날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이름 하여 작심삼일, 용두사미. 시작은 잘 했지만 끝마무리가 엉망이라면 시작 안 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전 7:8 말씀은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고 말씀합니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마무리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시작은 좀 엉성하게 했어도 마지막을 잘 장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일컬어 “유종의미”라고 하지요.
마 21:28-32에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두 아들의 비유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같은 일을 시켰습니다.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큰 아들은 “가겠습니다”고 대답했지만 일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싫습니다”고 대답했지만 나중에는 마음을 고쳐먹고 가서 일했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하신 다음에 예수님께서 질문하셨습니다.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한 아들인가”
화장실에게 가면 “아름다운 사람은 지나간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는 문구를 봅니다. 화장실에만 필요한 문구가 아닙니다. 우리는 끝이 아름다운 사람 되어야 합니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되어야 합니다. 시작도 잘 하고 끝도 잘 마무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충성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신실한 사람, 믿을만한 사람, 저 사람에게 이것을 맡기면 틀림없이 해놓을 사람, 그런 사람이 정말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 여호와 하나님에게도 필요한 사람입니다. 아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입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좋아하십니까 자기를 닮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아주 두드러진 속성은 신실하심입니다. 신약에서는 아예 예수님의 이름을 충성이라고 붙이셨습니다. 주님 재림하실 때, 하늘에서 백마를 타고 오시는 데 바로 그 예수님의 이름이 “충신과 진실(계 19:11)”이십니다.
그 이름대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일에 끝까지(죽기까지) 충성하셨습니다(히 2:17, 3:2, 3:6). 그렇게 충성하신 예수님께서 자기의 제자들에게도 꼭 같이 충성을 명령하십니다. “끝까지 (죽도록) 충성하라! 작은 일에 충성하라!”
그리고 그 이름이 충성이신 주께서 끝마무리를 잘 한 충성된 종들을 칭찬하십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일을 잘 벌이기는 하는데 마치는 것은 흐지부지한 편입니까 그래서 누군가가 뒤에서 따라가며 수습해주어야 할 사람입니까 아니면 일을 한 번 맡았으면 끝을 말끔하게 잘 마무리하는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까지 도와서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하는 사람입니까
2. 끝이 실패한 웃시야 왕
오늘 우리가 집중해서 보고자 하는 자는 웃시야 왕입니다. 그의 시작은 좋았습니다. 과정도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때에 그는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은 비참했습니다.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웃시야처럼 시작은 좋았지만 마지막에 가서 실패한 인물들을 여러 명 보여줍니다. 사사 기드온,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 세상을 사랑하여 떠난 바울의 제자였던 데마(골 4:14, 딤후 4:10)가 있습니다.
처음 시작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처음 정신이 계속 지속되는 것입니다. 항상 초심을 견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처음 겸손이 끝까지 가야 합니다. 처음 열정이 그대로 지속되어야 합니다. 처음 가졌던 순수함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는 날까지 그대로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웃시야는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웃시야는 16세에 왕이 되어 52년간 유다를 치리했습니다. 그의 시작은 참으로 훌륭했습니다. 4절에 보면 그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정치하고 정직하게 살았습니다. 5절에는 스승 스가랴의 조언을 듣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던 겸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얼마나 형통케 하셨는지 이어지는 구절들이 밝혀주고 있습니다(6-15절). 웃시야 왕은 군사적으로, 행정적으로, 건축과 토목공사에 있어서, 농업정책에 있어서, 국가의 전반적인 부분에 있어서 큰 역량을 발휘했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부강하게 했습니다. 국제적인 명성까지 얻었습니다. 15절 하반절을 보세요. 그 이름이 원방에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더라. 모든 부분에 있어서 부강한 나라가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기이하신 도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났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웃시야의 생이 15절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16절을 보세요.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
강성해진 웃시야 왕의 마음에 교만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에 제사장만이 하도록 되어 있는 분향을 자신이 직접 하려고 했습니다. 분향하지 못하게 말리는 제사장의 직언을 듣고도 중지하지 않았습니다. 화까지 냈습니다. 교만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완고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18-19절).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율법에 명시된 대로 왕궁에서 살지 못하고 별궁으로 격리 수용되었습니다(21절). 죽어서도 왕의 묘실에 묻힐 수가 없었습니다(23절). 비참한 종말입니다. 성경은 교만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죄로 경고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앞잡이)입니다. 교만하면 망할 때가 곧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3. 웃시야가 실패한 원인
그런데 중요한 것은 웃시야가 왜 교만해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웃시야가 어디서부터 그렇게 되었는가, 이것을 오늘 우리가 찾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 그가 교만하게 된 원인 즉 실패의 근본 원인 두 가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1)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을 의존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
다시 말해서 자립하는 신앙으로 자라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여호와 하나님을 구하였다”는 말씀은 스가랴의 말을 듣는 동안에는 웃시야의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께로 향하였다는 것입니다. 스가랴는 웃시야 왕의 스승이자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직언하는 충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스가랴가 죽은 다음에는 웃시야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전해주는 사람이 가까이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웃시야는 점점 여호와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웃시야는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의지하기 보다는 스가랴를 더 의지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지했습니다.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신앙의 자립이 정말 중요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의존하는 자립하는 신앙이 바른 신앙입니다. 사람은 의지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물론 신앙의 성숙을 위해 목사나 교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자기 스스로 서야 합니다.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께 의존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성숙이요 신앙의 자립입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언제까지나 남의 도움을 받고 사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 좋은 사람이 옆에 있으면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그런 사람이 옆에 없으면 금방 넘어지는 사람이 된다면 그것은 신앙이 어리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사람은 빨리 신앙의 자립을 위해 분발해야 합니다.
자립하는 신앙이란 또한 환경에 구애 받지 않는 신앙을 말합니다.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굳게 서는 것을 말합니다. 어려운 환경을 만나면 쉽게 좌절하고 좋은 환경을 만나면 쉽게 교만하고 안일해지는 것은 환경에 좌우되는 사람입니다.
웃시야 왕이 그랬습니다. 스가랴가 죽은 후, 왕 주위에는 왕의 성공을 찬양하는 자들만 자리 잡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를 칭송하는 자들의 소리에 점점 취해갈 때 웃시야 왕은 이전에 가졌던 겸손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대신에 자기를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그 영광이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것, 상당히 으쓱해지고 기분도 좋았습니다. 거기서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뿌리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통째로 뿌리가 뽑혀버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분향사건입니다.
신앙의 자립이란 여호와 하나님 안에 자신의 뿌리를 깊이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뿌리를 내려야 할 곳은 사람이 아닙니다. 환경도 아닙니다. 돈도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의존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은 다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존해야 할 대상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뿌리를 내려야 우리의 신앙이 바르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일 년 동안 제대로 성장했습니까 여러분의 신앙은 정말 자립하는 신앙으로까지 자랐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자립하는 신앙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웃시야 왕이 스승이었던 스가랴가 죽은 후에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읽고 묵상했다면 스승이 살았을 때보다 더욱 신앙의 진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던 스가랴가 죽은 후에는 말씀에서 자꾸 멀어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 퇴보의 원인이었습니다.
몇 년 전 성탄절에 한 집사님께서 제게 주신 크리스마스 카드에 너무나도 귀한 고백이 적혀 있었습니다. “목사님, 요즘 들어 계속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행복의 크기는 그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와 같다는 생각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알아갈수록 제 행복의 크기가 점점 커져간다고 생각하니 열심히 성경책을 펼쳐야겠어요!” 저는 그 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시편 1편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행복한 사람은 주야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즐거워하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행사가 다 형통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시절이 좋지 않을 때 더욱 그 진가가 발휘됩니다. 그래서 결국 그 사람의 끝이 아름답습니다.
사도 바울이 죽음을 앞두고 그의 마지막 편지를 디모데에게 보내면서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고 권면한 말씀은 한 마디로 말해서 네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한 해를 반성하시면서 다시 결심하십시오! 신앙의 성숙과 자립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겠다는 계획을 다시 세우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신앙의 성숙과 신앙의 자립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계획입니다.
2. 기도하는 삶에 실패했기 때문
기도에 실패했기 때문에 그는 교만에 빠졌습니다. 5절을 다시 보세요. “스가랴의 사는 날에 여호와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는 말씀은 스가랴가 죽은 후로 웃시야 왕은 점점 기도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충신이요 스승이었던 스가랴가 죽었기에 웃시야는 더욱 정신을 차리고 기도했어야 했는데 스가랴의 죽음과 더불어 그의 기도도 죽어버렸습니다.
물론 웃시야 왕은 여전히 종교의식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지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이전에는 스가랴 선생님과 함께 매사에 기도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갔는데 이제 그는 국사를 자신의 상식과 경험으로, 대신들의 중론으로 처리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할 때도 그저 의식을 치르기 위해서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송년주일입니다. 2007년의 마지막 주일공동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의 내면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혹 몸만 예배의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 정말 마음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까 참된 기도가 예배 중에 드려지고 있습니까 정말 진지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고 있습니까
요즘 여러분의 기도생활은 어떠합니까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일상에서 순간순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까 이런 기도를 숨기도 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숨쉴 때마다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질문할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매 순간 기도할 수 있나요” 예, 있습니다. 찬송과 감사와 회개와 간구와 결심을 순간순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숨기도’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사라지는 것은 영적으로 병들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시면,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매사에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하면서 일하고 기도로 끝마치는 자가 제대로 된 성도입니다.
기도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요 특권입니다. 기도하는 권리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기도하는 가정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일터도 기도하는 장소가 되게 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자기를 나타내십니다. 지혜를 주십니다. 자기의 뜻을 가르쳐 보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힘을 주십니다. 바르게 살도록 힘을 공급하십니다. 기도하는 자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와 의를 이루어가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자의 마지막이 아름답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마다 그 끝을 항상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습니까 그러면 기도하십시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사야 6장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바로 웃시야 왕의 죽던 해였습니다(6:1). 우리가 오늘 본 대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여 자기 맘대로 분향하려고 했던 웃시야는 결국 문둥병자가 되어 별궁으로 내침을 받고 거기서 쓸쓸히 죽어갔지만 바로 그때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습니다. 그때 이사야는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뵈옵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사야는 자신과 민족의 죄가 얼마나 큰 지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회개하는 이사야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사죄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선지자의 소명까지 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이사야는 선지자의 사명에 충성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가 되고 싶습니까 웃시야 같은 사람입니까 이사야 같은 사람입니까 이 두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의지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란 여호와 하나님께로 매 순간 겸손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대화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으로 돌아가는 것, 기도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하는 가장 좋은 방편이요, 그것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 기도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신앙의 기본입니다. 기본으로 돌아가지 않고는 신앙의 성숙과 자립은 불가능합니다. 이 신앙의 기본이야 말로 영적 성숙의 도약판입니다. 그래야 신앙의 진보가 있고 신앙의 도약이 있습니다.
이제 내일 하루만 지나면 새해를 맞습니다. 어떻게 하면 의미 있게 새 출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새해를 맞기 전에 우리가 우선적으로 무엇을 반성하고 회개해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해를 잘 정리하시고 새해를 희망차게 맞으시기 바랍니다. 처음보다 나중이 더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시작은 물론 끝마무리까지 아름다운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끝까지 주님 앞에서 겸손하시고 끝까지 주님을 말씀을 가까이하시고 끝까지 기도하는 일을 계속하십시오! 신앙의 기본에 충실하십시오! 그러면 좋은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입니다.
특히 내년을 위해 교회 일꾼으로 임명되신 분들 저와 함께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충성된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당부했던 권면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드립니다. “이 모든 일(네게 맡겨진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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